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의 새 책 - 폭력과 존엄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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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국가인가?”
어느 날 갑자기 간첩이 되었다.
국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간첩이기를’ 강요했다.
그날 이후, 삶은 돌이킬 수 없는 엉터리 소설이 되었다.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 7인, ‘시효 없는 역사’를 말하다


김순자(71) 1979년 강제 연행(징역 5년) → 2013. 11. 14. 무죄 확정
이성희(90) 1974년 강제 연행(징역 16년) → 2014.12. 무죄 확정
박순애(86) 1977년 연행(징역 15년) → 2015. 11. 7. 무죄 확정 
김흥수(80) 1977년 강제 연행(징역 15년) → 2014. 10. 10. 무죄 확정
김평강(76) 1981년 강제 연행(징역 7년) → 2014. 11. 13. 무죄 확정
고 심진구 1986년 강제 연행(징역 2년, 자격정지 2년) → 2013. 7. 11. 무죄 확정
김용태(57) 1984년 강제 연행(징역 13년) → 2014. 6. 26. 무죄 확정

《폭력과 존엄 사이》는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삶을 기록한 인터뷰집이다. 간첩 조작 사건을 통해 국가폭력의 야만성을 조명하는 책이지만, 그보다 피해자들의 삶과 일상의 이야기에 훨씬 더 큰 강조점을 두는 르포르타주 작업이다. 《글쓰기의 최전선》(2015) 등을 통해 르포와 인터뷰에 꾸준한 관심을 갖고 글쓰기 작업을 진행해 온 작가 은유가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 7명(위의 표 참조)을 만나 인터뷰했고, 그 기록을 중심으로 이들의 삶의 이야기를 가공되지 않은 생생한 언어로 풀어냈다. 


이들은 간첩 조작 사건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됐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분모를 갖지만, 태어나고 자라온 환경, 가족관계, 유년시절의 기억 등을 축으로 저마다 독특한 삶의 이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지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한 사람의 인생을 관통하는 중요한 화두가 되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제목을 구성하고, 7명 각각의 이야기를 한 장씩 담았다. 이들의 생애 서사는 폭력과 존엄 사이를 ‘눈물’, ‘연민’, ‘인식’, ‘성찰’, ‘화해’, ‘신의’로 가득 채우고 있다. 작가가 인터뷰 내용을 보충·정리하는 식으로 이따금 서술에 개입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이들의 말투와 언어 습관, 제스처가 녹아 있는 ‘말들’로 구성된다. 




"책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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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맛으로도 먹고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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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다'와 '살다'의 가치를 지키는 것


먹다와 살다. 평생 안고 가는 화두다.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라며 긴 한숨의 꼬리를 물고 자기 생을 회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누군가의 말대로 우리는 평범하게 (먹고) 살기 위해 죽을만큼 노력해야 하는 이상한 시대에 산다. 그래서 이 책의 기획이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대박 신화’가 아닌 ‘먹고 살기’로 접근한 음식점 창업 성공기. 

그 주인공들을 직접 만났을 때 몇 가지 공통점이 보였다. 첫째는 정성스런 음식을 먹고 자랐다. 할머니나 엄마가 손맛이 좋아서 잘 먹었거나, 외부의 맛집을 찾아다니며 잘 먹었거나. 오랜 세월 손맛이 몸에 쌓여 자기의 ‘손맛’이 되고 장사의 ‘밑천’이 된 것이다. 

둘째는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에서 아이템을 발굴했다. 당시 유행하는 트렌드가 아닌 어릴 때부터 먹어본 국수, 반찬, 곡물, 빵 등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나만의 메뉴를 찾았다. 

셋째는 한번 맺은 인연을 귀히 여겼다. 작은 가게는 소수의 고객을 상대하기 마련이다. 늘 일정한 레시피로 최상의 맛을 선보일 때 고객이 입소문을 내고 단골이 늘며 안정화되는 구조였다. 돈보다 맛을 지키며 신의를 쌓아간 것이다. 

그러니까 손맛으로 먹고 사는 비결은, 이것이다. 가혹한 경쟁에 무모한 유행에 휘말리지 않고 ‘먹다’와 ‘살다’의 가치를 지키는 것. 내가 잘하는 음식으로 나도 살고 남도 살고, 이 얼마나 멋진 삶의 시나리오인가. 이 책이 조금이라도 영감과 힌트를 줄 수 있길 바란다. 


--- <손맛으로도 먹고삽니다> 프롤로그 


제가 필진으로 참여한 책이 나왔습니다. 교보문고에서 빵처럼 팔리는 책 <손재주로도 먹고삽니다>의 자매책 <손맛으로도 먹고삽니다>입니다. 워낙 사보기자 할 때부터 '맛집 취재'를 좋아했고 사람 살아가는 일 들여다보길 좋아하니 기쁜 마음으로 작업했습니다. 귀한 친구들과 같이 일할 수 있어 재미졌네요. 실용서 쪽으로 감각이 둔한 나를 구박도 안 하고 솔선수범하여 이끌어준 공동저자 박희선, 일겸 놀이겸이 가능한 같이 오래 있어도 말길이 끊기지 않은 벗 정정호, 대인배 편집장이랑 일하는 복락을 선사해준 권명희 선배에게 고맙습니다. 주변에 혹시 손맛 좋은 분 있으면 소개시켜 주세요. 이 책을 내면서 '인문서'에서는 감히 꿈꿀 수 없는 안정된 인세수입의 사심 또한 품었음을 고백합니다. 세상에 필요한 책으로 자라나길.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1504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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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글쓰기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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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삶을 살았다고 꺼내놓는 사람들 이야기는, 늘 압도적이었다. 인터뷰 현장에서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이들이 들려준, 그 엄청난 사실을 엄정한 진실로 가공하는 작업이 나의 오랜 글쓰기 과제였다. 언어를 초과하는 현실에 쩔쩔매면서도 나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논픽션에 점점 빠져들었다. 글의 힘은 삶에 있음을, 삶의 힘은 글에 있음을 믿게 되었다. 산다는 것은 밀려오는 사건을 받아들이는 수락의 여정이다. 때로 어떤 일은 삶보다 커서 존재를 덮어 버리곤 하는데, 그럴 때 사람들은 말을 하고 글을 쓴다. 글쓰기를 통해 나를 짓누르는 일이 내가 다룰만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힘일 것이다. 허구가 아닌 사실에 기반을 둔, 예술 창작물보다는 삶의 미학화를 지향하는 이런 글쓰기를 무어라 부를지 막연했는데 비로소 마땅한 이름을 얻었다. 일명 논픽션 쓰기. 이 책은 진짜 사람에게 벌어지는 사건들에서 가치와 의미를 생산하여 인간 이해에 기여하는 글쓰기 방법론을 보여준다. 작가, 기자, 학자 등 사람 이야기에 기대어 사는 직업인은 물론 자전적 글쓰기를 꿈꾸는 이들에게 좋은 반려서가 될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게 아니라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삶의 주인이 되는 글쓰기가, 지금부터 펼쳐진다._『글쓰기의 최전선』 저자 은유



태어나서 처음 해본 일. 소설보다 더 재밌는 <논픽션 쓰기>(유유) 추천글을 썼다. 책이 이틀전에 도착했는데 넘나게 민망해서 하루만에 쳐다봤다는 거 -.- 좋은 책에 누가 될까 싶어 원고지 3매 쓰기가 30매 쓰기보다 더 힘들었음을 고백한다. (지금 쓰면 더 잘 쓸 거 같..) 그래도 제가 워낙 실제 벌어지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글쓰기도 사람의 목소리에 바탕하고 있으므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읽고 쓴 글. 또 이 책을 번역한 정세라는 저의 오랜 (술)동무. 작년에 내내 번역작업 하는 걸 옆에서 지켜봐서 더 믿음이 간다. 선하고 꼼꼼한 사람. 역시나 막힘없이 읽힌다. 이 가을 노란 단풍 익어가듯 이 책과 함께 글쓰기에 고운 물드는 시간이길.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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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출간 기념 작가와의 만남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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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다 하게 됐습니다. 아래 썼다시피 저자는 특별하지 않지만 책은 이야기를 담고 태어난 생명체이므로 뭔가 제가 잘 살아가도록 말을 해주어야하는 것 같습니다.  

