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절판기념회 풍경

[극장옆소극장]


3월 17일 목요일 오후 7시반부터 9시 반까지,

이 책을 좋아하는 분들과 오붓하게 한 자리에 모여서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정면에 두 분이 북앤카페 쿠아레 샘들. 오른쪽 샘이 <옫드걸의 시집> 나왔을 때 

출판기념강연회 기획한 마포서강도서관 사서였는데 그사이 북카페를 만드시고 절판기념낭독회까지 열어주셨어요. 

책의 시작과 끝을 한 사람과 함께 한 드물고 귀한 인연. 



책방에 남은 책 예닐곱권이 그 자리에서 팔림. "친구들한테 선물할래요!"



북앤카페 쿠아레에서 올드걸의 시집 주문한 학인의 인증샷.

이렇게 예쁘게 온다네요. 노트까지 한권 끼워서 준대요. 멋을 아는 분들. 



제주에서 천혜향 농사짓는 학인이 절판기념회에서 먹으라고 

천혜향 한박스 보내주셔서 다같이 먹고 예쁜 비닐에 하나씩 담아가고 그랬네요. 

향기로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절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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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 시집 - 절판기념낭독회

[극장옆소극장]

출판기념회가 아니라 절판기념회도 있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어루만짐과 되돌아봄의 시간을 가지려한다. 

쿠아레 샘이 제안해주셨는데, 재미날 거 같아서 하기로 했다. 한 테이블에 오순도순 모여서 

<올드걸의 시집> 좋아하는 부분 읽고 이야기 나누는 자리, 복 있나니 조촐한 절판기념 낭독회는. 





일시 : 2016년 3월 17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장소 : 북앤카페 쿠아레 (역촌역 1번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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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비 : 1만원 (음료 제공)
참가 인원 : 10명 (입금 선착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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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 방법 : 입금 후 전화 혹은 온라인으로 이름과 연락처를 남겨 주세요.
_전화 070-8880-7870 **** 월요일 휴무입니다.
_온라인 http://goo.gl/forms/7j2XjT2nV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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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위한 시간 - 산드라의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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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 한 마리 커다란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 첫 구절이다. 그레고르 잠자는 벌레가 된 자신에 대한 경악보다 출근 걱정이 앞서는 뼛속까지 노동자다. 그를 대하는 사람들 반응은 제각각이다. 엄마는 기절하고 직장 상사는 기겁하고 아버지는 주먹으로 위협한다. 여동생은 벌레 오빠를 받아들이고 음식을 챙겨준다. 하숙인은 집안에 벌레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임대차 계약 위반이라며 하숙비를 내지 않겠다고 잇속을 차린다.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도 비슷한 설정에서 출발한다. 어느 날 회사에서 전화가 한통 걸려오고 산드라는 자신이 해고자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눈 뜨니 해고자다. 이를 안 산드라는 생계 걱정에 눈물샘이 터진다. 당연히 주변 사람과의 관계가 재편된다. 남편은 극진히 보필하고 몇몇 동료는 같이 웃고 울고 또 다른 친했던 동료는 싸늘하게 등 돌린다.

 

사람에서 벌레로 혹은 정규직에서 해고자로. 두 가지 경우 모두 생계가 위태로워진다는 점에서. 즉 인간의 지위를 박탈당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또 변신 ‘이유’보다 변신 ‘이후’ 전개 상황을 비중 있게 다룬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21세기 판 <변신>으로도 읽힌다.

 

영화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산드라는 우울증으로 병가를 낸 노동자다. 한 사람쯤 빠져도 공장은 잘도 돌아가는 법. 이를 놓칠 리 없다. 사장은 산드라의 복직과 상여금 중 양자택일을 제안하고 남은 직원들은 상여금을 택한다. 이 과정이 공정치 못했음을 전해들은 산드라는 재투표의 기회를 얻어내고 ‘두 번의 낮과 한 번의 밤’(영화의 원제) 동안 동료의 집을 찾아다닌다. 복직에 투표해달라며 바짝 마른 입술을 뗀다. ‘결과적으로’ 돈 대신 나를 택해달라는 요청인 셈인데, 이 과정이 담력 훈련처럼 혹독하다. 산드라는 자기가 동정을 구걸하는 거지가 된 거 같다며 주저앉고 남편은 옆에서 일으키고 독려하며 ‘완주’를 돕는다.

