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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우 조명디자이너 -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신화는 어둠을 무찌른 빛의 승리로 시작된다. 일상도 다르지 않다. 밋밋한 일상에 불이 켜지면 멋진 신세계가 열린다. 이 마법에 반해버린 유학파 미술학도가 5분 양초, 스파게티 샹들리에 등 감각적인 작품을 히트시키며 ‘빛의 전사’로 등극했다. 시크한 낭만과 은근한 유머, 소통의 추구가 담긴 빛을 연출하는 차세대 조명디자이너 박진우를 만났다. 빛에 빠진 디자이너 강남에 자리한 그의 디자인 스튜디오 쥐엔피크리에이티브(ZNP Creative)는 ‘거의 모든 것의 박물관’을 연상시킨다. 형광색과 원색을 과감히 사용한 인테리어와 조명, 영화사 소품실과 만화책에서 빼내온 듯한 진기한 오브제가 꿈틀댄다. 작업대에서 전구와 공구세트를 만지는 그는 초록색 점퍼와 빨간 체크무늬 바지를 입었다. 공간도 사람도 수채물감의 은은..
택시기사님과의 토킹어바웃 아들이 다섯 살 때쯤이다. 연산력 강화를 위해 눈높이 수학을 시켰다. 그런데 매일 반복적으로 풀어야하는 게 안쓰러워 두어 달 하다가 끊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들이 모여서 금연에 관한 얘길 나누었다. “누가 담배를 끊었는데 어쩌구 저쩌구..” 그랬더니 아들이 물었다. “엄마, 눈높이도 아닌데 담배를 어떻게 끊어?” -.- 학습지도 아닌데 끊어야할 것이 있으니, 내겐 택시였다. 하지만 늘어난 백양 면팬티 고무줄처럼 이미 커진 씀씀이를 줄이기는 좀처럼 어렵다. 카드대금사용서 내역을 받아볼 때마다 뜨끔하다. 조금 서둘렀거나 참았으면 발생하지도 않았을 지출일 텐데 싶어 반성한다. 특히 이번 동절기엔 한파 강타와 건강 악화로 지출 급증이다. 후회하면서도 ‘빈차’의 빨간불만 보면 손이 번쩍 올라갈 때는 대략 두..
인터뷰 강의를 마치고 ‘인터뷰가 사랑의 메신저’ 새해 벽두 일간지를 장식한 제목이다. 어느 남자 배우와 여자 아나운서의 결혼소식인데, 아마도 아나운서가 배우를 인터뷰하다가 정이 싹튼 모양이다. 회심의 미소가 절로 고였다. 평소에 ‘인터뷰는 짧은 연애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눈빛을 읽어내려 애쓰는 등 타인의 우주로 진입하려는 소통 의지는, 연애의 기운을 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전문 인터뷰어는 죄다 바람둥이겠네? 라고 물어서는 아니 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운명의 행로를 바꾸는 사랑은, 그렇게 자주 오지 않으므로. 꽃다운 청춘들과 인터뷰 수업을 하게 됐을 때, 사실 난감했다. 연애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을까? 어느 시인은 ‘효모에게 술이 되는 법을 가르칠 수 없듯이 시 쓰기를 가르칠 수 ..
카프카 <소송> 읽혀지지 않는, 읽고싶어지는 “학교 다닐 때부터 그렇게 읽고 싶었는데 이제야 읽었다. 와. 진짜 재밌더라.” 세미나 시간. 쥐-그래피티 이후 예술가를 참칭하고 다니는 박모강사가 들떠 말한다. 예술적 감성이 폭주하는지 요즘 들어 음악에도 부쩍 관심을 보이는 그. 예술가연 한다고 나한테 놀림을 당하는데, 카프카 소설마저도 솜사탕처럼 스르르 소화시킨 모양이다. 나는 푸념했다. 소설은 역시 나랑 안 맞는다고. 읽고 있으면 따분하다고. 특히 카프카는 난해하다. 내러티브가 익숙하지 않다. 골짜기를 탐험하면서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는 구조. 정상은 끝까지 나오지 않고 어둠도 걷히지 않다가 종말에 와서는 무죄를 밝혀내지도 못하고 맥없이 죽는 주인공이라니. 한 없이 건조하다. 물론 해설서를 보면 ‘작품의 의의’를 이해는 하지만 읽으면서 책에 머리 박..