두차례 열립니다. 19(화)일 자리는, 저랑 함께 공부한 학인이 주최하는 공익성 행사입니다. 제가 재능기부; 형식으로 참여하게 되었어요. 책 이야기도 나누고, 해외입양 단체 활동을 소개하고, 가수가 나와서 노래도 하는 그런 자리가 될 것입니다. 입장료가 있는데 기부금으로 쓰인다고 합니다. 홍대에서 편안한 분위기에서 고급진 차 한잔 하면서 글쓰는 것에 대해, 떠나가는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실 분들 환영합니다.

그리고 27(수)일 자리는 책이 나오면 출판사에서 진행하는 출간 기념 강연회 같은 것입니다.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도 이런 강연의 자리는 너무 부끄럽고 민망하고ㅜㅜ 암튼에 그렇습니다. 무료이고요. 알라딘이나 예스, 교보 이벤트 페이지에 신청하시면 됩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 오시면 함께 담소 나누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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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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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자고,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운데 뻔뻔하게 일을 저질렀습니다. 지난 4년 동안 글쓰기 수업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세상에 내놓습니다. 언제 이 세상을 떠나도 여한이 없도록, 가진 것은 좋은 것일수록 얼른 내려놓고 매듭 하나씩 묶으며 살자는 마음에 따랐습니다. 황제펭귄 책이랑 도시기획자들은 제가 인터뷰어로서 작업한 것이고, 올드걸의 시집은 블로그에 쓴 글을 모아서 냈고, 실제적으로 출간을 염두에 두고 집필에 몰두한 것으로는 첫 책입니다. 그래서 더 민망합니다. 제 부족함은 같이 공부한 학인들의 말들과 숨결로 메웠습니다. 황송하게도 홍세화선생님이 추천사를 써주셨습니다. 온갖 좋은 말은 다 넣은 나의 책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해봅니다.  

목차

나는 왜 쓰는가
들어가며 : 글쓰기의 최전선으로

PART 1 삶의 옹호로서의 글쓰기

삶의 옹호자 되기
다른 삶의 이력과 마주하는 시간
‘나’와 ‘삶’의 한계를 흔드는 일
내가 쓴 글이 곧 나다
고통 쓰기, 혼란과 초과의 자리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자는 누구나 약자다
말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말하기
내 몸이 여러 사람의 삶을 통과할 때

PART 2 감응하는 신체 만들기

불행처럼 우리를 자극하는 책들
말들의 풍경 즐기기
쓸모-없음의 시적 체험
느낌의 침몰을 막기 위해
호기심, 나로부터 벗어나는 일
합평, 역지사지의 신체 변용

PART 3 사유 연마하기

자명한 것에 물음 던지기
자기 입장 드러내기
얼마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
나만 쓸 수 있는 글을 쓰자
사건이 지나간 자리 관찰하기
여럿이 읽어야 하는 책, 니체

PART 4 추상에서 구체로

짧은 문장이 무조건 좋을까 : 단문 쓰기
글 쓰는 신체로 : 베껴 쓰기
마음에 걸리는 일 쓰기 : 모티브 찾기
추상에서 구체로 : 글의 내용
내 글이 누구에게 도움을 줄까 : 글의 위치성
별자리적 글쓰기 : 글의 구성
더 잘 쓸 수도, 더 못 쓸 수도 없다 : 힘 빼기
글은 삶의 거울이다 : 끝맺기

PART 5 르포와 인터뷰 기사 쓰기

노동 르포: 조지 오웰, 그 혹독한 내려감
사람을 이해하는 시간, 인터뷰
인터뷰는 사려 깊은 대화다
나만의 민중 자서전 프로젝트
시시하고 사소한 것들의 중요성
말을 잃은 백 세 할머니 인터뷰하기

PART 6 부록

노동 르포 : 효주 씨의 밤일
맥도날드 아르바이트 석 달의 기록(강효주)
인터뷰 1 : “침대에 누워 대소변 받아내도 살아 있어 괜찮았어”
공주병 울엄마 희순 씨의 우울증 극복기(박선미)
인터뷰 2 : “장수 씨, 이제 그만 짐을 덜어요”
가족등록부에만 존재하는 그와 나(사은)

참고도서 : 글쓰기 수업 시간에 읽은 책들
나오며 : 슬픔이 슬픔을 구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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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이 병을 만든다 - 병원 앞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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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일리히의 책 <병원이 병을 만든다>를 절반 가량 읽었다. (나머지는 다음주에 읽는다.)  제목만으로도 주제의식이 명확히 드러나는 책이다보니, 안 읽어도 읽은 거 같았다. 워낙 건강한 편이어서 크게 병원 갈 일 없이 성장했는데 결혼하고 불임클리닉을 다니게 됐다. 의사는 매뉴얼화된 지식과 자료, 통계 등으로 나의 몸을 진단하는데 그 해석이라는 게 그닥 신뢰가 가지 않았다. "이 사람이 나보다 더 모르나?" 하는 생각을 몇 차례 했다. 나는 기초체온을 재고 몸을 계속 관찰했지만 의사는 아니지 않은가. 진찰하는 시간도 10분 내외이고. 그 이후에 아이를 키우면서 소아과를 갔을 때도 대기시간이 진료시간보다 길고 의사의 태도도 형식적이어서 화병이 더 날 것 같았다. 여기에 끌려다니면 끝도 없겠구나 싶었다. 가급적 병원에 의존하지 말고 아이를 돌봐야겠다 결심했고 그렇게 아이 둘을 길렀다. 암튼 내 몸과 아이들 몸을 나보다 남이 더 잘 안다는 것도 뭔가 불합리하게 생각됐으니까.  

이반일리히는 나의 다듬어지지 않은 불만과 화남을 구조적으로 체계적으로 설명해주었다. <학교 없는 사회>도 그랬지만 40년도 전에 유럽에서 나온 책이 한국사회에 이렇게 적합하게 맞아떨어지다니 신기해하면서 읽었다. 한줄로 요점정리하면, 병원병의 문제점은 자기치료 의지의 회복의 기회가 원초적으로 차단되고, 치료에 대해 의사의 직업적 독점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 병원에 가서 병을 얻다

 

병을 앓는 사람들, 병을 앓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의료가 개입한 결과, 새로운 질병이 많아진다. 이처럼 의사가 만드는 병을 병원병이라고 부른다. ‘임상적인 병원병이란, 치료, 의사 또는 병원이 병원, 곧 병을 발생시키는 인자因子가 되고 있는 모든 임상적 상태를 포함한다. 나아가 의료가 단지 개인에게 직접적인 손해를 주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회적 조직체가 전체 환경에 주는 영향을 통하여 건강을 침식한다. 개인의 건강에 대한 의료적 손해가 사회 정치적 전달양식에 의해 산출될 때, 그것이 사회적 병원병이다

그 예로 드는 것. -옛날에는 치명적이었을 저양양의 수준에서도 인간의 3분의 1은 생존할 수 있었으나 반면에 보다 부유한 사람들은 그들의 식사를 통하여 더욱 많은 독물과 돌연변이를 초래하는 원인을 흡수시키고 있다. -메사추세츠 주에서는 질병도 아니었으나 심장치료 때문에 불구가 된 아이들의 수가, 심장병으로 유효한 치료를 받고 있는 아이들의 수를 초과하고 있다.

 * 20세기 의사, 건강치료를 독점한 최초의 직업

프랑스 혁명 때까지 의사는 장인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소수의 의사는 부유했으나 다수의 의사는 장인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소수의 의사는 부유했으나 다수의 의사는 빈곤 속에서 죽었다. “즐겁게 죽는 변호사 하나 없고, 즐겁게 사는 의사 하나 없다.”고 하는 속담은 유럽의 어느 나라에나 있다. (59)

안그래도 아침에 파리에서 인턴하는 후배랑 통화를 했는데 의사가 인기 신랑감 30위 안에도 못 든다고 한다. 왜냐하면 돈은 많이 못 벌고 바쁘기만 해서라고. 프랑스는 아이를 낳으면 부부가 공동육아를 하는데 남편이 일이 바쁘면 여자 혼자 애를 봐야하니 그렇다고 했다. 한국 의사도 즐겁게 살지 못하겠지만 돈은 많이 벌어서 그것으로 벌충하는데 프랑스 의사는 사정이 다르다. 의대 학비 연 45만원. 수업 교재도 나라에서 빌려준다. 돈이 안 드니까 졸업해서 본전 뽑을 일도 없는 것. 국가 공무원과 비슷한 직업이므로 직업적 소명감으로 해야하는 것이다. 피부과랑 성형외과는 의대 성적 가장 하위권이 간다니 여러모로 한국과 차이가 컸다. 