 

내내 속상했다. 심약한 아내한테 왜 저리도 고난의 행군을 고집하는지. 애초에 이런 몹쓸 구도를 짠 사장에게 항의하는 사람이, 남편 포함 동료는 왜 아무도 없는지. 산드라를 복직시키고 상여금도 달라! 회사 정문에서 일인시위라도 했으면 후련했을 게 아닌가…. 물론 그랬으면 <내일을 위한 시간>은 이토록 울림 있는 영화가 되지 못했을 거다. 만약 <변신>이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기 위한 분투기라면 고전이 되었을까.

 

상실은 삶의 근본 속성이다. 허물고 앗아간다. 되돌릴 수 없다. 그러니 우리가 사유해야할 것은 소설과 영화가 말해주듯 변신 이후, 해고 이후, 그러니까 상실 이후 달라지는 것들에 대한 받아들임, 성찰적인 태도, 살아가는 용기다. 수락하지만 투항하지 않는 것.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가 되고나서 ‘이렇게도 힘든 직업을 택하다니’ 라며 이전 직장생활을 낯설게 바라보듯, 산드라도 해고된 이후 일과 사람 관계에 대한 다른 관점을 얻는다.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선’(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중) 그녀. 산드라의 변신이 반갑고 뭉클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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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 - 망각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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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초에 별꼴카페에서 개최했던 사진전 <사람을 보라> 끝나는 날. 한금선, 노순택 작가님이 와서 사진  떼는 일을 했다.

연구실 안쪽에서 회의하고 있어서 처음에 두 분이 온 줄도 몰랐었는데, 나와보니 이미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내가 말했다. 우리나라 다큐멘터리사진계의 기둥들;;께서 이렇게 허드렛일을 직접 하시느냐고. 겉으로는 그리 말했지만 내심은 존경모드였다. 이름난 작가가 작품만 '민중속으로'이고 일상은 민중밖으로인 경우도 많다. 사진 등 도제식으로 이뤄지는 업계에서는 일상의 착취가 만연하다. 그러지 않는 분들을 보면 그래서 더 믿음이 간다. 더군다나 다큐멘터리사진은 현실에 발딛은 곳, 낮은 세상을 기록하는 것이기에 낮은 자세가 더욱 요청되는 분야가 아닌가. 작품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 그. 노순택 작가를 지난 토요일 쌍차희망걷기대회에서 마주쳤다. 제주 강정마을에서 작업중이었는데 주민들과 상경한 모양이다. 간단한 안부를 나누다가 광주 관련 사진전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다음날, 사진전을 찾았다. 걷기대회의 여파로 욱신거리는 두 다리를 끌고 경복궁 왼편 담길따라 올라갔다. 민속박물관 매표소 건너편 '학고재' 갤러리. 날렵한 처마 위로 드러난 시원한 하늘, 초여름 신록과 바람이 만들어낸 그늘에 앉아 진미샘을 기다렸다. 진미샘이랑 시네마메이트인데 글쓰기수업하는 동안 영화를 한 편도 못 봤고 밀린 수다도 산더미다. 그날 일정이 맞아서 같이 보기로했다. 한 사람을 기다리며, 사진전을 기다리며 광주를 생각했다. 나에게 광주는 마음의 고향. 엄마의 고향이면서 내 절친들의 고향이면서 민주화의 고향. 생각하면 마냥 좋고 문득 아픈 곳. 광주를 어떻게 사진으로 담았을까는 중요치 않다. 예술은 재현이 아니다. 해석이다. 노순택 작가는 광주를 통해서 어떤 의미와 물음을 만들었을까.    

 

 

제목이 망각기계. 망월동이다. 구묘역이다. 예상치 못한 일. 입구에 비치된 전시안내문을 한달음에 읽어내려갔다. 한 아저씨의 이야기가 적혀있다.

