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기계화 기계의 노동자화

[스피노자맑스]

 

맑스의 <정치경제학비판요강>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 2권에 나온다. '가처분 시간이 부의 척도가 된다'는 것. 돈이냐 시간이냐의 이중구속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현대인의 삶의 출구로 삼아야할 금언이 아닐런지. 버마의 소(음메)도 한나절 일하면 쉬는데 한국사람들 너무 일을 많이 해서 놀랐다던 소모뚜씨의 말이 생각났다. 가처분 시간이 부의 척도가 되는 사회적 개인의 출현. 여기까지는 이해가능. 그런데 이 사회적 개인의 출현이 곧 부르주아 사회의 지양이 된다는 게 구체적으로 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독일이데올로기>에 나오는 그 유명한 아침에 농사 짓고 오후에는 낚시 하고 저녁에는 비평하는 삶. 내가 아는 가장 고급한 삶이 우리들 살아가는 삶의 양식이 되는 그날을 꿈꾸며.  

 

   

* 자본가는 왜 노동자를 기계로 대체하는 걸까

 

-기계의 도입은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킴으로써 잉여가치를 증대.

생산성의 혁신은 노동일의 연장 없이도 잉여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방법.

- 노동과정 실질적 장악 :

독립수공업자의 기계사용 - 기계를 전면적 장악. 근무량 작업시간 외면적 강제 (형식적 포섭)

대공장의 복합적 기계체제 - 노동자는 고유의 노동리듬 상실하고 전적으로 기계의 리듬에 맞춰 노동 (실질적 포섭)

- 노동가능한 인구층 증가 - 아동, 여성.

- 노동일의 연장 - 기계가 자신의 조수인 인간들이 육체적 정신적 한계에 부딪히지 않는다면 생산 계속 가능.

- 새로운 기계의 발명은 튼튼한 옛기계를 죽음으로 내몰기 때문에, 자본가로서는 투자비를 잃지 않기 위해 기계를 놀릴 수 없음.

- 기계는 노동자 저항 진압하는 수단 "기계는 자본의 독재를 반대하는 노동자들이 주기적 반항인 파업을 진압하기 위한

가장 유력한 무기"

 

---> 기계에 의한 생산성 혁신이 노동의 절약으로 이어질 것 같지만, 실제로는 노동인구 확대와 노동일 연장으로 나타난다. 기계는 노동자의 부족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노동인구가 많은 곳에 그들을 대체하기 위해 들어온다.

 

= 자본가는 '온순하고 말이 없으며, 그러면서도 아주 강력한' 이 새로운 노예 속에서 자신의 유토피아를 발견.

노동자는 기계를 적대세력으로 발견 - 기계파괴운동

 

* '자본가가 출현시킨 기계'에서  '기계가 출현시킬 세계'로 관심 이동

 

: 자본가가 기계를 도입한 이유 - 기계의 도입이 자본주의에 초래할 변화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

: 기계와 노동자가 적대가 아닌 구별불가능한 지대로 이행해갈 수 있음

"기계는 어떤 관계에서도 개별적으로 노동자의 노동수단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기계의 특유함은 노동자의 활동을 대상에게 매개해주는 데 있지 않다. 노동자의활동이 기계의 노동을 매개한다."

-> 노동도구는 노동자의 기교와 숙련에 의해 좌우. 그러나 거대기계장치 공장에서 노동자는 기계의 리듬, 기계의 역학법칙에 복종. "노동자는 생산과정의 주행위자가 아니다. 그는 기계의 한 관절에 지나지 않는다."

 

= 맑스는 노동자가 기계 장치의 부품이 되는 경향과 기계가 살아 있는 노동자처럼 되어가는 경향을 함께 기술한다.

"기계는 스스로가 기계에서 작용하는 역학법칙들로 자기 혼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지속적 운동을 위해 마치 노동자가 식량을 소비하듯 석탁과 기름을 소비하는 명인이다."

-> 기계야말로 종합하는 자, 통일하는 자

 

* 자본이 꿈꾸는 미래, 기계가 꿈꾸는 미래

 

- 자본이 골치 아픈 개별노동으로부터 독립하려고 시도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자본이 부의 창출을 개별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노동에 덜 의존하기 위해 만든 "사회적 교류와 결합, 과학과 자연의 모든 힘의 소생"이 계속 자본의 가치축적을 위해 필요한 한계 내에 묶여있을 것인가. 자본은 꽤나 위험한 힘을 명부에서 소환하고 만 게 아닐까.