이반일리히는 또 역사적으로 건강 치료를 독점한 직업이 없었다고 말한다. " 환자나 환자를 둘러싼 환경의 물리적, 생화학적 구조에 기술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의료제도의 유일한 기능이 아니고 그랬던 적도 없었다. 병원의 제거 그리고 약품의 투여는 결코 인간과 질병의 관계를 조정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마술이나 의식을 통한 치료는 명백히 의료가 갖는 중요한 전통적 기능이다...치료자는 신들의 승려일 수도, 입법자일수도, 이발사 겸 의사(중세 유럽에서는 이발사가 외과의사를 겸했음)일수도, 과학적 충고자일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의사라고 부르는 말에 포괄되어 있는 뜻의 범위를 대부분 포함할 수 있는 고통의 이름은, 14세기 이전의 유럽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며 못 박는다. "건강 치료를 독점한 최초의 직업은 20세기 말의 의사라고 하는 직업이었다."

* 검사와 진료의 순례로 변모한 인생  

이반 일리히의 의료체제 비판은 (학교가 그렇듯이) 병원이라는 제도적 장치에 의한 개개인 삶의 장악이다. 현대인의 생애주기는 병원에 의해 기획되고 구획된다. 부자에게도, 가난한 자에게도 인생은 검사와 진료를 통하여 출발점까지 돌아오는 순례로 변모되고 있다. 인생은 이리하여 좋든 나쁘든 제도적으로 계획되고 형태를 갖추어야만 하는 통계적인 현상, 곧 하나의 기간으로 깎아내려지고 말았다. 생존 기간은, 의사가 태아를 출산해야하는가 어떤가, 그리고 어떻게 출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출생 전의 검사로 시작되어, 의사가 인공호흡 장치를 멈추라는 지시를 차트에 기록할 때 끝난다.” (89)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것이다. "위기의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병원이 맡게 되면 병원은 사회에 새로운 죽음의 형식을 강요한다." 사람들이 스스로 행위하고 스스로 만드는 능력을 빼앗아버리고 신체와의 투쟁 능력을 상실하며 독립하여 늙을 기회를 상실하고심지어 죽음의 형식까지 강요한다는 것이다. 의존하는 것은 언제나 가혹한 것이고, 노인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94) 의료가 존재하지 않는 죽음은 낭만적 고집, 특권 또는 재앙과 같은 뜻으로 여겨지고 있다. 환자는 자기에게 스스로 죽는 능력(그것은 건강의 마지막 표출이다)이 있다고 하는 신념을 상실하였고, 전문가에 의해 살해되는 권리를 중요한 문제로 만들어 왔다 

니체도 자유죽음, 내가 선택하여 죽을 권리를 말했고 난 동의한다. 얼마전 프랑스 노부부가 안락사의 합법화를 요구하며 동반 자살한 기사도 떠올랐다. 인간세상 한번 태어나서 백년도 못 살고 죽는데 산다는 게 어째 삶에 대한 전반적인 통제권을 빼앗긴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병원이 한 몫하고 있었다. 죽음을 관장하는 유일한 곳이 되어버렸으니까.   

* 과로사회, 노동자의 건강검진은 필수  

언젠가 가정의학과 명의를 취재 갔을 때 그가 물었다. “우리나라 남성들이 당뇨, 고혈압, 암 같은 성인병이 왜 많은 줄 아세요?” 나는 , 담배가 과해서요.”라고 했더니 아니란다. “과식이라고 했고 과식의 이유는 과중한 업무 부담에 따른 스트레스라고 했다. 술담배보다 과식이 더 안 좋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많이 하고 일을 많이 해서 병에 걸리고 병에 걸리면 병원에 와서 돈을 다 갖다 주면 이게 전태일이 말한 밑지는 생명아닌가? 그 뒤로 세브란스, 서울대병원, 이대병원 같은 초대형 병원은 물론이고 거리에 꽉 들어찬 무슨 크고 작은 의원들을 보면 자본주의와 공모해서 살아가는 거대한 기계 시스템으로 보였다.

이반일리히도 '조기진단의 실시'를 꼬집는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계이고 자주 수리 공장에 가지 않으면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하는 신앙을 강요받는다."(107) 병을 앓지 않는 사람들은 장래의 건강을 위하여 전문적 치료에 의존하게 되었다. 산업의 확대 단계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비정상이고 치료를 필요로 하는 자라고 정의되고 만다. 모든 사람들이 어떤 점에서는 병자의 경향을 보여주는 현재에 있어 임금노동은 치료적 특징을 획득한다. 평생 동안의 건강교육, 카운슬링이나 건강진단, 건강 유지는 공장이나 사무실의 일상 업무에 포함되어 있다. 시민으로서 정치적으로 성장되어간 인류는 이제 평생을 산업화 세계에 거주하는 자로서 훈련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산업화 사회의 의료화는 그 제국주의적 성격을 궁극적으로 성취하고 있다. (136)

아이들은 공부하느라, 어른들은 일하느라 고달프다. 치과나 내과 등 동네병원은 대부분 야간진료를 하고, 12시에도 치킨을 배달해주는 곳이 있고, 맥도날드와 커피전문점이 24시간 운영된다. 그렇게 과로 구조로 세팅된 사회는 구성원이 모두 다 병원의 잠재 고객이 될 수밖에 없다. 회사에 영혼을 저당 잡히고 살다가 죽을 때는 병원에 저당 잡힌다. 그 생각을 하면 얼마나 구슬픈지 모른다. 학교와 군대는 자본주의 신체에 적응하는 노동자를 양성하고 병원은 노동자를 수선하고 관리하면서 유지되는 피로사회다. 우리가 초과노동을 하는 임도농자 신분의 궤도에서 벗어난다면, 즉 적게 벌어서 적게 먹고 인간다운 삶의 속도로 살아간다면 병원에 가는 일이 줄어들까.

이반일리히 책을 보면서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나는 고민한다. 보험공단에서 12월말까지 건강검진 하라는 문서가 와 있다. 또 동네 산부인과에서는 자궁암 위험 바이러스가 있다면서 더 자주 해야한다고 3개월마다 정기검진을 하라는 문자가 온다. 난 지금 몸도 안 아픈데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의사도 그랬다. 바이러스가 암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사라질 수도 있다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는 거라고. 예방이 목적인 것이다. 근데 병원가서 내진하면 스트레스 지수 올라가서 바이러스 다시 생길 것 같다. 병원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는 진료비도 비싸지만 회사에 들어가기 싫은 이유랑 비슷하다. 저 병원이라는 설국열차에 올라타야 하는가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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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기획자들- 도시를 살만한 곳으로 바꾸는 사람들 인터뷰집

[비포선셋책방]

 

인터뷰집 <도시기획자들>이 나왔습니다. 도시를 사랑한 사람들. 문제 투성이 도시를 등지지 않고 그곳에서 해법을 찾는 분들 7명을 인터뷰하고 글을 썼습니다. 서울이 왜 그리 좋은지는 모르겠으나, 서울의 미세먼지조차도 사랑한다고 외치곤 했는데 이 책을 만들게 되었네요. 그리고 꼭 언젠가 인터뷰집을 내고 싶었는데 작업하게 되어서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는 책입니다. 도시와 사람과 글쓰기. 제겐 너무 매력적인 조합입니다.

초여름부터 작업해서 초겨울에 나왔어요. 세 계절에 걸쳐서 품던 원고예요. 여름이 너무도 무더워 이 카페에서 저 카페로 옮겨다니면서 글 쓰느라 괴로웠는데 책이 완성 되니까 밉기도 하고 좋기도 해요. 하고 싶은 얘기는 서문에 다 썼는데요.^^  좋은 사람 만나서 삶의 이야기에 흠뻑 젖고 존재가 확장되는 호사를 오랜만에 누렸습니다. 인터뷰 오르가즘! 