 

"이거 좀 너무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세요? 신묘역을 저렇게 삐까번쩍 다듬어 놨으니, 여기는 또 이렇게 방치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남자는 새묘역에 들렀다 오는 길이라 했다. 거기 가니 마음이 편치 않아 옛묘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했다. 여기 오니 한결 마음이 편한데, 그와 동시에 속이 상한다고 말했다. 이곳이야말로 더 소중한 '성지'라고, 518정신은 바로 이곳 묘역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곳을 이렇게 폐허처럼 방치할 수있느냐는 게 그가 품은 의문이었다.

 

그게 언제인지. 십년도 전이다. 광주에 놀러갔다가 친구 안내로 신묘역에 가보고는 다시는 망월동에 가지 않았다. 저건 518을, 망자를 기억하려고 만든 기념관이 아니다. 매끈한 대리석 바닥, 지문 자국하나 없는 액자들, 죽음과 눈물과 한숨과 회한이 섞이지 않은 저것들을 보면서 도대체 무엇을 기억한단 말인가. 기억하면서 은폐하는 방식으로 고통담론을 소비하는 기념관의 기만에 몹시도 불쾌했다. 나의 광주는 허름하고 처절하다. 입구에서부터 구슬픈 음악이 흘러나오고 흙길 돌아 무덤에 가면 친구가 남긴 편지가 써있고 소줏잔이 외로이 떨고 있었다. 광주에서 시체가 나뒹굴고 총성이 들리는 것 처럼 피를 끓게 했던 구묘역과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유치하게도 이십대의 나는 구묘역에서 산자로서 소임을 맹세하곤 했다. 그렇게 신묘역을 핑계로 발길을 끊었던 구묘역을 다시 마주했다. 기억하면서 외면했던 그곳이 노순택의 사진으로 나타났다.

 

잔인했던 군사독재도 이젠 끝나고 5월의 영령들도 이제는 명예를 회복했다. 허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광주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한다. 관홧발로 짓이겨진 대추리의 절규는, 살인자 대통령을 기념하겠다는 일해공원의 몰염치는, 외로운 섬 강정의 피눈물은, 흘러간 옛일이 아니다. 우리는 나랏돈으로 죽은 자와 죽인 자를 동시에 기념하는 부조리의 시간에 서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은, 죽은 자의 편에서도 죽인 자의 편에서도 흘러나온다. 망각의 성립은 언제나 공조에서 비롯된다.

 

노순택은 글을 잘 쓴다. 사진처럼 글도 명료하다. 오랜 사유에서 우러났기에 그럴 것이다. 글쓰기 수업할 때 좋은 작품의 세 가지 조건. 인식적 가치, 감성적 가치, 미학적 가치를 꼽는다. 좋은 글은 최소한 한 가지라도 충족시켜야한다고 말한다. 노순택의 사진은 세 가지를 충촉한다. 보고 있으면 알게 된다. 보고 있으면 흔들린다. 보고 있으면 매혹된다. 미학적 가치는 단연 독보적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사진전 관련 기사가 '월간 사진'이 아니라 '월간 미술'에 등재된 것은 수긍할만 하다.) 군더더기가 제거된 격정의 이미지. 왜곡과 망각과 시간으로 뒤틀린 얼굴들. 초현실주의 작가의 그림 같은 사진들은 낯설고 처연하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518에 대해 남다른 고통을 느끼는 사진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그곳 다 쓰러져가는 구묘역을 찾아가는 한 사람이 있음에, 왜 타인의 고통은 쉬이 망각되는가를 묻는 한 사람이 존재함에, 나는 감사했다.