- 기계가 노동자들과 융합하고 네트워크를 통해 사회적 신체를 구성함으로써 '일반지성'을 가진 네트워크로 연결된

  '다질적 집합적 신체'가 탄생하는 건 아닌가.

 

-> 자본주의는 '고정자본'으로서 인간 자신의 발전, 다시 말해 다양한 능력을 가진 완성된 인간을 향해 나아가지만,

이 고정자본으로서 인간 자신은 부르주아 사회의 도달점이자 그 지양의 출발점이 되는 건 아닌가.

 

- 맑스의 인간해방 : 인간의 본래성 회복에 둔 청년기(1842)의 발상과는 반대로, 인간과  기계의 구분이 불분명해지는 지대 속에서, 다시 말해 인간의 죽음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떻든 '사회적 개인'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381)

 

"한편으로는 필요노동시간은 사회적 개인의 욕구들을 자신의 척도로 삼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이 빠르게 이루어져서 생산이 모두의 부를 목표로 해서 이루어진다 해도

모두의 가처분 시간은 증가한다. 왜냐하면 실질적인 부(잉여가치)는 모든 개인의 발전된 생산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코 더 이상 노동시간이 아니라 가처분 시간이 부의 척도가 될 것이다."(384)

 

"노동시간을 절약하는 것은.. 향유 능력뿐만 아니라 향유수단의 발전, 향유 능력은 향유를 위한 조건 즉 향유의 첫번째 수단이다. 그리고 이 능력은 개인적 소질, 생산력의 발전이다."(388)

 

"우리에게 부르주아 경제체제가 점차로 발전되듯이, 이 경제의 마지막 결과인 그 자신의 부정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부르주아 사회를 고찰하면 사회적 생산 과정의 마지막 결과로서 그곳에서는 언제나 사회 자신,

즉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인간 자신이 나타난다." (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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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반복과 허무주의

[스피노자맑스]

예전에 사보취재 다닐 때 들은 얘기다.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곳이었는데 본사가 부산이었다. 서울 사무소 직원이랑 취재를 마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아무 생각 없이 KTX가 생겨서 왕복시간이 단축되니 덜 피곤하고 좋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모르는 소리 말라고 한숨이다. 새마을호 시절에는 어차피 하루만에 다녀오질 못하니까 부산에서 일 보고 회도 먹고 바다도 보고 좀 놀다가 다음날 왔는데 KTX가 생기니 당일출장 처리가 되고 다음날 피곤한데 또 출근해야해서 더 힘들다는 것이다. 나는 오래 기차나 버스를 타면 멀미나서 힘드니까 시간이 단축되면 좋다고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산업자본주의 초기에 가장 먼저 철도가 깔렸다. 물품운송. 자급자족하던 공동체에서 물건이 '상품'의 외형을 띠고 공동체 바깥으로 나가려면 길이 필요했다. 나치집권 시기에도 토건자본은 부흥기를 맞았다. 사람운송을 위해 철도 깔고 수용소 짓느라고 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굴뚝산업이 발달한 영남지역에 일찌감치 널찍하게 뚫린 고속도로. 운송수단이 발달하는 것은 자본의 순환에 전적으로 기여한다. 그렇게 자본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의 더 큰 폐해는 착취의 강도가 높아지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의 감각을 '빨리빨리'로 바꿔놓아사람을 쫓기고 불안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KTX가 생기면서 바깥풍경도 사라지고 사람사이 대화도 사라진 것처럼.자본의 속도가 빨라지면 자본에 종속된 일반인의 삶도 빨라진다. 삶이 쫓기는 것은 목적만 보기 때문이고 목적만 바라보면 주변부의 작고 약한 존재를 놓치고 밟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인터넷 서점과 쇼핑몰의 '당일배송'이란 문구만 봐도 숨이 막힌다. 저 당일배송, 30분 배송 등 고객만족을 위해 죽어가는 건 배달노동자고,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각박한 삶의 공기를 형성해서 나에게도 나쁜영향을 미친다.     

