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장애운동 활동가 송수헌

[행복한인터뷰]

'변절했다', '돌았다' 손가락질 받던 시절을 보내고
정신장애 당사자 운동에 매진하는 송수헌 한아름방송국 국장



싸움하는사람은즉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고

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었기도하니까


-이상 ‘오감도 제3호’

 

 

그는 ‘국장님’으로 통한다. TV 드라마에 나올 법한 국장 캐릭터 그대로 호방한 풍채에 매끄러운 중저음 목소리를 가진 중년 남성이다. 그의 일터는 한아름방송국.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제작과 운영에 참여하는 인터넷 라디오 방송이다. 그는 2011년 창립부터 참여한 원년 멤버로 진행자나 제작자로 나서며 ‘보라돌이’라는 닉네임을 썼다. 정신장애인을 ‘미친놈’으로 간단히 낮잡아 부르는 세상이니 만큼 본래 이름 공개를 주저했다.


3년여 방송 생활, 무엇이 그를 변하게 했을까. 올해부터는 본명인 ‘송수헌’으로 활동한다. 얼굴이 나오는 ‘보이는 라디오’ 방송을 계획 중이다.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자신을 세우기도 한다. 인권과 복지 사각지대에 방치된 정신장애인의 처지를 알리고 당사자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1인 시위 현장에 나선다. 지난 9월 1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5년 뒤 10년 뒤엔 뭐 할 거냐? 나의 지인이 며칠 전 물었다… 난 소시민의 꿈을 안고 시위현장에서 도망쳤다가 그 자책감에 수십 년을 끔찍하게 살아왔다.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것도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배고플 것도 없다! 매주 목요일 1인 시위 내 차례임에도 당사자들 신청이 밀려서 오늘과 다음 주 쉬란다. 그래, 이 맛이지. 변화. 그리고 두려움 없는 사랑!’

 

▲한아름방송국에서 팟캐스트 녹음 중인 송수헌 씨.

 

# 김귀정의 죽음, 조울증


조울증 병력 24년 송수헌. 최초 발병은 고 김귀정의 죽음과 닿아 있다. 성균관대 불문과 학생이던 김귀정은 1991년 5월 25일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 도중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숨졌다. 그에게는 같은 학교 같은 조직에서 활동하던 미더운 동기의 죽음이었다. 열흘 뒤 고 김귀정의 시신을 요구하는 정부 측에 맞서 그는 서울 중구 백병원 부근에서 수 겹의 백골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시위에 나온 일행은 지쳐서 구호도 잦아들었고 백골단이 뱉어대는 가래침 같은 쌍욕만 코앞에서 어지럽게 웅웅거렸다.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그때부터 혼란이 들어왔어요.”


송수헌이 기억하는 통증은 ‘혼란’이다. 88년 대학에 들어간 이후 온갖 시위, 점거 농성, 삭발, 단식을 감행하며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그다. 행동은 선두에 있었으나 마음은 늘 조금 비켜서 있었다. 중1 때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고생고생하며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가 발목을 잡았다. 운동권이 되어 감옥을 들락거리는 불안정한 삶을 살 것인가, 어머니를 봉양하는 안정적인 삶을 택할 것인가, 고심 끝에 총학생회장 출마를 포기하는 것으로 학생운동을 정리했으나 “한 학기만 더 싸워 달라”는 조직의 요청에 시한부 투쟁에 나섰는데, 동료가 죽었고 다시 선봉에 설 수밖에 없었다. 몸에서 회오리치는 ‘혼란’, 즉 싸움하는 나와 싸움하지 아니하는 나의 오랜 뒤척임은 그를 결국 주저앉혔다. 


“여기서 잡히면 100% 구속인데 별의 별 생각이 다 났어요. 어차피 이럴 거면 총학회장 선거에 나갈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결국 쇠파이프를 스르르 한쪽에 내려놓고 골목으로 도망쳐 나왔죠. 그러다가 다시 돌아가야 하나 싶어 몸을 돌렸더니 백골단이 ‘이 새끼 장난하나’ 쌍욕을 하고.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고.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그길로 나도 모르게 학교에 갔어요. 휴일 텅 빈 교정을 왜 갔을까. 아마 ‘마지막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던 거 같아요. 그때가 1991년 6월 6일이에요.”
 

송수헌은 그길로 집에 가서 6개월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누구보다 왕성하고 활달하게 많은 일을 해내던 그의 칩거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집으로 친구와 선후배가 찾아오면 ‘그때 이랬지’ ‘그때 좋았지’라며 오로지 과거만 반복했다. 현재와 미래가 없는 사람이 된 그를 보며 누군가 그건 우울증의 전형적인 증상이라고 했다. 며칠을 망설이다가 정신과 치료를 마음먹고 일부러 집과 반대편 방향으로 전철을 탔다. 길거리 병원 간판을 보고 공중전화를 걸어서 상담 좀 받고 싶다고 했더니 간호사가 “30분에 3만원입니다”라며 툭 끊었다. 그의 주머니에는 단돈 1만원뿐, 치료 기회를 놓쳤다.


‘나는 죽을 것’이라며 날마다 몸부림치면서도, 새벽기도를 다니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죽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사는 것도 아닌 채로 시간을 보냈다. 보다 못한 친구가 일자리를 알아봐주었다. 신문사 광고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규칙적인 생활을 하자 몸이 가벼워졌고 남다른 실적을 올리자 자신감이 차올랐다. “경조증 상태였던 거 같다.” 특유의 조직력과 추진력으로 맡은 일을 척척 해낸 그는 하는 일마다 많은 돈을 벌고 그 많은 돈을 썼고 그 사이 군복무를 마치고 11학기 만에 겨우 대학을 졸업했다.  


“송수헌이 ‘변절했다’, ‘돌았다’로 소문이 나면서 연락들이 끊기더라고요. 영어학습지에 과외를 접목시키면서 많은 소득을 올렸거든요. 그 돈으로 친구들 만나면 비싼 술을 사고 그랬죠. 그런데 돈을 아무리 벌어도 채워지지 않는 게 항상 있었어요. 자꾸 외로워지니까 순간이라도 잊으려고 술을 찾았던 거 같아요.”

 

▲지난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송수헌 씨.

 

# 강제입원, 병에 대한 자기인식  


조울증은 감정 조절에 문제가 생기는 병으로 양극성정동장애라고도 한다. 술과는 상극이다. 그 역시 술을 마시면 목소리가 커지고 감정이 과잉되는 흥분 상태에 빠졌다. 술로도 어찌하지 못하는 외로움과 공허함에 부대끼다가 “기독교에 꽂혔다.” 성경책 삼독하고, 그래도 유물론자가 유신론자가 될 수는 없어서 관련 서적 100여 권을 탐독했다는 그. 교회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어느 날 부부싸움을 하다가 이혼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일이 커지자 양가 가족이 모여 들었다.  


“그 자리에 경찰관인 사촌형이 나타나 결정타를 날렸죠. ‘나랑 같이 일하는 동료가 조울증인데 그동안 작은엄마(송수헌의 모) 얘기를 들어보니 수헌이 술쳐먹고 하는 짓이 조울증이다’. 잠시 후 응급이송단이 출동했어요.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다짜고짜 손발을 똘똘 말고 번쩍 들어서 침대에 몸을 묶더라고요.”


서울 청량리 정신병원에 첫 입원을 했다. 의사와의 인터뷰는 아내만 허용됐고 당사자에게는 발언 기회조차 없었다. 보호사 2명이 와서 양쪽에서 팔짱 끼고 철문 열고 올라갔다. 병실에 딱 들어가니까 간호사가 ‘어이구 어떻게 왔어요’라며 유치원생 취급했다. ‘그렇게 딱해 보여요. 제가? 저는 이 시간에도 잠 못 자는 간호사님이 딱하네요.’ 그랬더니 몸을 묶고 코끼리 주사를 놓았다. 눈 떠보니까 다음 날 낮이었다. 한 달 반 만에 병원을 나왔다. 


그후 지금까지 네 차례 강제 입퇴원을 반복했다. 한 번의 자의입원을 제외하고 세 번은 어머니의 신고에 의해서 병원에 끌려갔다. 왜 어머니가 아들을 병원에 넣는 걸까. 


“술에 절어 사는 아들이 못마땅하니까 어머니가 잔소리하고, 그러면 저는 내가 한두 살이냐고 대들고, 내 목소리가 커지면 어머니는 조용히 나가서 신고 전화를 했어요.”


어머니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공포에 휩싸였을 것이다. 알코올 의존성이 높은 남성이 있는 집안에서 여성들이 흔히 겪는 고통이다. 어머니에게 당신과 아들을 보호하기 위한 선택지는 병원 말고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입원 치료 결정은 의사의 전권이다. 한번은 병원에 강제로 끌려갔지만 당직 의사가 돌려보내주기도 했다. 이 사람은 입원 시킬 근거가 없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입원의 가장 큰 단점은 내 생활이 뚝 끊기고 완전 날아가는 거예요. 정말 비참해요. 사람을 똘똘 감고 상소리 하고. 한번은 입원 과정에서 몸에 상처를 입어서 고소했어요. 엄청 두들겨 맞고 며칠 지나도 분이 안 풀리는 거야.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끊어서 경찰서에 고소했죠.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보내졌고 몇 달 후 검사가 연락이 왔어요. 검사가 나보다 한참 젊은 사람이었는데 서류를 보더니 ‘이 새끼 또라이네. 병원 왔다갔다 했네’ 하더라고요. 응급이송단 사람들이 나 팬 거 하고, 내가 병원 들락거린 게 무슨 상관이야. 진단서랑 사진이랑 증거자료 다 첨부됐는데도 소용없었어요.”


아픈 사람은 즉 아프지 아니하는 사람이고 아프지 아니하는 사람이었기도 하다는 것. 이 실존의 역동을 세상은 헤아리지 않았다. 한 사람을 사물처럼 고정된 존재로, 원래부터 “또라이”며 앞으로도 “뻔한 놈”으로 규정한다. 그럴수록 송수헌은 자신의 질환을 부정했다. 병원에서는 환자였지만 훨씬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직장인으로 지냈다. 수입화장품 회사에서 착실히 월급 받고 일상을 영위해 나갔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병을 자신의 삶으로 인정하게 된 건 2003년이다. 각 병동에서 조울증 환자 50~60명을 모아놓고 의사가 정신장애에 대해 강의를 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의학적 사실들, 이미 수십 번 수백 번 주입된 레퍼토리지였만 새삼 “그 말들이 가슴에 꽂혔다.” 


병식(병에 대한 자기인식)이 생기자 술도 절제하고 약도 잘 먹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영업일을 하니까 스트레스를 받고 술을 더 먹는다고 판단했다. 육체노동으로 진로를 바꾸자! 퇴원 후 구멍가게에 물건을 납품하는 일을 시작했다. 개척교회 다니면서 배송업무를 몇 년 하고 월급도 올라가고 7~8년을 한 번도 입원을 안 하고 잘 살았다. 조울증 약은 계속 먹었다. “우리 어머니는 그 약이 보약인 줄 안다.” 


# 정신장애인 팟캐스트, 당사자 운동


‘사람의 마음에는 늘 추진력이 되면서 동시에 문제가 되는 힘이 있다’고 『조울병, 나는 이렇게 극복했다』의 저자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은 말했다. 병을 안고 살아가는 그에게 병을 갖고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송파정신보건센터 사회복지사가 그에게 정신장애인들과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해보자고 제안한 것. 이런저런 팟캐스트가 한창 인기를 끌던 시기였다.

 

▲2014년 한국정신장애연대가 연 '광기발랄' 콘서트. 당시 송수헌 국장(사진 가장 오른쪽)을 비롯한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은 정신장애인으로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방송으로 만들어 팟캐스트로 전달했다.

 

“모처럼 열정이 살아났다.” 그는 평일에 쉴 수 있는 마트로 직장을 옮겨가며 매주 정해진 요일에 미디어 교육을 받았다. 방송 대본 쓰기, 방송 기법, 장비 운영법 등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2011년 11월 23일 한아름방송국이 문을 열었고 시사 토크, 고민 상담, 음악 감상 등 프로그램을 짜서 한창 재미있게 방송을 하는데 예산이 삭감돼 방송국이 문 닫을 위기가 왔다. 그가 방송국장을 맡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월급이 25만원. 가족들과 상의했더니 뜻밖에 ‘의미 있는 일을 하라’며 지지해주었다.
 

자신을 아는 일은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던가. 마이크 앞에 앉아서 자기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의 사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는 점차 자신(의 병)을 알아갔다. 자신의 언어로 존재하기를 시도했다. 2013년 4월, 그 해 봄엔 다른 세상이 열렸다. 담당 사회복지사를 따라 정신장애인 당사자운동 논의 및 정책 제안을 위한 정정당당(‘정’신장애인의 ‘정’당한 권리 ‘당’사자가 ‘당’당하게 말하다) 공청회에 참여한 것. 


“그전에도 정신장애운동, 인권이라는 키워드를 인터넷으로 많이 쳐봤거든요. 그런데 찾을 수가 없었어요. 신체장애인은 많은데 정신장애인들은 왜 인권단체가 없을까. 응급이송단 같은 것들 바뀌어야 할 게 많은데 이런 생각을 항상 했죠. 그런데 거기서 정신장애 인권단체를 소개 받고 깜짝 놀랐어요. 그때 알았죠. 정신장애 운동은 이미 시작되었구나. 내가 생각한 대로 정신장애에 대해 할 일은 정말 많구나.”


송수헌이 말하는 당사자 운동의 핵심은 이렇다. 최소한의 약 처방, 상담치료 병행, 정신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인식 개선, 삶의 질 향상 같은 것들. 특히 약 처방에 대해선 할말이 많다.


“제가 강제입원 당하기 전까지 병원 신세 안 졌던 건강한 사람이었어요. 증세라고 하면 술을 많이 마시고 과도한 자신감이 생기고 씀씀이가 커지는 정도. 소위 조증이죠. 근데 약물이 투입된 순간부터 조증이 오면 감당이 안 돼요. 조현증(정신분열증)에서 보이는 관계 망상, 피해 망상, 과대 망상이 찾아와요. 어느 때는 뜨든 가라앉든 그러는 내가 보여요. 그러면 술을 아예 안 먹고 잠을 오래 자요. 나 스스로 조절을 하죠. 너무 끔찍하니까. 약이라는 게 안 나오는 호르몬을 쥐어짜고 나오는 호르몬은 막는 거잖아요. 약물이 무서워요. 그런데 정부는 우리 말을 듣지 않죠. 입원 중심, 약물 중심 치료가 이뤄지는데 그걸 깨고 싶어요.”


그는 대안을 꺼낸다. 정부 부담금이 입원치료시 100원이면 외래치료는 20원이면 된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입원치료인가. 80원이 누구의 이익으로 귀속되는가. 퇴원을 시켜서 주거 안정과 직업훈련으로 사회 복귀 시키면 초기비용은 들겠지만 80원으로 충당하면 된다. 이걸 당사자의 힘으로 따 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9월 송수헌 씨가 광화문에서 정신장애인 복지지원법 제정을 요구하는 1인시위를 하는 모습.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싸움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변했다. 본인이 정신장애인으로 살면서도 “내가 나약해 빠져가지고 이런 병에 걸렸어”라며 자학했다. 그런데 당사자 운동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의 발병 사례를 접하며 누구든 터질 수 있지 특별난 사람만 걸리는 병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드라마나 예능프로는 비하하고 뉴스나 시사프로는 모함하면서 정신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강화시킨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즉 정신장애인은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웃임을 알리기 위해, 그는 방송 모니터링도 하고 1인 시위도 하고 지인들에게도 드러낸다. “나 조울증이야.” 간신히 입을 떼었을 때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는데 네가 직접 말해줘서 고마워’라고 반응해주는 사람이 가장 고마웠다.  


2003년 병식이 생겼을 때 장애 등록을 했다. 당사자 운동에 의욕이 넘치다가도 경제적 문제에 부딪치면 한숨이 난다. 다 그만두고 직장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몇 번 하다가도 그 생각을 더 밀고 나가면 “하고 싶은 대로 편하게 돈 쓰고 나면 남는 게 뭐 있지, 그 뒤에는 또 뭐지?” 하는 물음에 이른다. 어서 빨리 정신장애인복지지원법이 통과돼서 지자체 복지지원센터 당사자 활동가에게 급여가 나오기를 바란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도망쳤다가 이 병에 걸렸는데, 안정된 삶을 누리려다가 도망친 건데, 지금은 오히려 정신장애 활동을 하면서 크지 않은 공간이지만 다시 내 삶의 의미를 찾았다 싶어요.”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었기도 한 사람, 그러나 지금은 도피하지 않고 분투하고 있는 그 사람, 송수헌은 인터뷰 며칠 후 빠뜨린 말이 있다며 이런 전갈을 보내왔다. “나의 정신장애로 사회운동을 다시 시작하게 돼서 행복하다고 꼭 써주세요.”


백 년 전, 자기 질병을 ‘감히’ 시적 대상으로 삼은 한 시인의 시는 아직도 낯설고 난해한 시로 이해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정신장애라는 자기 질병을 ‘감히’ 사회운동으로 삼겠다는 한 사람의 말은 언제쯤 어떻게 세상에 가닿을 수 있을까. 

 

글쓴이 : 은유. 글 쓰는 사람. 학습공동체 '가장자리' 등에서 글쓰기 수업을 연다. 성폭력·가정폭력피해여성, 마을공동체 구성원 등과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자기경험에 근거해 자기언어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글쓰기의 최전선』(2015), 『올드걸의 시집』(2012) 등을 펴냈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 비마이너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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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연-친족성폭력 첫수기 작가

[행복한인터뷰]

지옥 9년 기록 10년 작가 2년차, 난 평범해지고 있다

 

한겨레 박승화

 

 

딴사람, 참 좋은 말이다. 나는 이 말에 입을 맞춘다.

-김수영, ‘생활의 극복’ 중

 

휴일이면 종종 도심의 한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영어 공부 삼매경에 빠진다. 잠시 고개를 들어보면 자신처럼 다들 혼자서 꾸역꾸역 뭔가를 하고 있다. 한 층이 거의 비슷한 표정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그 개별적이면서도 집단적인 풍경이 새삼 놀라워 중얼거린다. “나는 너희와 다 얘기해보고 싶다. 혼자서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거니?”

그러는 당사자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서울 거주 30대 싱글 여성이다. 장마철 습한 공기를 머금은 바지통이 다리에 감기는 게 싫어서 반바지를 입었지만 책상물림 생활에 실해진 장딴지가 영 신경에 거슬린다. 젖은 머리 물기 탈탈 털어 고무줄로 짤막하게 동여매고 까만 안경테에 목에는 하얀 헤드셋을 걸치고 어깨에 멘 에코백에는 형광펜 그어진 영어교재가 한가득. 직장을 그만두고 ‘적금 깨서’ 영어학원에 다니는 중이다. 같은 학급 20대 초반 학생들은 남다른 열공과 연륜 포스를 내뿜는 그녀를 ‘골드미스’로 인식하나 자신들과 죽이 잘 맞다보니 언니 혹은 누나라고 부른다. 눈치 없는 젊은 강사가 그녀를 ‘이모님’이라고 칭하는 바람에 듣는 사람 발끈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늦깎이 유학 준비생의 고군분투. 한국 사회의 30대 여성치고 흔치 않은 일상을 산다. 그녀는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의 저자 은수연. ‘어느 성폭력 생존자의 빛나는 치유 일기’라는 부제를 달고 세상에 나온 그 책은 ‘인면수심’ 친부의 성폭력 실상을 가감 없이 묘사해 한국 사회에 충격을 던져주었고, 저자 은수연은 얼굴 없는 유명인이 되었다. 신문 및 TV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그림자 연극의 주인공처럼 실루엣 혹은 목소리만 드러났다. 그런 상황들이 성폭력 피해자는 어둡고 침울할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확인시켜주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매체 밖에서 만난 은수연씨는 들장미 캔디처럼 표정이 다채롭고 말투도 활달하다.

눈에서 살기가 빠진 유학 준비생

“제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성폭력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웃음)”

그녀의 10대는 더욱 평범치도 평탄치도 않았다. 아빠에게 9년간 성폭력과 가정폭력을 당한 아동 피해자로 살았다. 집을 뛰쳐나온 20대는 겹치기 출연 배우가 따로 없었다. 혼자 있을 때는 수치심과 두려움에 몸부림치는 성폭력 생존자로, 밖에서는 밝고 야무진 금순이 캐릭터로 오락가락 지냈다. 틈틈이 글을 썼고 30대 들어서 작가의 이름을 얻었다. 작가이거나 학생이거나, 일상을 두 가지 버전으로 산다. 어느새 평범과 비범을 자유로이 즐기는 생의 곡예사가 됐다. 주변에서 그녀의 변화를 느끼는 지점은 따로 있다.

“저를 20대부터 봐온 선생님이 그러더라고요. 그때에 비하면 눈에서 살기가 빠졌다고요. 제가 봐도 대학생 때 증명사진을 보면 눈이, 완전 무서워요. 하하.”

눈빛이 달라지는 것만큼 확실한 ‘딴사람’의 징표가 있을까. 이제 그녀는 선한 반달눈을 하고 하얀 치열이 다 보이도록 환하게 고개 젖혀 자주 웃는다. 카페에 서식하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까지 호기심이 발동할 정도로 오지랖이 넓어졌다. 증오와 원한과 울분이 스르르 빠져나간 마음자리에 웃음과 수다, 공감 같은 것이 속속 들어차고 있다.

은수연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했다. 가족치료를 공부할 때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사례를 참조했다. 이 가족의 문제점은 무엇이고 희생양은 누구인지 분석하고,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정리해 글로 썼다. 어떤 생각과 감정이 떠다니던 게 말로 나오고 말을 글로 정리하면서 개념이 잡혀갔다. 이게 아니었구나, 이게 이거였구나. 논거를 찾지 못했던 감정이 정리돼가는 기쁨이 컸다. 또한 세상 밖에 나와서 지내보니 자신은 여러 면에서 운이 좋은 편이었다. 아빠라는 사람이 이상했던 거고,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피해 사실을 숨기고 수치스러워했는데, 수치심을 오롯이 느껴야 하는 사람은 아빠였다. 성장기의 고통과 치욕의 상황을 논리적으로 풀어갈 수 있게 되자 조금씩 홀가분해졌다. 공부의 효능을 안 이상 중단할 순 없다. 더 하기로 했다.

“여성학을 할지 사회복지를 할지, 아직 고민이에요. 네가 세상과 소통하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게 뭐니, 스스로 묻고 있어요. 나 자신을 위해서도 공부가 필요한데, 내가 살아낸 삶에 대해서 그냥 악바리처럼 잘 살았어 이러는 게 아니고, 나의 감정 중에 뭐가 잘못됐는지 스스로에게 이해시키고 싶어요. 수치심이나 죄책감이 나를 붙잡고 있었던 시간이 꽤 길었으니까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내 몸이 붙잡고 있는 기억이 있어요. 공부해서 생각을 일깨우고 싶어요.”

9년의 폭력, 10년의 기록

은수연의 책이 나온 건 2012년 8월, 세상에 널리 알려진 건 그 다음달이었다. 매체의 영향력이 컸다. 특히 <한겨레> 9월16일치 ‘조국의 만남’ 코너에 지면을 통으로 할애한 은수연 인터뷰는 당시 큰 화제를 모았다.

“아마 월요일이었을 거예요. 기사가 나간 날 아침에 조국 교수님한테 문자가 왔어요. 조회 수가 100만 건이 넘었다고, 이 정도면 1년에 손꼽는 대박이라고 하더라며 제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인터뷰 분위기는 따뜻하고 편안했다. 눈물은 딱 한 번 흘렸는데 그 장면이 공교롭게 기사화됐다. 은수연은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과거를 새롭게 해석하고 의미화할 수 있었다. 집을 나온 뒤 가해자를 맞닥뜨린 적이 있는지 조국 교수가 물었을 때, 은수연은 아버지의 출소가 1년 앞으로 다가오자 해코지의 두려움에 떨다가 직접 교도소에 찾아간 기억을 떠올렸다. 면전에 대고 말했다. ‘나는 당신이 망가뜨리려고 해도 망가지지 않았고, 더럽히려고 해도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걸 말하려고 왔다.’ 조국 교수는 물었다. “그게 왜 책에서 빠졌죠?” 이 극적인 장면, 성폭력 피해자가 눈앞의 거대한 악이자 자기 안의 끔찍한 공포와 대결하고 발언하는 장면은 그대로 기사 제목이 되었다. “아버지의 성폭력에도 난 더럽혀지지 않았어요.”

은수연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이렇다. 1994년 대학에 들어간 해, 집에서 탈출해 한국성폭력상담소 열림터에 갔다. 당시 최영애 소장이 책을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그냥 흘려들었다. 책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고, 피해 경험이 글감이 된 전례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막 집을 나왔을 때라 너무 힘들고 정리도 안 돼 있고 무엇보다 피해 경험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네 잘못이 아니다’ 같은 말이 계속 내 안에서 쌓여갔다.” 도전 의식이 생겼다. 한번 정리해보자.

직장을 다니면서 문화센터에서 글쓰기 강좌를 수강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겪은 일들을 써나갔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식지에 수기를 연재하면서 작업에 탄력이 붙었다. 글쓰기 전담 선생에게 글쓰기 묘사와 표현 등 개별지도를 받았다. ‘괴물 같은 사람이…’로 시작하면 안 되었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줘라, 내러티브 원칙에 따라서 그 배경이나 표정, 말투, 심정을 되도록 상세히 묘사해라. 그 상황에 있는 피해자가 어떤 감정일지 읽는 사람이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너무 몰입해 공포와 분노에 휩싸이기도 했다. 눈물의 방류 사태로 글쓰기를 중단해야 했다. 그럼에도 독자와 마감이 있어 글을 쓸 수 있었다. 회원들이 소식지를 받으면 가장 먼저 찾아본다는 피드백이 왔다. 끔찍하지만 재미있다고 했다. 상담자들도 피해자의 마음을 알 수 있고 많이 배운다고 했다. 피해자들에게 큰 용기와 위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힘든 시기를 써야 할 때는 끔찍한 기억에 붙들렸다. 길게는 2년 정도 손을 못 댔다.

“수능 전날 호텔에 갇혀서 폭행당했던 장면을 쓸 때는 겁이 나서 글이 나아가지 않았죠. 그래서 버스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가보았어요. 아, 나 지금 저 안에 있지 않지. 그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글을 썼어요.”