 

   

  

 

* 노순택사진전 6월 24일까지. 학고재갤러리 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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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뱅클럽 - 삶의 딜레마를 안고 가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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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읽는다고 인생은 달라지지 않는다
. 삶에 관한 엄청난 유용성 전략들을 담은 가슴 뛰는 잠언들이 살아 숨 쉬지만, 그 말이 현실에서 작동하기는 몹시 힘들고 드물다. 몇 몇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나니 더 혼란스러워진다고 말했을 때 나의 무능을 책망하면서도 조금은 안도했다. 그 혼란스러움이 니체가 준 선물 같다며 잘 읽은 거라고 말해주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동굴과 속세와 바다를 오르고 내리고 다양한 캐릭터를 만나면서 자기 깨달음을 전달한다
. 그 과정이 녹록치가 않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차라투스트라는 실망하고 병들고 회복하고 고뇌하고 방황하고 의심하고 성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길을 떠난다. 이 같은 상승과 하락의 과정에서 자기 확신에 찬 목소리들이 팽팽히 대립한다. 차라투스트라와 동물들, 차라투스트라와 보다 높은 인간들은 같은 듯 다른 얘기를 말하면서 무척이나 헷갈리게 만든다. ‘그래서 니체가 말하고 싶은 게 뭐야...’ 불만스러울 정도로 개념과 가치를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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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아멘> 신적인, 시적인, 선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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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났을 때 가슴이 아렸다. , 신음 같은 감탄사가 터졌다. 심오한 내용을 잘은 이해하지 못해도 아름다운 건 알겠는 기이한 체험. 신이 보이고 삶이 보이고 김기덕이 보인다. 제목이 <아멘>이다. 여주인공이랑 둘이 프랑스에서 만든 로드무비인데 대사가 거의 없다. 글씨 없는 그림책 같은 영화다. 한 시간 반이 전혀 지루하지 않을 만큼 스크린이 회화적이다. 크레딧도 달랑 세 줄. ‘감독 김기덕’ ‘배우 김예나’ ‘촬영 김기덕 김예나그리고 END. 이건 거의 묵언수행이다. 김기덕이 열반에 들었구나, 그렇게 결론내렸다. 아무려나, ()적인 것이 신()적이고 시()적이기까지 하다.


사실 김기덕의 영화를 끝까지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수년 전부터 그의 작품을 보려고 시도하다가 끔찍한 장면에서 그냥 꺼버리곤 했다. 미장센은 지독히도 아름다운데 상상초월 날 것의 장면에 눈 맞추기 힘들었다. 영화가 고행이자 고문이므로, 나는 눈 돌렸다. 그런 내가 변한 건가. 제아무리 영화가 끔찍해도 삶의 냉혹함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 삶의 엄정함을 극단까지 밀고 나가는 김기덕이 새삼 위대해 보인다. 어느 평론가의 지적대로, 창녀가 여대생이 되는 허구적 설정으로 스토리를 치장하지 않는 점이 훨씬 윤리적인 것 같다.

이것은 시를 읽으면서 느낀 변화이기도 하다. 김수영은 삶의 절망을 또렷이 직시한다. 관념적인 언어로 덧칠하며 쉽게 화해하지 않는다. 삶에 가득한 모순과 역설을 끝까지 끙끙 앓으면서 가져가는 것. 그 노력. 그 사랑. 그 눈물겨움. 그것에 뜨겁게 위안 받는다. 언제부턴가 그런다.

다시 김기덕. <아멘>을 보고 나니 존경스럽다. 인생수업을 마치고 다른 층위로 등업한 자의 내공이 느껴진다. 어떻게 저렇게 깊게 군더더기를 제거해버리고 삶의 정수를 담아낼 수 있을까. (나의 짐작이지만 칸느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을 것만 같다.) 나이 들면서 깊이를 더해가는 예술가를 경험하면서, 무엇이 한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가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배신이 아닐까. '배신을 통한 성장' 아직 못 봤는데 <아리랑>에는 김기덕의 품을 떠나서 자본의 품으로 가버린 장훈감독에 대한 실명비판이 나온단다. 살기등등하다는 후문.

몇 년 전, 김기덕이 유명해졌을 때 본 인터뷰가 기억난다. 초년고생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이다. 그림을 잘 그렸고 파리로 떠났다. 거리의 화가로 돈 벌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우리나라 미술계가 학력카르텔이 공고해서 실력을 인정받을 수 없겠다싶어서 방향전환했단다. 시나리오를 썼다. 어떤 공모에서 입상해서 가능성을 확인하고 쓴 다음 작품이 <악어>다. 그 시나리오는 누구를 도저히 주기가 아까워 본인 스스로 감독까지 하게 됐다는 얘기였다. 비주류로 살아가면서 자기만의 작품을 구축했고 세계 3대영화제 상을 받은 유일한 감독인데, 배신사건 이후 폐인 됐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실제로 현재 김기덕의 모습은 봉두난발 흰머리 흩날리는 야인 혹은 도인의 아우라가 물씬했다.

