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 읽다 - 나의 두 사람

[은유칼럼]

출산을 앞둔 후배에게 선물을 하려고 신생아 용품 매장에 갔다. 손바닥만 한 턱받이부터 팔뚝만 한 배내옷까지 크기가 앙증맞고, 순백색부터 복숭아 색까지 색감마저 보드라워 넋을 잃고 만지작거리는데 저만치에서 통화를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나 혼자 가란 말이야? 평생 한 번인데 하루도 못 빼? (…) 오빠 회사 사람만 그렇겠지. 내 주변엔 교육 안 듣는 사람 없어.” 

만삭의 임신부였다. 아마도 예비 부모 출산교육 프로그램에 남편과 함께 가려는 계획이 어그러진 모양이다. “에휴…”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이를 대하는 태도와 감각이 달라서 남편이 남처럼 느껴졌던 기억이 먹구름처럼 몰려왔다. 무언가에 깊이 절망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누군가를 많이 사랑해서 결혼하고, 사랑하는 그이와 아이를 낳아 많이 절망하고, 청춘이 그렇게 흘러간 것 같다. 

ⓒ어떤책 제공 김달님씨의 대학 졸업식 사진.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날 처음으로 학사모를 써봤다.

첫아이는 예쁘고 두려운 낯선 생명체다. 꼬물꼬물한 발가락에도 수시로 벅찼지만 작은 충격에도 아이가 소멸할까 봐 무서웠던 나는 남편 출근길에 차를 얻어 타고 친정에서 지내다가 오곤 했다. 돌 이후에는 동네의 또래 엄마들에게 주로 의지했다. 같이 유모차를 끌고 산책하고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고 문화센터를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육아는 살림하는 내 몫으로 받아들였기에 괜찮았다. 하지만 유치원 재롱잔치나 참관수업, 입학식이나 졸업식처럼 꼭 함께했으면 하는 자리에 남편이 부재할 땐, 저 만삭의 여인처럼 복받쳐서 따졌다. 서러워 눈물지었다. 

한 아이가 자라는 데는 최소한 두 사람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부모든, 조부모든, 이웃들이든. 아무도 없으면 자기를 둘로 나누어야 한다. 아이를 돌보는 나와, 그런 나를 다독이는 나. <나의 두 사람>을 쓴 김달님에게 두 사람은 할머니, 할아버지다. 사회적 용어로 ‘조손가정’인 셈인데 조부모 품에서 자란 그 아이가 “나는 행복과 불행을 고루 느껴본 평범한 어른으로 자라 있었다”라며 그 고마움을 책으로 기록했다. 

“내가 평범한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내 늙은 부모에게는 평범하지 않은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50의 나이에 다시 시작된 부모의 삶. 두 시간마다 깨는 갓난아기를 제 품에서 키우는 수고로움. 한 아이를 먹고 입히기 위해 되풀이된 돈벌이의 고됨(6쪽).” 

조금 다를 뿐 고개 숙이지 않아도 돼 

<나의 두 사람> 김달님 지음, 어떤책 펴냄

나도 부모에 의해 그렇게 자랐겠고 또 부모가 되어 어떻게 키워냈다. 사람답게, 남들 사는 것처럼 살아보려고 우리는 얼마나 버둥대는가. 그래서 부부가 손잡고 오는 출산교육에 저 홀로 가야 하는 여자는 울컥한다. 비슷한 이유로 친구들의 ‘젊은 부모’가 모여드는 초등학교 졸업식 날 달님이는 초조하다. ‘늙은 부모’인 할머니가 오는 것도 싫고, 오지 않는 것도 싫어 심장이 빨리 뛴다. 그 시절을 살아낸 저자는 “열세 살의 초조한 나에게”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가족의 풍경을 가지고 산다고. 너 역시 조금 다를 뿐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된다고(103쪽).” 

할아버지는 세상을 비추는 사람이 되라며 저자에게 ‘달님’이란 이름을 주었다. 달님은 자신의 성장 스토리를 통해 훌쩍이는 예비 엄마에게, 곧 태어날 아이에게, 그리고 엄마의 부재로 기죽은 아이에게 나직이 말을 건넨다. “화목한 가정이란 누구나 기대하는 실체 없는 이미지에 가까울지 모른다(6쪽)”라고. 앞서 말한 대로 평범하게 살기 위해선 평범하지 않은 노력이 필요한 법이니, 성에 안 차고 서러웠더라도 당신이 크는 동안 “많은 것을 무릅쓰고 온 한 사람이 항상 네 옆에 있었”음을 기억하라고.


*시사인 은유 읽다



고통의 출구를 찾는 방법

[은유칼럼]

강원도 한 고등학교에 초대받았다. 학생들이 6월에 ‘평화’를 주제로 독서 토론을 하는데 내가 쓴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인터뷰집 <폭력과 존엄 사이>를 읽는다며 저자와의 만남을 준비한 것이다. 강연을 앞두고 담당 교사가 ‘아이들이 작가님께 드리는 질문지’를 미리 보내주었다. 이 책을 왜 쓰게 되었는지, 자료 수집은 어떻게 했는지…. 질문지를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다 난 그만 웃음이 터졌다. 

‘억울하게 잡힌 분들의 주소는 어떻게 알았나요?’ 이토록 엉뚱한 질문이라니, 과연 아이들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핵심 질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주소는 개인의 사회적 좌표다. 그 학생은 폭력 상황에 처한 한 사람이 어떻게 공적 발언의 장을 확보해 ‘나 여기 있음’ ‘나 억울함’을 세상에 알렸는지, 그 절차와 경로의 시작점을 묻고 있었다. 그건 국가폭력 피해자 인터뷰집의 기획 의도와도 닿아 있다. 고통의 출구를 찾는 법은 삶의 필수 기술이니까. 