 

얼마전 화물연대는 못자고 못먹고 과적하는 등 무리한 운송업무에 시달리다 못해 파업에 돌입했다. 사람보다 돈의 원리로 작동하는 자본. 그 자본은 유통속도를 '0'화하려는 의지(허무주의)가 있다는 맑스의 분석. 회전속도가 잉여가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생산물의 가치를 실현하려고 하는 경우 '거리'는 생산비용 증대로 나타난다.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으려는 자본의 시도.  저렴한 수송 및 통신수단의 생산은 자본에 기초한 생산의 조건이 된다며 맑스는 "시간에 의한 공간의 절멸"이라고 말한다. 도로의 경우는 개별자본의 특수한 이해가 아니라 자본 일반의 이해가 달려있는 생산조건이다. 자본이 도로건설을 필요로하고 또 도로가 수익을 낼 수 있기 위해서는 "대규모 교류를 전제"해야 한다. 사업의 필요성은 크지만 수익이 작을 경우 "자본은 철도를 국가 부담으로 전거시키거나..국가적 욕구로서 나라 전체에 미룬다. 자본은 이익이 있는 사업들..이익이 되는 사업들만을 수행한다."

 

유통시간 없는 유통

 

* 자본의 회전 

:  화폐 -> 노동과 생산수단-> 생산물 -> 화폐로 전환되는 순환 

"자본의 화전에서는 출발점이 귀환점으로 정립되어 있고 귀환점이 출발점으로 정립되어 있다"

 

- 자본순환의 중요성. "생산과정은 상품이 화폐로 전환되기 전에는 새롭게 시작될 수 없다.. 한 생산국면이 다른 국면으로 막힘없이 흐르듯이 이행하는 것이, 과거의 모든 생산형태들에서와는 전혀 다른 정도로 기본조건으로 나타난다."

- "주어진 시간 동안에 얼마나 많은 생산물이 생산될 수 있는가, 주어진 시간 동안에 자본이 얼마나 자주 증식될 수 있는가, 그것의 가치를 재생산하고 배증시킬 수 있는가는 유통의 속도, 유통이 경과하는 시간에 좌우된다."

 

* 자본의 회전을 결정하는 시간은 크게 두 가지 - 생산과정과 유통과정

 

->유통은 생산과정에서 정립된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일 뿐 가치를 창출증식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가치 감소를 초래.

    유통시간을 단축시킬수록-자본의 회전을 늘릴수록- 자본에 유리하다.

-> 자본은 가치증식을 위해 생산과정 - 잉여노동시간 늘림, 유통과정- 자본의 회전수 늘림

-> 유통속도가 빠르면 자본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아도 동일한 더 많은 잉여가치를 낳을 수 있다

    '유통속도가 자본의 크기를 대체할 수 있다. 그러나 유통은 가치자체에는 아무것도 추가하지 않는다.

 

"자본은 한편으로 교류, 즉 교환의 모든 장소적 제약을 무너뜨리고 지구 전체를 그의 시장으로 정복하고자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에 의해 공간을 절멸시키고자 한다."

---> 유통시간 없는 유통은 자본의 필연적 경향

 

* 자본가의 횡탈   

자본가가 자신의 시간을 바쳐서 유통에 나섰다고 해도 그것은 과잉시간, 비노동시간,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 시간이다.

유통비용은 자본가의 시간이 아니라 노동자의 시간을 빼앗은 것. 노동자가 창출한 잉여노동시간을 소모하는 과정이다.

"자본가는 사회를 위해서 노동자들에 의해 차출된 자유시간, 즉 문명을 가로챈 것이다."

 

* 생산과정 자체의 기술적 조건이 자본의 회전에 미치는 영향 문제 제기

-> 만약 농업처럼 어떤 자연적 조건에 따라 일정시간 동안 대지에 작물의 성장을 맡겨놓고 기다려야 한다면,

즉 생산과정 내에서 산 노동의 결합을 중단시킬 수밖에 없다면 자본의 회전에 영향을 미친다. (비생산적)

 

자본의 소유통과 대유통

 

* 소유통:  노동자에게 급료지급 부분-> 가장 순수한 형태의 유동자본.

 "자본과 노동력 사이의 소유통은 자본 자체를 정립하고 자본의 증식과정의 조건이며 자본의 한 형태 규정, 자본의 실체도 정립한다"

* 대유통: 자본이 유통시간으로 나타나는, 생산국면 바깥의 자본운동.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구분

 

맑스는 고정자본-유동자본을 그 형태와 내용,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차이에서 해명

* 고정자본은 생산과정에서 고정. 생산과정 자체에서 소비되고, 다만 소멸하면서 가치를 유통으로 넘겨준다.