어디 제자의 배신뿐이겠는가. 영화필모그라피와 함께 상처도 첩첩 쌓였을 것이다. 고통을 통한 앎의 증대가 일어났으리라 짐작해본다. 사람에 대한 환멸을 느끼면 기존의 가치관이 다 무너진다. 그 사건을 중심으로 그 사람을 이해하려면 다른 가치와 다른 언어를 발명해서 나의 세계관을 재구성해야 한다. 그 전전긍긍과 암중모색은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 인간적 성숙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황지우도 그랬다. 87년 승리 이후 양김 분열로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고 이에 좌절한 그는 무등산으로 숨어버린다.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 이 늙은 낱말들 앞에 기다리기만 하는' 초조한 삶을 견디며 시를 쓴다. 그렇게 나온 <게눈 속의 연꽃>을 지난 주 시세미나에서 읽었는데, 김기덕의 <아멘>에서 황지우의 선적인 것이 겹친다.

시집의 첫 시가 <>이다.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해서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로 끝난다. 닻이 덫이 되는 삶의 잔인함이 섬뜩하다. <눈보라>에서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이런 구절도 있다. 영화 <아멘>에서도 짐승 같은 바람소리가 줄곧 난다. 무엇보다 황지우의 시적 절정은 <산경>의 마지막 구절이다.

...
그러므로
, 길 가는 이들이여
그대 비록 악惡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약藥과 마음을 얻었으면,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 

황지우가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니까 김기덕이 아멘'이라고 화답하는 것만 같은 시구다. 삶이 배신당하는 장소에서 자기성찰이 싹트고 수작이 태어난다. 황지우가 그렇고 김기덕이 그렇다. '크나큰 사랑으로 사랑하고, 크나큰 경멸로 사랑하라(니체) 했거늘, 예술가의 고통이 대중에게는 기쁨이 되니,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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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방향 - 등 뒤의 화살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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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쓰고 안 만나고 살았다. 조금은 의도적으로 납작 엎드려 지냈다. 이 세상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하루를 살고 나면, 사십대의 황지우가 그랬듯이 하루를 저질렀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그러고 싶을 땐 그래야 한다. 마음에 쏙 드는 나의 개인기. 직감에 민감하다는 것. 잃을 것도 지킬 것도 없는 홑겹 인생인지라 느낌 대로 사는 게 몸에 배인 편이다. 강의 하러, 세미나 하러, 회의 하러 일주일에 세 번 연구실만 댕겼다. 시내를 지날 때는 유혹에 흔들렸다. 시청에서 지하철을 타면서 핸드폰을 꾹 쥐고는 <북촌방향> 유준상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얌전하고 조용하게, 깨끗하게 서울을 통과할 거다.’ 


충무로 방향. 얼굴 안 보고 일을 처리하려고 용건만 간단히메일을 보냈다가 께름칙해서 전화를 넣었다. 충무로에 들렀다. 예전에 셋이 자주 뭉쳤던 그의 후배랑 소주를 기울이고 있었다. 추억의 삼자회동. 나를 위해 남겨두었다는 쭈꾸미불고기 몇 점을 먹었다. 입에서 녹는 맛. 오가는 정담. “누나를 마지막으로 본 게 신촌이야. 돈가스 사줬잖아. 그 집 아직도 있더라. 얼마 전 여자 친구랑 지나가면서 그 때 얘기 했거든...” 기억의 복원. 80년대 명동 경양식집 분위기 물씬한 구닥다리 카페. 정직한 공간구획과 낡은 소파가 좋아서 애연가 친구들과 자주 가던 곳이다. 후배의 얘기를 들으면서 누군가에게 나는 붙박이 장처럼 장소와 함께 기억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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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 - 안개처럼 스미는 사랑의 위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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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는 그대들 뒷모습이여 / 내 어찌 꿈에선들 눈물없이 바라보리’  