서울 홍대에서 열리는 와우북페스티벌 만든 이채관, 쌈지 대표이사였던 쌈지농부 천호균, 전주 한옥마을이랑 청년몰의주역 김병수, 홍대 클럽데이 10년 이끈 최정한, 서울숲 등 서울 공원 정책의 핵심 이강오, 수원 못골시장 등 지역커뮤니티를 가꾸는 오형은, 고양에서 주민들과 공공미술 활동을 펼치는 유다희 등이 주인공입니다.

이들이 도시를 대하는 태도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았고요, 그래서 본문도 좋지만, 각 인물 챕터 마지막에 들어간 '미래의 도시기획자들에게'는 삶의 기획자들인 우리 모두가 들어도 좋을 이야기랍니다. 10년~20년간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얻어낸 지혜와 통찰이 들어있어요.  도시를 어떻게 기획해? 라고 물으실 수 있는데요, 크게 사유의 그물을 치고 작게 실천하고 있다고 하면 맞을 거예요. 이분들은 크게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실패하면서도 재밌게 사는 고집쟁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들은 계속 묻고 살아요.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 그래서 부제를 달고 싶었답니다.  삶의 질문을 내려놓지 않는 희귀한 어른들. ㅋ

내가 만난 도시기획자는 “나는 사람들을 만나 사람답게 되었다”고 말하는 착실한 직업인이며, 파란불로 바뀌었다고 후다닥 건너지 않고 신호등을 한 번 굶고 건너는 몽상가이고, 한 걱정에서 또 다른 걱정으로 부단히 흔들리는 외로운 영혼이다. 그러면서도 도시가 주는 선물을 살뜰히 누리는 탐미주의자이다. 즉, 우리는 도시기획자를 술어의 자리에 놓고 사유해야 한다. ‘도시기획자는 무엇이다’가 아니라 ‘무엇도 도시기획이다’란 식으로 말이다. | p.12 <서문>

'도시는 문제가 아니라 해법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도시의 문제를 푸는 것이 지구의 생태문제를 푸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래요. 인터뷰할 때 이강오 처장님이 해준 말씀인데 동감합니다. 횔덜린도 그랬죠.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함께 자라네.' 이미 태어났을 때 서울이란 세계-내-존재로 던져진 저로서는 이곳을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애정과 바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분들 얘기에 더 매료되었고요. 아무튼 다른 분들도 도시인물에세이 <도시기획자들>을 읽으면서 사람 이야기에 취하고, 또 삶의 자리와 주변을 훑어보고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더 좋겠습니다.  ^^ 

 

 

도시는 인문학이다 | 이채관 _ 책 읽는 도시 풍경을 그려낸 서울와우북페스티벌 기획자
도시는 농부이다 | 천호균 _ 도시 안에서 착한 생산과 착한 소비의 다리를 놓는 쌈지농부 창업자
도시는 숲이다 | 이강오 _ 서울숲 운영자이자 서울시 그린 정책의 핵심 브레인
도시는 이야기이다 | 오형은 _ 이야기를 통해 사람 사는 경관을 빚어내는 커뮤니티 플래너
도시는 욕망이다 | 최정한 _ 도시의 욕망 에너지에 주목한 홍대클럽데이 창안자
도시는 청년이다 | 김병수 _ 오래된 전주를 청년의 땅으로 바꿔낸 사회적기업 이음 대표
도시는 예술이다 | 유다희 _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는 공공미술프리즘 대표

 

>> 추천사

박원순 (서울시장): 《도시기획자들》이라는 책을 보고 있노라니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기분입니다.
이제는 세계에서 오히려 우리 도시를 벤치마킹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의 도시기획은 이미 세계적 수준에 올라와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삭막한 도시를 살 만한 곳으로 바꾸고 있는 사람들: 도시기획자들》이라는 제목처럼, 이 책을 통해 서울시는 물론이거니와 우리나라 곳곳을 ‘살 만한 곳으로 바꾸는 삶의 혁명가들’이 더 많이 생겨나길 바랍니다.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도시와 시골의 경계를 넘나들며 재미난 작업을 하는 연금술사들이 나타났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립니다. 잿빛 도시에서 어슬렁거리는 자는 경계해야 할 요주의 인물이지만 이 연금술사들은 도시에 새로운 공기를 넣어주는 요주목 인물이라고 하는군요. 뒷짐 진 그들의 여유로운 산책길을 한번 뒤좇아 가볼까 싶습니다.

이원석 (데이브레이크 보컬):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도시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관심이 없기에 삭막하고 외로웠던 거다. 이 책을 읽고 도시를 기획한다는 거창한 꿈은 아니더라도 내가 살고 있는 곳, 내가 자주 가는 길을 위해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부터 집 앞 놀이터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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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동박물관 - 책으로 되돌아본 '독거노인 5명의 인생史

[비포선셋책방]
책으로 되돌아본 '독거노인 5명의 인생史'
 

(서울=연합뉴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 사는 독거노인 5명에게 7년간 반찬봉사를 해온 자원활동가들이 노인들의 인생사를 풀어 쓴 책 '이문동 박물관'이 지난 1월 나왔다. 작년 말 노인들과 자원활동가들이 사진관에서 함께 프로필 사진을 찍었고, 이는 '이문동 박물관'에 실렸다. 2013.3.22 

 
기사 전문 보기 : 자원활동가들 '이문동 박물관' 출간…"한분 한분이 보물" (연합뉴스) 
                     반찬 배달 하며 엮은 '할머니들의 역사' (경향신문)

 

"선생님, 우리 얘기 나왔어요."  봄이에게 문자가 왔고 기사가 링크돼 있었다. <이문동박물관> 책이 나왔다. 지난 가을, 이 책을 만들기로 계획이 잡히고 반찬 봉사를 해온 친구들과 글쓰기 수업을 진행했다. 어떤 책을 만들 것인가 기획하고, 스토리텔링을 하고, 초고를 쓰고, 같이 읽고 고치고, 방향을 잡고 다시 쓰고, 또 고치고. 이메일로 원고를 검토하고, 일요일에 홍대 카페에서 방 잡고 앉아서 제목을 달고, 내가 바빠 나가지 못하면 일 하는 사무실에서 와서 교정을 보고 그렇게 마무리 된 책이다. 

 

어르신의 삶을 담는다는 것. 수급자 처지에 놓였고 반찬을 얻어 먹어야했던 분들이다. 생의 말년, 경제적 몰락을 이유로 삶 전체가 폄훼되기 십상인 분들,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 아닌 한 사람의 존재체험을 오롯하게 담아낼 수 있을까. 남루해져버린 그 분들 삶이 살아온 세월의 최선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한가 온당한가. 생각에서 생각으로 돌아눕다가 책 작업이 끝났고, 막바지에이르러서 어르신들의 삶에서 '오래 되면 스스로 밝아진다는 존구자명(存久自明)'의 명제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번 작업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한 사람의 생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거울처럼 맑아져서 자신의 삶을 비춰보게 된다는 점이다. 비단 인터뷰이였던 어르신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같이 작업한 친구들도 내겐 하나의 맑은 거울이 되어주었다. 거울을 통해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하나의 우주가 있다. 엄마에게 얻어 먹은 밥, 어르신들에게 배운 사투리, 책에서 본 글귀, 가슴에 묻은 말들, 손에 남은 꽃잎의 촉감, 친구에게 주입된 음악, 조금 웃겼던 농담들...무수한 속성들로 채워진 나. 타인의 지분으로 가득한 나. 나는 내가 아닌 반전이 일어나는 그 지점이 좋다.

 

함께 작업하면서 나와 속성을 공유한 친구들, 언뜻 나의 말투가 묻어있는 그들, 그들의 말버릇을 흉내내는 나. 정든 친구 한 명이 내일모레 호주로 출국한다. 회사 그만 두고 장기여행 떠난다. 어제 송별회를 위해 만났다. '다녀와서 내 삶은 어떻게 될지 불안해요' 라고 말하는 그에게 '현재에 집중하면 미래에 대한 불안은 사라지지 않을까'말했다. 길에게 길을 물어가며 가라. 니체 투로. 나를 반찬팀 친구들과 연결해준 미남브로커 로맨스 조도 늦게 합류했다. 그는 이번 책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유미 말대로 '사진 좋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던 그 문제적 사진을 찍은 이다. 홍대 문학동네 카페에서 만나서 시집을 사서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인근 술집에서 이야기 나누고 이별의식을 치렀다.    