사용가치는 남지만 교한가치는 넘어간다.

"고정자본은 생산과정에 들어가서 머물자마자 생산과정에서 사라지며 소모된다."

-> 유동성이 커보이는 사물들 포함. 석탄, 목재, 기름, 수지 등 도구재료

* 유동자본은 사용가치가 양도될 때 교환가치도 실현된다.

 

* 고정자본의 자본의 구성부분이 증가함에 따라 자본의 유통시간이 증가한다.

"일정시간에 그것의 재생산 횟수가 감소함에 따라, 또는 일정한 시간에 재생산되는 자본의 양이 감소함에 따라" 잉여가치의 생산이 감소. 

->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즉 기계화가 현실화될수록 이윤율은 내려간다.

 

* 자본의 회전을 줄이는 규정들

1) 고정자본의 경우 생산과정에서 천천히 소비되므로 자본의 회전을 감소시킨다.

2) 멀리 떨어진 시장. 생산물의 화폐로의 전환에 소요되는 시간 때문에 자본의 회전을 감소시킨다.

3) 농산물처럼 생산과정에서 생산물이 나오는데 시간이 걸려서 자본의 회전이 감소될 수 있다.

 

자유경쟁에서 나오는 자유환상

 

* 자유경쟁에서 자유롭게 정립되어 있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자본이다.

"자신이 강하다고 느끼자마자 자본은 지팡이를 내던지고 자기자신의 법칙에 따라 운동한다."

-> 이 법칙, 이 외적인 필연성의 현실화가 자유경쟁. 이런 자유는 "모든 개인적 자유의 가장 완벽한 지양이다."

* 자유경쟁 찬미자들이 떠들어대는 "개인들의 사적이익 추구가 일반이익을 실현한다"는 말은

사적인 이익 충돌들의 상호작용이, 자본에 기초한 생산조건들을 재산출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맑스 읽고 나면 서늘하다. '나의 차가운 피를 용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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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목표량이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일

[스피노자맑스]

# 미래노동을 점유당한다

 

자본의 생산과정에서 잉여가치가 생겨났는데 잉여가치의 등가물은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노동속에만 있다" 자본이 잉여가치를 산출하는 한, 그것을 자본으로 재투자하므로, 자본가는 현재의 노동을 점유함으로써 동시에 미래 노동도 점유한다는 것. 그래서 자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걸까. 맑스 분석대로라면 노동자는 현재에 자본에 복무함으로써 미래 자본에까지 복무하는 거니까.

 

# 잉여가치율과 이윤율은 다르다

 

예: 자본 100= C (원료50+도구10)+ V(필요노동40)+ S(잉여노동40) = 140

 

생산물의 가치는 C원료+V필요노동+S잉여노동 =140

가치생산물은 V필요노동+S잉여노동= 80  

잉여가치율 (필요노동에 대한 잉여노동의 비율 )40/40 = 100%

이윤율 (투자에 대한 이윤비율) 40/100 = 40%

 

 "계산은 지옥에나 떨어져라" 라고 말한 맑스의 심정이 이해가는 무수한 수식이 많은 분량 나오는데  중요한 것은,

 

- 이윤율과 잉여가치율은 다르다.

- 잉여가치율은 착취율이다.

- 기계화 등으로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이윤율이 떨어져도 잉여가치율이 올라갈 수 있다.  

 

# 자본주의 인구법칙

 

현미경 들고 좁쌀영감처럼 주판알 두드리던 맑스가 이제 망원경을 든다. 일개의 노동자와 일개의 자본가 대립이 아니라 '노동일' VS '임금총액'으로 접근한다. 잉여가치 창출을 위해 뭐든지 하는 자본가. 그들의 주된 노하우는 필요노동줄이기, 노동인구 창출하기, 시간도둑질 등등.

 

"잉여노동량의 증가는 한 개인의 살아있는 노동일이 설정하는 자연적 한계를 뛰어넘기다"

 

그러니까 8시간 계약해놓고 10시간어치 일 시키기. 작업 반장을 배치해서 한 눈 팔지 못하게 작업효율 높이기, 음악틀어 놓아서 졸지 못하게 하고 야간노동 시키기 등등. 인간의 생리적 한계에 도전하는 초과노동에서 나아가 "노동일 곁에 다른 노동일을 동시에 정립하기" 즉, 조밀한 손작업 등이 요구되는 생산라인에 성인남성 외에 부녀자와 아동을 노동인구에 추가하면서 착취의 외형을 마구마구 늘린다.  