조조영화로 <만추>를 보았다. 극장 밖을 나오며 휘청했다. 눈부신 햇살이 부담스러웠다. 헤어진 다음 날처럼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말 그대로 심란하여 고정희 시집을 폈는데 <만추>라는 시가 있었다. 거짓말 같은 우연이 눈앞에 펼쳐졌다. 1991년에 선물 받은 시집이다. 이번 <만추>는 네 번째 리메이크 작품이다. 고정희 시인이 영화 <만추>를 보고 같은 제목으로 시를 지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 시집을 나는 지난 20년 수십 번 보았을 터인데 <만추>라는 시가 이제야 보이다니. 이 극적인 상봉을 위해 침묵했던 것일까.  


7년 째 수감 중인 애나는 어머니의 부고로 3일 간 휴가를 받는다. 장례식에 가기 위해 탄 시애틀 행 버스에서 훈이를 만난다. 돈 받고 애인노릇 하는 남창과 살인죄로 복역 중인 죄수. 두 사람의 하루를 영화에 담았다. 배경은 시애틀, 애나는 탕웨이, 훈이는 현빈이다. 잿빛 안개 낀 도시에 외로운 학처럼 걸어 다니는 두 사람. 탕웨이와 현빈의 눈빛과 시애틀의 안개가 분리되지 않는다. 감독이 일부러 시애틀을 정했단다. 시애틀의 특산물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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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 - 스물셋, 멀리해야 할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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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혜화, 動   엔딩 장면에서 시작해보자. 여자(혜화)가 문을 나선다. 가는 데마다 얼쩡거리는 옛 남자(한수)가 와 있다. 무시한다. 차를 몰고 남자를 지나쳐간다. 백미러로 남자의 전신이 잡힌다. 힐끔 쳐다보는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카메라가 손을 클로즈업한다. 후진기어를 넣는다. 남자를 향해 다가가는 여자. 여신의 미소를 짓는다. 영화가 끝난다. 아마 용서와 화해의 결말 같다. 나는 그 장면에서 후진 기어 넣고 내리 달려서 여자가 남자를 확 쳐버리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이 땅의 ‘지질한 남자’의 비참한 최후를 보고 싶었다.


줄거리는 이렇다. 18살 고등학생 혜화와 한수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혜화가 임신을 하자 한수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5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 앞에 한수가 나타난다. 그는 혜화에게 용서를 구하며, 죽은 줄 알았던 자신들의 아이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과거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혜화는 처음엔 그를 믿지 못하지만, 아이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녀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린다.  

황폐한 혜화,冬  청소년의 연애. 그것은 올바르지 않은 사랑이 아니라 축복을 받지 못하는 관계이다. 재벌가 아들과 천민의 딸의 사랑과 같은 맥락이다. 남근권력의 계급적 이해가 얽혀 있다. 남자 부모의 반대가 극심하고 최종적 피해자는 여자다. 이 영화 역시 그렇다. 산달이 가까워진 혜화는 ‘집안에 임신사실을 말했다’는 남자의 말을 믿고 한수 엄마를 찾아갔다가 “오늘 처음 알았다”며 “원하는 건 다 해드릴 테니 (앞길이 구만리 같은) 우리 한수를 놓아 달라”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는다. 뭐, 아침드라마에 나오는 설정과 흡사하다.  

두 가지 상황이 예측 가능하다. 물리적 나이 18세 한수는 여친의 임신과 출산이 두려워서 집안에 알리지 않았을 수 있고, 얘기했지만 엄마가 무시하고 둘러댔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크게 상관없다. 중요한 점은 한수가 지금-여기의 진실을 회피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문제에 주체적으로 나서지 않아 둘 간의 사랑(아기)을 잃었다. 혜화 혼자서 긴 겨울을 보냈다. 그리곤 5년 후에 나타나 무릎을 꿇고 예의 그 관용구를 울먹인다. “넌 왜 나한테 아무 것도 묻지 않니?” 마치 은폐된 진실이 있기라도 하다는 듯.  