재판이 진행됐던 법원 앞에도 찾아갔다. 글 쓰다가 막히고 찝찝하고 내가 왜 여기에 계속 붙들려 있지 그런 느낌이 들면 혼자 여행 가듯이 기억의 현장을 찾아갔다. 그렇게 한 장면씩 마주하고 사유하다보니 20대 후반에 시작해서 30대 후반까지, 10년이 걸렸다. 피해 기간보다 더 긴 집필 기간을 보내고서야 자꾸만 삐져나오는 통곡 같은 기억을 가지런히 언어화할 수 있었다. 피로 쓰고 온몸으로 쓴 덕분일까. “글이 사진처럼 생생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무얼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준다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고 시인 이성복은 말했다. 정말 그랬다.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의 내용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그것처럼 끔찍하나 책의 표지는 곱디고운 순백색이다. 이 책이 실제 은수연에게 숫눈길처럼 귀한 시간을 열어주었다.

2013년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최한 제29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은수연은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를 쓴 공로로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받았다. 처음엔 ‘이 상을 왜 나에게 주지?’ 하는 마음에 당혹스러웠으나 이제부터라도 그 상에 부응하는 역사를 만들어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성폭력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일에 기꺼이 행동하고 있다. 강의나 좌담회, 인터뷰 등에 응하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전국에서 모인 성폭력 전담 판사 120명과 토론회를 갖기도 했다. 판사, 언론인, 가해자 전담 국선변호사, 의료인, 법조인 등과 얼굴을 맞댔다. 생존자가 직접 책을 내고 하는 강의는 처음이라고 했다. 은수연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여러분이 무얼 상상하셨을지 모르겠지만 그 이상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왠지 긴장된 공기로 팽팽하게 당겨진 강연장 분위기가 다소 헐거워졌다. 은수연은 교통사고 경험에 빗대어 이야기를 풀어갔다. 직장에서 출장을 다녀오다가 하루에 두 번이나 사고가 났다. 나는 가장 먼저 보험회사에 연락하고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일을 처리했다. 운전자에게 ‘너 왜 이렇게 운전을 못하냐’ ‘하필 왜 그 시간에 이 터널로 갔느냐’ 식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 계신 판사님들은 법정에서 성폭력 사건을 특별하게 접근한다. ‘여자애가 왜 그 시간에 거기에 있었어?’ ‘치마 길이는 왜 짧지?’라는 식으로 묻는다. 성폭력 사건도 똑같이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교통사고처럼 사건 자체로 봐달라.

경청과 공감의 박수가 나왔다. 당시 판사모임의 좌장 판사는 성폭력이나 성추행을 교통사고 같은 사건사고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며 생존자의 목소리를 들려줘 고맙다고 각별히 인사를 전했다.

지난해 전북 전주에서 북콘서트를 했을 땐 진땀을 흘렸다. 어떤 나이 든 남성이 질문을 한다더니, 아가씨가 너무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거 아니냐, 자기 합리화가 심한 거 아니냐고 말한 것이다. 그 자리에는 성폭력 생존자 아이들도 와 있었다. 은수연은 꾹 참고 답변했다. 자기 합리화가 필요하다고,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고. 그러곤 관객을 향해 말했다. 생존자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상처받을 수 있는데 무시하고,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 자기 합리화 많이 해주시라고. 겨우 행사를 끝냈지만 놀라고 속상한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무대 뒤에서 “엄청 울었다”. 얼마 전 양성평등원에서 직원 대상 강의를 할 때도 편견의 벽을 마주해야 했다. 한 중년 남성이 이런 교육인지 몰랐는데 얼굴이 빨개진다고 말한 것이다.

피해자다움과 피해자답지 않음 사이에서

“성폭력이란 얘기를 들으면 ‘폭력’보다 ‘성’과 관련된 걸로 받아들여요. 그런데 참가자들한테 매체에서 본 성폭력, 친한 사람이 겪은 성폭력, 자신의 성폭력 사례를 물어보면 이야기가 끝도 없이 쏟아져나오거든요. 저는 말하죠. 내 얘기는 별로 할 거 없고, 얼마나 일상적으로 성폭력이 일어나는지 우리의 이야기로 풀어가자고.”

성폭력을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로 감각한다는 건 무엇일까. 은수연은 막내올케의 반응을 들려주었다. 언니한테 어떤 일이 어느 정도 있었을까 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는데 되게 많이 울었다며 말했단다. “근데 나는 언니가 참 존경스러워. 옛날에는 내 딸들이 절대 어디 가서 그런 일 당하지 말기를 바라는 맘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그런 일을 겪어도 언니처럼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맘이 생겼어….”

한 몸에 쏟아져내린 험난한 인생사를 통과한 사람. 오직 생존이 목표였던 지옥에서의 9년. 그녀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어떻게 그 힘든 시기를 통과했느냐는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울면서 기도하는 게 취미였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너는 성격 때문에 산 거 같다”고 했다. 이 또한 사실이다. 은수연은 나쁘게 보려는 마음이 없고 일상을 반듯하게 살려는 자세가 있다. 강인한 면, 나약한 면, 새침한 면, 예민한 면, 호탕한 면, 그것들 모두 은수연이 기르는 자아의 모습이다. 그런데 책 속에서는 우울하거나 카리스마가 넘치는 모습만 그려진 것 같다며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성폭력 피해자의 이미지는 일상에서 반복되고 재생산된다. 영화 <여자, 정혜> <텔미 썸딩>이나 드라마 <보고 싶다> <야왕> 등에서 나타난 성폭력 피해자는 대부분 어릴 때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우울하거나 무기력하거나 복수욕에 불타거나 보호받아야 하는 여자 어른으로 나오는데, 그게 은수연은 못마땅하다. 성폭력 피해가 지독한 상처를 남기지만 그렇다고 피해자가 그 시간, 그 감정에 꼼짝 못하고 멈춰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거다. 금방 씻기는 상처도 아니지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도 아니다. 은수연도 경험적으로 알아갔다. 스무 살엔 ‘성폭력 피해자’라는, 만들어진 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벗어나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찾아가자마자 한 일이 정신과 검진이다. ‘성폭력 피해를 당한 내가 과연 정상일까’ 심리검사를 받고 전문가의 정상 판정에 안도했을 정도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상과 비정상, 그 유동하는 경계에서 오뚝이처럼 흔들리며 산다. 누구라도 그러하다면 은수연도 그러하다.

“자기를 다뤄간다고 할까요. 그게(고통이) 올라오면 또 느껴주고. (웃음) 인생의 목적이 상처를 치유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냥 사는 거죠. 계속 따라오지만 병적인 반응을 하지 않게 된 거고요.”

더 이상 상처와의 동거가 불편하지도 일상을 방해하지도 않는 삶. 이걸 평범한 삶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그녀는 자신의 삶이 평범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너무 많이 울었어요. 예전에는 대구지하철 참사나 서해 페리호 참사같이 큰 인명 피해 사건에도 아무 느낌이 없었거든요.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할 때 사이코드라마가 진행됐어요. 다른 사람이 힘든 얘기를 하면 다들 안타까워하는데 나는 사과를 씹어 먹으면서 구경하고 있었대요. 누가 얘기해줘서 알았지, 내가 그러는 것도 몰랐어요. 왜 저런 걸로 힘들다고 난리야, 생각했겠죠. 내 아픔이 너무 크니까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일주일 동안 공부도 못했어요. 내가 온 국민과 하나가 된 것처럼 슬퍼하고 있더라고요.”

일상의 평범함, 오래 동경한 삶이다. 현모양처가 어릴 때부터 꿈이었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앞치마 두르고 간식을 차려주고 놀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품었다. 해보지 못한 일이라 더 해보고 싶고 막상 해보면 “오글거려서 앞치마를 벗어던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평범한 가정, 평화로운 일상을 소망한다. 나중에 결혼해서 남편과 야참으로 라면 먹기도 꼭 해보고 싶은 일 중의 하나다. 평범한 일상을 영위할 자세와 능력도 이미 갖춰져 있다. 가사일을 좋아한다. 웬만하면 손빨래를 하고 물걸레질도 즐긴다. 햇살 좋은 날 이불을 널고, 밤이면 햇볕 냄새 든 이불을 덮을 때 더없이 만족스럽다.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청소하곤 하는데 “요샌 화가 안 나서 집이 무척 더럽다”며 또 깔깔 웃는다.

용서는 숙제가 아니다

“내 문제에 스스로 충분히 애도하고 다른 사람들도 애도해줘서 슬픔을 건넌 것 같아요. 나 인복 완전 넘치는데 집에서 부모복만 없어, 그러거든요. (웃음) 인생의 멘토들, 친구들의 도움으로 트라우마가 극복됐어요. 사실 사람에 대해 신뢰를 갖지 못하는 것만큼 큰 상처가 없잖아요. 사람에 대한 상처를 사람으로 잘 극복한 것 같아요.”

은수연의 목에는 십자가 목걸이가 반짝인다.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에 추천사를 써준 인연으로 이금희 아나운서에게 받은 선물이다. (“촌스럽게” 이거 너무 자랑하고 싶으니 꼭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TV 프로그램 <아침마당>에 나오는 이미지 그대로 실제 봐도 푸근하고 자상한 큰언니 같은 분이라며 자랑에 여념이 없다. 이처럼 은수연은 사람이 살면서 사람들한테 받아야 하는 것들, 부모가 무너뜨린 것들을 좋은 인연으로 채울 수 있었다.

“용서하려고 애쓰지 마라.” 친한 목사님의 말씀도 일상을 회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녀는 용서가 의무나 숙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용서가 어느 순간에 되는 것도 아니고 매일매일 하는 거더라고요. 자신의 요구, 자기의 필요에서 나와야 해요. 누구를 미워할 때 나도 같이 썩어가는 것 같잖아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자기를 위해서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어학 공부에 몰두하느라 ‘그 사람’이란 단어가 떠오를 시간이 없어요. 예전에는 같이 방구석에 있어도 두렵지 않은 존재이길 바랐는데 지금은 마음에 들여놓을 영역이 없는 거죠. 그 사람은 지금 저에게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은수연 개인도 변하고 사회적 통념도 변했다. 스무 살 때 처음 만난 상담교사는 성폭력과 가정폭력 사실을 말하자 “아빠가 들어오지 못하게 방문을 꼭 잠그고 자라”고 충고했다. 그랬다간 가해자의 분노를 사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당시엔 친족 성폭력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그녀조차 자신이 당한 일을 뭐라고 명명할지 몰랐다. 강간? 느낌이 이상했다. 지금은 성폭력이란 단어를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쓰니 변하긴 변한 거다. 성폭력을 소재로 한 영화 <도가니> <소원>도 흥행했다.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는 지금까지 5쇄가 나갔다. 전례 없는 출판 불황과 소재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놀라운 수준이다.

이 모든 정황으로 볼 때, 일단 성폭력이 사회 일반적인 문제로 인식되는 단계에 접어든 것은 분명하다고 그녀는 본다. 대학원 석사 논문 주제가 성폭력 피해 생존자에 대한 사회복지적 지원에 관한 것이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놀랍게도” 그것들이 얼추 갖춰졌다. 기본적인 하드웨어가 바뀌었으니 소프트웨어가 바뀌는 일이 남았다. 생존자의 변화, 그리고 생존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의 변화.

“성폭력 피해 경험이 내 직업도 아니고 나를 특별하게 하는 것도 아니에요. 나를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갖춰지기 전까지는 얼굴을 안 보이고 싶어요. 꼭 성폭력이 아니어도 각자 자기 상처를 편하게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쟤, 그런 일 있었어’ 하면서 아래로 보거나 쑥덕거리지 않고 같이 아픔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거죠.”

은수연은 그날을 그려본다. 나의 기쁨과 세상의 필요가 만나는 일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필명보다 더 예쁜 본명으로, 어쩐지 쓸쓸한 뒷모습이 아닌 선한 눈빛을 나누며 마주할 수 있기를. “얼굴을 돌리고 나는 너를 기다린다”는 독일 시인 넬리 작스의 시구처럼, 그렇게 은수연은 ‘얼굴을 돌리고’ 기다린다.

 

한겨레 <나들> 내 몸, 파르헤시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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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 교수 - 혁명가의 성폭력? 예쁜 개한테 물렸다!

[행복한인터뷰]

 

 

 

몸은 세계를 떠안는다. 현경의 몸은 우주를 업은 듯 가볍게 춤춘다. 이유가 있다. 약한 것들의 ‘신’을 연구하는 신학자로, 참된 존재의 ‘길’을 묻는 수행자로 100곳이 넘는 나라에 머무르고 거주했다. 마르크스주의자부터 인디언 추장까지 그야말로 인류를 만나고 다녔다. 마치 돌아가는 지구본처럼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표정이 이는 이유도 국경, 종교, 계급, 나이, 학문, 예술의 경계에 부딪히고 그것을 횡단하며 자유로이 살아온 까닭이리라.

현경은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 종신교수이자 불교법사이다. 일명, 기독인불자다. 신학을 퍼포먼스와 제의로 표현하는 ‘신학적 예술가’이자 여성·환경·평화를 접목시킨 ‘에코페미니스트’로 불리며 생명을 살리는 ‘살림이스트’를 자처한다. 화려한 사회적 명성의 반대편에 고독한 실존의 이름도 갖고 있다. 보수 기독교계에서 ‘마녀’ ‘혼합주의자’로 지탄받았고 대학 사회에서는 엄숙한 학문 질서를 교란시키는 ‘직녀’(찍힌 여자) 교수였다. 유학생 시절 니카라과 평화대회에 갔다가 성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난폭하든 고귀하든 이 모든 경험의 잔치를 치르면서 새로운 삶의 질서로 건너간 현경은, 세계를 무대로 내 안의 여신을 발견하는 “신(神)나는” 삶을 설파한다.

“어릴 때는 못생겼다는 말을 듣고 자랐어요. 그런데 뉴욕, 히말라야, 니카라과에 가니까 저를 보고 예쁘다, 섹시하다고 하더군요. 그때 알았어요. 아, 사람 팔자 시간 문제가 아니라 장소 문제구나!”

‘와하하’ 웃음이 터진다. 이날의 무대는 SBS <지식나눔 콘서트- 아이러브[人]> 녹화장이다. 현경은 빨간 장미 꽃다발을 들고 나와 관객에게 뿌리고는 ‘스스로 행복한 여신이 되는 방법’을 주제로 2시간 남짓 열정적으로 강연했다. 강연 뒤 진행자가 방청객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런 질문도 있었다. 다시 태어나면 남자와 여자 중 무엇이 되고 싶은가. 며칠 뒤, 인터뷰를 위해 만났을 때 현경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나한테 물어봤으면 우주인으로 태어나고 싶다거나 남자·여자 성기가 다 달린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하려고 했어요. 남자 하고 싶으면 남자 하고 여자 하고 싶으면 여자 하겠다고요. 그랬으면 편집에서 잘렸겠지만요. (웃음)”

발칙한 소녀이거나 초월한 현자 같은 말투다. 애초 금기의 언어, 위험한 발상이란 그에게 없다. 자기 경험에 대한 성찰과 자아에 대한 상상이 있을 뿐이다. 성폭력 피해 경험도 거리낌 없이 터놓는다. 2001년 펴내 이미 수만 부가 팔린 스테디셀러 <미래에서 온 편지>(열림원)에도 다 들어 있는 얘기라며 그는 덤덤히 기억을 불러왔다.

#니카라과 평화대회, 혁명을 보다

현경은 1975년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 들어갔다. 얼마 뒤 계엄령이 내려졌고 학교에는 무기한 휴교가 선포됐다. 학교 주변에는 무장 군인이 배치됐다. 삼엄한 시절, 현경은 뚝방 빈민촌과 성매매 집결지에서 야학교사로, 청계피복노조에서 오락교사로 일했다. 신의 존재를, 삶의 온전성을 회의했다. 신이 계시다면 이런 가난과 비참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동지들을 숨겨주었다가 미행과 도청, 모진 고문을 당했다. 어릴 때부터 써온 일기장을 몽땅 빼앗겼다. 박정희가 살해당한 뒤 전두환 정권이 무력으로 들어서고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다. 시대적으로나 실존적으로나 환멸과 공포와 상실이 가득했다. 삶이 극도로 위축된 현경은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장원 교수의 소개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공장에 위장 취업하는 게 아니라 ‘제국주의 심장부’로 유학을 가는 일은 운동권에서 배반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미국 클레어몬트 신학교는 ‘지구시민’을 강조하는 열린 학교였다. 목회학 석사를 하는 동안 인도와 중남미 나라들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니카라과에서는 산디니스타 혁명군이 소모사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혁명의 성공을 전세계 사람들과 나누기 위한 국제평화대회가 열렸다. 현경은 교수·학생 몇 명과 함께 참가했다. 혁명 각료의 절반이 가톨릭 신부였다. 한국에서 처참한 패배만 보았던 그는 해방신학이 현실로 역사화된 현장에 와 있다는 사실에 감격과 환희로 들떴다. 그때 혁명 과정을 주도한 똑똑하고 잘생기고 카리스마 넘치는 혁명의 교사가 나타났다.

“요즘 말로 상남자예요. 투철한 역사의식, 날카로운 분석…, 스토리텔링은 압도적이었어요. 니카라과에서 있었던 일을 강의로 들으면서 눈물, 콧물을 흘렸죠. 한국인들은 스승에게 깍듯하잖아요. 자연스럽게 선생님에게 음료수까지 갖다드리며 챙겼는데, 그러는 사람이 한국 학생인 나밖에 없었어요. 그는 남미 사람이니까 내 행동을 호감의 표시로 이해했을 수도 있어요.”

그 혁명가도 낯선 나라에서 온 학생운동 출신의 현경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한국의 반독재 투쟁, 반미 투쟁에 대해 틈만 나면 물었다. 서로 한마디 하면 열 마디를 알아들으며 완벽한 교감이 오갔다. 그 혁명가는 여성운동에도 관심을 보이며 자기의 아내와 딸들 이야기까지 들려주었다. 아내가 혁명에 대해 쓴 여성 관련 자료를 줄 테니 자신의 방으로 오라고 했다. 고마운 마음을 안고 약속 시간에 방으로 갔다. 혁명가는 방문을 걸어 잠갔다. 현경은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술회했다.

‘지금 소리를 지르면 옆방에 있는 미국·유럽 사람들이 달려와서 이 사건을 알게 되겠지. 니카라과 혁명은 가짜 혁명이라고 비웃을 거야. 어린 학생을 성폭행한 혁명가의 혁명이 무슨 혁명이냐고. 그러니까 이 남자가 아니라 미 제국주의를 타도한 니카라과 혁명을 보호하기 위해 소리를 지르면 안 돼.’

현경이 따졌을 때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네가 너무 섹시하니까.” 내 방에 들어온 것은 너도 의도가 있었던 거다, 만약 몰랐다면 남녀 간의 언어를 모르는 거다, 혁명을 하겠다는 여자가 뭘 그렇게 성을 중시하느냐, 서로 이렇게 통하는데 왜 섹스를 안 하느냐며 외려 당당했다.

“지금 같으면 당장 기자회견을 했을 테지만 그때는 자책이 심했죠. 춤추자고 했을 때 괜히 추었나? 내가 꼬리를 쳤나? 너무 파인 옷을 입었나? 선생님을 너무 존경했나? 남편한테도 학교에도 어디에도 말을 못했어요. 네가 꼬리를 쳐서 그랬지, 외국에서 어떻게 행동했느냐. 이럴 때 항상 여자를 추궁하잖아요. 그 모든 게 이유가 되죠.”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뒤, 현경은 니카라과에서 온 여성학자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니카라과 혁명정부의 대통령 다니엘 오르테가의 딸이 자기 아버지가 11살 때부터 10년간 성폭력을 했다고 양심선언을 하고 아버지를 고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경은 자신의 피해와 그 딸의 피해, 니카라과 혁명정부의 몰락 사이에 필연성이 있다고 해석한다. 아무리 미국의 공세가 집요했다고 해도, 일상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이 반복되는 혁명의 말로는 자명한 것이 아니겠는가.

# 보스턴 여성신학센터, 몸을 씻다

“품종 좋고 예쁜 개한테 물렸다. 너무 예뻐서 쓰다듬었더니 물었다.” 지금은 자신의 피해 경험을 이렇게 정의한다. 그러나 스물다섯의 현경은 피해 경험을 분석할 수 있는 이론적 도구와 정서적 힘이 없었다. 다른 괴로움까지 더해졌다. 미국 이민사회의 한인교회는 한국 교회보다 더 보수적이고 권위적이다. 어릴 때부터 자유로운 분위기의 경동교회에서 자란 현경으로서는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학생운동의 선배이자 동지였던 남편은 한국의 변혁운동에 큰 회의를 느끼고 점점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는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깊은 우울감에 빠져서 1년간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예일대학의 레티 러셀 교수가 클레어몬트대학에 ‘파트너십과 페미니스트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왔다. 강의를 들으면서 가슴에 꽉 막혀 있던 것이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교수에게 남성 중심의 기독교에서 느끼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분노’를 터놓았고 보스턴에 있는 여성신학센터(Women’s Theological Center)를 소개받았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만들어진 페미니스트 실험학교다.

그곳은 커리큘럼을 교수와 학생이 같이 짠다. 일주일에 16시간을 감옥이나 난민수용소, 여성들을 위한 정신병원, 성폭력 피해여성이나 매 맞는 여성을 위한 쉼터에서 일하고 그 경험으로 여성 문제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왜 여자들이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란 무엇인가, 치유는 무엇이고 성령의 힘이란 무엇인가. 그런 공부를 마치고 예술가들과 여성들을 위한 제례를 만든다.

미국의 어느 섬에서 한 여성이 밤에 산책하다가 괴한에게 흉기로 위협받으며 성폭력을 당했다. 그 뒤 삶이 망가졌다. 밤길을 다니지 못하고 남자와 섹스도, 결혼도 할 수 없었다. 자기가 더럽혀졌다는 생각에 좌절했다. 사이코테라피로도 고해성사로도 고통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여성을 위해 제례를 준비했다. 보름달이 휘영청 뜬 어느 밤 미국의 아름다운 자연공원에 다 같이 가서는 그 친구를 폭포에 세웠다. 몸을 정성스레 씻어주었다. 죄의식, 수치심, 모멸감을 다 물에 떠내려 보냈다. 그러고는 여성들이 둥글게 손잡고 보름달 아래서 강강술래를 했다. 여신의 축제였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죠. 거기서도 나는 내 경험을 얘기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를 치유하면서 저도 치유가 됐어요. 내 잘못이 아니었구나. 성폭력을 당한 여자들이 얼마나 벗어나기 어려운지 알게 되었지요.”

여성신학센터에는 미국 최고의 여성신학계 거장들이 와서 쌍방향 수업을 진행했다. 아는 것의 힘, 인식의 기쁨은 날로 컸다. 현경은 ‘데이트 성폭력’ ‘부부 성폭력’이란 개념을 처음 배웠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고 10년을 사귀었어도, 같이 호텔방에 갔어도, 옷을 벗었어도, 여자가 싫은데 하는 건 성폭력이라는 거였다. 이전에 없던 개념이었다. 이론이 없으면 세상을 읽을 눈이 없다. 페미니즘 이론은 세상을 새롭게 읽게 하는 눈이었다.

현경은 여성이 성폭력으로부터 치유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꼽았다. 첫째, 이론. 해석의 도구가 있어야 한다. 둘째, 자매.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네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셋째, 전문가. 성폭력만 전담하는 상담가들과 대화하는 게 참 중요하다.

“그다음에는 영성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이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일까, 큰 그림을 그려보는 거죠. 이게 꼭 나쁜 의미만 있나. 나는 성폭력을 경험한 뒤 성에 대해 더 많이 배워야 한다는 걸 알게 됐고,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이런 걸 당할까, 즉 다른 여성들 마음을 이해하게 됐어요. 또 하나는 우울증의 바닥을 치고 올라오면서 내가 훨씬 더 강해지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았어요. 나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이 항상 나쁜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현경은 여성신학센터에서 “세포 하나하나까지 페미니스트로 바뀐 것 같은” 경험을 거쳐 여성신학자로서의 삶을 결심한다. ‘아시아의 여성해방신학’이라는 연구계획안을 세웠다.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이라는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았고, 10여 년간의 파란만장 유학생활을 마쳤다. 그 긴 시간, 현경이 서양신학을 공부하며 마주한 것은 남성적 백인신학의 끝이었다. 신학마저 인종차별주의와 식민주의, 제국주의, 남성우월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기존 신학에 인종적·문화적·종교적 다양성을 선사해 신학의 지평을 확장하겠다는 뜻을 품고 1989년 5월, 모교인 이화여대 조교수 임명장을 받았다.

 

#오스트레일리아 세계교회협의회, 초혼제를 벌이다

난폭하든 고귀하든 모든 경험의 잔치를 치르며 새로운 삶의 질서를 넘나든 현경의 이름 뒤에는 기독인불자, 신학적 예술가, 에코페미니스트, 살림이스트, 마녀, 혼합주의자, 직녀(찍힌 여자) 등 온갖 혼종적이고 때로는 부정적인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아무려나 현경은 세계를 무대로 내 안의 여신을 발견하는 ‘신나는 삶’을 설파한다. 한겨레 박승화

 

현경은 젊고 독창적인 여성신학자로 주목받으며 국내외에서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냈다. 세계학술대회에 참석하느라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아졌다. 실험적 강의로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이대에서 교수로 조용히 잘 지낼 수 있는데 그 사건이 벌어졌다”. 1991년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제7차 세계대회 주제 강연자로 참석했다. 주제는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옵서소!’ 여성, 아시아, 제3세계 민중의 입장에서 성령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해석을 내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아시아 전역을 다니면서 1년간 발표를 준비했다.

큰 줄기를 잡았다. 첫째, 아시아 신학. 조상으로부터 받아온 전통 영성, 즉 불교·무속·도교를 버리지 않고 그 토양에 뿌리를 내리는 성숙한 기독교를 알려주겠다. 둘째, 페미니스트 신학. 여성의 몸을 비하하는 가난한 정신의 신학에 도전하겠다. 셋째, 민중 신학. 엘리트 교회 지도자가 만드는 신학이 아니라 매일매일 고통받는 제3세계 민중의 입장에서 신학을 써보겠다.