 

"과잉인구는 자본축적의 새로운 지렛대가 된다. 과잉노동인구는 자본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산업예비군'이 되어

호황, 활황, 공황, 침체의 자본축적  사이클에서 자본이 받을 충격을 완화시키는 완충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고동노동자에게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임금을 감내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동한다...예비군 경쟁이 취업자들에게 가하는 압박이 취업자로 하여금 과도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 실업자들이 대기하고 있으면 자본가는 취업자들에게 더 많은 노동을 아주 당당히 강요한다. "니들 아니라도 일할 사람 줄섰다" --> 노동자의 증대없는 노동의 추가공급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한강의 기적, 눈부신 발전도 그렇게 이뤄졌다. ==> 자본주의는 필요를 충족한 뒤 잉여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잉여를 창출해야만 하는 사회다. 이는 맑스가 옛날 사람이라 옛날에만 있었던 일은 아니라, 지금도 버젓이 진행중. 구로공단이 사라지고 구로디지털단지로 이름을 바꾸고 건물에 회칠하고 대리석을 깔아도 착취는 맑스가 분석한 구시대 수법 그대로. 유성기업은 작년부터 '밤에 잠 잘 권리'를 주장하며 야간작업 철폐 투쟁 중이다.  전태일 평전은 물론이고 김진숙의 책에도 가혹한 노동착취의 실상은 눈물겹게 자세히 나온다.

 

"회사 옥상에 높다랗게 붙어 있던 ‘수출만이 살길이다’라는 큰 간판이 언젠가 ‘수출강국’으로 바뀌어도 전혀 강하지 못했던 아이들은 그 간판 아래 짓눌린 채 버려진 배추 잎사귀처럼 누렇게 시들어 가고 있었다...욕먹는 일, 매 맞는 일, 개중에 예쁜 아이들 엉덩이 주물리는 일, 매일 목표량이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일, 수당도 없는 연장 작업을 거의 매일 하게 되는 일, 그런 일이 부당한 일이라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지만, 점심 시간 줄 서 있다 어쩌다 한 번씩 하늘과 눈이 마주치면 갑자기 편도선이 부은 것처럼 목울대가 뻑뻑하게 아파서 밥이 잘 안 넘어간다든지, 집에 편지를 쓴다고 화창한 일요일 기숙사 창문 아래 배를 깔고 엎드려 ‘어머니 아버지 보세요.’ 한 줄만 써 놓고는 편지지에 눈물 콧물 칠갑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든지, 그럴 때는 뭔지 모르게 자꾸 억울하다는 생각이 치밀고는 했다."    

 

 - 김진숙 <소금꽃나무>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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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교환가치이길 중단하려면

[스피노자맑스]

 

"임금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재생산도 포함한다. 그리하여 노동계급의 이 표본이 죽으면, 다른 표본이 그를 대체한다. 50명의 노동자가 죽으면, 이들을 대체하기 위해 다른 50명이 나타난다." (정경비요1권 -368)

 

어른들을 위한 '잔혹동화' 한 구절을 같다. 뻔한 얘기.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인데 '나타난다'라는 동사가 낯선감성을 일으킨다.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는 걸까. 무한증식 무한복제 가능한 존재로 산다는 것의 쓸쓸함.  한 존재가 쉽게 다른 존재로 대체된다는 게 자본주의적인 폭력구조를 가장 잘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쌍차 분향소의 22개 영정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22명의 죽음은 22명의 다른 노동자로 대체되어 자동차는 차질없이 생산된다. 엠비시는 파업 130일을 넘겼는데도 방송은 그런대로 멀쩡히 진행되고. 재능노조는 61일로 농성1625일이라고 했다. 이제 투쟁사업장에서 천일은 기본. 쌍차걷기대회에서 단식농성 20일 넘긴 언론노조 위원장이 그랬다. 엠비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제 시작이라고.