기막힌 혜화, 童  진실은 언제나 표면적이다. 그는 홀연히 떠났고 그녀는 남겨졌다. 그것만이 엄정하다. 남자의 인격적 도량이 거기까지였다. 그걸 인정하기 싫은 한수는 우리 사랑(아기) 살아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혜화의 주위를 맴돈다. 엄마아빠놀이 스위트홈 퍼포먼스의 욕망을 위해 엽기적인 행각을 펼친다. 이 대목은 영화에 장착된 다이너마이트다. 어이상실의 극점. "진짜 미친놈이네"라는 소리가 절로 난다. 여전히 철들지 못한 채 삶의 중심에 가닿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는 꼴이라니.

이 영화 남녀주인공의 처신은, 연애에 대처하는 갑남을녀의 윤리적 태도로 읽어내기에 무리가 없다. 한수는 5년 전 이별 후에도 유학을 가지 않았다. 가출 상태에서 방황하다가 군대에서 사고로 다리를 다친 채 제대했다. 스물셋이나 먹었는데 현실감각 없어 주변에 민폐만 끼치는 존재다. 혜수는 동물병원에서 애완견 미용사로 일하며 유기견을 돌보는 등 훨씬 건강하게 아픔을 극복한다. 연애경험은 대상에 따라 독 혹은 약이 됨을 알 수 있다. 


가혹한 혜화, 同  <혜화,동>은 민용근 감독의 첫 장편이다. 정교하고 영리하다. 잔잔한 톤을 유지하며 극적 긴장을 끝까지 밀고간다. 개인적으로는 치미는 공분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영화적 미덕도 많은 작품이다. 성교육용 영화로 전국 중고등학교에 추천한다. 한줄 교훈은 '청소년 시기에 연애하면 인생 망친다'가 아니라 ‘미성숙한 남자는 인연의 뿌리를 잘라라’이다.  청소년은 결코 미성년, 덜 어른이 아니다. 한수가 청소년이라서 우유부단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는 5년후에도 놀라울만큼 변치않았다. 반면 혜화는 열여덟살부터 줄곧 사려 깊고 의연하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무너진다. 아직 유아기적 언어와 경험을 벗어나지 못한 한수와 단호히 단절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한다. 두 사람은 이전과 같아질 수 없는 인연이다.  

민용근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둘 사이에 상처가 있어도 옆에 같이 있어주는 게 중요한 것 아닌가요…" 맞다. 그런데 중요한 단서가 빠졌다. 한 인간의 숙성 정도를 고려해서 연을 맺어야 한다. 혜화처럼 모성애가 발동하여 미성숙한 남자 곁을 지키다가 피폐한 일생을 산 여자가 얼마나 많은가. 감독은 알고 있다. 여자는 강하고 남자는 약하다는 사실, 그리고 남자는 비겁하고 여자는 미련하다는 점까지. 그러므로 감독은 한수를 홀로 남겨두는 결단을 내렸어야 한다. '어리석음'의 원죄를 가진 남자란 종의 진화를 위해서 말이다. 후진기어는 가혹한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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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러브 - 울기엔 좀 미안한 청각장애인 신파극

[극장옆소극장]

이것은 청각장애인야구단 영화다, 라고 할 때 자동으로 연상되는 감동코드가 있다. <글러브>는 그것을 배반하지 않고 정확히 그려낸다. 재밌고 뭉클하다. 두 시간 반이 지루하지 않게 휙 지나가고 눈물 한 사발 뽑아낸다. 대사발 유려하고 배우들 연기 탄탄하다. 남자주인공 정재영은 진짜 야구 선수 같다.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야구선수다. 근데 영화를 보고 나면 허전하다. 교과서적인 메시지로 꽉 차있어 울림을 주는 여백이 부족하다. 장르적인 전형성을 비켜가지 못해 안타깝다. 어쨌거나 똑 떨어지는 영화란 점에서 이야기꾼 강우석 감독의 우월한 능력은 맞는데, 삶의 이면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그가 ‘장인’은 아닌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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