발렌티나 리시차와 함께 한 일요일 오후 Valentina Lisitsa -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월광 3악장 '소낙비를 맞고 나면 우산이 필요없지' 여고생 때 팬시노트를 모았다. 내 책상서랍은 메모지와 편지지까지 가을날 낙엽이 쌓인 곳간이었다. 만년필로다가 시집이나 책에서 본 아름다운 글귀를 옮겨적었는데 거기에 써 놓았던 문구다. 어린 나이에 왜 저 말이 좋았을까. 겉으론 얌전한 아이였지만 안으론 폭풍같은 삶을 꿈꾸었는지 모른다. 우산도 없이 소낙비를 맞으며 거리를 떠도는 장면은 노래방 뮤직비디오 배경화면으로도 쓰지 못할 삼류영상이겠지만, 가끔 꿈꾼다. 소낙비에 흠씬 젖은 나. 그러고 나면 마음에 풀썩이는 먼지가 싹 가라앉고 비갠 뒤 아침처럼 미풍 살랑이는 평화로운 날들이 펼쳐질 것같다. 그런데 원할 때 비가 내리지 않으니까, 또 남의 시선이 ..
46 빈 손 / 성기완 당신을 원하지 않기로 한 바로 그 순간 나는 떠돌이 가 돼 그것을 놓았는데 다른 무얼 원할까 그 무엇도 가지기가 싫은 나는 빈 손, 잊자 잊자 혀를 깨물며 눈 을 감고 돌아눕기를 밥먹듯, 벌집처럼 조밀하던 기억 의 격자는 끝내 허물어져 뜬구름, 이것이 내가 원하던 바로 그것이긴 한데 다시 생각해보면 어떻게 이렇게 잊혀지고 말 수가 있을까 바로 그 때문에 슬픔은 해구 보다 더 깊어져 나는 내 빈 손을 바라보다 지문처럼 휘도는 소용돌이 따라 망각의 물로 더 깊이 잠수하 며 중얼거려 잊자 잊자 - 성기완 시집 문학과지성사 “요즘 뭐 하고 지내셨어요?” “방황하면서 지냈어요.” 말해놓고 나니 푸푹 한숨 같은 웃음이 터졌다. 2010년 마지막 날, 수녀님과 이별을 고하기 위해 마주했다. 지난 일 년 수녀님들이 만..
공유정옥 노동보건활동가 - 나는 삼성직업병 통역하는 사람 삼성 직업병 피해자 관련 영상자료를 보다 보면 젊은 의학전문가가 등장한다. 한번은 긴 머리, 한번은 짧은 머리, 안경을 쓸 때도 있다. 인상은 매번 다른데 소견을 밝히는 야무진 말투와 ‘의사 공유정옥’이란 자막은 똑같다. 동일한 인물이다. 세월의 폭이 느껴지는 모습이 말해주듯 그는 일찌감치 노동자 편에서 일했다. 금속·자동차 노동자들의 작업환경 개선과 산재보상을 일궈낸 노동보건운동 활동가로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발족에 참여하는 등 삼성 직업병 문제를 세상에 알리고 공론화하는데 힘썼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공중보건학회(AHPA)의 ’2010 산업안건보건상(Occupation Health & Safety Awards)’ 국제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하지만 노동자 건강권을..
방황이 끝나갈 무렵 어느 토요일 오후. 밖에 있는데 꽃수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집에 오니까 가스레인지에 불이 켜져서 수레가 껐어. 뚜껑을 열려고 행주를 댔더니 치익~ 소리가 나서 무서워서 안 열었어.” 그 얘길 듣고서야 불현 듯 가스불을 켜던 순간이 생각났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을 올려놓았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국도 아니고 찌개도 끓이지 않았다. 도대체 가열해서 요리할 것이 없는데 뭘까? 집에 가서 냄비를 보고서야 알았다. 오랜만에 보리차를 끓인다고 물을 한 냄비 가득 올려놓았음을. 냄비가 외롭게 몸을 데우다가 태우고 있었을 시간을 헤아려보니 무려 1시간 반이다. 냄비가 잿빛으로 변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불이 났을까. 그 생각을 하자 한숨이 나왔다. 안도의 한숨이 아니라 나의 허술함을 개탄하는 한숨이다. 이틀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