 

맑스가 말하는 착취는 노동자가 자기 몫을 챙기지 못하는 부등가교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환가치 자체의 착취 구조를 문제삼는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게끔 되어있는 구조. 자본주의에서 생겨난 이 교환가치 시스템이란, 더 많은 잉여가치를 창출하려는 끊임없는 자가증식 운동이다. 잉여가치는 노동자의 능력을 사용해야 생기므로, 노동은 잉여가치의 원천이 된다. 생산수단이 박탈된 자유로운 개인(굶어죽을 자유를 가진 개인)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팔고 자본에 피땀을 흡빨리면서 임노동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꿈의 직장이라 불리는 구글도 예외없다. 자본의 질서에 들어갈 때만, 자본의 이익에 복무할 때만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나아가 자아실현의 꿈을 펼칠 수 있는데, 그래서는 안된다는 게 맑스의 주장이다. 여기서 발생되는 물음. 자본의 외부는 어떻게 창출하는가.  

   

공장이나 자본을 매개하지 않고서 바깥 세상과 관계 맺고 자아실현을 경험할 수는 없을까.

노동이 (교환)가치이길 중단하고, 노동이 자기단련이 되는 길은 없을까.

일할수록 피폐해지지 않고 일할수록 자아확장이 일어나는 그런 노동을 맑스는 단련이라고 불렀다.  

 

맑스의 또 한 가지 문제제기. 노동자가 일하지 않으면 원자재는 썪는다. 기계는 먼지가 쌓인다. 공장은 폐가가 된다. 가령 집에서 엄마가 일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시들고 냉장고 야채도 썪고 집안이 난장판이 되는 것과 같다. 고로, "노동은 죽은 것을 살려내는 불이다." 그런데 정작 그 불의 담지자인 노동자는 복락을 누리지 못하고, 자본가는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고 보물을 얻는다는 게 맑스의 지적이다. 노동자가 노동을 발휘해서 물건만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손길이 닿지 하지 않았으면 쓰레기가 됐을 그것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데 그에 따른 대가는 지불받지 못한다는 거다. 꿩먹고 알먹는 자본가. 노동자는 이중삼중 보상을 받아도 시원찮을 판에 이중삼중 착취를 당한다. 맑스 읽으면 심란하다. 한 인간이 피조물 상태에서 세계내존재로 던져져서 삶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일이 왜 이렇게 고달픈 곡예가 되어야하는 걸까. 왜 노동자는 평생 일하고도 가난하고 고달픈가. 이 부조리한 세상은 왜 이렇게 잘도 돌아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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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학비판요강 - 화폐와 자본 그리고 노동

[스피노자맑스]

<정치경제학비판요강1>172~308 요약 

 

1. 화폐의 기능형태

화폐는 모순되어 보이는 기능들의 복합체다. 맑스는 화폐가 어떤 기능적 형태를 취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역할, 역사, 그로부터 초래되는 위기들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강조한다.

1) 가치척도: 상품들이 교환되기 전에 이미 전제되는 척도로서의 화폐. 척도로서의 화폐는 계산화폐로 기능한다. 가격으로서의 상품은 관념적 화폐로 전환된다.

2) 유통수단: 상품이 화폐로 실현될 수 없다면 그 가격은 단지 상상에 머물 뿐이다. 화폐는 모든 사물의 형리이고 모든 것이 바쳐져야 하는 화신이며, 모든 상품의 전제군주가 된다.

3) 화폐로서의 화폐: 부의 축적. 화폐가 가치척도나 유통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순환. "화폐는 더 이상 수단으로도 척도로도 현상하지 않고 자기목적으로 현상한다“ -> 자본으로서의 화폐 규정을 예감.

 

* 유통수단으로서 화폐도식 W(배추)-G()-W(자전거): 화폐는 유통바퀴로서 유통에 머묾. 영구기관으로서 끊임없는 자기회전.

* 화폐와 화폐를 상품이 매개하는 도식 G()-W(배추)-G(): 화폐가 상품들의 단순한 교환수단으로서, 중간자로서, 결론의 소전제로서 나타나는 형태와는 특유하게 구별된다. “화폐도 유통으로부터 이탈될 수 있음을 보여줌.

 

** 화폐 그 자체를 목적으로 유통에서 퇴장시킨다는 것 - 화폐가 부의 보편적인 물적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화폐는 모든 사물 중의 일반자이다. 단순한 유통수단일 때는 종의 형체였지만 부의 일반적 대표자로 인식되는 순간 그것은 상품세계의 지배자이며 이 된다. “화폐는 욕망의 한 대상에 그치지 않고 욕망의 유일한 대상이 된다.” -> 치부욕의 탄생. 물욕은 화폐가 없어도 가능하다. 그러나 치부욕은 역사적 산물이다. 치부욕의 발전은 개성의 부재와 공동체의 몰락을 초래한다.