내용은 형식을 창조했다. 먼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땅을 축복하는 제례로 강연을 시작했다. 인류 역사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남녀들의 한 많은 영을 불러 해원하는 초혼제를 지냈다. 한국 젊은이 20명이 풍물을 쳤다. 그동안 연구한 성령에 대한 새로운 신학 이해를 이야기식으로 풀어서 강연하고, 마지막으로 살풀이를 하며 큰 광목을 몸으로 찢고 나아갔다. 중간에 한국 여성을 만나서 포옹하고 성령의 해방적 힘을 보여주는 춤을 추는 것으로 끝이 났다. 결정적인 하나가 남았다. 서양에서 성령은 서양 남자들의 모습으로 표상된다. 현경은 중국 관세음보살 사진을 보여주면서 내가 자궁으로부터 느끼는 성령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나는 식민지 신학은 하지 않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근거해서 기독교를 세웠는데, 그건 정통이고 토속과 불교에 세운 신학은 이단인가. 기독교 제국주의지. 너희가 2천 년 동안 여자한테 잠잠하라고 했지만 너희는 앞으로 200년 동안 잠잠하고 우리 말 좀 들어라. 그랬더니 교회가 발칵 뒤집혔죠.”

기독교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강연으로 거론되는 이 사건은 <뉴욕타임스> <슈피겔> <르몽드> 등 세계 유수 언론에 기사로 실렸다. 한국 언론도 떠들썩했다. 보수 교단에서 나온 신문은 ‘마녀, 혼합주의자, 이단’ 등 갖은 저주와 비판을 쏟아냈다. 아무려나 신학자 현경은 날개를 달았다.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강연과 세미나를 다녔다. 이화여대 총장실에는 학부모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어떤 근본주의자는 ‘무당의 딸은 무당에게로, 교회는 교회에게’라고 쓰인 전단지를 교회마다 돌리며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이 무당을 잡아 죽이랬다고 부추겼다. 현경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학교에 휴직계를 냈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초빙교수로 가서 1년간 ‘종교와 여성’ 분야를 가르쳤다. 그리고 1996년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은 160년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여성 종신교수로 현경을 초청했다.

#유니온 신학대학, 법사가 되고 신학을 하다

사람 팔자 장소 문제라고는 하나, 다른 장소에 삶을 들여놓는 일이 쉬울 리 없다. 팔자를 바꾸는 건 운명을 바꾸는 일.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2년여를 보냈다. 심신이 깨어나는 만큼 지쳐갔다. 30대에 잇따라 일어난 존재 변신에 현기증을 느꼈다. 커다란 쉼표가 필요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땅, 히말라야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21세기는 히말라야에서 맞으리라는 막연한 계획으로 안식년을 받아놓고 이전 1년간 독일, 프랑스, 우간다, 쿠바, 스위스 등의 세계 여성들과 열심히 교류했다.

1998년 짐바브웨에 세계 각국에서 온 3천 명이 넘는 여성들이 모였다. 여성 10여 명이 앞으로 나와 자신들이 교회에서 겪은 갖은 폭력에 대해 고백했다. 여성들이 교회에서 받아왔던 억압과 폭력은 인종, 계급, 신앙 노선과 관계없이 어디에나 존재했다. 캐나다에서 온 여성은 목사인 아버지에게서 어린 시절부터 당했던 친족성폭력에 대해 고백했다. 현경은 치유예배를 이끌었다.

“여성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1천 번도 더 살해된다.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주는 폭언으로, 폭력으로, 그리고 미워하는 눈빛과 보디랭귀지로 우리의 영혼과 감성과 지성은 살해된다.” 예배를 통해 아픔과 부서짐을 치유와 변혁의 힘으로 바꾸는 과정을 진행했다. 마지막에 여성들이 같이 신나게 춤을 추면서 서로의 상처를 만지며 축복해주었다.

현경은 ‘많은 여자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아픔,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긴장, ‘나를 비우고 싶다’는 열망을 안고 히말라야로 향했다.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한 수도원에서 날마다 명상하고 손가락이 얼얼하도록 글을 썼다. 이후에도 불교에 대한 관심과 공부를 놓지 않았다. 뉴욕의 숭산 스님을 만나고는 가르침에 매료돼 1년간 머리 깎고 안거에 들어가기도 했다. 2008년에는 대선사 전통의 미국 관음선원에서 불교법사 자격을 받았다.

“학생들이 물어요. 선생님은 예수님과 결혼하고, 부처님과 잠자시나요? 그러면 이렇게 말하죠. 나는 숨어서 하지 않는다. 셋이서 같이 산다. 하하. 그건 농담이지만, 나는 불자 기독교인이에요. 21세기 코드라고 생각해요. 유대인불교. 힌두크리스천. 이슬람신비주의 같은 종교의 이중 국적자가 많아요. 틱낫한 스님께서는 적극적으로 불교도와 기독교인이 결혼해서 아이를 포용력 있는 사람으로 키우라고 권하죠. 불교라는 뿌리와 기독교라는 뿌리가 합쳐져 더 큰 나무가 되면 더 큰 그늘과 더 큰 열매가 열려요. 두 종교가 접목해서 더 큰 지혜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철학자 니체는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 사상에 정통했다. 그랬기에 삶에 복무하지 않고 삶을 억압하는 기독교(목사)의 타락을 누구보다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런 맥락에서 쓴 <안티크리스트>에서 니체는 불교에 대한 호감을 슬쩍 표현한다. ‘불교는 더 이상 죄에 대한 싸움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인정하면서 고통에 대한 싸움을 말한다’는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 현경도 기독교 논리에 따라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 한다고 믿었던 많은 도덕감정의 사슬과 고통의 고리를 불교를 통해 끊어버리고 더 큰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기독교와 불교를 아우르며 좀더 너른 가슴을 가진 신학자로서 자아의 윤곽을 그려간다. 그렇게 힘을 키워 남북여성 평화통일 모임 ‘조각보’ 공동대표를 맡고 ‘종교 간 세계평화위원회’ 자문위원을 맡는 등 더 많은 타인의 고통-해방에 관여한다.

최근 현경이 연구하는 학문적 주제는 신비주의와 사회혁명이다. 역사적으로 수도원 운동이 사회변혁 운동으로 연결된 사례 등을 통해 어떻게 해서 내면의 변화가 사회질서 시스템의 변화로 연결됐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지금 여기, 여성학과 남성학이 대화해야

마지막으로 현경에게 물었다. 과연 전세계에 구조화된 젠더폭력을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까. 현경은 여성운동이 없으면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경우도 여성운동의 노력이 없었으면 영원히 묻혔을 것이다. 아직도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드러내놓고 얘기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의식의 변화, 수치의 대상에서 치유의 대상으로 재정의하는 것 등을 통해서 열린 지평이다.

“성폭력 문제도 드러내놓고 이야기해야지 치유가 돼요. 남자들도 여자와 함께 싸워야 해요. 그래야 자기들도 잡놈이 되지 않아요. 남자도 성폭력 피해자가 됩니다. 남자가 남자를 폭행하는 경우도 있고 어린 남자가 권력 있는 여자에게 당하기도 하죠. 성이 인간의 너무 내밀한 문제라 큰 상처를 받으면 남녀 누구라도 벗어나기 어려워요. 성폭력은 여성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죠.”

‘모든 학문은 남성학이다’라고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모든 학문은 남성학이 아니라 가부장적 학문이라며 현경은 ‘남성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모든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는 게 얼마나 폭력적인가. 여성이 한 인간으로서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여성학을 하듯이 남성도 남성학을 해야 하고, 남성학을 통해 여성학과 대화해야 한다고 했다.

삶의 실험가는 언제나 삶의 유혹자로 나타난다는 니체의 말대로, 현경의 말은 유혹한다. 모든 경계에 걸터앉아 끊임없이 다름을 잇고 화두를 던진다. 새로운 생성을 재촉한다. 내 안의 여신을 깨우라고 말을 건넨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진리도, 가위눌리게 하는 선도 아니고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스무 살 쪽방촌에서 신에게 던진 최초의 물음, “신이란 무엇인가” 아니 “신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화답’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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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경 - 아동성폭력 피해자의 엄마

[행복한인터뷰]

[내 몸, 파르헤시아]딸은 엄마에 엄마는 딸에 공유된 기억  
 
 
세 명의 엄마가 있다. 영화 <마더>의 엄마(김혜자)는 살인사건에 연루된 장애인 아들을 구하기 위해 다른 지적장애아에게 누명을 씌우고 마더에서 머더(murder·살인자)로 되어간다. 광기와 폭력의 왜곡된 모성은 말한다. “아무도 믿지 마, 엄마가 구해줄게.” 영화 <한공주>의 공주 엄마(성여진)는 전화번호까지 바꾸고 다른 남자와 산다. 거세된 모성의 리비도는 오직 자기 욕망과 생존으로 쏠리고 3년 만에 찾아온 딸에게 말한다. “엄마도 힘들어. 다신 찾아오지 마.” 영화 <말아톤>의 엄마(김미숙)는 자폐를 앓는 자식에게 ‘백만불짜리 다리’라며 주술을 건다. 희생하고 헌신하는 전능한 모성은 말한다. “내 소원은 초원이 죽은 다음날 죽는 것이다.”

자식의 고통 앞에 선 모성은 각 영화에서 하나의 인격으로 극화하지만 현실은 좀 다르다. 여러 갈래의 모성 충동이 한 사람의 신체에서 길항하다 상황에 따라 돌출된다. 성폭력 피해 아동 유정(가명)이의 엄마, 김수경(가명)이 그랬다. 두 아이의 양육을 혼자 책임지며 생계 압박에 시달렸으나 거세된 모성으로 달아나지 않기 위해 버텼다. 반듯한 아이로 키우고자 매사 엄격히 통제하고 북돋우고 기도하는 전능한 모성에 도전했다. 그리고 1년 전, 그 사건 이후 이상적 모성은 분열했다. 복수와 은폐의 왜곡된 모성으로 추락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일단은 딸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이제부터 엄마가 너를 보호해줄 거야. 값싼 용서 하지 마라.”

“하나씩 찾아가면서 딸을 위해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보았어요. 상담소를 찾아가고 변호사를 만나고 자조모임에 정기적으로 나가고 치유 프로그램에도 참석했죠. 오늘 아침에도 유정이가 지난해에 쓴 글을 읽는데 또 눈물이 났지만 많이 희미해졌더라고요. 쓰지 않았으면 응어리로 남았겠죠. 지금의 나를 봤더니 대견해요. 얼마 전까지 딸이랑 부둥켜안고 울고 그랬는데. 유정이도 지금은 친구랑 문자를 주고받고 아이돌그룹 ‘엑소’도 좋아하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게 너무 대견해요. 이 사건을 묻어두지 않고 기회를 준 게 얼마나 다행인지….”

“엄마, 우린 가족이잖아”

때는 경계의 시간. 잔인한 4월이 가고 푸르른 5월을 맞는 4월의 마지막 밤이었다. 딸아이가 잠든 방에서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렸다. 왠지 모를 불안이 등줄기를 훑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일기장이나 메시지를 몰래 본 적이 없었다. 이건 봐야 할 것 같았다. 손가락 따라 화면이 점점 위로 올라갔다. 사실인가 허구인가. 이 자는 인간인가 짐승인가. 경계의 말들. 그건 아이의 몸을 집요하게 탐하는 어린 늑대의 말이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죄어왔다. 메시지 발신자는, 아이의 사촌이었다. 곤히 자는 딸아이를 깨웠다. 엄마가 카톡을 봤어. 그동안 왜 말을 안 했니…. 딸아이는 답했다.

“엄마, 우린 가족이잖아.”

유정이는 가족에 애착이 컸다. 자신이 사촌오빠에게 성폭력을 당한 사실을 말할 경우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아빠, 사촌 모두와 연결고리가 끊어질까봐 두려웠다고 했다. 아이는 왜 한 해 두 번 만나는 사촌까지 ‘가족’으로 품었을까. 엄마는 알뜰하여 500원짜리 요요 장난감 하나 사주는 것에도 인색했다. 친척이 사주는 티셔츠나 양말 하나조차 아이는 상대적으로 크게 느꼈을 터다. 또 외할머니는 종종 말했다. 엄마 힘드니까 친가에 가서 아빠랑 살라고. 유정이에게 친가는 자신의 삶을 의탁할 수 있는 최후이자 유일한 거처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유정이는 친가에서 환대받지 못했다. 태어났을 때도 ‘아들이면 몰라도 딸인데’라며 너덜너덜한 헌 기저귀와 말간 미역국을 내놓았다. 남아선호 관념이 뿌리 깊은 집안에서 손녀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결국, 사달이 났다. 가부장제 질서의 가장 약자인 손녀의 몸에 은밀한 폭력이 가해졌고 그 신음소리는 어디에도 가닿지 못했다.

엄마가 나섰다. 사건을 알려야 했다. 명절마다 면접교섭권을 주장하며 아이들을 데려갔던 전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가 아이를 데리고 있을 때 발생한 일이다. 그는 외려 노발대발 소리를 질렀다. “둘 다 똑같다. 가만두지 않겠다.” 딸아이까지 싸잡아 탓했다. 전남편은 평소 아이들과 교류가 없었다. 아이들이 아빠가 밥은 먹었는지, 잘 지내는지 걱정스러워 메시지를 보내도 답을 하지 않았다. 명절에만 모습을 드러냈던 건 핏줄에 집착하는 할아버지가 유정이 동생인 손자를 보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 조부에게도 말씀드렸다. 가만히 듣더니 태연스럽게 얼버무렸다. “글쎄다. 나는 금시초문이다.”

가해자 엄마의 반응도 싸늘했다. 일단 아이가 학교에 갔으니 직접 들어보고 얘기하자고 했다. 그 후에 “우리 아이가 그런 일까지는 하지 않았다더라”며 사건을 축소했다. 나는 우리 아이가 착한 거만 바라보고 살았다, 성교육도 어려서부터 시켰다며 아들의 폭력행위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했다. 가해자는 일찌감치 휴대전화를 꺼놓았다. 친가 구성원 모두 사건을 외면했고 진실을 알려 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가해자에게 잘못을 알려줄 의무가 있다

“그 일이 있고 며칠간, 처음엔 내가 잘못을 한 건가? 내 잘못인가? 누가 이 일을 알고 뭐라고 하면 어떡하지? 내가 잘 감당할 수 있나? 내 욕을 하진 않을까? 내 말을 믿어줄까? 다 포기하고 싶다. 아… 죽고 싶다. 내가 지금 죽어도 되는 걸까? 내가 죽으면 이 일은 이제 끝나는 건가? 내가 죽으면 스스로 이 일은 내 잘못입니다 하고 인정하는 게 되는 건데, 난 죄가 없는데. 죽을 각오를 하고 베란다 난간으로 갔다. 밑을 쳐다봤다. 너무 높다. 맘속으로는 죽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딸, 유정의 글

유정이 나이 열한 살, 4학년 후반에 생긴 일이다. 그즈음 아이의 행동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키 크고 마른 체형이던 아이는 이것저것 마구 먹기 시작했다. 식탐을 부리고 방 안에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정리·정돈을 하지 않았다. 영문을 모르는 엄마는 그저 사춘기인가보다 생각했다. 아이의 성적이 다소 떨어졌지만 사교육을 시키지 못해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유를 의심할 수 없었다. 2년이 지나고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서도 모녀는 서로 눈치만 살폈다. 엄마는 아이를 살피지 못한 죄책감이 컸다. 유정이는 이불에 방대한 오줌을 두 번이나 쌌다. 수경은 엄마로서 묵묵히 이불을 빨고 방을 치워주었다. 그럴 때면 마개 뽑힌 가슴에서 눈물이 한없이 솟구쳤다.

컴퓨터 앞에 앉았다. 고소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사법기관의 출입이 꺼려졌다. 인권도 보호도 느낄 수 없는 곳을 출입했다간 딸아이를 망칠 것만 같았다. 아동성폭력상담소를 검색했다. 법적 절차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사건 당시 가해자의 나이가 어려서 강한 처벌은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모든 소송이 그렇듯이 시간과의 싸움이고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 등 기본적인 정보를 알려주었다.

유정이는 사촌의 고소를 반대했다. 자기 때문에 시끄러워지는 게 싫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남동생과 다투면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 모두가 남동생을 두둔했다. 둘째아이 특유의 생존법으로 남동생이 잔꾀를 부려 잘못을 누나에게 뒤집어씌우면 그 말을 믿고 어른들은 일방적으로 호통을 쳤다. 이런 상황을 반복적으로 겪고 자라서인지 유정이는 누가 자신을 지적하는 것에 극도로 예민했다. 또한 가해자가 소년원에 들어갔다 나와서 자신을 해코지할까봐 두렵다고 했다.

“아이를 안심시켰죠. 엄마가 널 보호할 거다. 아직은 네가 미성년자라서 결정권이 엄마에게 있고 가해자에게도 잘못을 알게 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사과를 받아야 한다. 그게 또 다른 피해자를 줄이는 방법이라고요.”

가해자는 사건 당시 미성년자여서 형사책임을 면했고 거주지역 가정법원으로 사건이 넘어갔다. 가해자와 가해자 부모와 판사만 있는 곳에서 판결이 내려진다고 했다.

“가해자에 대한 사법처리는 내 딸을 회복시키기 위한 당연한 일이었어요. 소송의 진행은 진행이고 일상은 일상이죠. 소송은 일상에서 감내해야 하는 무수한 일들 중 좀더 버거운 사안일 뿐이었어요. 사법처리를 결정했으면 선택에 후회하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했죠. 어차피 판결은 판사 몫이고.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최선을 다해보고 나면 미련은 없을 테니까요.”

가족주의의 껍질을 깨고 나온 엄마의 낭독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산다는 것은 서로를 돌보고 키우는 과정이다. 한 아이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도 작은 마을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람에겐 사람이 약이다. 곁을 지켜주고 말을 들어주고 편이 되어주는 존재가 반드시 필요한 법. 수경은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어떻게 거기까지 갔을까 싶은데 살려고 하니까 살고자 하는 힘으로 간 것 같다”고 말한다. 엄마는 딸을 데리고 치유워크숍에 참석했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모여 각자 자기 경험을 이야기하고 글로 쓰는 프로그램이었다. 유정이는 최연소 참가자였다.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데려갔다. 그래도 아이의 표정은 밝았다. 잘 웃으면 이제 괜찮다고 생각해서 엄마가 안 데려갈 줄 알았다고 했다. 그렇게 꾀를 부리고 눈치를 보고 투정도 부리면서 몸이 그곳에 가 있는 동안, 유정이는 ‘엄마의 낭독’을 듣는다.

“갓 스무 살, 그녀는 여상을 졸업하고 벤처기업에 경리로 입사했다.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연말정산, 법인세 신고로 연이은 야근에 환영식을 미루고 있었는데 관공서의 큰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환영식을 겸한 회식 자리가 마련됐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 소주 한 잔을 마셨고 빈속인지라 취기가 확 올라왔다. 매운탕 한 숟가락을 떠서 먹지도 못하고 바로 머리 박고 잠이 들었다. 어쩐 일인지 그날따라 술 한 모금 입에 대지 않던 한 남자 동료는 수경을 집에 데려다준다며 차에 태웠다. 부축당한 기억도 있고 업힌 기억도 있고 짤막짤막 장면이 이어졌다. 허름한 여관 침대에서 바지와 속옷만 벗겨진 채로 두 팔은 머리 위로 저지당한 채 그녀는 성폭력을 당했다. 그 남자는 사랑이었다고 말했다. 신앙생활에 따른 소신을 어기면서 원치 않는 임신과 낙태를 하고 나서 그녀는 마음을 정리했다. 내가 더럽혀진 게 아니라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했으니 믿자. 결혼하자. 스무 살 그녀는 그렇게 ‘값싼 용서’를 했다.” -엄마, 수경의 글

그녀는, 수경은 고백했다. “유정아, 엄마가 그녀야.” 엄마 역시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었고 그것이 결혼과 이혼의 기막힌 서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음을. 다단계에 빠져 수천만원의 빚을 지고 가족도 등진 아빠, 그 아빠가 자식의 양육권과 친권을 자필로 쉽게 포기한 사실을, 스물일곱 살에 준비 없이 이혼녀가 되어 살아간 엄마의 외로운 날들을, 첩의 딸로 태어나 모진 구박을 받고 자란 엄마의 유년 시절까지. 유정이는 가족의 어두운 비밀을, 여자로 사는 비애를 어렴풋이 알아갔다. 값싼 용서를 하지 말라던 엄마의 말은 온 생애를 걸고 하는 너무도 곡진한 당부였다.

“저는 고상 떠는 엄마였어요. 아픈 티 안 내고 강한 척하고 화 한번 안 내는 엄마가 자기 얘기를 터놓으면서 눈물을 흘리니까 아이가 놀랐죠. 엄마한테 그런 아픔이 있는 줄 몰랐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동안 혼자 참고 아닌 척한 행동은 나를 지키는 힘이 아니라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었죠.”

수경은 그간 아이들에게 이혼 사실을 숨겨왔다. 아빠는 일하러 지방에 가 있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아빠가 원망의 대상이 되기보다 그리움의 대상이 되길 바랐다. 이웃이나 지인에게도 이혼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다. 엄마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모습이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칠까 싶어 외식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정상 가족’의 외양을 지키려 했다. 유정이가 상담치료를 마치는 날, 이혼 뒤 처음으로 세 식구가 음식점을 찾았을 정도다. 이혼녀라는 낙인, 세상의 수군거림 같은 스스로 만들어낸 환영에 결박되어 전전긍긍 속을 끓였다. 유정이가 가족 간 단절의 두려움 때문에 피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했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이 아이, 정말 내 딸 맞구나….’

유정이도 슬슬 글을 썼다. 자신을 믿어주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준 상담 선생님, 변호사 선생님, 무조건 내 편인 엄마, 자조모임 선생님들을 일일이 언급하며 그분들이 믿어주고 아껴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잘 살아야겠다고, “만약 누가 이 일을 알고 나에게 말을 해도 나는 당당하게 아주 자신 있게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차분한 사유로 써내려간 끝에 기침처럼 터져나온 마지막 두 글자는, 어른들의 감탄을 자아냈으니 바로 이것이었다. ‘살자.’

다 말하고 다 먹이는 불량식품 엄마

말 그대로, 엄마와 딸은 조금씩 살아났다. 소송이 끝나고 상담이 마무리되고 6개월간의 치유워크숍도 마쳤다. 영화치료, 글쓰기치료, 반찬만들기 등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덮어두었던 과거를 들춰낼 수 있었다. 억눌렸던 온갖 것들이 우글우글 기어나왔다. 삶을 보호하기는커녕 결박해온 정상 가족의 위선과 가족주의의 압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숭배해온 낡은 믿음에서 자연스레 풀려났다. 정작 살면서 한번도 힘이나 지지가 되어준 적이 없었던 혈연관계의 무서운 진실을 확인하자 상실에 대한 막연한 공포도 사라진 것이다. 엄마와 딸은 단절의 두려움 대신 소통의 대화법을 체득했다.

사건 전에는 서로 듣고 싶은 말만 주고받았다. 아이는 엄마를 기쁘게 해주기 위한 노력으로 대화에 임했고, 엄마도 도덕 교과서 같은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서로 치켜세우기 바빴다. 수경은 속상한 일이 있으면 쓰레기봉투를 양손에 들고 나가서 버리고 심호흡을 하면서 화가 누그러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평온한 얼굴로 들어왔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아이들을 대했다.

사건 이후에는 편하게 모든 걸 이야기한다. 성폭력 사건을 둘러싸고도 가해자, 가해자 부모, 친조부모, 아버지의 태도가 어떠했는지 있는 그대로 알려주었다. 그랬더니 아이도 자신의 감정, 생각나는 일, 느끼는 기분을 다 터놓았다. 여전히 소리 내서 ‘엉엉’ 울 줄은 모른다.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다. 그건 엄마가 우는 법이기도 하다. 수경의 눈자위가 붉어지고 목소리가 떨릴 때면 유정은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얼른 팔을 벌려 안아주고 다독이며 달랜다. “엄마 또 울어?”

수경은 좋은 엄마가 꿈이고 낙이었다. 스물아홉 살에 교통사고로 인한 수술과, 연이은 세 번의 교통사고로 몸이 불편해 8시간 정규직으로 일하지 못하지만 집에서 하는 조그만 사업으로 스스로 아이들을 책임진다는 자기만족이 컸다. 풍족한 환경은 아니나 아이를 끝까지 놓지 않고 책임지는 엄마가 되려 했다. 라면이나 햄버거 같은 인스턴트 음식은 절대 먹이지 않고 삼시세끼 모두 집에서 챙겨주었다. 잘 먹는 것도 예쁘고 살아 있는 것도 감사했다. 임신해서 지금까지 아이에게 존댓말을 쓸 정도다.

지금은 불량식품 엄마다. 좋은 엄마의 기준을 완화했다. 아이들에게 라면을 먹이고 입에 착착 달라붙는 바삭한 치킨도 사 먹인다. 영화 보고 돈 들지 않는 산책이라도 하려고 함께 집 밖을 나선다. 의례적인 칭찬이 아니라 시시콜콜 지적질도 잘한다.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먹고사는 일에 치여 아이들 표정을 제대로 봐주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 편히 양껏 얘기할 수 있는 엄마는 아니었음을 인정하고 아이에게도 사과했다. 긴 치유의 여정을 일단락지은 유정이도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겪은 일이 아주 큰 일 같기도 하고 아무 일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고.

“유정이가 ‘살자’라는 글을 썼을 때, 우리 딸이 죽음을 생각했다는 글을 보고 좌절했어요. 왜 죽고 싶은 생각이 없었겠어요. 늦게라도 드러나서 다행이죠. 내 딸, 내 일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여기저기 주저리주저리 얘기하기보다 안전한 곳에서 얘기하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아이가 피해를 입었을 때 ‘정확히 도움받을 수 있는 전문기관’이 있으니까 찾아가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내고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는 게,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데 큰 에너지가 되었어요.”

생활공동체 반려가족의 탄생

올해 초 수경의 가족은 다른 가족과 ‘전격 합체’ 했다. 일전에 가입한 인터넷 카페 ‘한부모가정동호회’에서 만난 인연이다. 꾸준히 재혼을 염두에 두었지만 여건이 허락지 않았다. 사람을 만날 기회 자체가 없었다. 일은 집에서 했고, 작은 개척교회를 다녔지만 교인은 네 가정뿐이었다. 혹시나 싶어 동호회에 가입했지만 활동할 자신도 없고 조건도 안 되었다. 그러곤 딸아이의 사건이 생겼으니 더욱 경황이 없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한창 힘든 시기를 보낼 무렵 공지가 떴다. 동호회에서 같이 워터파크에 가기로 했다. 유정이 기분 전환도 시켜줄 겸 나들이를 갔다. 그의 아이들과 수경의 아이들이 비슷한 또래였다. 네 명이 곧잘 어울려 몰려다녔다. 그날 친해진 이후 우리 같이 살자고, 엄마·아빠라고 해보라고 애들이 시키는 바람에 두 사람의 관계가 진지해졌다.