 

 

(은유,로맨스 조, 유미, 소연, 봄이)

 

 

 

 

술집을 나서 집에 가는 길, 봄이가 스마트 폰으로 어떤 글을 보여준다. 글 쓰는 작업하다가 힘들 때 쓴 글이란다. 선생님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나도 보고 싶었다. 메일로 왔다.

 

12.11.23


할머니가 미웠고 글이 써지지 않는 것이 너무 힘들고 괴로웠다. 원래 모임날짜까지 글 완성본을 들고가기로 했는데 대안 방법만 주르륵 나열해놓고 뺀질거리지 않은 척 보여주기를 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밤새 괴로워하며 만들어 왔는데 내 뻔히 보이는 게으름이 너무나 부끄러워 미쳐버릴 것 같았다. 물론 정신적 상태가 쓸 수 없었던 상황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이, 어떻게든 붙잡고 씨름을 했어야 했는데 너무나 쉽게 '포기' 했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자신이 싫었다. 


은유 선생님은 화를 내시진 않으셨다. 조용히 단호하게 '이런식으로 대안을 쓰지 말고 끝까지 써보도록 해요.'라고 모두에게 권장하는 말처럼 하시면서 사실은 나에게 말씀하시고 계셨다. 선생님은 나의 포기와 게으름을 관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조용하면서도 엄하게 하신 말씀이 거울이 되어 나를 뒤돌아 보게했다. 미친듯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선생님의 그 싸늘한 표정이 가슴을 후볐다.

그런 후 다음 모임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 오전에 그 글을 쓰고 있을 때였다. 활기차고 발랄한 목소리로 "봄이 나야~"라고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전화를 받자마자 선생님의 그 따뜻함이 느껴져 눈물이 울컥 날 뻔했다. 선생님께선 잘 안써지면 구조를 도와줄테니, 같이하면 되니까 걱정말고 우선 써내려가라고 출고해주셨다. "내가 도와 줄께."라는 말씀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선생님께서 나의 그날의 표정이 마음에 걸려 전화를 하셨다는 그 말씀에 또 소리없이 감동했다.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나 혼자의 힘으로 써보겠다는 의지가 더 생겼다. 선생님의 말은 위안과 힘을 주었다. 은유 선생님이 정말 감사해서 어떻게 감사함을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선생님 앞에만 서면 사실 조금 언다.
김사인교수님 때와 비슷하다.
너무 감사해서 어떻게 표현을 해야할지, 무엇을 해드려야 헐지 통 감을못잡아 딱딱하게 굴때가 많다. 내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선생님의 첫 책이라며 주신 <올드걸의 시>는 선생님을 닮아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선생님의 이야기가 갊겨있어서 궁금하다. 이틀 밤 꼬박 새서 글을 완성하고 받은 <올드걸의 시> 선물. 선생님께 받자마자 많이 표현은 못했지만 감격해서 눈물이 날뻔했다.

내가 글응 쓰는 것이 지겹지 않느냐는 물음에 선생님은 "난 글쓰는게 지겨웠던 적이 없어. 글을 쓰면서 너무 괴로운데 그 이상으로 희열이 있어." 라고 말했다. 난 그 말을 알고있다.

설레인다. 설레인다.
선생님의 만남과 출판으로인해 내 인생이 바뀌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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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말라르메 "언어의 고행은 실존의 고행이다"

[비포선셋책방]

나는 의미란 게 정말로 시에 덧붙여진 어떤 것일까 여러 번 의심했다. 나는 우리가 의미를 생각하기도 전에 시의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점을 사실로 알고 있다."

 

어느 책에선가 보고 베껴놓은 문장이다. 어떤 글을 읽고 뜻도 모른 채 압도당할 때 가장 행복하다. 사고하지 않는 그 바보같은 상태에 빠지는 게 좋다. 가슴이 철렁하고 숨이 턱 막히는 순간. 그것은 절정 체험이랄까 -.-; 머리가 의미를 생각하기 전에 가슴이 반응하는 거다. 황현산의 문장들은, 나를 종종 찰나에서 심연으로 이끈다. 말라르메 <시집>을 읽는데 황현산이 5년간 고심했다는 번역과 해설이, 말라르메의 시보다 더 감동적이다. (말라르메 시도 물론 정이 들려는 중이다. 더 여러번 읽어봐야할 것 같다. 처음엔 공부하듯이 무슨 시를 읽는가 싶기도 하지만, 잡지 보듯이 한 번에 쓱쓱 이해하면서 시를 읽는 것이 이젠 더 이상할 지경이다.)

 

좋은 책은 반드시 서문이 훌륭하다. <시집> 역시 시적이다. 책에 대한 안내, 말라르메에 대한 이해에 도움 받았다. 아주 어렴풋이. 필사하고 싶은 문장들 정리해보았다. 발췌 요약은 예전에 자주하던 짓인데 올만에 해봤다. 쓰는 순간 휘발될 것이 분명하지만 쓰는 동안이라도 그것이 내 것이 되는 것 같아 좋다. 내가 쓸 수 없는 문장, 쓰다듬고 만질 수 있으니 좋지 아니한가. 말라르메의 시 쓰기는 실존의 고행이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다음은 황현산의 글을 정리한 것.

 

 

* 말라르메의 자리

말라르메는 프랑스 시 역사에서 가장 난해하고 형식적으로 가장 완벽한 시를 쓴 것으로 평가되는 시인. 시는 말라르메의 절대적인 목표였고 생애의 사건 전체이기도 했다. “그는 시간 밖에서 시를 썼다.”(시트롱) 현재의 인간이건 미래의 인간이건 인간의 이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작품 그 자체의 논리에만 의지하여 그것을 완결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 편집적으로 몰두했다. 36년 동안 완성한 시 작품이 70편을 넘지 못했다.

 

문학사에서 볼 때 말라르메는 보통 환멸의 낭만주의라고 불리는 후기 낭만주의의 정신을 이어받은 시인이다. 낭만파 문인들은 신과 우주의 섭리에 역사적 진보의 원리를 대입하여, 인류 해방의 이상을 전파하는 일이 시의 사명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고결한 이상을 품고 비천한 사회에 등을 돌리도록 저주받은 시인들이었다. 그들은 세상을 향해 말하지 않았고, 세상은 그들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시는 현실을 부정하는 독백이 되었다. 말라르메는 이 환멸의 부정적 효과에서 언어 소통의 새로운 힘을 발견해내고, 독백과 그 표현법인 은유를 시의 운명이자 사명으로 여기는 가운데 새로운 시어를 창출했다고 흔히 평가된다.

 

* 무의 발견과 말의 소멸

세계를 창조하고 주재하는 자로서의 초월적 존재를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된 근대 사회의 유물론적 세계관이 역시 문제된다. 우리가 목도하는 세계의 실상이 우연한 현상들로 점철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신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는 한 그 우연은 섭리의 한 과정이고 부분이라고 여길 수 있다. 건강한 나무와 마찬가지로 병든 나무도 어떤 높은 의지의 표현이며, 활기찬 짐승과 죽어가는 짐승이 모두 제가 있을 자리에 있다. 그러나 그 초월적 의지라는 것이 애초에 부재하는 것이라면 저 벌레 먹은 꽃이나 피부병을 앓고 있는 짐승은 도대체 무엇이겠느냐.

 

서구의 문화 전통에서, 시는 초월적 존재자로부터 그 영감을 얻고 그 의지와 섭리를 옮겨 적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거기서 시인의 직업적 자부심이 비롯됐다. 신이 추방된 자리에 일반 물리학과 방불한 이성적 원리를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게다가 그 원리가 아무리 방대하고 섬세하다고 하더라도, 어떤 인격신이 보장해주던 서정의 영감을 거기서 기대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능력을 지닌 특권적 물질이지만, 그러나 그 생각이 진정한 것이라는 보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말라르메가 허무라고 일컫는 것은 신의 결여, 곧 말의 진정성을 보증해줄 장치의 결여라는 말과 다른 것이 아니리라. 결여는 진리와 미에 대한 확신 아래서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의 결여다.

