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

(1025)
우리 동네 구자명씨 / 고정희 - 여성사 연구 5 맞벌이부부 우리 동네 구자명씨 일곱 달 된 아기엄마 구자명씨는 출근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씨, 그래 저 십분은 간밤 아기에게 젖 물린 시간이고 또 저 십분은 간밤 시어머니 약시중 든 시간이고 그래그래 저 십 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 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히는 지붕마다 여자가 받쳐든 한 식구의 안식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의 잠을 향하여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 고정희..
김승호 전태일노동대학대표 '이론은 맑스, 실체는 전태일' 확고불변의 진리를 부정하면서 오 멋져라, 머리를 옆으로 흔드는 것은! - 브레히트 중에서 49년생 김승호, 48년생 전태일. 두 사람은 친구다.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던 전태일이 대학생 친구를 원할 할 때는 서로를 몰랐다. 노동자와 대학생인 그들은 만날 수 없었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에야 인연이 열렸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피맺힌 외침에 삼동친목회 친구들 김영문, 신진철, 이승철, 임현재, 최종인이 ‘청계피복노조’를 만들었다면 “나를 따르라”는 간곡한 요청에는 김승호가 가만히 손 맞잡았다. 1970년 11월 13일 대학생 배지를 떼고 노동운동에 투신해 “아직도 전태일이냐”는 말을 들으며 새천년을 맞았고 그해 을 세웠다. 공부하는 노동자 전태일의 부활로 40년 세월 신실한 우정을 다지고 있는 김승호 대표..
스피노자의 '인간의 나라' ‘이게 인간의 나라인가’ 신문을 펴는 순간 움찔했다. 어제(11/16)김종철 선생님이 한겨레에 쓴 칼럼 제목이다. 이게 인간의 나라인가. 시의적절한 물음. 아니 질타, 한숨... 나의 괴로움을 대변해주는 한줄 요약. 얼마 전부터 깊은 통증을 느꼈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부터 같다. 인간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다. 물질화된 세상, 믿기지 않는 험악한 가난과 착취의 실상들. 인간이 징그러웠다. 저 인정머리 없는 기업주들. 못 자고 못 먹고 신음하는 어린 아이들을 데려다 화장실도 못 가게하고 일을 시키다니. 그들은 왜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 타인에 대한 배려와 도리를 모르는 타락한 인간들. 개인의 성정 탓은 아닐 것이다. 사장의 자리가 끊임없이 화폐증식을 욕망하도록 하는 것이니 어찌 보면 그들이 자본..
레인보우 - 무려 영화감독 꿈꾸는 엄마 아침에 일어나서 밥하고 생선 굽고 찌개 데우고 아들을 깨운다. 딸내미는 나랑 같이 자니까 내가 부시럭대면 같이 일어난다. 아들아, 학교 가야지. 그럼 아들은 이불속에서 꿈틀거리며 묻는다. 엄마, 아침 뭐에요. 기가 딱 막힌다. 전표에 주문이라도 받아야하나 싶다. 밥이지 뭐야(이놈아). 기분 좋은 날은 그냥 넘어가고 피곤한 날은 쏘아붙인다. 아들은 억울한 목소리로 그냥 물어보는 거에요. 아무거나 줘도 괜찮아요. 그런다. 주는대로 먹겠다는 얘긴데 그러면 왜 아침마다 물어보느냐고 또 따진다. 아침엔 티격태격 오후엔 살랑살랑. 저번엔 야채랑 고기 넣어서 샌드위치를 정성스레 만들어주었다. 맛있게 먹는 아들이 귀여워서 그걸 못참고 한마디 했다. 아들아, 엄마가 온갖 정성 다해서 세끼 밥 먹이고 고급간식까지 챙겨서 ..