ⓒ시사IN 조남진

나는 아이들을 만나 답변했다. 간첩 누명을 쓴 분들이 억울한 옥살이를 했지만 진실 밝히기를 포기하지 않고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생겼을 때 진상 규명을 신청했다고. 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같은 단체에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고. 그분들이 이런저런 시도를 하면서 남긴 기록과 인연의 고리를 연결해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고. 

며칠 후 나는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를 읽었다. 이주여성들이 직접 쓴 폭력 피해 증언집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몰랐던’ 세상의 이야기다. 아니, 피해 대상만 다를 뿐 익히 ‘알았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간 내가 만난 선주민(한국인) 여성들의 가정폭력, 성폭력 피해 사례와 내용이 일치해 오싹했을 정도다. 특히 캄보디아에서 온 쏙카의 경험은 가정폭력을 넘어 “인신매매와 강제노동”에 가까운데, 그 지옥을 그는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쏙카에게는 쏙카를 위해 통역을 해주고 시어머니를 설득시켜준 사촌언니와 동서가 있었다. 통장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 폭력 신고를 도와준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있었고, 집에서 나왔을 때 쉼터로 연결해준 경찰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도록 도와주는 쉼터가 있다. 고립되어 있는 쏙카를 살려준 것은 세상과의 연결이었다(35쪽).” 

강연에서 아이들에게 당부한 말

한국이주여성인권 센터 지음, 오월의봄 펴냄

당사자 증언에 대해 전문가가 쓴 해설이다. “고립은 피해자에 대한 통제와 지배를 확보하는 과정으로서 가정폭력의 주요한 형태의 하나(31쪽)”라고 한다. 어디 가정폭력뿐일까. 성폭력이나 학교폭력의 경우도 ‘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식으로 피해자를 고립시킨다. 그래서 ‘세상과의 연결’, 즉 내 존재를 남이 알게 하는 것이 피해자에게는 상황을 돌파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아울러 피해자는 어떤 일시적 상태의 명명이지 한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다. <폭력과 존엄 사이>가 그분들이 무자비한 국가폭력에 맞서 어떻게 존엄을 지키고 살아갔는가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처럼, 이주여성들의 생존담도 꼭 그러하다. “피해자의 취약성보다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는데도 문제 해결을 위해 참여하는 이들의 행위성을 강조한다(187쪽).” 

사실 그날 강연에서 아이들에게 당부했다. 살면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니 여러분도 폭력을 당하면 꼭 도움을 주는 기관이나 단체를 찾아가라고. 이런 말을 해야 하는 현실이 착잡했지만,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를 읽고 나니 잘한 거 같다. “폭력이 발생하기 전에 폭력에 대응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건 중요하니까. 


* 시사인 은유 읽다


그녀가 호텔로 간 까닭은

[은유칼럼]

<19호실로 가다>라는 소설이 있다. 영국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도리스 레싱 작품으로 유명하다. 크고 좋은 집, 돈 잘 버는 남편, 귀엽고 기운찬 아들 둘 딸 둘까지. 모든 것이 매끄럽고 흠잡을 데 없이 설계된 가정생활을 누리고 있으나 주인공 수전은 행복하지 않다. 가족을 돌보면서 정작 자신이 사라지는 현실을 자각한다. 다시 “나 자신이 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오롯한 몰입이 가능한 ‘익명의 장소’를 찾던 수전은 호텔로 간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아내가 사라지는 것을 안 남편은? 사설 탐정을 시켜 찾아낸다. 수전은 세상에 의해 발각된다.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나 6시까지 19호실에서 혼자 있다가 간다고 호텔 지배인이 ‘있는 그대로’ 증언했지만 남편은 믿지 않는다. 다른 남자와 있었으리라 추측한다.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자신에게 애인이 있었듯이 당신도 그랬을 거라며 교양과 관용의 제스처를 취한다.

얼마 전 인터넷 포털 화면도 ‘호텔’이란 단어로 어지러웠다. 위계, 위력에 의한 성폭행 혐의를 받고 있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재판에 대해 “김지은 호텔 잡았다”, “본인이 직접 호텔 예약” 등의 제목으로 여러 개의 기사가 났다. 호텔 예약. 이건 수행비서의 업무다. 그러나 이 사건의 맥락에서 저 단어의 조합은 사실판단이 아닌 가치판단을 유도한다. ‘합의에 의한 관계’라는 피고인 주장에 유리한 기사였다.

언론사 사무실에서 저와 같은 제목을 짓느라 말을 고르고 단어를 배치하는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편집기자의 손놀림과 데스크의 표정과 지시하는 입모양은 어땠을까. 성별이 남자든 여자든 가부장제의 통념과 상식에 길들여진 두뇌에서 나온 합작품일 것이다. <19호실로 가다>에서 아내가 겪는 고립과 절망과 소외를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남편이, 배우자의 호텔 출입을 ‘그렇고 그런’ 빤한 일로 자동 반응했던 것처럼 말이다.

사람이 호텔을 가는 이유는 여러가지다. 그런데도 여성의 행위는 일 그 자체로 인식되거나 말 그대로 인정되지 않는다. 김지은은 네 차례 성폭행을 당했다고 미투에서 밝혔다. 이를 두고 처음 폭행을 당했을 때 곧장 사표 내지 않은 게 의심스럽다고들 한다. 반문하고 싶다. 상사에게 언어적·물리적 폭력을 당했다고 해서 그 즉시 사표를 제출하거나 고발하는 직장인이, 저항과 권리를 배우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있을까. 사표는 생존과 직결된 결단이다.