 

그는 비천한 물질의 상태를 벗어나고 우연의 중첩일 뿐인 거친 현실에 도전하기 위해 시를 쓰려 하지만, 시의 언어는 존재의 필연적이고 고결한 양식이 될 수 있는 가능성보다 우발적인 사건들과 잡다한 감정의 결합에서 울려나오는 빈말이 되어버릴 위험에 더 많이 직면해 있는 것이 틀림없다.

 

말라르메는 지금 모든 낱말에서 그 경험의 침전물을 제거하고, 그 여유 공간을 삭제하여, 말이 그 지시체와 충만하고 순결한 관계를 맺게 될 어떤 지점까지 시구를 파들어가고 있다. 사물에 대한 실망스럽고 비루한 기억으로부터 그 사물을 최초의 순결한 모습으로 구출한다는 뜻이다.

 

이라는 말이 한 번 발음되고 소멸할 때, 우연하게 꽃의 모습을 둘러쓴 모든 물질의 꽃, 다시 말해서 현실의 꽃에 대한 모든 실망스런 기억이 함께 소멸하고 꽃이라는 생각만이 솟아올라야 한다. 꽃이면서 동시에 꽃의 부재인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데아는 순수 지성의 산물이지만 말라르메의 관념 그 자체는 우리의 물질 감각과 맺는 관계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않는다. 말라르메의 순수관념은 끝없이 지성화 하려는 감성과 매 순간마다 감성화하려는 지성을 투명하게 결합하려는 열망이 있다. 말라르메의 시어가 노리는 순수 관념은 최소한의 육체적 계기,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을 유지한다.

 

* 순수 지성과 시인의 소멸

난해어법은 말하면서 말하지 않는 어법, 다시 말해서 내가 말하려는 것은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다르게 말하더라도 그 역시 아니다라고 말하는 어법이다. 말라르메가 불교를 알지 못하면서 불교적 에 도달했다는 말은 필경 반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선승들의 문답법이야말로 지칭할 수 없는 어떤 깨달음의 자리에 이르기 위해 언어의 논리를 무참하게 잘라내는 어법이 아닐까. 말라르메에게 중요한 것은 형언할 수 없는 그 존재의 본질이 아니라, 그와 관련하여 스스로 부정되는 그 말들의 효과에 있다.

 

네가 꽃이란 그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꽃을 보았다면 너는 그저 그런 꽃 한 송이를 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네가 정말로 무심한 상태에서 그 꽃을 보았다면 너는 우주의 한 얼굴을, 지극히 작은 얼굴이지만, 본 것이다. 말라르메에게서 낡고 우연한 관념들을 차례로 부정하고 색조와 선율로 하나의 인상이 되려는 이 시어의 지평선에서 순수 관념들이 떠오르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언어의 고행은 실존의 고행이다. “순수한 작품이란 필연적으로 화자로서의 시인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며, 시인은 낱말들에 주도권을 양도한다. 낱말들은 하나하나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충돌함으로써 동원상태에 놓인다. 낱말들은 마치 보석들 위에 길게 뻗어 있는 허상의 불빛처럼 그 상호간의 반영으로 점화된다.”(운문의 위기)

 

*대문자의 책과 시집

세계는 하나의 책에 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우주의 모든 것을 종합하는 책. 오직 내부의 질서가 존재할 뿐 바깥이 없는 책이다. 말라르메만큼 자신이 쓴 책으로보다 쓰지 않은 책으로 더 유명해진 시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책에 신념을 걸고 백지에 앉아 있는 시인 자신의 모습이 발견된다. 불가능한 기획이 마침내 자신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신념이 아니라, 적어도 그 기획에의 천착이 자신의 시 쓰기를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고 그 깊이를 보장해줄 것이라는 신념이다.

 

실현이 가능하건 불가능하건 책의 개념은 그의 시 쓰기 속으로 들어와 내적 비평의 기능을 했으며, 사물과 생각과 말의 관계에 대한 성찰의 틀을 마련했다. 그는 자신의 열망을 실현된 작품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열망이기 이전에 포기될 수 없는 열망이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간다는 것이리라. 생각하는 것의 끝까지 간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 너머를 생각하지 않는 인간적인 삶은 없다. 시는, 패배를말하는 시까지도, 패배주의에 반대한다. 어떤 정황에서도 그 자리에 주저앉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시의 행복이며 윤리이다.

 

 

***

들뢰즈가 쓴 <니체와 철학>에도 말라르메와 주사위가 나와 찾아보았다.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말라르메의 이런 형이상학적인 현실부정적인 태도가 니체랑 반대되는 것은 알겠다. 말라르메는 부정의 권력의지가 충만한 시인. 니체는 즐거운 학문을 하는 긍정과 생성의 철학자니까. 다음은 알듯말듯 심오한 들뢰즈의 말.

 

말라르메는 항상 필연을 우연의 소멸로 간주했다. 말라르메는 주사위 던지기를 우연과 필연이 두 항으로서 서로 대립하는 식으로, 후자가 전자를 부인해야만 하는 식으로, 전자가 후자를 실패하게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해했다.

 

사람들은 종종 말라르메의 시가 세계의 이원성이라는 낡은 형이상학적 사유 속에 위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우연은 부인되어야만 하는 현존과 같고, 필연은 순수 관념 혹은 영원한 본질의 특징과 같다.

 

그러므로, 주사위 던지기의 마지막 희망은 어떤 성좌가 우연이 존재하지 않는 필연을 책임질 때, 그것이 어떤 다른 세계 속에서 그것의 이해 가능한 모델을 발견하는 것이다. 결국 성좌는 주사위 던지기의 결실이라기보다는 그것의 한계로의 이행, 혹은 다른 세계로의 이행이다.

 

말라르메에게서 예술 작품은 <정의롭지만> 그의 정의는 현존의 그것이 아니라, 여전히 삶을 부인하고 그것의 실패와 무능을 전제하는 비난하는 정의이다. 그와 반대로 니체가 현존의 미적 정의에 대해 말했을 때 삶의 자극제로서의 예술과 관련되었다. 즉 예술이 삶을 긍정하고, 삶이 예술 속에서 긍정된다.

 

말라르메는 주사위 던지기이다. 하지만 그것은 허무주의에 의해서 다시 파악되고, 가책과 원한의 관점들 속에서 해석된다. 그런데 긍정하고 찬양하는 맥락으로부터 분리되고, 결백과 우연의 긍정으로부터 분리된 주사위 던지기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주사위 던지기는, 사람들이 거기서 우연과 필연을 대립시킬 때,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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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 시집 - 슬픔이 슬픔을 구원한다

[비포선셋책방]

   

 

 

 

그것은 다른 시간이리라. 그 시간을 다른 여인이 살게 되리라.

그 시간은 다른 세계에 존재하리라. 그 세계가 다른 삶을 열어 주리라.

- 파스칼키냐르, 빌라 아말리아

 

 

 

1. 나이든 소녀

 

동네 꽃집을 지나는데 창문에 예쁜 글씨가 새겨져있다. ‘우리 엄마도 한 때는 소녀인 적이 있었답니다.’ 발걸음이 멎었다. 뭐랄까. 애잔함과 서글픔과 허탈함이 차례로 밀려왔다. 매년 어버이날이면 애들한테 카네이션 달라고 조를 때는 언제고 저 문구에 쓰인 우리 엄마에 나도 해당된다는 사실이 인정하기 싫었다. 어느 덧 내가 효()마케팅의 판촉 대상으로 위로받는 처지가 된 게 못마땅했다. 그럼 뭐 지금은 시들었어도 예전엔 생기어린 꽃이었다는 건가? 고쳐주고 싶었다. ‘우리 엄마는 지금도 소녀일 때가 있답니다.’