“나란 사람의 에너지는 저와 아이들 둘뿐이었어요. 한계가 딱 거기까지였죠. 아이들이 아빠랑 합쳐서 살면 안 되느냐고 요구할 때도 그렇게 말했죠. 엄마는 너희 둘은 책임질 수 있는데 아빠까진 여력이 없다고. 지금은 누구를 끌어안을 힘이 되더라고요. 새 가정을 꾸렸죠. 물론 꾸준히 의심도 해요. 왜 나랑 결혼했지? 보모가 필요한가? 섹스 파트너가 필요한가? 남편한테 계속 물어보고 의심하고 확인하죠. (웃음)”

혈연 중심의 성별 분업을 토대로 한 가족주의의 위계와 억압, 온갖 갈등과 폭력이 있어도 유지되는 가족이 문제이지 가족 자체가 배척의 대상일 리 없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결혼을 하고, 그리고 그 희망이 몹시도 위험하지만, 산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것. 위험의 파도를 피하지 않고 타고 넘을 힘이 조금은 생겼기에 수경은 새 반려자를 맞이했다. 물론 현실은 늘 상상을 초과한다.

“내가 남편한테 맨날 책 낼 거라고 말해요. 제목은 ‘사별남과 결혼하지 마라’, 하하. 그럼 남편은 실명만 쓰지 말라고 그래요.”

어쩌면 정말로 책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수경은 새 가정을 꾸린 뒤 살면서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그 상황을 글로 써서 남편한테 보낸다.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지만 수경의 입장을 이해하는 답이 온다. 서로 감정이 누그러진다. 일상적인 일로 또다시 싸우더라도 “털어내는 게 중요하다”. 그런 수경을 보고 남편은 말한다. 좋은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는 당신이 부럽다고. 수경은 으쓱하여 말한다. 글 쓰는 게 여러 사람 살린다고.

딸에 대한 사랑으로 몸부림친 시간이, 수경을 삶의 다른 자리에 데려다놓았다. 엄마가 딸을 돌보겠다고 나섰지만 어느 순간 딸이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전능한 모성이길 중지하고 나누는 모성으로 살아가자 수경도 유정도 다른 표정, 다른 관계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모성의 힘이라면, 아마 이상적 모성이란 약한 것들끼리의 돌봄 연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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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상 - 여성의 집단기억 봉인 푸는 페미니스트

[행복한인터뷰]

한겨레 박승화

 

새까만 눈동자에 설핏 물기가 오르곤 한다. 소행성B-612호에서 온 전령사처럼 짧은 곱슬머리, 날렵한 재킷에 긴 스카프를 둘렀다. 호쾌한 웃음과 수다에 열띠다가도, 갓 난 송아지처럼 물끄러미 보다가 고인다.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하여 하늘나라가 보인다고 함석헌은 말했던가. 초점을 잃고 사라지는 사물들을 지나 눈물렌즈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어떤 세계를 향한 그리움일까.

언어 대신 상징으로 답을 청했다. 그녀가 가방에서 타로카드를 꺼냈다. 옥빛 융단이 깔리고 동그란 카드가 몽글몽글 흩어진다. 잰 손놀림이다. 78장의 상징화. 구상과 서정추상 사이 평평한 그림들, 압도적 느낌들. 태초의 그날처럼 삶이 가득하다. 거기서 카드 두 장을 찾은 그녀가 신분증 제시하듯 멋쩍게 내민다. 생년월일에 따른 별자리가 있는 것처럼 누구나 자기만의 타로카드가 있다. 그녀의 상징은 현자(Crone)와 달(Moon)이다.

하느님이 남자예요? 누가 그래요?

“현자는 밖으로 확장하고 추진하기보다 내면 성찰적인 성향을 의미하고, 달은 무의식을 뜻해요. 아마 저한테 외향적이지 않은 면이 있는 거겠죠. 다른 수준의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있어요. 무의식에 한번 가닿아보고 싶어요. 그게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이윤상은 전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이다. 1992년 자원활동가로 시작해 2012년 소장 임기를 마쳤다. 20년 장강 같은 세월, 깊고 짙은 인연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1991년에 생겼다. 이미 마련된 반성폭력운동의 장에 그녀가 몸담은 게 아니라 그녀의 몸에 반성폭력운동의 장이 형성된 셈이다.

스무 살 어느 봄날이다. ‘다른 수준의 정신적인 것’에 관한 물음의 씨앗이 강의실로 날아들었다. 필수교양 과목인 기독교문학 시간. 서른셋 젊은 나이에 교수로 부임해 화제가 된 현경 교수가 강단에 올랐다. “여러분. 하느님이 남자예요? 그럼 자지가 있어요? 본 사람 있어요? 하느님이 백인이에요? 누가 그랬죠?” 당시는 빈곤과 인간 소외를 핵심으로 한 해방신학, 남성 위주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생태여성신학 등 새로운 기독교 신학운동이 활발했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새내기 대학생은 가슴이 뛰었다. 기존의 상식을 이탈한 ‘다른 목소리’는 고정관념을 신나게 흔들었다. 인식만 파격이 아니라 인디언처럼 머리를 길게 땋은 외모도 신선했다. 교수에게 느낀 발작적 존경심은 지식과 진실에 대한 열정의 불을 제대로 지폈다. 전공인 교육공학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참이었다. 철학과 복수전공을 택했다. 숨통이 트였다. 인간의 삶과 세계의 질서를 탐구하는 그런 공부가 좋았다. 철학과 조교 언니들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는 담배마저 빛나 보였다. 평범한 것보다 색다른 것, 응용학문보다 순수학문에 관심이 기우는 자신을 보고 느꼈다. 매우 실질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실은 “가슴 깊이 겉멋이 있는 사람이었던 거다.”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는 귀인은 또 한 번 나타났다. 대학 4학년 때 교양여성학 특강에 초대된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 정경자 선생이다. 이번에는 ‘다른 수준의 육체적인 것’의 물음이 던져진다. “여러분 중에 성폭력 피해를 받아본 분 손 들어보세요.” 학생들은 잠잠했다. 강사가 말하기를, 저는 피해가 많은데 여기는 한 분도 없으시냐고 하더니 강의를 이어갔다. 성폭력이란 극단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신체적·정서적·언어적 폭력을 포괄한다고, 성폭력 공포 때문에 배낭여행을 못 가고 밤에 외출을 못하는 것과 같이 일상을 옥죄는 것도 피해의 범주에 속한다는 내용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성폭력 피해를 입은 사람 있느냐고 다시 물었을 때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윤상의 손도 스르르 올라갔다.

운전면허 취득 10년 걸린 까닭은

윤상은 딸 셋의 장녀다. 첫째에 대한 기대와 지원을 받았고 자매끼리 자라서 별다른 차별을 경험하지 못했다. 중학생 때다. 아버지는 아들과 테니스 치는 친구가 부럽다고 말했다. 딸이랑은 못 칠 게 뭐 있겠느냐며 오기 반 호기심 반으로 테니스를 배웠다. 어느 날 레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등 뒤에서 갑자기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다다다다…. 어떤 남자가 순식간에 뒤에서 몸을 만졌다. 소녀 윤상은 얼음처럼 그 자리에 굳었다. 소리를 지르지도 손가락질을 하지도 쫓아가지도 못했다. 더 놀라운 것은 뒤에서 뛰어오던 그 남자는, 소녀의 앞을 가로질러 무심한 보폭으로 유유히 걸어갔다는 점이다. 벌건 대낮 집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대입 시험을 치르자마자 고3 겨울방학에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했다. 교육과정 막바지에 담당 강사가 결근해 젊은 남자 강사가 대타로 들어왔다. 자동차라는 폐쇄된 공간에 둘만 있는 게 어쩐지 오싹했다. 강사는 차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위치에 자리하고 수강생은 수동적인 상황에 처한다. 아니나 다를까, 강사는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은근슬쩍 허벅지를 만졌다. 끝나고 뭐해? 커피 한잔 할까? 툭툭 손가락으로 찔러보듯 말을 건넸다. 그 시간이 천년만년같이 길었다. 이후 그 강사와 마주칠까 노심초사하며 간신히 학원을 다녔다. 운전면허시험을 봤지만 출발하자마자 떨어졌다. 그때부터 발길을 끊었다가 10년이 지나고서야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이런 일이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기득권자들이라면 어떤 경우에 자기 기회를 10년씩이나 유예하겠어요. 그건 삶 속으로 어마어마하게 깊숙이 들어와서 찌르는 경험이에요. 또 갑자기 성폭력을 당하면 극심한 공포를 느껴요. 얼어붙은 공포(Frozen Fright)라고 하죠. 이런 경험이 여자와 달리 남자는 일상적이지 않으니까 공감하기 어려워요. 특히 판사 같은 남성 법조인은 더 몰라요. 그러니까 그때 왜 저항 안 했느냐, 왜 소리 안 질렀느냐, 말만 했어도 넌 구제됐을 거다,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사람이 살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지만 모든 경험에 이름이 붙지는 않는다고 윤상은 말했다.

“저 같은 피해 경험이 과거에는 이름이 없었어요. 지금은 ‘성폭력’이란 단어를 아이들도 알지만 그땐 무섭고 두렵고 뭔가 이상해서 엄마한테도 말 못하고, 망각으로 자연스럽게 흘려보낸 거죠. 그게 몸의 기억인데 그 불쾌함, 기분 나쁜 기억이 망각 회로에 갇혀 있다가 그날 강의를 듣고 나서야 ‘성폭력’이라는 이름을 얻은 거예요.”

이것이 ‘명명의 정치학’이다. 윤상이 다른 자리에서 자신의 피해 경험을 꺼내면 대부분의 여성들이 “맞아 나도 그래” “그런 적, 나도 있어”라며 맞장구를 친다. 이렇게 여성이라는 하나의 큰 범주가 공통적으로 갖는 경험에 이름이 없다는 것은 엄청나게 정치적인 일 아니겠는가 묻는다. 여성의 피해를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일로 만들거나 무화하려는 가부장 권력에 맞서서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더없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대학교 4학년 때 이 모든 구조적 모순과 대안적 인식을 획득할 수는 없었지만 강의를 듣고 나자 윤상은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자신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 보통의 경험 보통의 여성을 위한 단체임을 알았다. 자원활동가를 환영한다는 강사의 말에 용기를 내어 한국성폭력상담소를 찾아갔다. 학교를 다니면서 일주일에 하루씩 출근했다. 언론사에 팩스 보내기, 사서함에서 우편물 찾아오기 같은 심부름을 하고 어깨너머로 실무와 언어를 익혔다. 1994년 ‘서울대 우 조교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서명을 받았다. 때로는 법원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간이 오그라들고 펴지기를 반복하면서 배짱을 두둑이 키웠다.

대학원에서도 고난도 ‘실전 훈련’은 계속됐다. 학부 때부터 오매불망 동경해온 여성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무엇 하나 간단치 않았다. 읽어야 할 책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쏟아지는 말도 죄다 어리둥절했다. 너 이성애자니? 결혼은 왜 하는데? 그거 진짜 네 생각이야? 등등. 매사 문제제기를 하는 친구들과 부대끼고 토론하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자기를 하나하나 설명해내야 했다. 성 정체성은 다양한데 내가 이성애자인 게 고민 없이 된 것 같고, 이성애자여서 미안하다 할 수도 없고,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기성찰이 끊임없이 요구되는 삶을 살아내고 나니 진이 다 빠져버렸다. “혈기왕성한 20대여서 버틴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여성들 사이의 같음과 다름의 딜레마 해결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논문을 써서 통과됐다. 대학원까지 공부시켰더니 월급 40만원이 웬 말이냐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윤상은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로 정식 출근했다.

그렇게 페미니스트 생활인이 되다

시인 김수영은 평소 후배 문인들에게 독서와 생활을 혼동하지 말라고 이르곤 했다. 독서는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생활은 뚫고 나가는 것이라는 게 시인의 지론이었다. 어디 문인에게만 해당될까. 잘 익히고 잘 살고픈 이들이 직면하는 과제였다. 윤상도 그랬다. 20대까지가 온갖 금기와 상식에 도전하는 사유를 받아들이는 시기였다면, 30대로 들어서면서 현장에서 난제를 풀어가며 일상을 뚫고 나가는 시기가 도래했다. 시민단체 활동가로서 ‘윤상의 생활난(生活難)’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과 소장으로 일하는 동안 본격화된다. 크게 꼽자면 세 가지다. 돈과 사람 그리고 언론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통념.

우선 돈. 윤상이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자리를 제안받고 가장 망설인 이유다. 활동가 12명의 급여를 꼬박꼬박 챙겨주면서 일하려면 후원회원을 관리하고 크고 작은 기부를 끌어내야 한다. 아무리 명분이 정의로워도 돈 부탁이 쉬울 리 없다. 원체 성격도 소심하다. 그런데 소장이 되고 나자 “급해지면 별짓을 다할 수 있구나”를 알았다. 직·방계 가족은 물론 엄마 친구, 먼 친척에게까지 후원회원 신청서나 1일주점 티켓을 ‘넙죽’ 내미는 자신을 발견했다. 다음세대재단의 전문가를 초빙해 교육도 받았다.

“전도랑 똑같대요. 대뜸 교회에 가자는 게 아니라 장기 계획을 세우고 평소 관심사를 살피다가 적기를 택해 요구하라는 거죠. 만약 거절당해도 그건 상대방의 몫이지 내 잘못이 아니니 상처받지 말라고 하고요. 우리는 성공사례 나누기랑 스티커 그래프 붙이기도 했어요. 먹고살려면 할 수 없어요. 이렇게 해야 돼. (웃음)”

이 대목에서 살아갈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고난도 이겨낸다는 니체의 말을 떠올리기엔 좀 이르다. 윤상에게 사람 문제는 돈 문제보다 더한 자기초극을 요했다. 조직은 기본적으로 위계 구조다. 시민단체는 평등하고 민주적인 조직을 지향한다. 조직의 효율성을 얻으면서도 민주적인 조직을 실험하지만 모든 것이 매뉴얼화될 수는 없는 노릇. 의사결정 방식을 둘러싼 내부 갈등에 고충이 컸다. 활동가가 그만둔다고 하면, 윤상은 ‘내가 잘못한 거 같다’며 사과하곤 했다.

“안 흔쾌하죠. ‘에라, 네가 다 해라’ 이 말이 여기까지 차오르지만 꾹 참아요. 하하. 정말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사과만 하는 거 같았다니까요.”

이게 다 인과응보라고 여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신입 활동가 시절 최영애 소장과 일했는데, 자기 역시 소장에게 왜 맘대로 결정하느냐고 사사건건 따졌다. 소장을 미워한 걸 뒤늦게 반성한다며 자숙 모드로 빙그레 웃는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러나, 제아무리 대인배 소장을 지향해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다. 특히 자신을 저임금으로 노동자 부려먹는 고용주로 대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때, 설움에 복받쳐 기어이 입을 뗀 적도 있다. “나, 너네들이랑 똑같이 적은 월급 받고 일하거든. 나도 피고용인이거든.”

씻을 수 없는 고통 아니거든요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성폭력 생존자와 직접 관계를 맺지는 않는다. 고통받는 이들과 상담하고 일을 처리하는 건 활동가다. 각자 맡은 사건과 피해자가 백이면 백 전부 경우가 다르다. 그럴 때 동료들끼리 동료상담(Peer Counselling)을 한다. 각자의 이야기를 듣고, 너 이게 힘들구나, 이런 상태구나 얘기해준다. 일이 너무 바빠 서로 얘기할 시간이 없으면 두 배로 힘들다. 어려운 사건을 승소하면 되게 기쁘지만 승소 이후에도 힘든 일은 끝나지 않는다. “술이 필요한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 특히 언론의 성폭력 관련 보도 행태는 늘 안타깝다.

10년 전쯤 활동가 시절, 윤상은 기자들에게 이런 전화를 받았다. 여름이라 피해가 많죠? 20대 여성이 여름에 과다한 노출을 하고 다녀 피해가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여기에는 남자들의 성욕은 불가피하다는 가부장제의 논리가 깔려 있다. 여자가 짧은 치마를 입은 것, 노래방에 가서 춤춘 것, 밤에 귀가 안 한 것 등을 전부 성범죄의 구실로 삼는다. 몇 년 전, 한 일간지에는 성매매를 단속해서 성폭력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는 기사도 실렸다. 성매매를 막으면 여염집 여자가 피해를 입는다는 발상은 여자를 마리아 아니면 창녀로 보는 이분법적 사고다.

“성폭력은 대개 계획된 범죄예요. 자기가 제압할 수 있는 상대를 고르거든요. 매사에 당당하고 내일 기자회견 할 수 있는 여자를 선택하지는 않죠. 근데도 사람들은 성폭력이 충동적이고 우발적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언론 보도도 그래요. 조두순 사건 같은 것만 성폭력 피해의 전부인 양 부각시키죠. ‘성폭력 피해는 무조건 씻을 수 없는 상처래.’ 말해주고 싶어요. 씻을 수 있거든요! 죽지 않거든요!”

갈 길은 멀다. 윤상은 그간 수많은 자리에서 강의하며 잘못된 사회적 통념을 바꾸기 위해 열변을 토했다. 성희롱예방교육이 의무화된 지도 어느덧 15년이다. 그런데 관례적이고 일방적인 교육으로 의식을 바꾸기에는, 100년쯤 뒤면 모를까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더군다나 포털 사이트에는 날마다 성폭력 관련 기사가 최고의 페이지뷰를 기록한다. 극단적인 사례 위주로 보도되다보니 집·직장·학교에서 발생하는 일상적인 사건은 문제제기조차 되지 않는 실정이다. ‘사이코패스’만이 아니라 ‘멀쩡한’ 가해자가 얼마나 많은지, 그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사회적 학습 기회가 마련되지 못한다.

“저를 포함해서 활동가들은 언론에 대한 불신이 커요. 선정적 보도 태도 때문이죠. 피해자가 주어가 될 때조차 아이의 피해를 그렇게 낱낱이 알려야 하는지 안타깝고, 얼마나 죽지 못해 고통스러운지를 부각하는 방식도 참 나쁘고요. 피해 당사자가 나서서 언론에 발언해야 하는데 안전한 공간이 어디에도 없었어요. 편견과 비난에 대한 걱정 없이 힘들고 아팠던 걸 말할 수 있으려면, 당사자 발언을 들을 수 있는 수준의 사회가 되어야겠죠.”

내 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준 유일한 사람

서울시 시민인권보호관 이윤상.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임기를 마치고 1년간 꿀맛 같은 백수 생활 뒤에 얻은 새 명함이다. 계약직 공무원 신분으로 시청에서 근무한다. 유리 건물의 ‘온실효과’에 따른 여름철 무더위만 아니라면, 일할 맛 난다. 급여 수준이 양호해졌다. 첫 월급을 받고는 감격스러워 휴대전화 카메라로 통장을 찍어 남편에게 보냈을 정도다. 가난한 활동가들과 만났을 때 술값과 밥값을 내는 것으로 부의 사적 재분배에 기여한다. 하는 일은 서울시 유관기관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성희롱 등 인권침해 관련 민원 처리인데, 윤상은 또 눈이 커지면서 마른 침을 꿀꺽 삼킨다.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직장여성 잔혹사의 구조와 원인 및 대처 방안을.

아이들은 가족, 친·인척, 선생님 등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는다. 가족관계를 벗어나는 성인들은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한다. 어린아이한테는 부모가 생존권이고, 성인은 직장(상사)이 생존권이다. “성폭력은 생사여탈권을 쥔 사람이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여성 직장인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더럽고 불쾌한 경험들. 직장생활이 다 그런 거야, 라며 회자되는 일들. 회식 때 주물럭거리던 남직원은 이튿날 당당히 출근하고 여직원은 아프다고 휴가를 낸다. 우울증 약을 먹고 직장을 다니거나 급기야 사표를 낸다. 직장여성의 아픈 역사다. ‘직장 내 성희롱’이라고 명명하면서 더 많은 여성들이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됐는데, 여전히 대다수는 당하면서도 참고 산다. 윤상이 제안하는 해법은 ‘말하기를 통한 연대’다. 직장 내 성희롱도 상습범이 정해져 있다. “한 놈이 또 한다.” 피해자가 다수일 때가 많다. 그런데 정작 피해 여성들은 서로가 서로를 모른다. 당하고도 어디다 말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 “김 과장만 땡큐다”.

“모든 여성이 경험하는데 모든 여성이 얘기하지 않아. 아마 국가정보원도 이만큼 보안 유지는 못할걸요. 평소에 시시콜콜 잡담하면서도 성폭력 얘기는 빠지거든요. 무겁게 얘기하자는 게 아니라 공통의 경험이라는 걸 공유하자는 거죠. 일상에서 여성 연대가 필요하고, 연대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한국성폭력상담소도, 시민인권보호관도 관계에서 고통받는 약자를 만나는 자리다. 우리 사회가 아픈 사람들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윤상은 절절히 세세히 목도했다. 담당 사건이 잘 해결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비밀스러운 자기 언급 뒤에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내 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준 사람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별일 없이 살지 못하는 사람들. 말하고 싶어도 말할 데가 없거나 말이,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논리적·합리적·이성적 잣대에 걸려 미끄러지는 말들. 그걸 더 온전히 듣기 위해 윤상은 타로를 배우고 철학을 공부한다. 철학이나 타로나 사람들 삶에 관계된 질문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편이다. 본디 상징은 로고스의 독점을 억제하는 힘이 있다. 고도의 상징화인 타로카드를 통해, 로고스의 독점을 해체하면서 열리는 자유의 공간, 말씀이 아닌 목소리가 활개 치는 시간을 향유하는 것이다. 윤상은 시민인권보호관이 되고 얼마 뒤 워크숍에서 동료들의 타로점을 봐주어 인기를 끌었다. 사람 사이 벽을 허물고 말을 나누고 마음의 화평을 돕는 좋은 매개로 삼는다.

윤상에게 무엇보다 힘이 되는 건 페미니스트 동지들이다. 징한 관계다. 울고 웃고 지지고 볶다가 정들고 철든다. 이를 두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 받침의 모서리가 닳으면 그것이 사랑이고, 사각이 원이 되는 기적이라고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말했다. 윤상은 두 글자로 ‘성불’(成佛)이라고 표현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대표나 활동가를 구할 때 써먹기도 한다. 이 자리가 돈이나 명예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임기를 마치고 나면 성불할 수 있다고. 그러면 이런 답이 돌아온다. 별로 성불하고 싶지 않다고.

“사실 성불은 모르겠고 소장 하고 났더니 세상에 무서울 게 없고 못할 일이 없어졌어요. 일이 힘들어서 피폐해지지 않을까 싶지만, 그런 사람은 중도 하차하죠. 희망이라는 고문을 꽉 붙잡아야 해요. 인간에 대해서 믿고 사랑하지 않으면 못하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돼요. 소장 할 때 인터뷰하면 무슨 힘으로 일하냐고들 많이 물어보던데, 힘은 딱 하나예요. 동료밖에 없어요.”

의사소통이 되는 존재. 많은 사람들이 놓치는 이 사회의 아픔을 깊이 바라보고 통찰하는 존재. 그들이 있어서 뭐라도 도모해보고 있으니 그런 밑천을 가진 건 “나의 대단한 재산”이라며 으쓱해한다.

가만히 응시하면 보인다. 능히 겨워서 웃을 때도, 못내 치밀어오를 때도, 몸소 서러워 말할 때도 잠시 잠깐 무엇이 어룽거린다. 그럴 것이다. 이 세계의 남루함을 삶의 신비함으로 변환시키는 장치가 신체 어딘가 장착돼 있어야 인간은 살 수 있을 것이다. 윤상에게는 그것이 눈에 어린 물빛이 아닐까. 어느 시인도 “아무 병(病)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고 봄을 노래했으니….

 

 

* 2014년 4월호 한겨레 사람매거진 <나들> '내 몸, 파르헤시아'에 실린 글

 

 

신고

국가기관 2차 피해자 해인 -"성서비스노동자의 성폭력 고통, 외려 커요"

[행복한인터뷰]

한겨레 박승화

 

더한 고통, 덜한 고통이 있을까. 같은 ‘불면증’을 앓고 있다고 해도 내가 의미하는 고통으로 너는 이해하지 않는다. 고통은 서로의 상태를 비교하도록 허용되는 체험이 아니다. 영혼의 경험이다. 윤동주의 시구대로 “늙은 의사가 젊은이의 병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내재적이고 전달 불가능하며, 그래서 비교 불가능하다.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은 쉬이 비교당한다. 장소, 시간, 수법 등을 따져 육체적 경험으로 여기고 고통의 양을 객관화한다. 안방에 침입한 괴한에 의한 아동의 피해와, 모텔에서 일어난 유흥업소 종사자의 피해는 같은 성폭력이라도 달리 간주된다.

이해받는 고통, 의심받는 고통은 있다. 정숙한 여자와 타락한 여자라는 사회적 척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해인(가명)은 후자의 경우다. 사건 직후 여성긴급전화에 요청했을 때도, 수사기관에서 조사받을 때도 도리어 고약한 의심과 핀잔의 말을 들었다. 성폭력과 성노동은 엄연히 다른 범주이지만 누구도 엄밀히 구분하지 않았다. ‘예/아니요’만 통하는 사법적 언어로는 피해사실을 낱낱이 설명할 수 없었다. 말의 불능 상태에서 보낸 3년. 자기언어를 만들어내기까지 해인은 고통의 독특한 존재방식으로 인해 철저히 고독했다.

“그 키스방 건인가봐?” 한 형사가 지나가면서 툭 던진다. 서울 강북경찰서 형사팀. 사무공간에 칸막이가 없다. 남자 형사 앞에서 피해를 진술하기도 수치스러운데 현장중계하는 꼴이다. 창피함에 목소리가 작아지자 담당형사는 크게 말하라고 다그쳤다. 바로 옆자리에는 업주가 앉아서 뚫어져라 쳐다봤다. 성폭행을 저지르고 나서 “손님하고 2차 나갔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니냐”며 뻔뻔스럽게 말하던 자다. 1만원짜리 몇 장까지 쥐어주었다. 그날로부터 일주일 뒤, 해인은 업주를 성폭력으로 고소했고, 키스방 업소의 불법 성매매 알선에 대한 처벌 의사를 밝혔다.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자는 성폭력을 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를 가만두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의 일들은 나를 울게 한다

업주는 조사를 받으며 시종일관 ‘그런 적 없다’로 응수했다. 외려 해인더러 돈을 요구하며 성매매한 여자라고 주장했다. 키스방 종업원들에게 성매매를 권유한 적이 없고 다들 자발적으로 하는 거라며 거짓 진술을 일삼았다. 업주는 친구까지 대동하고 조사를 받으러 왔다. 해인은 기가 찼다. 서러운 노릇이었다. ‘나는 아무한테도 말 못하고 신뢰관계인도 없이 혼자 왔는데 가해자는 친구를 데려올 수 있는 일이구나….’