삶은 늘 우리의 경험과 인식을 초과한다. 문학으로 타인의 삶을 상상할 수는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왜 결혼생활 10년이 넘도록 잘 참다가 하필 그날부터 호텔로 갔는지, 기껏 가놓고 왜 그 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 결혼 전 광고회사에서 일한 ‘스마트한 여성’인데 어째서 이혼하지 않고 지리멸렬한 결혼을 이어갔는지, 매사 합리적인 언어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설명 불가능하다. 문학의 언어는 보여준다. 스스로 전개되는 삶을 통해 합리와 이성으로 기획된 세계의 빈틈과 모순을 드러낸다. 그래서 <19호실로 가다>의 첫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로 시작한다.

안희정 성폭행 혐의 사건은 법리적 판단이 내려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끝나도 여성의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그건 성폭행이 계속된다는 말이고, 남성의 언어로 세상을 해석하고 편집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말하기는 계속 실패하리란 뜻이다. 그러나 견고한 지배질서의 틈을 뚫고 터져나오는 목소리는 그만큼 질긴 생명력을 갖는다. 삶을 대동하고 나온 목소리는 말하기에 실패할 때마다 정교해진다는 것에서 나는 희망을 본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55231.html?_fr=mt5#csidxb609449c1f5541497dfeac21ffe18f2 

싱크대 앞에서 아담스미스 생각하기

[은유칼럼]

아들이 제대하고 나서 나는 ‘싱크대 앞 체류 시간’이 늘었다. 하루 한 끼 정도 집에서 먹는데 제대로 먹여야 할 것 같은 책임감에 스스로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마트, 유기농 식료품점, 백화점, 동네 슈퍼를 오며 가며 찬거리를 연신 사다 날라도 냉장고는 금세 텅 빈다. 끼니는 뭐든 먹어치우는 괴물인가. 성인 남자 입 하나 느는 게 수저 한 벌 더 놓는 일이 결코 아님을 실감하는 나날이다.

그러면서도 다 큰 아들의 밥을 계속 차려주는 게 옳은가 자책한다. 처음엔 군대에서 고생한 아이가 가여워서 해 먹였다. 당분간이라 여겼다. 그런데 아이가 바로 복학하고 학업에 아르바이트에 친교 활동으로 바빠지면서 난 하숙집 아줌마처럼 시간 맞춰 밥을 대령하고 있다. ‘너도 성인이니까 네 밥은 알아서 챙겨라’ 생각은 하면서도, 미성년자인 딸아이만 해주고 아들은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 내 몸은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앞치마를 두른다.


ⓒ시사IN 윤무영

이런 행동은 너무도 반시대적이다. 이 한 몸 ‘고생’에서 끝나지 않고 가사노동이 여성, 곧 엄마의 할 일로 ‘고착’되는 데 일조하는 것 같아서 그렇다. 물론 안다. 자식한테 밥 안 해주는 게 페미니즘은 아니다. 다만 자기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해도 매번 밥이 나오는 게 당연한 일도 쉬운 일도 아님을 깨칠 기회를 아이에게 주고 싶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건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 등 “상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긴밀한 공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가 매일 저녁 식사가 식탁에 오를 수 있도록 보살폈기 때문(32쪽)”임을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보이지 않는 손’보다 ‘보이지 않는 어머니’를 아는 교양인으로 키우기. 실은 계획이 있었다. 아이들 식사 제공 기한을 스물세 살로 정해놓았다. 그건 내가 어머니의 일방적인 돌봄 속에서 반찬 하나 만들 줄 모르다가 결혼한 나이다. 양심상, 받은 만큼은 돌려주자는 의미로 정했다. 서서히 아들이 스물셋이 되어가니 불안한 것이다. 어제까지 해주던 밥을 과연 오늘부로 안 할 수 있을까. 내가? 갑자기? 어떻게?

한 수강생이 “고맙다”라고 한 이유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희정 옮김, 부키 펴냄

“쌤, 고마워요.” 나와 같이 1년 동안 글쓰기 공부를 한 여성이 다짜고짜 고백한다. 고마운 이유는 이랬다. 처음에는 오후 5시에 수업 마치면 남편 저녁 차리러 가야 해서 가슴이 조마조마했단다. 점점 읽고 쓰면서 여자의 본분이란 사회적 갑옷이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가족 중 한 명은 모든 시간을 무보수 가사노동에 쓰고, 다른 성인 한 명은 모든 시간을 집 밖에서 보수를 받는 노동에 쏟아붓는 것이 과연 이치에 맞는가?(62쪽)” 회의했고, 죄의식에서 벗어났다며 말한다. “이젠 남편 저녁밥을 안 차려줘도 안 미안해요.”

20년간 밥을 하던 사람이 안 하게 된 것은 혁명이다. 그녀의 용기가 내게도 용기를 준다. 나야 일 때문에 집에 없을 때도 많고 가사노동을 남편과 분담하고 있지만, ‘자식 밥걱정’의 족쇄를 풀지 못했다. 강한 모성이라기보다 질긴 습관이다. 이행기를 두고 아들에게 제안해볼까 싶다. 먼저 일주일에 한 끼는 직접 메뉴를 정해서 밥을 차려보라고.