 

예전에 홍익대학교 청소노동자 노문희 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녀의 담당구역인 건물 3층 복도 끝에 휴식공간이 있었다. 새의 둥지처럼 몸 하나 겨우 웅크릴 공간, 책상 하나 놓이니 꽉 차는 창고 같은 방이지만 다행히 벽면의 통유리 너머로 짙푸른 나무가 흔들려 운치를 더했다. 책상 위에는 낡은 스프링 노트가 정물처럼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학생들이 버린 노트를 주워서 일기를 쓴다고 했다. 그녀가 넘기는 노트에는 깨알 같은 글씨와 소녀얼굴의 스케치가, 마치 전혜린의 노트처럼 동경과 낭만으로 일렁였다. 나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까맣게 염색한 보글보글 억센 파마머리에 울퉁불퉁 힘줄 튀어나온 마른 손등에 소매통 넓은 파란색 작업복을 걸친 청소부. 예순 살의 그녀가 감수성 주체로 여기 책상에 앉곤 한다는 사실이 마냥 낯설었다. 돌아오는 길, 우리 엄마도 가을이면 단풍잎 은행잎을 주워서 식탁유리 밑에 끼워놓곤 했던 생각이 났다. 엄마가 화초 가꾸기를 좋아하니까 그런 줄 알았는데 엄마가 주운 것은 낙엽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싶었다. 살면서 흘린 것, 놓친 것, 떨궈진 것들을 낙엽에서 보았던 게 아닐까. 잃어버린 당신 시간을 모으듯 몸을 구부려 줍고 부서질세라 쥐고 고이 간직하는 동안 엄마는 가을을 통과하는 소녀였던 거다.

 

나는 이십대 초반 결혼해서 아이를 둘 낳았다. 엄마로 오래 살았다. 남들은 나보고 젊은 엄마라고 말했지만 나는 일찍 엄마가 된 소녀였다. 엄마 아닌 생에 대한 갈망이 컸다. 앞치마 풀어버리 듯 엄마의 옷을 간단히 벗어버리고 싶었다. 체념인지 적응인지 마흔에 다다르자 심신의 변화가 왔다. ‘모든 일이 참을 만해요. 세포가 늙어가나 봐요’(최승자 길이 없어) 상태가 되었다. 그럭저럭 살만했고 얼렁뚱땅 살아졌다. 하지만 심신의 변화가 전면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체력의 저하와 감각의 퇴화가 그래프처럼 항목별로 고르게 나타나는 건 아니었단 말이다. 나는 여전히 왕성하게 분열중인 세포를 발견했다. 두루두루 참을 만하다가도 견딜 수 없어지는 순간에 불쑥 튀어 오르는 힘, 내 피만 알아차리는 저항. 그것은 한숨이나 눈물 같은 울컥함으로 나타났다. 나는 불행을 예민하게 느꼈다. 내가 태어난 이유를 찾고 싶었다. 그것은 아마도 본래적 자아로 회귀하려는 어떤 경향성일 것이다. 일상의 아수라장 안에서도 뭉그적뭉그적 나의 자리를 찾아가게 하는 힘이 있었으니, 그때마다 나는 어떤 소녀와 대면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올드걸은 고정된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방식이다. 그러니까 피부에 잔주름 없애고 명품 몸매 가꾸어 영우먼되려는 욕망처럼 눈가의 물기와 사유의 탄력을 잃지 않는 올드걸이 되려는 욕망도 있다. 그런데 올드걸은 눈에 띄지 않는다. 영우먼은 미용산업, 성형산업, 의류산업을 거쳐야 만들어지므로 매스컴에 의해 떠들썩하게 알려지고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반면, 노트 하나 시집 한권이면 족한 올드걸은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이 사회의 거미줄 같은 자본시스템을 경유하지 않는 존재는 발굴되지도 부각되지 않는 법이니까. 또한 일상생활에서 엄마역할로 기능하면 딱히 드러날 기회가 없기도 하다. 나이든 여자를 마주하고 당신은 꿈이 뭐냐고, 무얼 욕망하느냐고, 어떤 슬픔이 있냐고 물어본다는 건 영 어색하다. 나도 엄마에게 그러지 못했다. 어쩌면 보통명사 엄마의 사적영역은 한 때 누군가의 자식이었던 우리 모두에게 상상불가능의 지대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드걸은 살아있다. 누군가 나에게 올드걸의 정의를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돈이나 권력, 자식을 삶의 주된 동기로 삼지 않고 본래적 자아를 동력으로 살아가는 존재, 늘 느끼고 회의하고 배우는 감수성주체라고.

 

 

2. 로 지은 집

 

내 생애 첫 시집은 한국명시선이다.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의 하얀 거품, 까만 포도알 같은 아이의 눈망울, 세모 지붕에 낮은 울타리가 쳐진 집으로 뛰어가는 들판의 아이들 등등 70년대 지방 소도시에 있는 이발소 달력그림에 쓰일 법한 사진에다가 윤동주, 이육사, 김소월 등의 국정교과서 수록 시가 어우러진 사진판 양장본 책이었다. 내가 둥그런 바가지 머리 아이였을 때 그 시집을 방바닥에 드러누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다음 두 번째 시집은 잡지 부록으로 딸려온 세계의 명시-애송시 200으로 국내편 국외편이 섞였다. 괴테의 첫사랑, 릴케의 가을날, 롱펠로우의 인생찬가등 어색한 번역에 따른 비장한 시어를 나는 아무 이물감 없이 그대로 흡수했다. 책을 읽다 보면 심오하고 난해해서 잘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느낌에 압도되는 경우가 있는데 소싯적 읽은 시들이 그랬다.

 

아이에서 소녀로 자라면서 나는 시의 풍요를 제대로 누렸다. 문학적 감수성이 남달라서가 아니라 그 시절에는 시가 봄날 개나리처럼 어디에나 흐드러졌다. 꼭 시집을 사지 않더라도 스프링 연습장 겉표지에 조병화의 남남, 서정윤의 홀로서기,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같은 시가 예쁜 글씨체로 꾸며져 있었다. 그 뿐인가. 대중가요도 시적 정취가 물씬했다. 산울림과 들국화와 김광석의 어떤 가사는 시보다 시적이었다. 나는 노래와 시를 구분치 않았다. 노트를 쫙 펴고 한 쪽에는 이형기의 낙화와 그 옆에는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를 베껴 쓰곤 했다. 부피가 얇고 작아서 손에 쏙 들어가는 시집은 선물용으로도 그만이었다. 삼천 원에 그만큼 기품 있는 선물이 또 없었다. 친구들과의 갈등에서 속상함을 표현할 때나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존경과 사랑을 고백할 때 등 언어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시집을 뒤적거렸다. 연애편지에도 시 한 편씩 꼭 곁들였다.

 

그렇게 꽃이 피고 낙엽이 질 때마다 한 사람과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시가 쌓였다. 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 김남주와 박노해의 해방문학 시편들도 빼놓을 수 없다. 뜨겁게 달궈진 불온한 언어는 정신의 성냥불을 확 그어주곤 했다. 비장미와 숭고미와 낭만성과 유치함이 교차하던 이십대. 온통 정서과잉의 그 시대. 일상, 연애, 투쟁 어느 곳에서도 손 길게 뻗어 나는 시에 의지했다. 시로 지은 집에는 어김없이 사람의 얼굴이 누워있었으니 그 인연이 매개한 말들의 풍경은 그대로 세상 읽기의 독본이 되어주었다.

 

 

3. 행복 없이 사는 훈련

 

서른 중반 즈음부터다. 결혼과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삶이 복잡계 수준으로 얽혔고 몇 개의 돌부리 같은 사건’(이성복)을 지나오면서 나는 더 이상 한갓 취향으로 시를 읽을 수 없었다. 생이 기울수록 시가 절실했다. 일을 마치고 늦은 밤 귀가하면 식구들은 잠들고 집이 난장판이 되어 있곤 했다. 식탁위에는 라면 국물이 반쯤 남은 냄비와 뚜껑도 닫지 않은 김치보시기와 고춧가루 묻은 젓가락이 엑스자로 놓여있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벗은 양말은 발아래 낙엽처럼 채였다. TV는 저 혼자 무심하게 떠들고 있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아무 것도 손댈 수가 없을 때면, 나는 책꽂이 앞으로 가서 주저앉았다. 손에 잡히는 시집을 빼서 시를 읽었다. 정신의 우물가에 앉아 한 30분 씩 시를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기계적으로 일하는 노예가 아니라 사유하는 인간임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를 읽으면서 나는 나를 연민하고 생을 회의했다. 생이 가하는 폭력과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는 시. 고통스러운 감정은 정확하게 묘사하는 순간 멈춘다고 했던가. 마치 혈관주사처럼 피로 직진하는 시 덕분에 기력을 챙겼다. 꿈같은 피안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남루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힘이 났다. 시가 주는 묘한 해방감의 정체가 무언지는 몰랐다. 그런데 얼마 전 친구가 소설에서 봤다며 조선조 사대부 여인에게는 시가 짓기를 금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 책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결혼은 항상 숙명과 같은 엄숙한 얼굴로 가시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아내는 그 울타리 안에서 순치된 가축처럼 고분고분 살아갈 뿐이다. 이것이 남권 사회의 순리다. 가장 무난한 방도는 회의하지 않는 일이다. 남권 사회에 있어서 여인의 회의는 독약이나 같다. 조선조 사대부 여인들에게 시가 짓기를 금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문학에 눈뜨는 것은 회의에 눈뜨는 일이 아닌가.