사방에서 옥죄는 남성의 시선들. 그 속에서 해인은 털 뽑힌 참새처럼 작아질 대로 작아졌다. 담당형사는 얼굴도 보기 전에 전화를 걸어서 말했다. “합의하실 거죠?” 대질심문 때문에 조사받을 때는 “증거가 없어서 처벌 안 돼요. 어차피 불기소예요”라고 했다. 마지막 남은 존엄의 깃털마저 뽑아버린 결정적 한마디는 이것이었다. “보통 다른 여성들은 피해 상황에서 상처를 입더라도 저항하기 마련인데 왜 그러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조사 말미, 업주는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사과를 하였고 고심하는 해인에게 형사는 메모지에 적어서 보여주었다. “어차피 불기소이니 사과를 받으세요.”

“저는 공황상태에서 온전한 판단력도 갖기 힘든데 계속 불기소를 강조하는 건 처벌 의사를 꺾는 것과 마찬가지였어요. 또 몸에 상처가 남을 때까지 반항했어야 한다는 담당형사의 말은 정조를 생명보다 중요시하는 거잖아요. 여기서는 내가 불리하구나. 어떤 말을 해도 모텔까지 따라가놓고 성폭력 운운하는 여자의 횡설수설로 받아들여지고 있구나 싶었죠. 암담하더라고요.”

단순히 젠더 감수성의 문제는 아니었다. 사건 직후 여성 상담원에게는 “그 나이 먹고 모텔까지 따라갔느냐”는 말을 들었다. 해인은 자포자기 심정이 되어갔다. ‘과연 나의 경험을 믿어줄 사람이 있을까.’

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퇴근길, 해인은 오늘도 어김없이 연체 이자를 송금했다. 하루라도 입금이 연체되면 다음날 타격이 크기 때문에 늘 조마조마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참고서나 옷 한 벌까지 얻어 입고 자랐다. 테이크아웃 커피조차 사치였다. 검박한 생활의 결과물은 엉뚱한 데로 고스란히 새나갔다. 월급 전액이 원금 상환은커녕 사채이자를 메우는 데 들어갔다. 아버지의 두 차례 투자 실패로 인한 뒷감당은 해인 몫이었다. 내가 저지른 일도 아닌데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나 억울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하루빨리 부채를 해결하겠다는 일념으로 저녁에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혹했다. 전화로 문의했다.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는 면접을 보러 오면 알려준다고 했다. 업주는 해인을 보더니 화장을 하지 않았다며 탐탁지 않아했다. 여기서 일하기엔 나이가 많지만 특별히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기억의 카타콤에는 공기가 더럽고

비좁은 방. 소파 옆에는 휴지가 있었다. 업주는 말을 바꿨다. 이곳은 무늬만 키스방이지 대부분의 손님은 성매매까지 원하니까 융통성 있게 행동하라고 당부했다. 기본 시급만 받아서는 돈벌이가 안 되고 성매매를 해야 팁을 받을 수 있고 지정 손님도 생긴다는 거였다. 해인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하루만 일해보고 결정하라고 권했다. 아니나 다를까, 첫 손님이 담배 냄새와 술 냄새가 범벅이 된 채 성관계를 시도했다. 해인은 중간에 뛰쳐나왔고 업주는 어르고 달래고 협박했다. 손님 비위를 안 맞추면 어쩔 거냐, 환불을 요구하면 네가 책임질 거냐, 실랑이가 벌어졌다. 해인은 대기실로 와버렸고 대기실에 있던 최연장자가 대타로 투입됐다.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의 이중고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업주는 단속에 대비한다며 일하러 온 여성들에게 ‘성매매를 강요받지 않았고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라는 각서를 받아서 책임 회피 수단으로 삼았다. 그런 부당함도 참기 힘들었다. 하루쯤 경험으로 여기겠다고 말하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곧바로 업주가 전화를 걸어왔다. 거기에 있어보라고 다른 데를 소개해준다고 했다. 자신은 이런 데서 일하는 여자들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온갖 감언이설로 위로하고 다독였다. 캄캄한 새벽길. 업주는 집에 데려다준다며 동행하더니 모텔촌으로 향했다. “비도 맞고 늦었으니까 씻고 쉬고 가라.” 그 말을, 수면 부족과 피로감에 지친 해인은 의심 없이 받아들였고 모텔에서 ‘풀려나기까지’ 4시간이 걸렸다.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사비네 여인들의 강간>에 나오는 여인처럼 해인의 몸은 심각하게 꺾였다. 손을 아무리 내저어도 허공엔 잡을 것이 없었다. 한 마리 사나운 말처럼 돌변한 업주는 말발굽 같은 성기로 몸의 중심을 짓눌렀다. 화폭의 남성이 손에 칼을 쥐고 있듯이, 업주는 맥주병을 들고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남성의 동물적 폭력성의 파괴력은 그림의 안과 밖에서 조응했다. 평생 여성 편력으로 유명했던 피카소와 살았던 두 여자, 마리 테레즈 월터와 자클린 로크는 자살했고, 반나절 몸 들인 유흥업소 업주에게 성폭력을 당한 해인은 자살충동에 시달렸다.

동의하지 않아도, 밤은 온다. 사채이자처럼 꼬박꼬박 밀려오는 밤. 해인은 밤마다 울부짖었다. 성노예처럼 취급당했던 새벽의 시간이 되면 ‘기억의 폐수’(최승자)가 흘러 수면제 없이는 잠들지 못했다. 자살충동이 심하게 밀려올 때는 차라리 살인계획으로 전환시켰다. 죽어야 될 자는 내가 아니라는 억울한 심정에 가상의 복수극을 펼쳤다. 복수를 다룬 영화나 소설을 읽고 대리만족을 느꼈다. 신변의 안전과 방어를 위해 가방에 넣고 다닐 전기충격기와 가스총 같은 ‘무기’를 찾아다녔다. 택시를 탈 때, 가방에 무기가 없으면 근처 만물상점에서 식도를 사서 탑승하기도 했다.

“정말로 무기를 갖고 있어야 마음이 더 편하다기보다, 반항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조사 과정의 추궁에 따른 후유증이었죠. 그날 조사받다가 이대로 더 가다간 나만 만신창이가 되겠다 싶어서 바로 고소 취하장을 제출했어요.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이 증거가 될 수 있는데 그때는 몰랐어요. 법에 무지했죠. 지금도 고소를 취하한 건 후회하지 않아요. 수사기관에 신고한 것 자체를 후회했으니까요. 영화 <공정사회>의 결말처럼 사적인 복수를 택하는 게 현명하진 못해도 한심스럽진 않을 거 같다고 생각했어요. 최소한 2차 피해는 없었을 테니까요.”

고독한 이빨을 갈고 있는 살의, 아니 그것은 사랑

국가기관에 의한 2차 가해를 두고 “성폭력보다 더 고통스러운 폭력”이라고 해인은 말했다. 지금과 달리 2010년만 해도 성폭력 사건은 별도의 밀폐된 공간에서 여경에게 조사받을 수 없었다. 그 누구도 해인에게 원스톱지원센터의 존재나 신뢰관계인이 동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지해주지 않았다. 현재 시행 중인 증인지원관이나 피해자 국선변호사 같은 피해자의 법적 권리를 위한 제도는 기소 이후 상황에 해당한다. 기소 이전 경찰 조사 단계에서의 피해자 인권보호 장치는 그때나 지금이나 미흡한 실정이다.

아무튼 작은 천막도 없이 ‘2차 가해’라는 비바람을 맞은 해인의 정신적 외상은 컸다. 두 번째 자살 시도 이후 외래진료를 받다가 입원치료를 시작했다. 약물치료 덕분에 가해자에 대한 분노는 줄었지만 삶의 의욕도 같이 사그라졌다. 항상 우울감에 젖어 복수심을 느낄 기력조차 없었다. 말을 끊고 약에 취한 시간들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약을 끊고 말을 시작했다. 입원 두 달 뒤 즈음 사이코드라마에 도전했다. 그때 성폭력 경험을 처음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겪은 상황만이 아니라 원했던 상황인 배려받는 수사 과정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런데 심리극 진행자가 무슨 아르바이트였는지 물었을 때 해인은 또 말더듬이가 되어 ‘호프집’이라고 해버렸다.

천주교성폭력상담소에서 치료와 상담을 받으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성폭력 이후 신체적 ‘증상’에 대해서만 얘기했지 사건의 ‘정황’이나 가해자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모텔’과 ‘키스방’이라는 그 두 단어를 빼고 상담하다보니 늘 겉돌았다. 이야기를 해도 후련하지 않고 체한 것처럼 답답했다. 자괴감이 들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한 말, 막힌 말이 아니라 트인 말을 하고 싶었다.

열망이 기회를 불렀을까. 지난해 하반기 해인은 성폭력상담소의 프로그램인 글쓰기 워크숍과 큰말하기대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다른 성폭력 생존자들과 관계를 맺고 말을 나누고 글을 썼다. 그곳에서도 해인은 경계심을 늦추지 못했다. 같은 생존자들이나 활동가들에게도 처음부터 피해사실을 터놓지는 못했다. 글쓰기 워크숍에서는 16주 과정의 마지막 수업에서야 한 편의 글로 사건의 전말을 온전히 고백했다.

“내가 말할 기회를 꼭 갖고 싶었어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죠. 글을 쓰면서 초안 만드는 과정은 힘들었지만 한줄 한줄 완성하면서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글쓰기는 억압적이지 않은 말을 창조하고 자꾸만 끊어지려는 말을 잇는 과정이었다. 글로 정리하고 말이 트이면서 약도 줄일 수 있었다. 해인은 그간 정신과 입원, 약물 복용, 상담, 글쓰기, 말하기 등 수많은 치료 방법을 통해 고통의 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일련의 시도에서 가장 큰 효과를 본 방법은 글쓰기나 말하기 같은 ‘스스로 드러내기’였다.

고양이로서 실천할 수 있는 선행은 악행만큼 다양하고

“고양이가 되겠다고 집을 나온 첫날 밤부터 눈에서 빛이 났던 건 아니죠. 열세 살 때부터 고독한 눈알을 원했는데요, 초점이 사라질 때까지 눈알을 빙빙 굴렸을 뿐이죠.”

-김행숙, ‘고양이군의 수업시대’ 중에서

고양이 눈알로 응시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해인이 어려서부터 목도한 세계다. 화장실 불을 켜지 않는 습관으로 지금도 어둠을 지향한다. 아버지를 ‘독재자’라고 부른다. 은유적 수사가 아니다. 해인이 자라면서 본 모습은 독재자의 호르몬이 분비되는 한 남자다. 가난의 역경을 딛고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신혼 때부터 재떨이를 던지고 폭언을 행사했다. 그런 아버지와 살면서 어머니는 더욱 순종적으로 변해갔다. 해인은 자살충동에 시달릴 때도 어머니를 떠올리며 견뎠다. 유일하게 혈육의 정을 느끼는 존재가 어머니다.

해인은 고양이-엄마가 되었다. 캣맘(cat-mom)이다. 동물에게서는 상처받지 않으리란 희망으로 유기묘를 3마리 데려왔다. 처음에는 무척 공격적이던 고양이들이 자꾸 보듬고 품고 애정을 주자 달라졌다. 도도하지만 사납지는 않다. 고양이와 해인은 서로 존재하는 것으로 돌보고 키운다. 해인은 고양이와 살면서 환경과 기질의 관계를 인식했고 생명체의 변화 가능성을 확인했다. 고양이에게 사랑과 책임감을 배우고 나니 직장생활을 다시 할 수 있는 용기까지 생겼다. 그뿐인가. 폭행이나 협박이 동반되지 않는 경우처럼 성폭력 유형의 편견 때문에 주저하는 이에게는 기꺼이 동행이 되어준다.

“성폭력 생존자 중에 피해를 입고도 신고를 못한 사람은 신고한 사람을 부러워하고, 신고한 사람은 유죄판결이 난 사람을 부러워해요. 그런데 유죄판결이 나기까지 1~2년 동안 그 지난한 과정에서 일어난 얘기를 들으면, 아휴 그냥 저기까지 안 간 게 다행이다 싶다고들 하죠. 제가 겪은 일이 어떤 형사의 개인적 자질이나 직업의식 수준의 문제는 아닐 거예요. 과중한 업무 속에서 성폭력 문제를 다루니까 감수성도 부족하고 무지해서 생긴 일이죠. 나중에 만난 생존자들 또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인지 수사 과정에서 겪은 고충은 비슷했어요.”

해인은 길게 본다. 지금은 명백한 성폭력으로 인정하는 사건도 동일한 조건에서 과거에는 가해자 처벌이 어려웠다. 성폭력을 둘러싼 조건은 계속 변해간다. 그 변화를 만들어내는 원인으로 직접 참가하고자, 성폭력 피해자 지원 동행 자격으로 법정에 간다. 참관을 하면서 문제점을 발견하고 개선점을 고민하고, 그렇게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여기저기 떠들고 다닌다.

성노동 여성 당사자 운동도 열심이다. 성폭력 생존자의 문제는 여성단체에서 대리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물론 초반에는 보호와 상담이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 치유됐을 때는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본다. 여성단체와 시민사회에서 제도적인 문제를 풀어갈 때 동시에 생존자들도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내야지 사회적 편견이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해인이 자신의 2차 피해 경험을 당당하게 얘기하고 공론화를 시도하는 이유다.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

서울 지하철 4호선 수유역 부근. 수많은 간판들의 아우성 속에서 그곳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음지식물처럼 질기게 연명한다. 아직도 악취를 풍기는 기억의 거점. 사건이 발생하고 2년이 지났을 즈음, 한번은 분에 차고 억울해서 올라가본 적이 있다. 가해자였던 업주를 만나지는 못했다. 나중에 알았다. 그런 업소는 신고가 들어가면 폐업하고 사업자등록증 명의를 바꿔가면서 영업을 지속한다고 한다. 그러니 저 키스방이 사라진들 무엇할까. 업주들은 또 다른 신종 변종업소를 만들어내고 여자들을 인형처럼 부릴 텐데 말이다.

사건 당일, 잠깐이나마 머문 키스방 대기실 풍경이 떠오른다. 말이 부글부글 들끓었다. 방금 상대한 손님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푸는 성토의 장이었다. 30일 동안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아 만근 수당을 받았다는 언니는 싱글맘이었다. 반값 등록금 실현은 요원한 일이어서 사립대학 등록금 마련을 위해 온 앳된 학생, 낮에는 편입학원에서 공부하고 밤에 출근하는 휴학생 등 제각각의 사연들을 갖고 있었다.

그 누가 알까, 아니 알려고 할까. 사람들은 ‘왜 그런 일을 하는지’는 물어도 ‘그런 일을 하는 과정에서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지’는 거의 묻지 않는다. 성매매집결지는 물론이요 키스방이나 노래방, 안마방, 다방 같은 신종 변종업소에서 벌어지는 여성들에 대한 크고 작은 인권침해들, 목숨을 위협당하는 (성)폭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인권 사각지대다. 가부장제 사회의 타자인 여성, 그 여성에서도 주변화된 존재인 성노동자는 실제 피해 당사자이면서도 자신의 고통을 사회적으로 문제화하기 어렵다. 해인이 그러했듯이.

“여러 상황 중에 하필 키스방에 간 첫날 성폭력 사건이 생겼을까, 원망이 컸어요. 근데 제 사건을 계기로 다른 생존자들과 성노동자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생겼어요. 매스컴에서 성노동자는 마치 쉽게 돈 벌려는 사람으로 그려지는데 성노동의 특수성이나 그들이 감수해야 하는 위험성, 건강권을 담보해야 하는 상황이 있거든요. 제 일이 아니었다면 저에게 상처 준 사람과 비슷한 가치관으로 살아가다가 저도 남에게 상처 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었겠지요.”

성매매 여성에 대한 큰 편견은 없었지만 약간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봤음을 고백한다. 그들을 시혜받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고 여겼다. 그들이 고되게 일하는 노동자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성노동자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고 인터뷰하는 것에 크게 지지를 못했을 것 같기도 하다. 그저 정부의 지원을 조금이라도 더 잘 받는 게 실속 있다고, 그게 아니면 여성들이 하루빨리 그 일을 접고 사무직에서 일해야 한다고, 그게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물론 아니다.

“제가 갔던 키스방에서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가 다른 직장과 다르게 취급돼야 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성매매집결지 외에도 다방이나 키스방에 종사하는 여성이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못 받는 경우가 많거든요. 어느 지역의 노래방 도우미들이 시급을 올려달라는 운동을 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간헐적인 움직임이겠죠. 감정과 육체를 팔아가면서 장시간 노동하는 여성들이 부당한 처우를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그걸 막는 일에 작게나마 일조하고 싶어요.”

‘성매매가 사회구조적 문제’라는 사실을 이론으로만 이해했을 때는 할 수 없었던 생각이다. 그들을 타자화하는 시선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나마 당사자로서 경험하면서, 해인은 ‘성노동자의 성폭력 피해 지원’과 ‘성노동자의 노동3권 보장’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똑 부러지게 말하게 됐다. 이것이 특정한 사건 속에서 진리를 체험한 주체가 그 진리에 대한 충실성(fidelity)을 고수하는 윤리적 태도(알랭 바디우)일 것이다.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의 권력과 자본이 여성을 수단으로 이익을 취하는 한, 성노동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은행원으로 오래 일하다가 어느 날 직업을 바꾸는 게 힘들고 두렵듯 성노동자도 마찬가지다. 새 출발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그러니 성매매의 근절이냐 허용이냐의 거시적인 입장만 되풀이해서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성노동자의 구체적인 삶을 보호할 수 없다. 그 틈에서 해인은 자신의 역할을 발견한 것이다.

얼마 전 반성매매 단체에서 자신의 피해 경험을 이야기했다. 개인적인 악몽에 그치는 게 아니라 분명히 지금 또 어딘가에서 고용주로부터 강제적으로 성상납을 요구받거나 당해도 신고 못하는 여성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다. 언젠가 그들 목소리에 기대어 해인도 힘을 얻고 싶다.

더디 사라지는 고통, 안고 가는 고통이 있을 것이다. 가까스로 피해 경험을 다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해인은 아직도 투병 중이다. 수면제가 없으면 잠들지 못하고 낯선 남자만 보면 안면 근육이 경직돼버린다. 슬픔은 가도 아픔은 남는 법이니. “인터뷰에 응하면서도 익명과 뒷모습을 원하는 걸 보면 떳떳하지 못한 그 무엇이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싶다”고 쓸쓸히 말한다.

모든 고귀한 변화가 그렇듯 미미하고 지지하고 데데한 것 같지만 실존적 차이는 있다. 해인은 더 이상 정신과 병동이나 방 안 같은 격리된 공간이 아닌 삶의 복판에서,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 아프다. 아픈 세상에 가서 아프고자 한다. 의심받는 고통이 이해받는 고통이 될 때까지. 그리고 논리회로에 갇힌 단단한 언어가 분열하는 다성의 언어로 삶에 스밀 때까지.

 

*이 글의 각 중제는 허수경(‘울고 있는 가수’), 이성복 (‘기억에는 평화가 오지 않고’), 최승자(‘사랑 혹은 살의랄까 자폭’), 김행숙(‘고양이군의 수업시대’), 황지우(‘산경’)의 시에서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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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이 - 엄마가 말하는 폭력, 아들과 바꾸는 세상

[행복한인터뷰]

 

손경이는 전문 강사다. 직장 내 성희롱 예방, 성·학교·가정·직장 폭력 예방 등을 주제로 강의한다. 2012년 여성가족부 장관상을 받았다. 손경이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다. 강의 도중 그 자리가 ‘안전하다’고 판단하면 피해 경험을 터놓는다. 삶의 진실함에서 나온 묵직한 강의에 대부분 감동하지만 이런 반응은 피할 수 없다. “아, 자기가 당해서 성폭력 강사를 하는구나.” 어떤 이는 대놓고 구시렁거린다. “어쩐지 드세더라. 남자를 가만 안 둘 기세야.”

편견의 말은 대개 단순논리로 반복된다. 특히 성폭력에 관해서는 논리적 성찰을 허용하지 않는다. 삶의 여정에서 흘러들어온 모든 것의 퇴적층이 성정이다. 특수한 경험이 직업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드물다.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의사 할까. 더군다나 그는 반대다. 성폭력 경험이 있어서 강사를 하는 게 아니라, 강사로 일하다가 자신의 성폭력 경험을 기억하게 됐다.

손경이씨


성폭력 나만 당했다… 나도 당했다

어느 초등학교 5학년 교실이다. 손경이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폭력 예방 교육을 했다. 2년차 새내기 강사는 매뉴얼대로 별다른 감정 없이 강의에 임했다. 성폭력 피해자에 관한 통계를 보여줬다. 한 해에 ○○명이 사건을 겪고 가해자 1위는 사촌오빠, 2위 의붓아빠, 3위 친아빠, 4위 외삼촌, 5위 오빠다, 라고 설명하는데 한 여자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아빠한테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너무 놀라고 당황한 그는 수업이 끝나고 상담하자며 얼버무렸다. 강의가 끝나자 아이가 말을 걸어왔다. 성폭력 통계를 보여준 사람은 선생님이 처음이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가해자 2·3위가 아빠였다니, 이건 자기 문제가 아니고 아빠의 잘못임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그간 다른 강의에서 통계를 제시하면 반응이 시큰둥했다. 비경험자는 못 믿는다. ‘그런 아빠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말한다. 경험자인 아이는 달랐다. ‘나만 당했다’에서 ‘나도 당했다’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다. 내처 아이는 서운함을 토로했다. 자기가 용기 내어 피해 사실을 공개했을 때 박수를 쳐주었어야지 왜 손을 내리라고 했느냐고. 선생님도 경찰이랑 똑같다고. 어른들은 왜 무조건 숨기느냐고. 그러고는 “선생님이 원칙이 살아 있는 세상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로부터 9개월 남짓, 강의를 하다 중단하다 했다. 열두 살 아이의 당당한 모습이 부러웠다. 강사로서 부끄럽고 어른으로서 미안했다. 크게 마음이 움직였다. 진정한 감동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이라고 했던가. 이전 지식은 폐기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성폭력 교육 자료를 조목조목 의심하면서 읽어 내려갔다. 그때 안에서 무언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소리를 질러라? 소리 지르면 죽을 수도 있는데. 소리 질러서 산 사람이 있을까. 짧은 치마를 입지 마라, 밤에 돌아다니지 마라,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마라. 성폭력 예방 지침의 모든 항목이 피해자 유발론인 거예요. 제가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기도 한데, 이런 인식 때문에 여성이 피해를 입고도 자기 잘못이라는 자책감에 시달려요. 신고율도 저조하고. 내가 완전히 잘못 가르치고 있구나. 피해자 유발론에서 가해자 책임론으로 접근이 바뀌어야 한다는 걸 알았죠.”

어떻게 하면 강의를 잘할 수 있을까, 그것만 연구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홈페이지를 즐겨찾기 해놓고 드나들면서 사례를 참고했다. 그 무렵 ‘제3회 성폭력 생존자 큰말하기대회’ 공지가 떴다. 호기심에 찾아갔다. 무대에 올라가 마이크를 붙잡고 자기의 피해 경험을 얘기하는 여성들을 보았다. 마음이 울렁거렸다. 눈물이 솟구치고 기억이 떠올랐다. 십수 년 전에 폭발해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기억의 퍼즐 맞추기가 시작된 것이다.


교육중독자, 자격증과 자존감을 얻다

스물넷 봄날. 손경이는 촉망받는 회사원이었다. 여상을 졸업하고 대기업 경리과에 입사해서 1년 만에 그룹 경영기획실 인사과로 자리를 옮겼다. 주경야독으로 의상학과 대학을 마쳤다. 계열사 의류업체에서 재능을 펼치고 싶었다. 인생에서 가장 승승장구하던 그때, 꿈과 일에 빠져 살던 5월의 어느 날 사건이 발생했다. 낯선 남자에게 끌려가 닷새 동안 감금당했다가 풀려났다. 경찰에 신고했고, 잡지 못했다. 그러고는 잊었다. 해리 현상. 모든 종은 위험이나 전멸의 무시무시한 위협에 생물학적 반응을 한다. 해리는 신체적·정서적으로 뭔가를 느끼는 능력이 완전히 차단되면서 고통과 공포로부터 멀어지는 현상으로, 효과적인 생존 기제다. 그도 그랬다. 기억은 지지직 타버리다 끊어졌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일하고 몇 개의 돌부리 같은 사건을 지나며 일상을 살아갔다. 심해의 깊은 어둠을 밀고 올라온다는 산갈치처럼 외상의 기억이 불쑥 떠오르기 전까지는.

손경이의 일상은 늘 2배속으로 흘러갔다. 결혼 전에는 타고난 근면함과 탈(脫)가난에 대한 욕망으로 직장생활에 전념했고, 결혼 후에는 실질적 가장 노릇에 대한 책임감으로 자신을 밀어붙였다. 백화점에서 스카우트 대상 1순위 숍매니저로 거론됐다. 밤이고 낮이고 일해서 돈을 벌었지만 행복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하루에 얼굴 한번 보기 힘든 아이에게 가장 미안했다. 왜 열심히 살수록 관계가 끊어지고 심신이 피폐해지는가. 삶보다 앞선 근원적인 질문이 돋아났다. 돈이란 뭘까. 부모란 뭘까. 사는 게 뭘까.

좋은 부모가 되자. 일을 그만두었다. 동네 구청에서 하는 부모교육을 받았다. 그때 난생처음 성교육을 접했다. 흥미로웠다. 상담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사회복지학, 심리학까지 파고들다보니 40여 개의 자격증 및 수료증을 취득했다. 서른 중반에 ‘성폭력 예방 강사’라는 새로운 직함을 얻었다. 자칭 ‘교육중독자’가 되어 지식을 미친 듯이 습득했으나 정작 자신에게는 무지했다. 강의에서 만난 열두 살 여자아이, 그리고 다른 성폭력 생존자들의 외침은 그런 그를 일깨웠다. 좋은 부모가 되는 일은 나를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고, 나를 온전히 인정하기 위해서는 성폭력 경험의 재해석과 기억의 복원이 필요했다.