로리아 스타이넘은 페미니즘을 “여성들이 기존의 파이에서 더 큰 조각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파이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정의한다(102쪽). 내게 페미니즘은 ‘밥은 엄마’라는 등식, 아니 무의식을 해체하는 일이다. “무한정한 천연자원을 캐듯, 돌보는 손은 여성의 본능으로부터 항상 얻을 수 있다는 신화(186쪽)”는, 전 세계에서 날마다 자동으로 차려지는 밥상에서부터 만들어진다는 의심을 떨칠 수 없다.



*시사인 은유 읽다

분위기 깨는 자의 선언

[은유칼럼]

스마트폰에 카메라 앱을 깔았다. 셀카를 찍어보니 소문대로 신통했다. 주름 제거, 미백은 기본에 눈동자가 크고 또렷해졌다. 메이크업 기능이 내장된 듯 칙칙한 얼굴이 지중해 햇살 받은 해사한 분위기로 변모했다. 흡족함도 잠시, 곧 도덕 감정이 올라왔다. 이건 속임수이며 나 아닌 거 같다고 했더니 누군가 말했다. 오렌지 과즙 3%만 들어가도 오렌지주스라고 하는데 본래 얼굴 3%만 있으면 자기 얼굴 맞는다고.


나의 죄책감은 더 근원적인 부분에 닿아 있다. 일회용컵 사용을 줄이듯 외모에 대한 언급을 자중하고 싶었다. ‘외모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일주일 살아보기’가 오랜 목표다. 이 슬로건은 2016년도에 여성민우회에서 진행한 캠페인으로 꾸밈 노동을 강요하고 외모중심주의를 부추기는 세태에 맞서는 실천으로 제시됐다.


외모에 대해 말하지 않기는 단 하루도 성공하기 힘들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인사말부터 시작이다. “어쩜 그대로냐~” “살 빠졌다!” 외출을 안 하는 날엔 거울을 보고 혼자 중얼거렸다. 배가 나왔네, 잡티가 생겼네, 라며 제 몸의 감시자를 자처했다. 내 몸은 세월과 경험이 만든 고유한 신체 표현인데도 일단 못마땅하게 본다. 무의식 중에 마른 몸, 희고 갸름한 얼굴이라는 미의 획일적 기준을 잣대 삼아 남을 보고, 남을 보는 눈으로 나도 보는 것이다.


이런 시선의 관습적 경로가 만들어진 역사는 길다. 인간생활의 기본조건을 의식주라고 하는데, 집도 밥도 아닌 옷이 왜 일순위인지 늘 궁금했다. 입성을 중시하는 체면 문화의 반영 같다. 그리고 외모지상주의의 피해는 여성, 노인,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게 쏠린다. 딸들은 연중 다이어트다. 살만 빼면 예쁠 거란 말을 엄마에게서부터 듣고 자란다. 항공사에는 여자 승무원이 못생겼다는 민원도 들어온다고 한다.


일전에는 버스에서 결혼식장 근처 정류장 안내 방송에 이비인후과 광고가 나왔다. “결혼식에서 콧물 흘리는 신부 본 적 있나요? 어서 비염을 치료하세요”라는 내용이었다. 콧물까지 성별로 간섭하는 게 몹시 거슬렸다. 여성의 질병은 개별적 고통에 사회적 비난까지 이중 처벌이 내려진다. 그뿐인가. 뚱뚱한 몸, 뒤틀린 몸, 노쇠한 몸은 곧 추한 몸으로 간주돼 모욕, 배제, 차별에 쉬이 노출된다.


외모 평가는 걱정도 덕담도 아니다. 무비판적 습관이다. 보여지는 것 이면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읽어내고 표현하는 능력이 인간 종 전체적으로 감퇴하고 사라지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는 ‘카메라 앱’도 바람직하지 않은 장난감이다. 셀카 놀이가 ‘기분 전환’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미의 표준화된 각본에 유희하는 사소한 행동이 외모 위계의 ‘의식 고착’에 기여하는지도 모른다.


젊은 여성들 중심의 탈코르셋 운동이 반가운 이유다. 하이힐, 브래지어, 풀 메이크업, 긴 머리가 꾸밈의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것.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아도 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인다. 외모 품평이 아닌 품평 행위 자체에 대한 논의가 오가는 게 훨씬 성숙한 풍경이다.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저자 사라 아메드는 “모욕을 유발하는 농담에 웃지 않을 작정”이라며 “하지 않고 되지 않으려는 자의 선언문”을 썼다. 일명 ‘분위기 깨는 자의 선언’이다. 제목이 딱이다. 개성 있는 몸이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사회문화적 분위기를 형성하려면, 지금의 획일적 분위기가 깨져야 한다. 극소수가 외모-매력 자본을 독점하고, 대다수는 자기 자신을 미달된 몸으로 보는 현상, 순도 97% 얼굴을 왠지 떳떳하지 못하게 여기는 문화는 이상하고 불행하니까.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51279.html?_fr=mt5#csidxa69af279d19f69a86b42a5791ff2f9d

수영장에서 불린 내 이름

[은유칼럼]

“자기가 돈 좀 걷어. 선생님 드리게.” 스승의 날 무렵, 수영장 같은 반 ‘언니’가 명했다. 나밖에 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 울고 싶었다. 내가 다니는 월·수·금 오전 9시 반은 50~60대 여성 서넛, 애가 어려서 수업에 잘 빠지는 젊은 엄마, 20대 젊은 남성으로 구성됐다. 결석 없는 제일 ‘어린’ 회원으로 지목되는 바람에 지난번 설 명절에도 내가 떡값을 걷었다.