-<달아 높이곰 돋아사 1권> 이영희

 

문학에 눈 뜨는 일은 회의에 눈 뜨는 일이고, 회의에 눈 뜨는 일은 존재에 눈 뜨는 일이었다. 시를 읽는 동안 나 역시 생각에서 생각으로 돌아눕고 곱씹고 되씹고 뒤척이기를 반복했다. 흔한 기대처럼 시는 삶을 위로하지도 치유하지도 않는다. 백석 시인이 노래했듯이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할 뿐이다. 사는 일이 만족스러운 사람은 굳이 삶을 탐구하지 않을 것이다. 시가 내게 알려준 것도 삶의 치유불가능성이다.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끔찍한 재능’(니체)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바닥까지 시는 깊게 내려간다. 옥타비오파스의 말대로 시는 존재의 심층에 거주한다. 시를 통해 나는 고통과 폐허의 자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법을, 고통과의 연결고리를 간직하는 법을 배웠다. 일명 진실과의 대면 작업이다. 어디가 아픈지만 정확히 알아도 한결 수월한 게 삶이라는 것을,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게 낫다는 것을 시는 귀띔해주었다.

 

참 고마운 일이다. 어딜 가나 치유와 긍정의 말들을 사나운 헤드라이트 불빛처럼 얼굴에 들이대어 삶에 눈멀게 할 때, 시는 은은히 촛불 밝혀 삶의 누추한 자리 비추어주니까. 배신과 치욕과 절망과 설움이라는 분명히 존재하는 삶의 절반을, 의도적으로 기피하고 덮어두는 그 구질구질한 기억의 밑자리를 시는 끝내 밝힌다. ‘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절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면 그 절망 속에 살아갈 수 있다는 벤야민의 말을 나는 시를 통해 이해했다. 시를 읽는다고 불행이 행복으로 뚝딱 바뀌지는 않지만 불행한 채로 행복하게 살 수는 있다. 그래서 시는 행복 없이 사는 훈련’(황동규)인 것이다.

 

 

4. 시를 핑계삼다

 

삶은 천연덕스럽고 시는 몸부림친다. 시가 뒤척일수록 삶은 명료해진다. 삶이 선명해지면 시는 다시 헝클어버린다. 나는 시라는 말만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가슴 아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좋은 시를 읽으면 자동인형처럼 고개가 올라간다. 가슴에 차오르는 것을 누르듯이 책장을 덮는다. 방안을 한 바퀴 돌고나서야 다시 시 앞에 앉아 베껴 쓴다. 그러고 나면 어김없이 글쓰기 충동에 시달렸다. 시가 휘저어 놓아 화르르 떠올랐다가 층층이 가라앉는 사유의 지층들. 몸에 돌아다니는 말들을 어디다 꺼내놓고 싶었다. 꺼내놓고 싶은 만큼 꺼내놓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고유한 슬픔일지라도 언어화하는 순간 구차한 슬픔으로 일반화 되는 게 싫었다. 우리가 입을 다무는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던가. 말하고 싶음과 말할 수 없음, 말의 욕망과 말의 장애가 충돌하던 어느 가을 날, 나는 이미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말은 나를 떠났다. 계속 쓰고 싶었다. 궁여지책으로 사유를 자극한 시 한 편과 차오르는 말들을 나란히 블로그에 올렸다. 혹여 누가 그 섬에 닿더라도 시 한 수 나눈다면 덜 민망하리라 더 인정어리리라 생각했다. 그 후로 사는 일이 힘에 부치고 싱숭생숭이 극에 달하는 날이면 시를 읽고 글을 썼다. 글을 쓰고 싶을 때마다 시를 핑계 삼았다. 한해 두해 시간이 흐르고, 회한이 쌓이고, 시집이 늘었고, 눈물이 마르고, 아이들이 커가고, 올드걸의 시집이 자랐다.

 

 

5. 삶과 시의 합작품

 

이 책은 단순하게는 서른을 지나 마흔에 들어선 한 여성의 이야기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간식 챙겨주고픈 구닥다리 모성관의 소유자이자, 문득 일상을 전면 중지하고 홀연한 떠남을 꿈꾸는 몽상가이자, 시시때때로 아름다운 언어에 익사당하고 싶은 문자중독자이고, 밥벌이용 글을 써야하는 문필하청업자이며, 사람만나 이야기하고 그 소소한 행복을 글로 쓰길 좋아하는 데이트생활자인 나. 수많은 존재로 증식되는 나를 추스르느라 휘청거리며 살아온 날들을 담았다. 요란한 삶이고 빈 수레이다.

 

살면서 공부를 중단하지 않았지만 학위가 없고 책읽기와 글쓰기로 생활비를 벌지만 명함이 없고 시를 늘 곁에 두지만 등단이나 전공을 목표로 하는 건 아니다. 아무래도 능력이 닿지 않는다 해야겠다. 이런 나의 삶의 이력이 부끄럽지는 않지만 살면서 민망한 적 많았다. 하나의 목적으로 수렴되지 않고 성과를 축적하지 않는 삶은 설명하기도 이해받기도 어려웠다. 오직 노릇과 역할로 한 사람을 정의하고 성과와 목표로 한 생애를 평가하는 가부장제 언어로는 나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말이 바닥났을 때, 시가 내게로 왔다. ‘모든 것에 대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끝까지 말하려 하는 시’(황현산) 그 포기하지 않음에 기대어 존재증명을 시도했다. 동시에, 익숙한 나로부터 떠나는 연습을 일삼았다. 지금 나는 손에 쥔 것은 없으나 눈에 보이는 사람은 더 많아졌으니 그리 나쁘지 않은 삶이었구나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엄연하게는 삶과 시의 합작품이다.

 

이것을 왜 책으로까지 묶어야하는지 고민이 길었다. 블로그와 웹진 위클리 수유너머에 연재한 올드걸의 시집을 읽고 시가 좋아졌다’ ‘시집을 샀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용기를 냈다. 시의 사적소유가 아닌 시의 공적순환을 위해서 뻔뻔해지기로 했다. 내가 구상하는 좋은 세상은 고통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는 세상이다. 이는 아주 일상적으로는 끼니마다 밥 차리는 엄마의 고단함을 남편과 아들이 알아보는 것이고 음식점이나 편의점이나 경비실에서 일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것이다. 시를 읽는 것은 타자의 언어를 이해하는 일이고 나를 허물어뜨린 자리에 남을 들여놓는 행위이다.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고 존재가 존재를 닦달하지 않는 세상. 그것을 시에 곁들여진 수다가 조금이라도 도우면 좋겠다.

 

2011년 가을부터 연구실에서 세미나 말들의 풍경을 진행하며 열 명 남짓한 벗들과 함께 매주 토요일 시를 읽었다. 시의 이해도와 삶의 만족도가 동시에 상승했다. 말을 들어주고 말을 만들어가는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벌써 몇 해 전 일이다. 엄마의 돌연한 죽음으로 삶의 일회성을 자각했고 존재의 요청을 들을 수 있었다. 나로 하여금 생을 귀히 여기도록 영감과 자극을 준 눈물겨운 인연들이 있다. 이 책에는 수많은 타인의 지분과 체온이 깃들어있음을 말하고 싶다.

 

 

2012. 다시 가을

은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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