독일이데올로기 - 지반을 떠난다는 것 홍세화 씨가 한국에 와서 TV를 보다가 가장 충격을 받은 말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부자되세요’ 하나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각각 카드회사와 건설회사 TV광고 카피이지만 범국민적 표어로 사용될 만큼 히트를 쳤다. 이는 돈이 삶의 모든 가치를 빨아들이는 대한민국의 실상을 가감 없이 드러내준 광고이기도 하다. 뭐 사실, 더 좋은 대학, 더 많은 돈,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를 인생목표로 부여받고 자란 우리는 성장과정에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얘기라 익숙했지만 ‘파리’의 택시운전사였던 홍세화씨가 볼 때는 저 물신적인 표어가 몹시 거슬렸던 것이다. 이렇듯 ‘바깥쪽에서’ 보는 일은 중요하다. 바깥쪽은 객관적인 장소가 아니라 객관성 자체가 지역적인 공동주관성에 지나지 않음을 아는..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과의 만남 “근데 왜 저를 부른 겁니까? 연구원들이라고 하셨죠? 삼성반도체 한 사업장에서 100명 가까운 사람이 백혈병과 희귀암으로 죽어갔습니다. 이런 사안에 대해 진보 지식인이라고 한다면 성명서라도 내야하는 거 아닌가요? 우리나라에 무슨 단체들 많잖아요. 삼성문제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꿈꾸는 좋은 세상, 세상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도대체 어떤 건가요.” 체크무늬 셔츠에 베이지색 투쟁조끼, 덥수룩한 수염, 형형한 눈빛이 천생 노동운동가의 포스였다. 원망과 애원이 범벅된 직설적 어법으로 첫마디를 열었다. 외면과 내면의 일치. 그 진실한 환대에 야단맞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저런 말 들어도 싸다. 삼성 나쁘다고 말만 했지 뭐 하나 실천적으로 연대한 것이 없으니 아무 말 못했다. 8일 저녁 수유너머N에서 김성환 삼..
스피노자의 절대적 민주주의와 다중 사회계약론 17세기 계약론적인 테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회계약론은 인간의 결사와 시민사회의 구성을 설명하는 기능보다는, 정치적인 사회의 구성과 시민사회의 권력이 국가로 양도되는 것을 합법화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다. 또한 권력의 양도가 실효성을 거둘 수 있도록 합법화 되어, 국가라는 법적인 개념의 토대를 마련한 명백히 사회학적인 허구일 뿐이다. 사회계약론은 초월적 성격을 갖고 있으나 형식적으로 제한됐다. 국가라는 관념을 구성할 수 있는 제반 의미들 가운데 군주제적 개념, 즉 명목적 권력의 단일성과 절대성 그리고 초월성에 관한 개념이 기본적인 중요성을 지녔다. 사회계약론은 근대적 성격을 띠는 절대주의 국가의 다양한 통치 형태들을 합법화하려는 내적 경향을 실질적으로 갖는다.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 마키아벨리..
심보선 시인 - 나의 시는 1.5인칭 공동체 언어다 “사실 시를 쓰면서도 열심히 시를 읽지 않았어요. 당시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 친구가 저보다 시집을 많이 읽은 문학소녀였죠. 그 친구가 기형도 시집을 빌려주었어요. 그때 지하철 안에서 읽고 다녔죠. 꽤 여러 번 읽었어요. 그 이유가 뭐였냐 하면, 시집을 그 친구에게 돌려주면 바로 ’안녕’을 고할까 봐 ‘완독’을 미루고 있었던 거죠. 물론 그러는 와중에 빨리 돌려달라는 그 친구의 독촉 전화는 계속됐지만.(웃음) 그래서 아직 다 못 읽었다고 미루고 미루고 하면서 몇 번이고 다시 읽었어요. 결국 돌려줬는데 그러고 나서 바로 퇴짜 맞았죠.(웃음)” – 기형도 20주기 기념문집 발간기념 좌담 중에서 남겨짐, 그 후 폐인되는 사람 있고 시인되는 사람 있다. 심보선은 시인이 됐다. 1994년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