고령화 시대라서 농촌에 가면 60대가 ‘청년부장’이고 막내라서 ‘막걸리 셔틀’을 한다더니, 내가 그 짝이 된 심정이었다. 수영장에서 얼굴 보는 사람마다 언제까지 돈을 가져오라고 당부하고, 탈의실에서 머리 말리는 사람 붙들고 돈을 받아내고, 현금이 없다는 사람에게 계좌번호를 찍어주어 입금을 받고, 몽땅 현금으로 챙겨서 돈이 젖지 않도록 비닐로 싸서 강사에게 금일봉을 전달한 바 있다. 그 짓을 또 하라니. 평생 가계부 한 줄 안 쓰고 촌지 한번 안 주었으며 돈 계산에 서툰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수영장에서 난 다른 세계, 다른 몸을 산다. 육지의 상식과 언어가 수중에선 통용되지 않는다. 왜 꼭 나이 적은 사람이 해야 하냐며 연령주의를 비판할 수도, 남자 회원이 걷으라며 성평등을 주장할 수도 없다. 이번에도 추석이랑 설에만 선물을 드리면 안 되냐고 말했다가 “노래교실에서도 스승의 날엔 안 하는 경우가 없다”라는 반박에 입을 닫아야 했다. 수영 강습 50분, 샤워 20분인데 맨몸으로 논쟁하기도 멋쩍거니와 그들만의 관습을 부정할 용기도 없다.

특히 난 ‘수영 약자’다. 시력이 나빠 건너편 강사도 못 알아본다. 샤워장에서 먼저 인사하는 다른 회원을 지나쳐 오해를 사기도 했다. 운동신경 둔하고 폐활량 낮고 겁은 많다. 초급반에서 가장 늦게 자력으로 물에 떴다. 배영, 평영, 접영 등 새로운 영법 자세를 똑같이 배워도 유독 어설프고 우스꽝스럽다. 그럭저럭 써온 몸뚱이가 무력해지는 상황, 남겨지는 사람이자 뒤처지는 몸으로 존재하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었다.

어영부영 10개월이 지났고 수영장 생활에 적응 중이다. 떡값을 일인당 2만원 걷는데 자신은 1만원만 내겠다고 고집을 부리거나 샤워기 하나로 신경전을 벌이고, 레벨과 속도로 자존감을 겨루는 ‘언니’들은, 내게 “팔꿈치 펴라”며 원포인트 레슨을 자청하는 전문가이자 ‘락스 물’을 잔뜩 먹고 꺽꺽거리는 걸 보고 “오늘도 보약 먹었네~”라며 용기와 웃음을 주는 동료들이기도 하다.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60쪽)”을 목도한다. 

수영을 배우며 “이질적인 사람들과 접촉을 통해 스스로를 성숙시켜나갈 기회(166쪽)”를 가진 것 같다. 그간 내가 얼마나 동질 집단에서 안전하게, 혹은 오만하게 살았는지 실감했으니까. 남들이 다 나처럼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알았다. 또한 ‘몸에 힘을 빼라’ 같은 수영 이론을 머리로 아는 것과 몸이 따르는 것의 괴리를 체감하고 나니, 글쓰기 수업에서 내가 말하는 ‘설명하지 말고 보여줘라’ 같은 원칙들이 학인들에겐 얼마나 막막하게 느껴질까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실패까지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230쪽)”는 말을 곱씹어본다.

며칠 전에는 수영장에서 오가며 눈인사만 나눈 한 회원이 말을 걸었다. “언닌 이름이 뭐예요?” 순간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지영이요. 지영….”

내 본명인데 한동안 불러주는 사람이 없던 이름이라 발음조차 낯설었다. 비대해진 ‘은유’ 자아를 비활성화하고, ‘지영’ 자아로 사는 시간을 늘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 시사인 은유 읽다




'좋은 책' 말고 '좋아하는 책'

[은유칼럼]

읽을 만한 책 좀 소개해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는다. 시를 읽고 싶다, 니체를 읽겠다, 독서모임 하겠다며 강연장에서 혹은 이메일로 생면부지의 사람이 물어올 땐 난처하다. 나는 책 소개가 어렵고 두렵다. 어떤 책이 좋았다면 당시 나의 욕망과 필요에 적중했기 때문인데 그 책이 남에게도 만족스러울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그래서 그냥 지금 읽는 책을 말하거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기한테 끌리는 책을 몸소 찾아보는 시도가 독서 행위의 시작이라고 얘기한다. 

출판 관계자들은 독서 인구가 줄어드는 게 스마트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것도 크겠지만, 전반적으로 다른 재밋거리를 누릴 기회가 많은 데 비해 책의 재미에 빠질 기회는 적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추천도서를 선정하는 일방적인 방식도 사람들이 책에서 멀어지게 하는 원인 같다.

누가 추천하는가. 책 단체나 관계자, 학자나 지식인, 행정 관료, 심지어 자본의 증식을 연구하는 대기업 경제연구소가 나선다. 대 학생이 읽어야 할 권장도서, 학년별 도서 목록, CEO 여름휴가 도서 목록, 올해의 책을 발표한다. 추천자의 삶의 조건과 목적은 특수하다. 평생 활자와 친했고, 책 보는 게 직업이거나 일과 중 독서 시간 확보가 가능한, 읽는 훈련이 된 일부 계층의 관점이 반영된 목록이다. 그런 책들이, 책을 거의 안 봤거나 볼 시간이 없고 고된 노동과 학습에 지친 이들의 일상에 지적·정서적 쾌락을 주는 ‘좋은 책’으로 스밀 수 있을까. 추천자와 독자 사이에 ‘공감 격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일전에 지인이 교양 필독서에 단골로 오르는 장 그르니에의 <섬> 독서 실패기를 말한 적 있다. 책이 몸에 밴 애서가였다. 여기저기서 좋다는데 자기만 이해 못하는가 싶어서 위축됐단다. 나도 사놓고 안 읽혀서 못 읽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대학생 추천도서에 꼽히는 책이다. 상징과 비유로 된 문학서이자 철학서로 난도가 높다. “니체를 이해하는 사람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해할 수 있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만으로는 니체를 이해할 수가 없다”라고 역자 해설에도 나온다. 지금은 나의 인생 책이지만 만약 스무 살에 봤다면 조용히 덮었을지도 모른다. 책은 따분하다는 편견을 심화하고 독서 활동을 중단시키면 ‘고전’이 다 무슨 소용일까 싶다. 