나를 알아가는 진짜 공부가 시작됐다. 피해여성들과 대화하고, 전문가와 상담하고, 여성학 공부에 몰입했다. 그렇게 3년간 복구한 몸의 기억을 들고 손경이는 2007년 ‘제5회 성폭력 생존자 큰말하기대회’에 섰다. 성폭력 사건으로부터 14년이 흐른 뒤다.

“드러내자, 세상에 아픔을 드러내자. 하지만 잘 살고 있다는 것도 같이 보여주자. 항상 성폭력 피해자는 아프고 힘든 모습만 보여주는데, 내가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 다른 피해자들도 잘 사는 방법을 찾지 않을까 생각했죠. 저라고 해서 아예 힘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힘듦이 점점 줄어들고 의식이 바뀌고 주변 사람이 바뀌면서 덜 힘들어졌거든요.”

가치의 전환이 일어났다. ‘보이는 나’가 아닌 ‘변화하는 나’로 사는 쾌감이 컸다. 열심히 살수록 경험과 관계가 쌓이고 그의 풍요는 주변으로 넘쳤다. 비로소 좋은 삶에 안착한 것이다. 그러자 삶의 의미를 나누고 싶었다. 성폭력피해생존자 다큐멘터리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감독 조세영·2009) 출연을 수락했다. 영화에서는 ‘한새’라는 별칭으로 나온다.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에 나오는 성폭력 피해자와 달리 음성 변조나 모자이크 없는 최초의 다큐인권영화라는게 저한테는 신선했어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항상 죄인처럼 가려야 하는 현실이 싫었거든요. 약간의 군중심리랄까. 그동안 하고 싶어도 못했는데 주인공 네 명이 같이 하니까 용기가 났어요.”

영화 시사회 때 가족을 초대했다. 아빠, 엄마, 남동생, 여동생, 여동생 남편, 아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영화를 보러 왔다. 그가 십수 년 전 닷새간 행방불명됐을 때, 집과 회사에서는 “연애에 실패하고 죽으려다 며칠 바람 쐬고 살아 돌아온 사람”으로 돼 있었다. 그도 차마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히지 못했다. 영화를 본 가족들은 박수와 눈물로 외로웠을 그를 다독였다. 친정엄마는 밖으로 나가 연신 눈물을 닦았다. 아들 상민군은 무대에 올랐다. 극중 손경이의 일상을 다루는 장면에 출연하는 나름 조연 배우 자격인데, “내 허락도 안 받고 영화 찍었어요. 전 중학생인데 저 너무 창피해요”라고 말해 관객의 웃음을 자아냈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 엄마의 기록영화에 출연한 아들은 그 자체로 통념을 깨뜨렸고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들은 말했다, 엄마는 성폭력 생존자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엄마의 어깨 위로 머리가 쑥 올라오는 상민군은 곧 대학생이 된다. 법대에 일찌감치 합격했다. 엄마와 나란히 서서 대각선으로 시선을 나누며 중저음의 목소리로, 여전히 쉴 새 없이 떠든다. 각별히 “공을 들여서” 키운 아들이다. 손경이는 가정폭력을 휘두른 아빠와 남편, 그리고 성폭력 가해자까지 ‘남자’에게 상처가 많다. 아들만큼은 젠더 감수성을 키우고 올바른 성의식을 갖도록 노력했다. 아이의 존중(사정)파티를 열어주는가 하면 엄마의 경험과 생각을 자주 들려주고 의견을 물어보았다. 그런 일상에서 영화 출연도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상민군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처음 들었다. 세월에 눅이고 삭이어 지금은 질감이 달라진 그날의 기억을 덤덤한 목소리로 되짚었다. “책이나 신문에서만 봤을 때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그(피해 당사자)게 엄마라니까 느낌이 이상했어요. 상상도 못했죠. 엄마한테 뭐라고 얘기하려다가 너무 복잡한 거 같아서 그냥 똑같이 대했어요. 내가 하던 대로 해주면 엄마도 살던 대로 살겠구나….”

상민군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음을 숨기지 않았다. 혹시 내가 아빠의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설정, TV 드라마에서 보았던 인물의 처지가 되어보기도 했다. 그런 미묘한 감정의 결까지 살려서 속내를 편안하게 터놓는 아이가, 평소 하던 대로 대해주는 아들이, 엄마는 마냥 미덥다. 특히 성폭력 사실을 듣고 나서 의연하게 대하는 일은 어른도 쉽지 않은 고난도의 배려 행위다. 대견하고 든든했다. 한때 “성폭력 얘기만 들어도 지겹다”고 말했던 상민군도 타자의 고통에 대한 수용력을 키워준 엄마가 고맙다. 전 여자친구가 성폭력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당황하지 않고 잘 들어줄 수 있었고,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성폭력을 겪는지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들은 때로 강의에도 함께 나간다. 고아원이나 보육시설에서 성교육을 할 때, 상민군은 마지막 20여 분 특별강사로 나선다. 두 사람이 이심전심 마음이 척척 맞는 건 아니다. ‘야동’ 문제에선 의견이 갈린다. 엄마는 ‘왜곡된 성의식을 심어줄 수 있고 성차별성이 많으니 되도록 보지 말라’는 쪽이고, 아들은 ‘어차피 안 볼 수는 없으니 가짜임을 알고 보라’는 쪽이다. 상민군은 당당하다.

“야동을 한번 보고 나면 억제하는 건 불가능해요. 판타지 영화가 가짜라는 건 알지만 빠져서 보잖아요. 무조건 보지 말라고 막는 거보다 저건 허구라는 걸 알려주고 비판 능력을 길러줘야죠.”

상민군이 자기 경험에 근거한 이야기를 전할 때 청중은 몰입한다. 옳은 주장으로 가득한 ‘어른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아이들도 ‘아이의 말’에는 눈을 반짝인다. 이 확연한 차이를 보며 손경이는 강사이자 엄마의 입장에서 배우는 게 많다. 물론 아직도 야동 반대 의견에는 변함없다. 하지만 어차피 ‘정답 없음’의 삶이다. 다른 세대, 다른 존재가 각자의 견해를 드러내고 토론하는 과정 자체가 건전한 배움의 장이 되지 않을까 믿을 따름이다.

평소에도 두 사람은 왕왕 시끄럽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낙태 문제를 놓고 잠시 뜨거운 논쟁에 휩싸였다. 낙태를 반대하는 아들의 비판은 가차 없고, 엄마는 페미니즘 이론을 근거로 제시하며 물러서지 않는다. 종교 문제로 쟁점이 이동돼 토론을 유보해야 했다. 두 사람은 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심상하다. 소개팅에 입고 나갈 두툼한 코트를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와 그냥 있는 옷 입으라는 엄마가 옥신각신 정겹다. 아무튼 두 사람에게 대화는 일상이고 논쟁은 활력이다. 중요한 건 ‘차이’를 좁히는 게 아니다. 그 차이가 대화의 단절이 아니라 대화의 촉매가 되어주는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다.

“우리 아이가 너무 착한 남자는 아니에요. 근데 솔직해요. 자기감정을 안 감춰요. 뭐 땜에 힘든지 다 말해요. 그러니까 대화가 잘돼요. 변화할 가능성이 있고, 문제가 뭔지 빨리 파악하고 인정하는 아이예요. 지난 4~5년간 수없이 싸웠죠. 지금은 인간 대 인간으로 존중해줘요. (웃음)”

손경이씨와 아들


‘느낌 없음’의 청소년, 가정폭력이 낳은 괴물

아이가 스승이자 친구이다. 손경이는 아들과 싸울 때마다 조금씩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삶에서 도출한 앎은 이렇다. “좋은 남자를 많이 만들면 나쁜 남자는 사라진다.” 아들과 그랬듯이 꾸준히 대화를 나누면 이 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많이 생기지 않을까. 나쁜 남자는 점점 사라지지 않을까 믿는다. 앎은 다시 삶을 이끌었다. 강의 초점을 성폭력 예방이 아니라 관계 교육에 맞추기 시작했다. 그가 작정하고 차린 연구소의 이름은 ‘관계교육원/연구소’. 강의의 목표는 좋은 여자, 좋은 남자 만들기다.

“제가 경험한 세상은 올바르지 않은 세상이거든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성적 위주의 투자 개념으로 봐요. 학원을 다녔으면 성적이 좋아야 하지 않느냐 다그치잖아요. 그런 부모의 태도가 사채업자 같다고 아이는 말하죠. 부모는 늘 사랑이라고 말하는데 아이는 다르게 느껴요. 남편은 자기가 돈 갖다 주는 사람 같다고 하고, 아내는 따뜻한 말 한마디 그리워하고. 사람이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어요.”

손경이가 볼 때 성폭력 가해자는 한국 사회가 만든 괴물이다. 그래서 가해자의 무지를 미워하지 가해자의 인격을 미워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법무부에서 ‘상담조건 기소유예’로 배정된 청소년이 있을 때 매달 정기적으로 청소년 가해자 상담을 진행하는데, 그들의 내밀한 고백을 통해 아이들만 나무랄 수 없는 상황임을 알아챘다. 야동, 대중매체, 친구, 부모, 학교 등 세상이 잘못 가르친 탓이 컸다. “엄마·아빠 대신 선생님이 사과하겠다”는 말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마음을 여는 강사는 3m 높이의 담장을 쌓아올린 아이들 마음도 허물어뜨린다. 아이들은 “선생님 말을 듣다보니 나는 예비 가해자가 아닐까 싶다”며 강의 뒤 종종 찾아오기도 한다. 미니스커트 입은 여자만 보면 스윽 만지고 싶고, 여자가 못 알아차리게 교묘히 성희롱을 하는 수위가 올라가고 있다고 실토한다. 어쨌거나 가장 빨리 바뀌는 대상은 청소년들이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느낌 없음’의 아이들이 눈동자가 흔들릴 때면 보람이 크다. 3∼4년 전에 상담했던 아이들에게 연락이 와 피자를 사주며 의젓해진 모습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 힘으로 손경이는 무겁고 어둡고 살벌한 폭력 예방 교육이 아니라 밝은 이야기, 밝은 생각, 밝은 교육을 하게 됐다.

“저의 요즘 관심사는 가정폭력과 성폭력 및 성매매의 유사관계예요. 늘 아빠가 엄마를 학대하는 걸 보고 자란 아들은 여자를 하찮게 여기죠. 가정폭력을 당한 여성은 늘 주눅 들어 있고 의사표현을 못하고요.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어요. 그래서 큰 틀에서 보면 가정폭력이 성폭력의 시발점이죠. 아주 밀접해요. 성폭력을 일부 남자, 일부 여자의 문제로 생각하는데 절대 아니거든요. 일반인들이 내가 가해자도 만들고 피해자도 만든다는 의식이 있어야 해요.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폭력, 군대폭력, 직장폭력 등 모든 폭력의 시작은 가정폭력이에요.”

그의 명함은 길다. ‘범죄예방위원회 의정부지검 고양지청 고양시 일산서지구 협의회 위원 손경이’. 뒷면에는 이력서 한 장 분량의 소개가 빼곡하다. 원래는 이름과 주소만 적힌 명함을 들고 다녔으나 “센 사람처럼 보이려고 법무부 로고를 아예 넣었다”며 눈을 다 감고 좋아라 웃는다. 호신용 명함을 들고 정부기관 위주로, 대기업·학생·학부모 등을 대상으로 한 해에 500여 회 강의를 나간다. 10년차 강사는 요즘 물이 올랐다. 어서 빨리 좋은 세상이 오기를, 폭력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학수고대한다. 그래서 전국을 누비며 강연하고, 영화도 찍었고, 지난해 12월엔 지상파 TV에도 출연했다. KBS 다큐멘터리 <공감> ‘성폭력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편. 성폭력 예방 인기 강사이자 아들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로서 얼굴을 공개했다. 


내 힘은 작다, 그러나 침묵은 우릴 돕지 않는다

“저는 힘이 작아요. TV에 나오고 신문에 나와도 세상은 안 바뀌겠죠. 강의를 10년 했으니 어림잡아 5만 명을 만난 거 같아요. 세상이 변했나? 그대로죠. 그래서 이제 저도 당사자임을 공개하면 더 빨리 바뀌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를 업신여길까봐, 남편 있는 여자처럼 행세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가정폭력으로 이혼했고 성폭력 피해자라는 걸 용기 있게 말해요. 그러면 깨닫는 가해자가 있을 거예요. 제가 그랬거든요. 성소수자를 혐오했는데 레즈비언 강사가 직접 나와서 당사자의 사례를 들어 얘기하는 인권 강의를 듣고 이해하게 됐어요. 재해석이 일어난 거죠.”

지킬 것이 없고 나눌 것만 남았다. 나는 학교폭력·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입니다, 라고 편히 얘기한다. 단, 앞서 말한 대로 ‘안전한 장소’라고 판단되는 경우다. 안전의 기준은 무얼까. “질문하는 사람이 많은 강의”다. 가령 이런 상황이다. 남자가 여자의 허벅지를 만진 성희롱 사례를 얘기한다. 조직에서 의무교육을 받기 위해 수십∼수백 명이 모인 경우라면, 보통은 듣고만 있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연민이 조금 더 있는 자원봉사자들 강의에서는 달랐다. “그 상사 몇 살이에요?” “술자리에서 동영상 찍은 사람 없어요?” “그 여성 고소 안 해요?” 1시간 내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나의 사례로도 교육 내용을 다 풀어냈다. 남의 얘기로 듣는 사람은 안 바뀐다. 내 문제로 듣는 사람이 바뀐다. 질문하는 행위는 관심 있고, 알고 싶고, 의식을 바꾸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래서 손경이는 강의의 꽃은 ‘질문’이라고 말한다.

꽃 대신 칼이 날아드는 순간도 더러 있다. 생존자임을 밝힌 뒤 조롱하거나 낙인찍는 말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손경이를 피하거나 주춤하게 하지 않는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내가 한다’는 생각이 단단하다. 사명감이 남다른 이유를 묻자 엉뚱하게 드라마 <추적자>(SBS·2012) 이야기를 꺼낸다. 이 사회의 모순과 불의에 저항하는 손현주 역할에 감동받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을 도와줘야 한다”는 걸 배웠고, 아무리 두렵고 힘들어도 정의와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는 행동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불편해야 인간이다.” 그렇다. 인간다운 삶의 추구를 위해 손경이는 불편한 상황을 감내하고 불편한 말을 약으로 삼는다. 그런 사람을 이해하면 강의의 질이 더 높아지지 않겠는가 말한다.

“악의적인 사람을 바꾸기보다 나의 주변을 먼저 바꾸는 게 더 낫죠. 청소년 성폭력 예방 교육을 하고, 학생에게 성의식의 중요성을 현실성 및 실천가능성 있게 가르치면 돼요. 젠더 감수성이 없는 사람은 여전히 그렇게 살 거고 언젠가 누군가 그 사람을 신고하겠죠. 악의적인 사람이랑 싸우는 건 소모적인 일이에요. 일반 사람을 감수성 있는 좋은 사람으로 바뀌게 하는 것이, 제가 할 일이에요.”

손경이는 얼마 전 아이와 함께 케이크에 불을 밝혔다. 이상민에서 손상민으로, 상민군의 성씨 변경을 기념하는 조촐한 파티였다. 아이는 아버지의 죽음과 친가의 의도적 배제와 비윤리적인 대우로 정서적 폭력을 겪은 뒤 엄마 성을 따르기로 스스로 결정했다. 재판장에서 판사에게 성씨를 바꾸려는 이유를 또박또박 개진하고 온 상민군은 능청스럽게 물었다. “엄마, 오늘 모성애만이 아니라 부성애도 느꼈지?” 세상은 바뀌는가, 안 바뀌는가, 더디 바뀌는가. 분명한 것은 지구상에서 이 두 사람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부딪치며 인간에게 주어진 ‘변신의 권리’를 실천한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세상은 바뀌고 있다.

 

* 한겨레 사람매거진 <나들> 내 몸, 파르헤시아 201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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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울 - 읽고 쓰고 말하며 거듭난 주체, 나는 행복해도 된다

[행복한인터뷰]

 

이곳은 소수언어박물관이다. 사멸해가는 소수언어의 마지막 화자들이 전시되어 있다. 자신이 살던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박물관에 사는 한 노인은, 모어를 마음껏 쓸 수 있는 고향을 그리워한다. 말에 대한 지독한 향수병에 빠진 채 차가운 전시관에서 삶 비슷한 것을 살다가 죽음을 맞는다. 그러자 그가 쓰던 소수언어도 사라진다. 말의 통제, 삶의 단절 그리고 작은 말들의 사라짐. 어쩐지 괴이하고 쓸쓸하다. 삶의 질료인 언어가, 관계와 이야기를 만드는 게 아니라 통제와 관리의 도구가 된 이 시대를 김애란은 소설 <침묵의 미래>로 그려낸다.

 

너울은 침묵의 미래에서 걸어 나온 사람이다. 사라지는 언어 최후의 화자가 그러하듯, 말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였다. 인터뷰를 위해 취재 의뢰 메일을 보냈을 때 그는 카페에서 쓴 시를 한 바닥 적어 보냈다. 얼굴을 마주했을 때는 음계의 말들이 공중에 퍼지다가 낙엽처럼 쌓였다. 오래 침묵했고 이제 막 말이 트였다. 집필을 하고 강연을 간다. 사라지려는 말의 불씨를 현장에서 조곤조곤 지피고 있다. 그 말들을 모아 책으로도 엮었다. 제목은 <꽃을 던지고 싶다>, 부제는 아동 성폭력 피해자로 산다는 것’.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전 너울은 성폭력 예방교육을 하러 지방에 갔다. 실무자와 웃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소개를 받고 강단에 올랐다. 성폭력 생존자의 경험에서 우러난 이야기는 커다란 공감과 지지를 얻었다. 집에 오니 메일이 한 통 와 있었다. 강의 시작 전 그렇게 환한 웃음을 짓고 있어서 강사인 줄 몰랐으며 자기도 성폭력 피해자인데 용기를 얻었다는 내용이 담겼다. 아마 메일을 보낸 그이도 웃는 순간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몰랐을 거라고 너울은 말한다. 성폭력을 경험하면 행복에 어색하고 불행에 익숙하다고.

 

매일 힘든 건 아니에요. 때때로 힘들죠. 근데 즐거우면 불안해요. 행복을 빼앗길 거 같고 행복하면 안 될 거 같고. 슬픔 중독자처럼, 나는 불행해야 한다 이런 강박에 빠져서 어렸을 때부터 살았던 거 같아요.”

 

아홉 살 때다. 엄마가 운영하던 자동차공업사에 딸린 식당을 찾은 손님이 첫 번째 가해자였다. 순둥이였던 아이는 어른이 시키는 대로 따라갔고 피해 사실을 직관적으로 함구했다. 일주일 내내 굶을 만큼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 아빠는 엄마를 매일같이 무지막지하게 때렸다. 온통 멍울진 엄마에게 아이가 기댈 품이 보이지 않았다. 홀로 작게 움츠러들던 아이는 계속 표적이 되었다. 열두 살에는 할머니 댁에서 삼촌에게, 다음 해에는 등굣길에 낯선 남자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 작은 몸뚱이에는 내지르지 못한 비명이, 발설하지 못한 말들이 고름처럼 퍼져갔다. , 할머니댁, 학교 어디에도 아이가 몸 둘 곳이 없었다.

 

피난처가 필요했다. 전쟁터 같은 집은 들어가기 싫었고 또래는 유치해보였다. 친구랑 친해지면 비밀을 공유해야 하는데 그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안전해 보이는 공간이 학교 도서관이었다. 아침에 교문이 열리기도 전에 학교에 도착해서 닥치는 대로 읽었다. 철학책, 위인전, 소설. 그런데 아무리 책을 읽어도 강간당하고도 훌륭한 삶을 살았다는 여성의 이야기는 없었다. 그 어떤 책도 왜 연거푸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세상이 말을 해주지 않자, 아이도 세상을 향한 입을 다물었다.

 

200712, 너울은 꿈을 꾸었다. 한 남자에게 강간을 당하는 꿈이다. 살려달라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당장이라도 숨통이 끊어질 것만 같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악몽 후 며칠간 불면의 밤을 보내고 나서야 꿈속에서 그 남자가 입고 있던 옷차림이 선명히 떠올랐다. 황토색 웃옷과 청바지는, 열세 살 때 강간했던 그 남자의 옷이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청바지를 안 입어요. 그냥 불편하다고만 느꼈어요. 청바지를 입으면 목을 조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계단을 못 가고 지하철을 못 탄다거나 했죠.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공포는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제 몸은 다 기억을 하고 있었던 거죠.”

 

25년 전 사건은 25년 간 일상을, 전면적으로 그리고 속속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남들처럼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들어갔으나 열심히는 살면서도 종종 우울하고 문득 죽음충동에 시달렸다. 가난은 천형 같았다. 생계를 해결하느라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고 하루에 4시간 이상을 자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밥벌이에 아등바등하지 않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인생에서 가장 여유롭고 평온한 시기를 보내던 즈음, 느닷없이 악몽이 덮친 것이다.

 

읽기, 자기고통을 해석하다

 

꿈을 꾸고 난 후, 여성단체 상담소를 찾아갔다. 상담과 독서를 병행했다. 상담 선생님이 외국 성폭력 생존자의 수기를 소개해주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답 없음의 결론을 내리고 등 돌린 책과의 해후이다. 너울은 책에 다시 빠져들었다. 원인도 모르면서 결과는 나의 책임이라며 괴로워했던 시간들, 천 번도 넘게 물었던 것들에 관한 이야기가 빼곡했다. 이것은 그토록 찾았던 피해자의 언어가 아닌가.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수잔 브라이슨)는 철학교수가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과 치유 과정을 기반으로 자아와 외상,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여성주의 관점에서 풀어낸 책이다. 난마처럼 얽힌 고통의 서사가 가지런히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불편한 진실-강간피해 생존경험 드러내기>(테레사 라우러)은 미국의 한 여성이 강간을 당하고 상담을 받는 지난한 과정을 기록하고 나중에 상담사가 되는 과정이 담겼다. 이 책은 상담을 받는다고 좋아지지 않는 자신을 자책하거나 포기하지 않게 해주었다. <나는 인생을 믿는다>(사미라 벨릴)는 프랑스에서 청소년기에 강간을 당한 여성이 잘못된 통념으로 발생하는 2차 폭력의 고통을 상세히 묘사했다. 사회적으로 성숙함의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 아이가 혼란 속에서 어떻게 성폭력을 견뎌내는가를 배웠다. <트라우마>(주디스 하먼)는 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폭력의 동일한 메커니즘과 인간의 심연을 밝혀낸 책이다.

 

자기의 고통을 여성주의와 접목해서 해석한 책들이 힘이 됐어요. 세상에 나만 이런 경험을 하는 게 아니구나, 내가 왜 고통스러운지, 내가 왜 말을 할 수 없는지 알았죠. 저는 언어화하지 못했는데 그들은 다 언어화하잖아요. 그동안 못 먹고 못 자고 아프면 짜증나고 저를 미워했거든요. <트라우마>를 읽고는 나를 아픈 대로, 부족한 대로 인정하게 됐어요. 스스로 이해하는 계기가 됐죠.”

 

고통도 해석이다. 철학자 니체의 말대로 우리는 고통이 아니라 해석된 고통을 앓는다. ‘성폭력 당했으니 여자 인생 끝이다’ ‘여자가 유혹해서 성폭력이 생겼다같은 말들만 해도 버젓이 가해자를 숨기고 피해자를 내친다. 본디 주류언어는 강자의 좋음에서 비롯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니체는 첫 번째 판단을 버려라. 그것은 시대가 네 몸을 통해 판단한 것이다라고도 했다.

 

너울은 피해자의 언어로 된 책을 읽으며 자기언어를 구했다. 상담을 시작하고부터 일 년 동안 읽은 책이 100여권. 갈급했다. 책의 내용에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을 연결지어보면서 서서히 자기미움에서 풀려나고 존재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오염된 말들은 저절로 폐기되었다. 페미니즘을 접하고는 처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상담 선생님의 권유로 성폭력 상담원 교육도 받았다. 더 이상 죄인처럼 웅크리고 살지 않기로 했다.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상담원으로 4년간 일했다. 내담자들은 10대나 20대나 너나없이 눈물지었다. 나는 살아갈 가치가 없어, 나만 이런 일을 경험해, 라고 말했다. 해석된 고통을 앓고 있는 것이다. 흠칫했다. , 이 사람들이 나랑 같은 생각을 하네. 시대가 이렇게 바뀌었는데 저들도 나처럼 힘들어하는구나.

 

너울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졌다. 외국 생존자 수기를 읽었을 때의 아쉬움도 더해졌다. 한국에는 왜 생존자의 증언을 기록한 책이 없을까. 우리 피해자들은 왜 말을 안 할까. 그렇다고 특별한 정의감의 발로는 아니고 때가 되었다는 자각, 어떤 우주적인 기운에 끌렸다. 2012년 봄부터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 성폭력 생존자의 기록 꽃을 던지고 싶다연재를 시작했다. 첫 이야기는, 인생 2막의 전환점이 되어준 2007년 꿈 이야기로 전개된다.

 

 

쓰기, 부단히 나로 돌아오는 일

 

모든 말하기는 협상적 말하기다. 약자는 이해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는 수위를 고려해서 말한다. 경험을 어디까지 털어놓을까. 과연 써도 되는가. 그러나 말할 수 없음의 자리에서 증언이 시작된다고 했던가. 사흘을 울고, 열흘을 앓아눕고, 한 달을 눈물로 지새우면서도 쓰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너울의 성폭력 피해는 성인이 돼서도 계속됐다. 대학생 때 아이들을 가르치던 학원 원장에게,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 고용주에게도 당했다. 가까스로 지탱해온 삶을 한 번씩 더 추락시키는 운명의 야멸참에 몸서리칠 때 어떤 스님이 다가왔다. 그리고 말을 걸었다. 남자 때문에 힘들겠다고, 자기에게 몸 보시를 하면 전생의 업을 씻을 수 있을 거라고. 귀가 번쩍 뜨였다. 전생? 그 말은 이제껏 해명되지 않던 삶의 질곡, 비극의 연쇄, 반복강박과도 같은 자기처벌의 상황들을 설명해주었다. 과거를 구제해줄 계시처럼 들렸다. 그렇게 승복을 입은 남성에게도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

 

나는 왜 이렇게 사건이 많을까. 다른 여성에게 물어봤어요. 남자들한테 성적인 제안을 받느냐고. 그런 일이 있으면 미친놈이러고 만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자존감이 성장해야 해요. 자기부정 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몸을 지켜요. 성폭력은 어떤 여자가 예뻐서, 짧은 치마를 입어서가 아니라 힘이나 권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여성을 고르는 거거든요. 제가 취약해 보인 거죠.”