고유한 책 취향이 생기기 어려운 이유 

철학자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이렇게 말한다. “선이란 우리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촉진시키는 것이며, 악은 우리의 활동 능력을 감소시키거나 억제시키는 것이다(253쪽).” 상황과 조건을 무시하고 절대명령처럼 주어지는 도덕(moral)을 비판하며 자기 삶의 조건에서 선악을 재정의하고 좋은 마주침을 조직하라고 권한다. 스피노자의 말대로라면, 좋은 책은 읽는 기쁨을 가져오는 책이고, 나쁜 책은 책에 대한 동경을 방해하는 책이다. 

어린이책은 어른들이 고르기 때문에 추천도서 선정 시 전문가의 영향력이 더 크다고 한다. 지난 4월 청소년 참정권 집회에서 만난 한 어린이책 시민단체 활동가는 기성의 권위로 좋은 책과 나쁜 책을 이분법으로 가르는 한, 아이들에게 고유한 책 취향이 생기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좋은 책’이라는 모호한 말 대신 내가 혹은 네가, 선생님이 ‘좋아하는 책’으로 표현이 좀 더 정교해져야 한다는 거다. 십분 동의한다. 경영자가 추천한 책을 노동자가 읽고, 교사가 선택한 책을 학생이 보고, 평론가가 권하는 책을 책 입문자가 산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누가 내게 ‘좋은 책’을 묻는다면 말문이 막히겠지만 ‘좋아하는 책’을 물어오면 기꺼이 말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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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해지는 자리를 잘 아는 사람

[은유칼럼]

각종 언론인 신뢰도 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그와 우연히 찍은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좋아요’가 1000개에 육박하고 부럽다는 유의 댓글이 100개에 달했다. 그를 향한 대중의 신망이 두텁다는 걸 체감했다. 나도 텔레비전 화면으로만 보다가 실물을 접하자 입이 딱 벌어졌다. 흐트러짐 없는 체형, 우윳빛 안색에 짜증 한번 안 낼 것 같은 고고한 입매의 그는 속인들 사이에서 단연 도드라졌다. 자석에 철가루 끌리듯 몸이 따라가는 바람에 사진까지 찍었지만 ‘우상’에 자동 반응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한 사람이 언론인의 상징적 지위를 수십 년 누린다는 것. 당사자의 탁월함은 기본이고 제도적 뒷받침, 꾸준한 기회, 그리고 동료의 헌신이 따라야 가능하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의 앵커 역할 수행에는 서너 명의 작가가 투여된다. 방송작가가 정규직이 아니며 부품처럼 교체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그는 또한 이성애자·중산층·비장애인· 남성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차별이나 배제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 악다구니 부릴 일이 덜한 안전지대에서 살았음을 그의 완벽한 신체-이미지가 증명한다. 남성이라는 스펙, 방송이라는 협업의 결과물이 한 사람으로 수렴되는 부조리한 구조에서 스타 언론인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에 이르면,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영웅이 나오지 않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 다양한 면이 있다. 이러한 선과 악의 복잡다단한 조합은 고정된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 인격은 극히 다양한 속성의 복합체일 뿐만 아니라 그 속성들은 해마다, 심지어 시간마다 달라진다(82쪽).” 그렇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허물과 결핍의 존재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우상이 된다는 건 한 사람이 단순화·고정화· 신화화된다는 뜻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현명하게도 인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그날 그는 용감했다.” 

나는 사진 속의 그를 이렇게 추억하기로 했다. 마이크 앞에서 용감했던 사람, 아니 자신이 가장 용감할 수 있는 자리를 잘 아는 사람으로. 있어야 할 자리를 아는 건 고난도 삶의 기예다. 우리는 뉴스 진행자가 명성을 얻으면 정치판으로 진출하는 경우를 종종 봤다. 언론인이 정치인의 예비자 코스처럼 여겨질 정도다. 자기 업에 대해 실력·자부심·절제를 갖춘 언론계 종사자가 귀하다 보니 그의 신실한 행로가 더 귀감이 되는 것 같다. 

<좋은 산문의 길, 스타일>F. L. 루카스 지음, 이은경 옮김, 메멘토 펴냄

서로가 경쟁자 아닌 경청자 될 때

자신이 용감해지는 자리를 알기.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이것이다. 글을 쓸 때 나는 그나마 용감하다. 글 바깥에선 비겁하고 부산스러운데 글 안에서만은 일관되고 침착하려 애쓴다. 글과 삶의 (불)일치는 내 삶의 영원한 화두다. 잘 존재하는 방법은 어렵고, 글 쓰는 내가 가장 나으니까, 삶에서 그 비중을 늘리는 전략을 일찍이 짰다. 

글쓰기 수업도 그 일환으로 재밌게 하고 있다. 학인들은 매번 말한다. “우리 수업에 ‘좋은 사람들’이 정말 많이 와요.” 그러면 내가 정정한다. 좋은 사람들이 오는 게 아니라 여기서는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는 거라고. 

서로가 경쟁자 아닌 경청자가 될 때, 삶의 결을 섬세하게 살피는 관찰자가 될 때 우린 누구나 괜찮은 사람이 된다. 대인배라도 된 듯한 그 착각이 좋은 글을 쓰게 하는 동력임은 물론이다. “작가란 최상의 순간에 자기 인격의 최상의 측면을 갖고 주로 글을 쓰고 실제로도 그래야 한다(83쪽).” 저마다 삶에 몰입하고 자기 인격의 최상을 만나는 횟수가 잦아지면 우상의 존재도 자연 소멸하지 않을까.


* 시사인 은유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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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편견

[은유칼럼]


성판매 여성 인권단체에서 일하는 친구가 홍보용 소책자를 건넸다. 성판매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로잡는 글이 문답식으로 적혀있다. 무심코 넘기다가 한 페이지에 멈췄다. 사람들은 성판매 여성에게 쉽게 충고한다. 그 일을 그만두고 ‘떳떳한 직업’으로 새 출발 하라고. 하지만 하던 일 관두고 새 직업을 찾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두 번 움찔했다. 한번은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걸 알아차려서, 한번은 비슷한 일을 겪고 있어서였다. 


당시는 금융업에 종사하던 내 배우자가 다른 일을 해보려고 시도했으나 좌절하던 때였다. 업종을 바꾸려는 순간 이전의 경력과 스펙, 몸뚱이가 쓸모없어지는 ‘생산성 제로’ 인간이 되어버린다. 효율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업무 감각을 몸에 익히도록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직 기회가 적고 적응이 어렵다. 결국 나의 배우자도 본래 업종으로 복귀했다. 직업을 바꾸는 일이 개인의 의지만으로 가능한 게 아님에도 유독 성판매 여성들에게는 너도나도 훈계했던 거다.


안다는 건 자기 무지를 아는 것이란 말대로, 소책자의 몇 줄 문장은 내 가치 체계를 흔들어놓았다. 떳떳한 일이란 무엇인지, 좋은 직업은 누가 승인하는지, 왜 그들의 행복은 탈-성매매일 것이라고 당연히 규정했는지 혼란스러웠다. 우연히 ‘성판매 여성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접속했고, 거기서 또 하나의 화두를 만났다. 


성판매 여성은 쉽게 돈 번다는 비난이다. 당사자는 증언한다. 성노동이 “밀폐되고 통제력을 갖기 힘든 상황에서 안전장치 없이 상대방의 요구에 맞춰줘야 하는 중노동”이라고(실제로 2002년 군산 성매매업소의 화재로 열네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반문한다. “쉽게 돈 벌면 왜 안 돼? 우리는 다들 쉽게 돈 벌고 싶어 하잖아요. 그래서 로또를 사고 건물주가 되길 바라고요.”


집필노동자인 내게 사람들은 덕담을 건넨다. ‘이번 책 대박 나세요.’ 가급적 수월하게 돈 벌라는 뜻이다. 쉽게는커녕 정직하게 돈 벌기도 어려운 세상이니 말이라도 넉넉하게 주고받는 것일진대, 같은 말이 특정한 대상에겐 비난의 말로 쓰인다. 이토록 성판매 여성들이 온갖 설교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숨겨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목소리 없는 이들은 납작한 존재로 일반화, 단순화, 타자화된다. 


내가 (두 번 볼 만큼) 좋아하는 영화에서도 성판매 여성은 상징적 폭력을 겪는다.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는 다니엘이 케이티의 성매매업소에 찾아가서 제발 이런 일만은 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이창동의 <버닝>에서 종수는 해미에게 창녀나 아무 남자 앞에서 옷 벗는 거라고 말한다. 젠더 편견과 선악의 잣대가 주저 없이 개입해 영화적 흐름이 깨지는 아쉬운 대목이다.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는 성판매 여성의 글을 묶어낸 책 제목이다. 이 사회에서 말의 지분을 갖지 못했던 당사자의 생생한 외침과 증언은 아프고 날카롭다. “몸 팔아서 쉽게 버는 게 옳으냐”가 아니라 왜 취약한 계층이 성판매로 유입되는지, 왜 누구는 성구매에 척척 지갑을 열고 누구는 성을 판매해야 겨우 ‘생계비’를 마련하는지, 정말 돈 쉽게 버는 사람이 누군지 저자 이소희는 묻는다. 

나도 질문을 바꿔본다. 왜 꼭 어렵게 고생해서 돈을 벌어야 가치 있다고 난 여겼을까. 나 같은 순치된 인간을 길러낸 세력은 누구이며, 그걸로 덕을 본 자들은 누구일까. 나와 상관없어 보이는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자기 삶의 문제인지도 몰랐던 문제가 드러나는 경험은 언제나 신비롭다.


*한겨레 삶의창


글쓰기는 나와 친해지는 일

[은유칼럼]

‘나는 왜 엄마만 미워했을까.’ 글쓰기 수업에 참여한 20대 여성이 써온 글의 제목이다. 맞벌이 부모 밑에서 자랐다. 집은 늘 서늘했다. 친구의 엄마들처럼 집안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고 입시 전형에 같이 머리 맞대주길 바랐기에, 그렇지 않은 엄마를 원망했다. 우연히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를 읽었고 엄마의 입장과 처지에서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됐다. 엄마도 아빠처럼 직장에 다녔는데 집안일, 자식 돌보는 일을 ‘의심 없이’ 엄마의 몫으로 여긴 자신을 반성하는 내용이었다.