 

그때는 몰랐다. 성폭력으로 망가진 어린 시절. 자아의 기초가 허물어져버린 신체. 열두 살부터 죽음에 대한 시를 썼다. 성장기 내내 치욕과 불안에 시달렸다. 나는 무가치하다는 느낌이 도사리고 있는 상태에서 어른이 됐다. 살고자 택하는 일들이 자꾸만 죽음을 재촉했다. “어른이 돼서 겪은 사건은 내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고 어떤 상황은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도 있기에 그걸 글로 옮기기가 부끄러웠다. 하지마 그러한 상황을 내가 원하거나 즐긴 건 아니므로, 폭력의 경험인 건 맞다고 본다.”

 

스님의 성폭력 사건 이후, 운명의 공범이 되기로 했다. 생의 불능 상태라고 판단했다. 고시원 쪽방에서 자살을 시도했다. 지인이 발견해 살아났다. 성을 팔기로 했다. 자살도 실패한다면 성판매 여성이 되는 것이 나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삶의 가능성을 알지 못했다. 어릴 때 읽은 소설 <헬로우 미미>, <은마는 오지 않는다> 같은 책들에서 체득한 성폭력 피해여성의 삶이 전부 그랬다. 죽거나 미치거나 창녀가 되거나.

 

글 쓰면서 가장 고민한 부분이다. 성산업에 띄엄띄엄 6개월 정도 종사한 경험이 자칫 성판매 여성을 대표하는 말처럼 될까봐 부담스러웠다. 성폭력 피해자는 다 불행하다거나 성판매를 할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일까봐 우려했다. 또 그동안 여성운동의 성과, 성폭력은 (여자 인생 끝장이 아니라) 사소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관점을 무너뜨리면 어쩌나, 자신의 경험으로 인해 사회적 편견이 더 공고해질까봐 주저했다. 그래도 썼다. 내가 겪어낸 일들이니까.

 

30회 연재를 마쳤다. 글쓰기는 를 회피하지 않고 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촘촘히 쓸수록 까맣게 죽어버린 과거에 피가 돌았고 겹겹이 존재감이 형성됐다. 다행히 내용이 힘들지 쓰는 일 자체는 힘들지 않았다. 어떤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으면 뽕 맞은 것처럼일필휘지로 써내려가곤 했다. 쓰기의 쾌감과 직시의 고통을 넘나들며 일다에 연재한 글들은 20139월에 같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사회가 규정한 여성성을 거부한다는 뜻의 제목 꽃을 던지고 싶다’. 성폭력 피해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기억의 복구 작업을 마치고 세상에 내놓은 너울은, 자신 있게 말한다. 피해자에게는 경험을 잊는 대신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고.

 

사건이 없어지지 않는 한 잊히지는 않아요. 과거를 부정할 때는 뿌리 없는 사람 같았어요. 과거가 없다는 게 끔찍한 게 뭐냐면, 저는 그 시기에 함께 했던 사람이 없어요. 서른 살 이전에 만난 사람은 지금 아무도 안 만나요. 한 해가 지나면 전화번호를 다 지웠어요. 학년이 바뀌면 아무리 친해도 안 만났어요. 친구를 보면 그 기억이 다시 났으니까요. 힘들어도 과거를 드러냈더니 제가 역사를 가진 사람이 되더라고요. 과거의 고통으로 만들어진 현재의 나를 인정하게 되고 내일을 꿈꾸는 힘이 생겨요. 누군가 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싶어 할 때 나는 이런 경험이 있어, 라고 말하는 제 자신을 볼 때마다 많이 좋아졌다고 느끼죠.”

 

 

말하기, 드러나야 줄어든다

 

너울은 얼마 전 충북대에서 꽃다운 성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학생 400명이 대강의실에 가득 모였다. 누가 피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될 수 있는가. 한국의 성문화 하에서는 누구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될 수 있으며 자신이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맺고 있는 관계들을 살펴봐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 통계에 따르면 성폭력 가해자의 80%가 아는 사람이고, 친족에 의한 성폭력은 12%에 달한다고 한다.

 

축제기간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학생들은 시종 진지한 태도로 몰입했다. 그 총총한 눈빛이 큰 에너지를 전해주었다. 내 삶과 내 경험이 누구한테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내 경험이 가치 없는 게 아니구나. “성폭력 경험이 가치 있는 경험은 아니지만, 나의 삶이, 그 경험을 견디면서 살아낸 내 삶이 가치 있다는 것을 인정받는 느낌에 너울은 마음이 환해졌다. 이는 보람이고 긍지이자 의무이다. 또 다른 생존자에게 강연의 기회가 이어지도록 활동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라도 너울은 어디든 부르면 가고 가면 열심히 한다.

저자로 데뷔한 이후 글쓰기 작업도 꾸준하다. <여성신문>에 매주 너울의 치유의 레시피라는 칼럼을 쓰고 있다. 생존자의 이야기를 쓰되, 생존자를 드러내지 않고 고통을 드러내기. 어떤 생존자는 어떤 고통을 겪는지 들려준다. 매번 성폭력 얘기만 담으려니 부대껴 요리를 곁들인다. 가령, 일전에 집을 나와 사는 친족성폭력 생존자에게는 식당 밥이 아닌 집 밥을 먹이고 몸보신도 시킬 겸 닭백숙을 해주었다. 요리는 너울의 주특기다. ‘꽃을 던지고 싶다출판기념회에는 그날 초대한 80여 명의 음식을 손수 차리기도 했다. 그렇게 글도 나누고 음식도 나누고 정도 나누고 말도 나눈다.

 

널리 말하기를 실천하는 이유는 절실하다. 성폭력 생존자가 한 명이라도 더 보았으면 해서다. 생존자가 어떤 고통을 경험하는지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주변에서 생존자에게 너 왜 이렇게 불안해?’ 라고 말할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날카로울 수도 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한다. 또 생존자들에게는 너는 그럴 수밖에 없어가 아니라 너가 그러는 게 당연해라고 말해주고 싶다.

 

제가 처음 성폭력을 경험한 게 30년 전이거든요. 그때는 주변에 믿을 수 있는 어른이 없어서 말 못했어요. 우리나라 아동성폭력 신고율이 9%에요. 미국도 6명 중 1명만 주변에 알린대요. 어느 외국 학자가 분석했는데, 아동성폭력 가해자는 한 장소에서 지속적으로 저지르는 특성이 있대요.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에도 다른 피해자가 있었을 거예요. 주위에 믿을 수 있는 어른이 있었으면 반복적인 피해는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죠.”

 

지금도 여전히 아동성폭력 피해자는 너울이 느꼈던 고통을 그대로 호소한다. 그럴 때 미안하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어른이 되어주지 못한 거 같아서.

 

 

모이기, 다섯이 하면 훨씬 난 말

 

 

벤야민은 이야기와 치유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름지기 병이란 그것이 이야기 들려주기의 흐름 속에서 충분히 멀리 떠내려 보낼 수만 있다면 치유 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우리가 겪는 고통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이야기의 흐름을 막는 댐과 같다.” 벤야민의 처방대로 이야기는 너울을 어루만져 주었다. 구술로, 책으로, 다른 성폭력 생존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통을 저만치 떠나보냈고 자연스레 자신도 이야기의 수문을 열 수 있었다.

 

작은말하기(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주최하는 자조모임) 친구들, 여성학과 대학원 친구들, 글쓰기 힘들 때마다 격려해준 일다의 조이여울 대표, 상담과 학업을 물심양면 지켜보며 8년간 곁이 되어준 애인, 출판을 제안해준 출판사, 글을 의미 있게 읽어준 독자들은 너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빚어주고 간직하고 퍼뜨려준 고마운 동료들이다.

 

자신이 받은 것을 세상에 돌려주기 위해 너울은 지난여름 인터넷에 생존자 네트워크 카페 성폭력, 그 이후’(http://cafe.daum.net/e-hoo)를 개설했다. 아직 사무실이 없어 엔지오 단체로 등록하지 못했지만 십시일반 후원과 자발적 재능 기부로 조금씩 체계를 잡아가고 있다. 회원이 50명 남짓이다. 운영진 다섯 명이 격주로 모여서 회의를 하고 사업을 논의한다.

 

가장 중시하는 것은 기록화 사업이다. 피해자들이 자기 언어를 갖고 세상과 소통하는 길을 모색한다. 또 가죽공예, 타로상담, 미술치료 등 각자 회복에 도움이 됐던 강좌를 개설하는 치유회복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생존자의 작품 전시회 등도 계획한다. 책 읽고 글 쓰는 모임도 꼭 꾸리려 한다. 읽으면 똑똑해지고 쓰면 자유로워지고 말하면 당당해진다는 것을 먼저 깨친 자의 욕심이다.

 

누구도 성폭력을 찬성하는 사람은 없는데 성폭력 피해는 왜 이리도 많이 발생하는가. 너울은 말한다. 성폭력을 반대하기는 쉽지만 무엇이 성폭력인지 알기는 그만큼 어렵다. 선뜻 나서서 알려 하지 않는다. 여성들조차 자신이 성폭력 피해 가능성을 거의 상상하지 않고 산다. 어쩌면 소설 <침묵의 미래>에 나오는 소수언어박물관의 설정처럼, 성폭력 생존자가 대상화되고 한갓 소재주의로 전시되었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당사자가 직접 증언하고 같이 말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너울은 소설 속 노인이 그리워했던 의 언어들, 이를테면 혼자 하는 말이 아닌 둘이 하는 말, 셋이 하면 더 좋고, 다섯이 하면 훨씬 난 말, 시끄럽고 쓸데없는 말, 유혹하고, 속이고, 농담하고, 화내고, 다독이고, 비난하고, 변명하며, 호소하는 말들을 원 없이 부릴 것이다. 말의 물살은 또 다른 말의 잔물결을 낳겠지. 아마도 성폭력 생존자의 언어가 거리낌 없이 오가는 날 성폭력이라는 몹쓸 단어는 스스로 소멸할 것이다. ‘큰 피해를 입히고 사라져가는 파도라는 뜻의 너울성 파도처럼.

 

 

 

* <나들> 2014년 2월호 '내 몸, 파르헤시아' 연재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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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 - 잔인한 나의, 홈

[행복한인터뷰]

돌고래는 친족 성폭력 다큐멘터리 <잔인한 나의, >(감독 아오리) 주인공이다. 피해 여성 당사자로서 두 해에 걸친 법정 공방을 좇는 카메라에 민얼굴로, 목소리로, 일상으로 등장한다. 아버지는 7년형을 선고받지만 이 영화는 아버지를 거대한 악으로 다루지 않는다. 제목의 암시대로 한국 사회의 도구적 가족주의의 실상을 드러내고, 자기 몸의 기억과 싸우는 작고 용감한 한 여성의 성장에 주목한다. 7살 때부터 원하지 않는 것을 당해야 하고 바라지 않는 것을 겪어야 했던 맏딸이 자신이 경험한 진실을 또박또박 말하고 부단히 흔들리면서도 삶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돌고래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당함에서 행함으로. 이 고난도 존재 이행의 드라마를 선보인 돌고래가 나는 몹시도 궁금했다. ‘진실 말하기’(파르헤시아·Parrh?sia)에 따르는 치욕, 불안, 고립, 파탄을 감당하면서도 집을 나와 지내니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하는 표정에는 거짓이 없었다. 원한의 힘이 아닌 진실의 힘으로, 세상을 향해 존재를 개방하는 이 신기한 생명체는 누구인가. 두 차례 인터뷰가 성사됐다. 까르르 웃어넘기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명랑함으로, 때로는 죽음과 존재의 허무를 아는 것 같은 종교적 차분함으로, 재능에 가까운 솔직함으로, 돌고래는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난 싫다고 말해요

말을 할까 말까 결정하는 게 힘들었어요.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는 게 자연스럽고, 포장하는 게 부자연스러운 거 같거든요. 숨기는 건 힘을 거꾸로 쓰는 거고. 그래서 힘들고. 그 억압하는 힘을 빼면 솔직한 말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그걸 알면서도 진실을 말하기가 두려웠어요. 이 사회의 진행 과정의 목표랄까, 결과적으로는 진실이 드러나는 쪽으로 간다고 생각해요. 진실이 알려지는 게 자연의 흐름이다. 제가 바라는 것이면서도 그렇게 믿는 것이기도 해요.”

돌고래는 스물다섯이다. 다큐멘터리도 찍고 인터뷰도 하고 자신이 드러나는 걸 받아들이고 환영한다고 했다. 보호의 논리로 침묵을 요구받던 시기를 보내고 자연의 이치로 말하기를 택한 것이다.

돌고래가 친부 성폭력 피해 생존자로 세상에 나온 것은 3년 전이다. 시작은 이랬다.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어떤 책을 보게 된다. <난 싫다고 말해요>. 제목에 꽂혔다. 나는 싫다고 말해요? 그것은 돌고래가 외치고 싶었으나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던 그 말이었을까. 어린이를 위한 성폭력 예방 그림책이었다. 책장을 넘겼다. 단순한 의문, 단순한 비교였다. 그 책에 나오는 가족은 엄마·아빠가 자식을 보호해주는 사람인데, 나는 왜 엄마·아빠가 괴롭히는 사람이지. 책에서 부모는 아이에게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다, 다친 데 없느냐고 묻는데, 나는 왜 솔직하게 말하면 혼나고, 다친 데는 없느냐고 묻는 사람이 없을까. 돌고래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왜 나는 괴롭히는 사람이 부모야?’

책 맨 뒷장에 성폭력 관련 기관 연락처가 나와 있었다. 돌고래는 아동·청소년 성폭력 전담센터인 해바라기아동센터에 전화했다. 상담사는 근처의 지역 성폭력상담소로 연계해주었고 상담이 진행됐다. 소장이 엄마를 보자고 했다. 면담에서는 별말이 없던 엄마가 상담소 밖으로 나오더니 말했다. 동생들 교육비를 내야 하는데 너에게 계획이 있냐. 아빠가 그런 사람이라는 게 밝혀지면 동생들 혼삿길은 어떻게 할 거냐. 돌고래는 엄청 화가 나서 말했다. 나는 엄마 딸이 아니냐고.

니체는 우연을 유서 깊은 귀족이라고 했다. 때로 우연은 삶을 예속 상태에서 구제하고 고귀하게 만들어준다. 돌고래는 우연히그 책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어디에 말해야 할지 몰랐다. 아빠의 이런 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경찰은 아빠가 다 아는 사람인데 네가 전화해서 뭘 어쩌려고, 너랑 나 사이에 있던 일은 무덤까지 비밀이다, 엄마는 나약한 사람이니까 이 일을 알면 슬퍼할 거다, 네가 얘기하면 가족의 행복이 깨진다, 같은 말들이 돌고래의 입을 다물게 했다. 건강한지 보는 거라며 아빠가 몸을 만지기 시작한 7살부터 집을 뛰쳐나온 그날까지.

“21살 때 만난 남자친구가 있어요. 내가 좋아하고 끌리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니까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사귀는 중에 결혼하고 싶다는 맘이 들었어요. 근데 아빠와 저 사이에 있던 일을 숨기고 있다는 죄책감에 너무 괴로웠어요. 솔직해지고 싶어서 얘기했고 그게 남한테 처음 말한 거예요. 남자친구가 생기면서 아빠가 오는 걸 막게 되고 집안이 싸늘해지고 용돈을 깎거나 하고. 더 집을 나오게 되었죠.”

 

세 가지를 놓다

 

20101월부터 지역상담소에서 머물며 상담과 고소를 진행했다. 피해 경험을 말하기 시작하면서 돌고래는 세 가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했다. 첫째, 이거 말하면 친구가 없을 수도 있다. 그래도 얘기하고 싶은가. 둘째, 결혼을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얘기하고 싶은가. 셋째, 직업을 구하기 힘들 수 있다. 고용자들이 내 경험을 알게 되면 일을 잘 못할 거라 생각해서 뽑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얘기하고 싶은가.

친구, 결혼, . 이 세 가지를 잃게 되더라도 지금 살고 싶었어요. 이 말을 안 하면 죽을 것 같았어요. 그래 어쩔 수 없다. 될 대로 돼라. 그래서 말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내 주위를 봤을 땐, 친구도 애인도 생계를 위한 일자리도 있었어요. 저한테 이렇게 말했죠. , 막연한 걱정이었나보다. 얘기하기 잘했다!”

지역상담소에서 머무는 동안 돌고래는 세상을 기웃거린다. 영어 홈스쿨링 강사, 과외 등으로 직접 돈을 벌었다. 외교관이 꿈이던 돌고래는 서울의 한 대학에서 열리는 정치포럼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의 지식과 언어에 반한 돌고래는 더 넓은 세상에서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휴학 중이던 대학을 자퇴하고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놈에게 복수하는 법>(감독 최미경)이라는 단편영화를 보았다. 감독과의 대화에서 감독이 말했다. 다음 작품으로 친족 성폭력을 다루고 싶은데 자신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고. 그 순간 돌고래의 마음에서 나는 괜찮아라는 말이 올라왔다. 감독에게 다가가 영화를 찍고 싶다고 말하고 연락처를 나눴다. 한 달이 지나도록 감독에게 연락이 오지 않자 돌고래는 먼저 전화를 걸었다. 영화는 언제부터 찍느냐고.

<잔인한 나의, > 촬영이 시작됐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순간 돌고래는 자신이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때그때 하고 싶은 말을 했다. 틈틈이 고민했다. 내가 이걸 왜 찍고 있지, 뭘 위해서 찍고 있지, 이 다큐멘터리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런저런 감정이 밀려오고 생각에서 생각으로 돌아눕길 반복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마냥 걱정만 하고 있더라고요. 그 순간을 알아채고 질문을 바꿨죠. 나는 이 영화가 어떤 의미였으면 좋겠나. 이 영화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는지 물으면서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있었어요. 이 영화가 엄마·아빠를 욕하고 싶어서 만든 게 아니다, 같이 욕해달라고 말하고 싶어서 찍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다.”

다큐멘터리를 통한 존재 개방의 시도는 자기 인식의 방편이기도 했다. 돌고래는 말했다. “내가 경험한 일이기 때문에 피해가고 싶지도 않고 못 본 척하고 싶지도 않다. 영화를 찍으면서 더 분명하게 보고 싶었다. 이런 태도는 영화에도 잘 드러난다. 특히 타로카드 점 장면. 아오리 감독은 20대 젊은이의 모습을 찍는다는 식으로 촬영 허가를 얻었다. 그런데 돌고래는 사실대로 말하고 싶다고 주장한다. 선의의 거짓말을 한 감독은 몹시 난처해한다. 두 사람은 친구처럼 옥신각신한다. 결국 타로카드 리더와 마주 앉은 돌고래는 말문을 연다. 저는 성폭력 피해자인데요, 라고. 

카메라가 없어도 얘기했을 거예요. 타로카드 점을 솔직하게 보고 싶었어요. 제 피해 경험을 알리려고 영화를 찍는데 직접적으로 알리는 걸 막는 일이 저한테는 역설적인 거예요.”

 

열림터, 존재 회복의 시간

 

돌고래는 지인의 소개로 한국성폭력상담소 열림터에 들어갔다. 열림터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집을 나와 거주하는 시설이다. 초기에는 누워서 시름시름 앓는 시간을 보냈다. 누가 나를 또 아프게 하지 않을까 막연한 불안과 근심이 서렸다. 시간이 지나자 그곳이 점점 좋아졌다. 가족과 있을 때는 이 지구상에 혼자만 겪는 일 같고, 자신이 유발한 일이라는 자책이 많았고, 그래서 더욱 누구한테도 얘기할 생각을 못했다.

열림터에서 다른 피해 사례를 대하면서 돌고래는 자신의 피해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선을 얻었다. ‘저 사람이 잘못해서 생긴 일이 아니듯 나도 내 잘못이 아니구나느꼈다. 피해 경험자들과 같이 밥 먹고 말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매달 열리는 작은말하기에도 참여했다. 작은말하기는 여성 10명이 모여서 피해 경험을 나누는 자리다.

제 이야기를 처음으로 시작했어요. 좀 지나는 순간 확 열리는 느낌이 들면서 같이 많이 울었어요. 몸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나고. 다 같이 얘기가 시작됐죠. 처음 순간 뭔가 침묵이 흐를 때 답답했는데 제가 먼저 얘기할 수 있었던 게 고맙기도 해요.”

소소한 일상도 즐겼다. 돌고래는 열림터에서 최고 연장자였다. 대부분이 10대이지만 돌고래에게 화장을 해주고 선물도 주었다. 돌고래는 친구들에게 피아노를 연주해주고 가르쳐주기도 했다. 관심과 칭찬의 말을 나누었다. 야외로 놀러 갔을 때 음악을 틀어놓고 개인기인 막춤을 춘 일, 명절에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고 놀이공원에 간 일은 신나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돌고래는 집에서 지낼 때 엄마에게 두 팔 벌려 안기려 했다가 밀침을 당한 적이 있다. 그때 놀란 가슴 때문인지 나는 여자와 잘 지낼 수 없다, 여자는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열림터에서 지내는 동안 여자들과 새로운 경험을 하고 관계가 만들어졌다. 서로의 살아 있음, 서로의 존재 자체가 치유였던 날들. 꽉 채운 2, 고마운 시간을 살았다.

 

잔인한 나의 홈

 

법정 공방도 끝났다. 20101월 경찰 조사가 시작돼 20127월 최종 선고가 났다. 돌고래의 아버지는 1심 무죄판결이 뒤집혀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영화에서 공판이 끝나고 법정을 나온 돌고래는 엄마, 어떡해요라며 오열한다. 복도 바닥에 신발처럼 쓰러져 운다. 재판 승소는 가족 파괴와 다름없다. 엄마는 돌고래에게 네가 아빠를 유혹하지 않았느냐라고 말한 가해자였지만, 재판이 끝나자 남겨진 아내라는 친족 성폭력의 또 다른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이 어찌할 수 없음으로 인한 좌절, 연민, 통한, 설움의 눈물로 뒤범벅된 장면에 대해 변성찬 영화평론가는 가장 슬픈 승리라고 표현했다.

돌고래의 홈(home)은 겉보기에 멀쩡했다. 아버지의 안정된 경제력, 전업주부인 엄마, 세자매로 구성된 가족이다. 맏딸이 침묵의 봉인을 풀면서 균열이 일어났다. 엄마는 그 말을 통째로 묵살했고, 할머니와 동생들은 아버지를 위해 탄원서를 썼다. 등 돌린 가족. 이 상황은 가정이 보살핌과 배려의 공간이 아니라 온갖 갈등과 폭력이 있더라도 서로의 이해관계에 의해 가족이라는 형식을 유지하고 결속하는 도구적 가족주의가 작동하는 공간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돌고래에게 아빠와의 경험은 이미지로 남아 있다. 일주일에 몇 번인지 구체적인 숫자가 아니다. 지역상담소에 처음 가서 진술서를 쓸 때,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어라고 써야 할지 막막했다. 그것은 일상적 기억이면서 외상적 기억이다. 살면서 한 번도 언어로 발화되지 못한 몸의 느낌과 감정과 일들은 돌고래의 것이면서 돌고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 행동이 일어날 때마다 턱턱 막히는 게 반복됐고 말로 해본 적이 없으니까, 단어랑 표현을 찾는 데 오래 걸렸어요. 상담소 선생님이 정히 어려우면 소설 쓰듯이 해보라고 해서 그렇게 썼더니 선생님이 야한 연애소설 같다고 하셨어요. 상담소에 있으면서 계속 쓰고 말하니까 기억이 또렷해지기 시작했어요.”

돌고래에게도 저항의 순간이 있었다. 한번은 아빠한테 말했다. 나 건드리지 마라. 어디 가서 돈 주고 해라. 엄마랑 해라. 그만해라. 21살 때인가도 일대일로 말하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말했다. 아빠는 알았다고,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던 거 같다. 그런데 몇 개월이 지나고 또 방에 들어왔다.

항상 초식동물처럼 주위를 살폈다.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일어날 일은 일어났다. 참 싫은데도 집요하게 구걸하는 걸 버티기가 힘들었다. 아버지의 요구에 따르게 되는 일도 있었다. 너무 어려서 생긴 일이다. 처음엔 아빠가 네가 싫으면 안 할게했고 그 말을 믿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공부도 우정도 엉망이 됐다. 돌고래는 괜찮은 성적으로 외고에 들어갔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머리에 뭐가 꽉 찬 거 같아서학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1 때 친한 친구가 있었다. 잘 지내다가 어느 순간 그 애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해지면 경험을 얘기하고 싶다. 따뜻한 게 필요하고 나누고 싶으니까. 그런데 친구를 멀리했다. 다르다는 것. 저 아이는 깨끗하고 나는 더럽다. 나를 싫어할 거라고 지레 짐작했다. 이성복의 시구대로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한가알지 못한 채 십대가 저물었다.

고소하기 전에는 그랬다. 돌고래는 아빠의 행동에 성폭력이라는 이름을 달고 싶지 않았다. 불편하고 꺼림칙하고 귀찮고 제발 그만했으면 좋을 것 같은 어떤 거였다. 아빠니까, 잘 따지지도 못하고 용서하고 다음에 다가오면 당하고 또 용서했다가 까먹었다가 또 당하고, 그런 반복이었다. 그때는 자신의 경험이 성폭력이라는 생각보다 ‘()관계라는 생각을 더 많이 했다.

고소를 안 했으면 안 끊어졌을 거 같아요. 고소한 걸 후회하는 측면이 있는데. 미안하다고 아빠랑 앉아서 얘기했는데, 법이 아니고 내 힘으로는 어떻게 못해요. 엄마가 말릴 수 있을 거 같지도 않고, 밖에 알려지지 않으면 끝날 수 없었어요.”

 

자유에 이르는 기술

 

돌고래는 현재 서울 용산구 해방촌에 있는 주거공동체 빈집에 산다. 청소와 빨래를 하고 마을 활동을 위한 회의에도 참여한다. 빈집 생활이 재미있지만 어떻게 정착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탈출할까를 문득 생각한다. 남자친구를 사귀어도 계속 살핀다. 이 사람을 언제쯤 떠나야 하나. 돌고래에게는 피하는 것이 스스로를 돌보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간 자신을 살게 해준 그 방어기제에 고마워하고 제사를 지내고 감사 표시도 하고 이제 전쟁이 끝났다고 알려주고 이 순간순간을 보려 한다.