 

각각 등장인물의 입장이 잘 드러난 좋은 글이었다. 딸이 느꼈을 서운함도, 엄마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도,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아버지의 가부장적 위치도 이해가 갔다. 악인은 없지만 고통받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구조의 문제에 눈 돌리게 된다. 그 글은 엄마의 노동이, 자식이 성인이 되도록 모를 만큼 공적으로 논의되지 못했음을 상기시켰다.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 자기 관계를 돌아보게 했다. 그는 수업 마지막 날 내게 손편지를 건넸다.

 

“지금까지 제 글이 이상하고 못났던 것은 배움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어요. 필사를 하지 않아서, 단어를 많이 몰라서, 독서량이 부족해서. 그게 아니더라고요. 나를 생각하지 않아서였어요. 나를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의 고독과 외로움이 괴로워서. 그럴 때 늘 찾았던 친구들, 드라마, 영화, 책이 문제였어요. 나 자신과 생각보다 서먹한 사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귀한 깨우침이 담긴 고백이다. 나는 수업과 강연을 진행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 아니 자기-삶을 진득하게 들여다보려 하지 않으려 한다는 걸 자주 느낀다. 그래 본 적이 없어서인 것 같다. 한국에서 입시제도 위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에게 글쓰기란 남에게 평가받는 일이다. 출제자 의도에 부합하는 표준화된 ‘답’을 찾다 보니 자기로부터 멀어지고 남의 사고에 집중하는 연습을 꾸준히 하게 된다.

 

“어떻게 쓰면 ‘좋은 점수를 받을까?’ 하는 것만 신경 씁니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말’과 어떻게 맞닥뜨릴까, 자신의 고유한 문체를 어떻게 발견할까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21쪽)

 

일본의 철학자 우치다 타츠루는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에서 사람들이 글을 쓰는 동기 자체가 망가져 있다고 진단한다. 일본도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 모양이다. 자기 경험과 감정은 뒷전이고 더 많은 지식, 더 인상 깊은 표현만 찾아 전전하니까 글쓰기는 점점 억지스럽고 고역스러운 일이 된다. 오죽하면 자기소개서의 줄임말인 자소서를 ‘자소설’이라고 할까 싶다. 그러나 글쓰기는 창작이나 발명이라기보다 발견에 가깝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글을 쓰는 동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발견합니다. 글을 써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48쪽) “미리 어떤 것을 써야지 생각하고 머릿속에 준비해둔 원고를 ‘프린트아웃’한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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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글쓰기를 시작하는 용기, 그리고 방법은 내 안에 있다. “자기 자신을 단서 삼아 이야기를 밀고 나가기”(32쪽) 그래야 글쓰기에 힘이 붙고 논의가 섬세해지면서 자기 고유한 목소리가 나온다. 엄마에 관한 글쓴이의 고백처럼 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에 무지하고 자기와 서먹하기에, 글을 쓰면서 나를 알아가는 쾌감도 크다. 그렇게 마음을 다 쏟는 태도로 삶을 기록할 때라야 “신체에 닿는 언어”를 낳고 “그런 언어만이 타자에게 전해”(311쪽)진다.

 

일전에 어느 강연에서 한 여성이 물었다. 내가 ‘엄마’에 관한 글을 많이 썼는데 혹시 엄마로서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무엇인지 말해달라는 거다. 애들이 커가는데 워킹맘으로서 고민이 크다고 했다. 육아에 정답은 없다는 전제하에, 나는 그냥 내 경험을 들려주었다. 딱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것만 챙겼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당시 나의 경제적, 시간적, 정신적 상황에 해당하는 거라고 못 박았다.

 

그 질문한 여성이 글을 썼으면 좋겠다고 난 생각했다. 얼마나 멋진 문제 설정인가. 엄마로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정리한다는 건. 이 세상에는 온통 이렇게 키워라, 저렇게 해줘라. 좋은 엄마라면 명심하라는 소위 전문가의 목소리가 공기처럼 떠다니는데, 그것은 한 개인의 구체적인 처지를 감안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화를 내지 말라는 육아 지침은 그 자체로는 온당한 말이지만, 엄마가 왜 아이에게 화를 낼 수밖에 없는지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윤리적인 지침이다. 

 

나도 엄마가 처음이었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누구보다 육아서에 의지했고 도움을 받은 면도 있지만 읽을수록 위축됐던 것도 사실이다. 이상은 고고하고 현실은 남루하니 부족한 엄마라는 자책이 들었다. 외려 육아서를 덮고 엄마 노릇에 대해 정리하고, 좋은 엄마란 무엇인가 글을 쓰면서부터 아이에게 화를 덜 내고 더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뭐 대단한 깨침을 얻어서는 아니다. 글을 쓰는 동안은 자신에게 집중하니까 자동으로 아이에게 무심해질 수 있었던 것뿐이다.

 

‘나는 왜 엄마만 미워했을까’ 글을 쓰는 딸이 어딘가에 있고, 다른 한쪽에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가’ 나만의 육아법을 설계하는 엄마가 있다. 저마다 속상하고 답답할 때마다 한줄 한줄 길어 올린 글쓰기로 자기 언어를 만들어가는 풍경을 그려본다. 그럴 때 존재를 옥죄는 말들이 “인정과 도리에 맞는 언어”로 교체되고 세상이 좀 더 살만해질 거란 믿음이 내겐 있다. “그것은 채점자 앞에 제출한 ‘답안’이 아니라 될수록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기 때문”(303쪽)일 것이다.

 


그동안 ‘은유의 다가오는 것들’을 사랑해주신 <채널예스> 독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