자꾸 과거를 탓하지 말자. 아빠가 감옥에 들어간 뒤에 깨달았어요. 아빠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아빠가 없는데도 힘든 거예요. 나한테 책임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억울했어요. 어느 순간까지는 필요하죠. 그 사람이 잘못했고, 다 그 사람 탓이고, 그 사람만 아니면 이런 일 없었다, 이런 말들. 그런 다음에는 나를 보는 거예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남에게 부탁할 수 있는 일을 떠올리고 실천하기. 계속 나로 돌아오는 것. 남 탓에서 벗어나 내 상처에 스스로 책임지기. 그럴 때 그 사람에게 자유가 오는 거 같아요.”

영화 <잔인한 나의, > 후반부에서 돌고래는 재판 뒤 추석에 집을 찾아가지만 엄마는 전화만 받고 만나주지 않는다. 보호자를 잃은 동생들도 언니를 외면한다. 돌고래는 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가끔 전화를 건다. 엄마가 어떻게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이야기해주지도 않고 묻지도 못하고 있다.

돌고래는 이런 상황이 아프지만 의연하게 받아들인다. 상처를 입히는 행동을 한 사람이나 상처를 입은 사람이나 공동체, 마을, 국가 안에서 둘 다 따뜻하게 받아들여주면 좋겠다고, 건강한 삶을 위해 서로 도울 수 있는 기술이나 인식이 있는 따뜻한 사회에서 살고 싶다고, 그래서 아빠가 나한테 성폭력하기 이전의 아빠와 나의 관계, 엄마와 나의 관계를 되찾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했다.

 

진실 말하기-들어주기

 

돌고래가 재판을 무사히 마치고 다시 신뢰하고 의욕하는 삶을 살기까지 성폭력상담소 같은 사회적 자원의 도움이 컸지만 주변 지지자들의 역할도 절실했다. 몸은 자기 목소리를 내려 하고 고통은 들어주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돌고래는 피해 경험을 터놓아야 하는 상황이 오면 회피하지 않았다. 가령 누군가와 깊이 친해지고 싶을 때, 왜 가족이랑 따로 사는지를 물었을 때, 말한다. 그 사무치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대개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 당황한다. 돌고래가 가장 고맙고 짠한 말은 말해줘서 고맙다” “믿어줘서 고맙다는 말이다.

한 친구가 저에게 묻더라고요. 자기가 엄마·아빠 얘기를 해도 괜찮냐고요. 그래서 말했죠. 너의 아빠 얘기 들을 때 어떤지 알려줄까? 나는 안심된다. 딸이랑 아빠랑 성적인 게 개입되지 않고 부모와 자식으로 지낼 수 있는 것, 그런 세상에 살고 싶기 때문에 든든하고 안심된다고요.”

연애할 때도 늘 혼란스러운 문제다. 돌고래가 피해 경험을 처음 말한 상대는 남자친구다. (그의 증언은 법정에서 결정적 사실로 채택된다.) 그때는 마음이 깊어진 뒤에 말했지만, 이후에는 호감 단계에서 미리 말한다. 이걸 알고도 나랑 함께할 수 있느냐 묻는다. 어떤 친구는 자기에게 너무 큰 일이라며 돌아섰다. “섹스를 하기 전이라서 다행이라며 돌고래는 씨익 웃는다.

한 친구는 마음 아파하면서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고 네가 어떤 슬픔과 고통을 겪었는지 모르겠다, 가늠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말했죠. 굳이 네가 가늠 안 해도 된다. 가늠해서 어쩌려고. (웃음) 내가 느낀 걸 네가 다 느끼게 하고 싶지도 않고 내가 고통스러울 때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했어요.”

 

돌고래 삶이 내는 소리

 

돌고래는 비폭력대화 중재 전문가 과정을 배우고 있다. 엄마·아빠와의 갈등을 크게 경험하다보니 살기 위해서평화를 만드는 기술을 익히는 게 중요했다. 그 외에 칵테일 제조 기술도 배우고 싶고 영화도 찍고 싶다. 이것저것을 시도하고 탐색한다. 과거의 상처로 하고 싶은 일까지 못하면 너무 억울하니까 다 해보고 싶다며 두 눈을 반짝인다. 시시각각 다른 눈빛, 다른 기류다. 쾌활하고 담대하다가 침울하고 잔망스럽다. 해사하게 웃고 짓궂게 굴고 이내 흔들리다 빤히 응시한다. 감정선이 올올이 살아 있다.

느낄 줄 알고, 물을 줄 알고, 말할 줄 아는 그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잔인한 나의 홈을 벗어난 돌고래는 끝없는 생성이 일어나는 힘들의 바다 위에 놓였다. 돌고래는 진실 말하기에 엄청난 힘이 있음을 보여준다. 힘이 있어서 진실을 말한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함으로써 힘을 얻고 인연을 끌어오고 그 수행적 힘으로 살아낸 것이다. 상승과 하강의 몸짓이 만드는 생의 파동, 돌고래의 삶이 내는 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삶에 대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 당신의 권리임을 결코 의심하지 말라.

 

<나들>2014년 1월호에 '내 몸, 파르헤시아'에 실린 연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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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히 - 보사노바뮤지션 '너무 흔한 비밀을 노래하네'

[행복한인터뷰]

[내 몸, 파르헤시아] 보사노바 뮤지션 소히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 방법 방법/ 약간은 낙관적으로 강해질 것/ 남들의 시선을 나에게 대지 말기/ 잘할 수 있는 일들에 열중하기/ 부드럽게 환하게 서로를 지켜보기/ 나보다 세다고 눈감아주지 말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 중

소히 1집 <앵두>(2006)에 수록된 노래다. 직접 가사를 쓰고 곡을 붙였다. 일용할 양식과도 같은 가사에, 흥겨운 보사노바 리듬을 입혀서 청아한 음성으로 부른다. 그해 처음 반팔 셔츠를 꺼내 입은 날 살갗에 떨어지는 노란 햇살처럼 묵은 감각을 깨우는 기분 좋은 노래다. 아니다. 그해 처음 내리는 겨울비가 콧등에 떨어질 때처럼 시큰하기도 하다. 경쾌하거나 애잔하거나. 소히의 노래는 빙긋이 웃게 한다. 이름의 주술적 힘일까. ‘소히’(sorri)는 포르투갈어로 ‘미소짓다’란 뜻. 본명 최소희(昭喜) 역시 웃는다. 기쁘게.

데뷔 이전부터 서울 홍익대 앞 인디신을 중심으로 꾸준히 활동해온 소히는 보사노바 싱어송라이터로 통한다. 어느 뮤지션은 “우리나라에서 소히보다 브라질 음악을 깊게 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했고, 어느 팬은 “완전 동안 보사노바 가수”라고도 했다. 한국 가요와 브라질 음악의 섞임이 돋보이는 2집 <밍글>(Mingle·2010)에 이어 세 번째 앨범 <데이케어>(2013)를 낸 소히는, 어느 인터뷰에서 “보사노바 말고도 하고 싶은 음악이 많다”고 했다.

“이번에 3집 음반은 제가 직접 프로듀싱을 했는데 밝은 음악만 있지 않거든요. 슬프고 우울한 면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1집, 2집 때 보사노바 이미지 때문에 시종일관 미소지어야 하고 샤방샤방해야 했어요. 그걸 벗어나니까 사람들이 무거워졌다고 느끼더라고요.”

기타를 잡은 지 10년. 소히는 외려 자신이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내면의 어둠을 표현할 만큼 비로소 ‘낙관적으로 강해진 것’이다. 워낙 기질이 소심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방 안에 오도카니 놓인 소녀가 음악과 사랑에 빠지게 된 걸까 싶지만 그 반대다. “혼자 있어서 음악을 만난 게 아니라 음악을 만나서, 음악만 듣느라 혼자 있게 됐다”며 웃는다.

 

흑인음악과 보사노바, 사춘기 반려음악

순수한 마음은 상처받기 쉽고/ 커다란 눈은 세상과 싸우고/ 영악하지 않으면 거친 세상에 살기 힘들 거란 생각에/ 모두 초조해지고/ 그리워라/ 따사로운 시선/ 느끼고파/ 연결된 기분/ 느끼고파/ 혼자가 아니란걸 <왈츠> 중

중1 때 <지구촌 영상음악>이라는 TV 프로를 보았다. 흑인음악이 잠깐 나왔는데 그루브한 리듬앤드블루스(R&B) 음악이었다.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듯 넘실대는 흥겨운 리듬에 단박에 사로잡혔고 그때부터 음악을 찾아들었다. 더 어릴 때 김완선의 무대를 보면 가슴이 뛴 적도 있다. 열정 같은 게 느껴졌다고 할까. 기타를 처음 잡은 것은 고3 때다. 록을 좋아하는 사촌언니를 따라 라이브클럽 ‘드럭’에 갔다가 음악 하는 친구들과 가까워지면서 밴드를 하게 됐다. 고등학교 때 한 달 정도 기타를 배우고 그때부터 혼자 연습했다. 소히의 첫 그룹은 슈게이징 록밴드 ‘잠’이다.

“흑인음악은 듣는 건 좋은데 직접 하려면 힘들었어요. 감정을 오버해야 하는데 제가 과하게 표현하는 걸 못 견뎌하는 성격이거든요. 그러다가 스무 살 때 ‘잠’에 들어가서 베이스를 쳤죠. 슈게이징(Shoegazing)이 고개 푹 숙이고 신발만 보고 연주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거든요. 록밴드지만 액션 없이 정적으로 하니까 좋았어요. 성장기의 우울함을 표현할 수 있는 음악이었죠.”

‘내 몸’에 가까운 음악은 따로 있었다. 보사노바가 소히의 귀를 두드렸다. 우연한 계기다. 서점에 갔다가 브라질 가수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의 베스트 앨범을 반값에 팔아서 반가운 마음에 샀고, 들었고, 반했다. 풍부한 리듬에 절제된 감성이 깃든, 그 건조함에 매료됐다. 음악이든 일상이든 감정을 발산하기보다 억누르는 것을 추구했던 소히다. 그 길로 인터넷 보사노바 동호회에 가입했고, 그곳에서 베이시스트를 구한다는 공지가 떠서 오디션을 보고 브라질 음악 밴드를 시작했다.

보사노바(BossaNova)는 포르투갈어로 ‘새로운 경향’이란 뜻이다. 삼바의 복잡한 리듬에 모던재즈 기법을 도입해 세련되고 단순하게 발전시킨 브라질 음악으로, 1960년대 세계적인 유행과 더불어 한 장르로 자리잡았다. 국내에서는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 한영애의 <어느 날>, 조덕배의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 등이 보사노바 장르에 속한다. 브라질 음악으로 앨범 전체를 소화하는 뮤지션은 소히가 유일무이하다.

왜 브라질 음악일까. 음악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음악으로 청춘을 기대고 영혼을 돌보고 앨범을 채운다는 것은 호기심이나 의지를 넘어서서, 존재의 요청이다. 브라질 음악의 어떤 요소가 소히와 부합했는지 묻자 소히는 ‘쇼로’(Choro) 이야기를 꺼낸다.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으면서 음악도 영향을 받았대요. ‘쇼로’라는 전통음악이 있는데 되게 슬프거든요. 원래 아프리카 노예들을 통해서 브라질에 흑인음악이 들어왔으니까 역사적 배경에 따른 특유의 정서도 있겠지만, 쇼로의 영향으로 브라질 음악이 밝지만 슬픔이 있어요. 삼바를 들어봐도 리듬을 잘게 쪼개고 박자가 빠르지만 멜로디는 구슬프거든요. 포르투갈 음악 자체가 슬픔을 깔고 있대요. 쇼로가 ‘운다’라는 뜻이거든요.”

 


‘웃으면서 말하기’ 모방하고 싶다

나나나나 나나나나/ 하고 싶은 말 있어/ 나나나나 나나나나/ 에겐 슬픈 일이 많아/ 나나나나 그래 너처럼/ 모두 내 잘못인 줄 알았어/ 하필이면 왜 나였는지/ 그냥 재수가 없었어/ 나나나나 참 웃긴 건/ 하필 나인 사람 너무 많아 <나나나> 중

울음이 끝난 뒤 하늘 같은 무구한 표정으로, 소히는 아동 친족 성폭력 피해 경험을 얘기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일이 정말 절망이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뭔가 부자연스럽고 정상이 아닌 것 같았고 긴 시간 동안 자신에 대해 긍정하지 못했지만 스스로 괴로워했다기보다 주위의 시선이나 매체에서 다루는 기사로 인해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쉬이 상처받고 자주 위축되는 상황에 처하면서 그 사건을 많이 탓했다.

“아동 성폭력의 괴로움은 우선 내 편이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가족, 친구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죠. 어머니가 알게 됐는데 구체적인 피해 사실까지는 모르고 장난을 쳤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저를 엄청 혼내셨어요. 뭐가 잘못인지도 모르고 혼이 나니까, 잘못했구나 생각했죠. 돌이켜보면 그때 엄마도 당황하신 거 같아요. 나이가 들고 학생이 되고 나서 제가 겪은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내가 한 것도 아닌데 내 잘못이고 그런 게 괴로웠고, 큰 비밀이었어요.”

2007년 8월, 소히는 피해 사실을 남들에게 처음 말했다. 홍대 앞 인디신에서 친하게 지내던 ‘소규모아카시아밴드’ 멤버 송은지의 제안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을 위한 컴필레이션 앨범 <이야기해주세요>에 참여할 때였다. 앨범 제작을 위한 사전 작업으로 정민아·송은지 등의 가수 외에도 글 쓰는 이들까지 6명이 위안부 관련 세미나를 듣고 학습 친목모임을 꾸렸다.

처음 모인 날, 술을 마셨는데 여성주의에 관한 이야기로 흐르면서 ‘나 이런 적 있다’며 성폭력과 성추행 얘기가 나왔다. 그 자리에서 소히도 자연스럽게 말문이 트이듯 말이 나왔다. 피해 사실을 축소시키기는 싫었고 있는 그대로 떨리는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그 뒤로는 성폭력 피해와 관련된 얘기가 나왔을 때 마치 “나는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처럼 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즈음 소히는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싹텄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이란 책을 만났다. 서문을 읽는데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거의 모든 인간의 고통은 ‘말’ 때문에, 즉 지배 규범을 내면화할 때 발생한다는 것, 자신을 다양한 존재로 개방해나가야 한다는 것 등 구절구절이 뭉친 과거를 어루만져주는 느낌이었다. 극렬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누가 한마디만 잘못해도 가만 안 두는. (웃음)”

영화, 음악, 책 등 두루 섭렵했다. 지인의 추천으로 조세영 감독의 성폭력 피해 생존자 다큐멘터리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를 보았다. 스크린에서는 ‘같은 고통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영화에 출연한 이들은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활짝 웃으며 피해 사실을 이야기했다. 침울하지 않은 분위기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항상 울면서 이야기하는 상황이 불편했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여성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좋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소히는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매달 주최하는 성폭력 피해여성 자조모임 ‘작은말하기’ 자리에 나갔다. 

 


 

나를 피해자로 본다면, 그건 애석한 일

내 옆자리에 앉아 내 옆구릴 스치는 느물거리는 손/ 심증의 손/ 편하단 말에 존중은 없고/ 존중한단 말에 진심이 없는/ 아/ 가녀린 내 마음/ 오해가 될까 착각이 될까/ 억울해할 테지만/ 난 말할 거야 <심증> 중

진실 말하기, 이후 실존의 변형이 일어났다. 탈소심. 자기억압에서 조금씩 놓여났다. 무대도 확장됐다. 소히의 음악이 공감할 수 있는 품이 넓어졌다. 여성단체나 반성폭력운동 진영과의 인연으로 크고 작은 행사에 초대됐다. 성폭력 생존자의 증언 기록인 은수연의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북콘서트에서 축하 공연을 했고, 전국성폭력상담소가 주최한 성폭력 피해자 글쓰기 워크숍 문집 발간 북콘서트에도 출연했다. 노래가 끝난 뒤 기타의 여음 속에서 소히는 나지막이 말했다. 저도 아동 성폭력 피해자인데요, 라고.

“제 피해 사실이 알려져서인지 관련 행사에 자주 부르시더라고요. 고맙게 가죠. 페이를 주니까. (웃음) 불러주지 않으면 제가 일일이 찾아다녀야 하는데 가서 얘기도 듣고 노래도 하고. 피해여성들이 자기 경험을 말하는 그 힘이 느껴져서 좋아요. 그런 자리가 비공개잖아요. 근데도 갈 때마다 느끼는 게 ‘이렇게 피해자가 많구나, 여전히 많구나’예요.”

타인의 아픔이 눈에 든다. 받은 것을 돌려줄 차례다. 과거의 자신처럼 끙끙 앓고 있는 피해여성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나도 그런 역할을 하고 싶다”. 그런데 그게, 횃불 같은 선구자가 되겠다는 것도 아닌데 막상 현실에 직면하면 이것저것 걸린다. 자기개방과 자기보호라는 상치된 두 욕망 사이에서 적어도 하룻밤은 뒤척인다. (소히에게 인터뷰를 제의했을 때 하루만 더 고민해보고 다음날 답변을 주겠다고 했다.)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이, 그것도 여성이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했을 때 예상되는 반응은 피해자로서의 낙인이다. 대개는 폭력을 폭력으로 보지 않고 성적 이슈로 본다.

이런 관습적 해석의 또 다른 폭력은 오롯이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 된다. 그렇게 개인의 고통은 사회적 의미망에서 생겨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폭력 피해를 말 못할 사연, 큰 비밀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건 사실 (피해자가) 말을 안 하기 때문인 거 같기도 해요. 음, 말을 했을 때 누가 나를 이상하게 섹슈얼하게 본다면 그건 그 사람이 미친놈이지 내가 그런 사람까지 고려해야 할 이유는 없는 거예요. 사실 저는 가진 게 없어요. (웃음) 제가 좋아서 음악을 하는 거니까 잃을 게 별로 없죠. 만약 누군가가 거부감을 갖는다면 애석한 일이겠죠. 여전히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그렇다는 게 애석하겠지만 그것까지 제 힘으로 바꾸려는 건 지나친 욕심 같아요.”

서정주의 유명한 시구대로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뉘우치지 않을란다’ 하는 자세가 때로는 필요한 법. 소히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강함이 생기는데 더 강해지기 전에 얘기하고 싶다고, 더 강해지고 나서 얘기하면 의미 없을 거라고 했다. 소히의 진실 말하기는 확신과 의지가 아니라 불안과 긴장의 힘에서 매번 시도되는 것이다.

 

인디뮤지션의 밥벌이, 그리고 108배

마치 높은 성처럼/ 쌓인 관념을 깨뜨리는/ 모두 다 딱 쿵 짝/ 들어맞진 않아도/ 너의 모습들이 참 좋아/ 남의 고통 느끼는 상상력이 좋아/ 힘 빠르기 자랑 안 하는 네 기타가 좋아 <좋아> 중

소히는 우울한 손가락을 가졌다. 희고 가늘고 기다랗다. 아슬아슬하지만 정확하고 날렵하게 기타 줄을 탄다. 의사표현도 그러하다. 물속의 수초처럼 부드럽고 촉촉한 어조인데 모호하게 말하는 법 없이 선명하게 전달한다. 말간 표정은 정지된 듯 섬세하게 변화하는 감정의 결을 활발하게 실어 나른다. 그 서정적인 손가락과 담대한 말하기와 갸우뚱한 감정선의 합작품으로 소히만의 고유한 노랫말이 나온다. 세 장의 앨범에 가사를 거의 직접 썼다.

이번 3집 앨범을 보면, <왈츠>는 상처를 잘 받는 작은 마음이 들어가 있고, <심증>은 성추행을 당할 때 큰소리 내지 못했던 억울한 상황을 표현했다. <투명인간>은 장기 투쟁에도 불구하고 사 쪽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떡볶이 식사>는 노점에서 1500원짜리 밀가루 떡볶이로 한 끼를 때우면서 드는 상념이 부의 불공정한 분배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나아간다. 이런 이야기들은 평소에 조금씩 메모해놓은 생각, 감정을 관찰하고 일상의 경험에서 모티브를 얻어 쓴 것이다.

뮤지션이고 노동자인 소히의 일상은 다채롭다. 20대부터 꾸준히 일했다. 방과후 선생님, 회사 경리직, 서빙 아르바이트 등 다양한 전직을 거쳤다. 현재는 “웹디자이너는 아니고 웹디자인 일을 한다”. 음악을 다루는 툴과 원리가 비슷해 어렵지 않게 배웠다고 한다. 주 5일 하루 5시간씩 생활비를 벌기 위한 최소한의 노동을 한다. 음악 하는 사람이 다른 일을 하는 게 약점일 수 있다고들 하지만, 소히는 오히려 더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악으로 못 먹고산다는 걸 방증하니까요. 현재 음악판이 그렇다는 걸 숨길 이유가 없는 거 같아요. 음악은 다 스트리밍으로 듣고. 스트리밍 해봤자 1원, 2원 들어오나요. 공연이나 해야지 수익이 나는데 기회가 많지 않아요. 아이돌이나 주류 가수가 아니면 신보가 나와도 음악 사이트 메인에 안 뜨거든요. 결국 버는 사람만 계속 벌고, 똑같은 시스템이 공연에도 적용되는 거죠.”

소히의 3집 앨범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13 앨범제작 지원사업’ 선정작이다. 금전적인 큰 어려움은 덜었다. 1년간 작업한 곡들을 장필순·고찬용 등이 소속된 뮤직레이블 ‘푸른곰팡이’에 보내서 앨범을 발매하는 등 좋은 동료와 작업하는 행운도 얻었다. 소히 3집 앨범은 이전의 브라질 음악에 대한 경쾌한 해석이나 소녀적 감수성에서 나아가 종교적 색채와 재즈적 분위기가 덧입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에 대해 본인의 해석은 좀 다르다. 대략의 곡 작업을 기타로 했고 리듬이 부각된 흑인포크 성향으로 이동했다며 이전 앨범보다 더 리드미컬한 앨범이라고 말한다.

소히는 요즘 불교에 관심이 생겼다. 종교적 접근이라기보다 성찰적 계기 정도다. 틈틈이 108배를 하는데, 목탁을 쳐주는 ‘108배 애플리케이션’을 틀어놓고 나의 하루는 어땠는지 돌아본다. 기도는 존엄을 잃지 않고 고통을 참기 위한 수단이라고 했던가. 스마트폰을 앞에 두고 몸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온갖 잡다한 생각을 정리한다. 앞으로 어떻게 할까, 어제 그런 일을 하면서 왜 그랬지 등등. 아무려나, 백팔번뇌의 팔 할은 음악이다.

“제 목적을 망각할 때가 많아요. 하고 싶은 음악을 하려고 3집 앨범을 낸 건데, 좋은 반응이 없다고 상처를 받아요. 남들의 평가보다는 제 음악적 표현이 중요한데…. 만약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20명 있었는데 지금은 5명이다. 그것 때문에 슬퍼하기보다 5명이라도 있는 게 어디야. 5명도 없다고 치면, 지금까지 음악 하는 게 어디야.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는 거죠.”


성폭력지원센터 만든 가수 ‘메리 제이 블라이즈’처럼

넌 내가 보이지 않나/ 보이는데 못 본 체하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순간/ 왜 우린 투명해져야 하는가/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듯/ 그렇게/ 그렇게/ 안아달라/ 애기하자/ 말하고 싶어/ 우리는 사랑했어/ 사랑을 잊으려고 하는 바보넌/ 투명인간? <투명인간> 중

피오나 애플은 12살 때 당한 성폭력의 기억을 음악으로 승화한 싱어송라이터이자 재즈아티스트다. ‘힙합 솔의 여왕’으로 불리는 메리 J. 블라이즈는 미국 뉴욕의 빈민가 출신으로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성폭력, 약물중독 등 온갖 역경을 딛고 최고의 뮤지션으로 성공한 그녀는 자신의 성장통을 음악에 고스란히 표현한다.

소히에게 특별한 뮤지션들이다. 특히 메리 J. 블라이즈는 음악과 삶에서 두루 존경한다. 그녀는 학대받는 여성들의 교육과 경력 개발 등 성장을 돕는 여성발전지원센터를 설립했다. 피오나 애플은 미디어의 선정주의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카메라 앞에서 늘 솔직한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음악을 통해 자신을 담는 걸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개인 체험에 대한 선정주의적 시각에서 음악을 분리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왔다고 전한다.

이처럼 유명한 외국 가수들이 자신의 성폭력 경험을 기탄없이 말하는 것을 보고 소히는 큰 자극과 위안을 받았다. 피오나 애플은 피해 사실을 가사에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소히 역시 피해 사실 때문에 음악의 움직임이 있었고, 그게 음악의 한 흐름인데 피해 사실을 떨어뜨려놓고 표현하거나 굳이 없었던 일처럼 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이렇게 말했다. “걸작이란 혼자서 외톨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해 동안 일단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생각한 결과이다. 다수의 경험이 하나의 목소리 이면에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도 경험의 사적 소유를 주장할수는 없는 일이다. 소히의 음악에는 피오나 애플과 메리 J. 블라이즈의 애절한 음성이 숨 쉰다. 밝게 웃는 성폭력 피해여성들과 떡볶이 노점상 아주머니와 콜트·콜텍 노동자들과의 경험이 존재한다. 이 사회에서 투명인간으로 살아가지만 소히의 눈에는 보이는 그들과의 공동 창작물이 소히의 음악이다.

흑인음악에서 슈게이징록을 지나 쇼로의 영향을 받은 보사노바까지, 역사적으로 형성된 오랜 슬픔의 지층을 탐사하면서 소히는 어느새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레비나스)이 생겼다. 하고 싶은 음악을 추구하고, 하고 싶은 말을 설파하는 힘이 길러졌다. 슬픔이 슬픔을 구원한 것이다.

“음악을 통해서 제 솔직한 생각과 마음을 알리고 싶어 요. 누구에게나 각자의 슬픔이 있잖아요. 그 슬픔을 저의 슬픔으로 위로하고 싶고, 사람들이 오랫동안 가져왔던 선입견이나 통념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음악을 통해 만들고 싶어요.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치유되는 사람은 저 자신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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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월간지 <나들>에서 '내 몸 파르헤시아' 코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소히가 3번째네요. 파르헤시아는 '진실말하기'라는 뜻으로 성폭력피해여성이 몸의 진실-삶의 얘기를 풀어가는 인터뷰입니다. 인터뷰이 요청에 따라 온라인 공개를 선택합니다. 소히는 공개를 해도 좋다고 해서 싣습니다. -> 본문보기 

* '내 몸 파르헤시아'에 인터뷰를 원하는 분 있으면 메일로 보내주세요. varyeyes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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