 

2.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

1) 교환의 사회이론:

자연은 환율이나 은행가를 낳지 않듯이 화폐도 낳지 않는다.” 화폐를 역사적으로 발전된 생산관계와 상관없이 설명하면서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내재적 대립이 단순히 파악된 화폐관계에서 해소된 것으로 현상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더욱 다시 화폐로 도피한다.

 

2) 화폐제도의 발전은 표면적으로 자유와 평등 체제의 실현. 판매자에게는 구매자가 왕이든 노동자든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심층으로 다가서면 피상적 동등성이 사라진다. 교환가치가 생산체제의 기반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들이 생산물이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것의 규정을 따른다는 강제가 내포 됨. “결코 개인의 의지나 직접적인 본성으로부터 유래하는 전제가 아니라 역사적인 전제일 뿐만 아니라, 개인이 이미 사회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정립된다.”

-> 노동과 자본의 대립 잠재 : 일한 만큼 받지 못했다는 부등가교환만을 착취로 이해하고 교환가치 자체의 착취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문제 = 교환가치 체제가 이미 폭력적이라는 것.

 

3) 자본의 규정에 대한 경제학적 통념 비판:

순수유통에서 존재하는 것과 같은 교환가치의 단순운동은 결코 자본을 실현할 수 없다. 유통의 외양 뒤에서 진행되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것의 전제는 노동에 의한 상품의 생산, 교환가치로서의 상품의 생산이다.”

 

* 자본을 자본이게 하는 형태규정. “생산을 위한 수단이 되는 모든 대상화된 노동이 자본인 것은 아니다.” 만약 자본이 축적된 과거의 노동일뿐이라면, 자본은 모든 사회형태에 존재했으며 전적으로 비역사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잘못은 자본을 인간적 생산의 특수하게 발전된 역사적 단계로 만드는 특유의 규정을 추상해버리기 때문에 일어난다.

 

** 자본은 관계로 파악해야지 사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프루동이 생산물과 자본을 동일시했던 이유는 그가 자본이 관계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A는 그 자체로 노예가 아니다. 그는 사회 속에서, 사회에 의해서 노예가 된다.”

 

4) 자본에 대한 규정: 첫째. 유통을 전제하고 유통 속에서도 보존되는 것. 단순유통에서 교환가치의 실현은 사라지는 실현이다. 자본은 유통을 전제하지만 유통을 통해서 또한 보존되어야 한다. “자본은 번갈아 상품이자 화폐이다.” 둘째. 노동을 매개로 증식되는 교환가치. “노동의 단순한 등가물, 노동의 단순한 대상화가 아니라 그 자체로 갱신되고 스스로 다시 유통을 시작하기 위해 노동에게만 바쳐지고 노동의 재료가 되는그런 교환가치로 스스로를 정립.

 

5) 대상화된 노동: 아무리 큰 화폐액도 그 자체로 자본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일정함이라는 한계, 그 규정을 넘어서는 무한성이 자본의 규정. 자기 증식하는 가치’. 어떤 사용가치가 자본에 마주하려면 화폐를 증대-배가 시키며 자본으로서 보존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 모든 상품들의 공통적인 실체, 교환가치들로서 그것들의 공통적인 실체는 대상화된 노동이다.

 

3. 자본과 노동의 교환

1) 자본가와 노동자의 교환: 노동자와 자본가의 교환은 등가적이다. 이 교환을 통해 자본가가 받는 것은 타인의 노동에 대한 처분이라는 사용가치다.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자 자신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시간.

* 임노동의 탄생: 임노동은 토지소유에 대한 자본의 행위에 의해 창출된 것. 토지에서 불필요한 입들을 청소하고 대지의 자식들을 그들이 성장한 가슴에서 떼어냄. 생산수단의 폭력적 박탈.

 

2) 절제와 근면, 그리고 박애: “최대의 근면, 노동과 최소의 소비는.. 그가 최대의 노동에 대해 최소의 임금을 받는 결과를 낳고, 노동의 일반적 가격을 낮춘다...일반적인 절약은 그들의 임금이 너무 높다는 것을 자본가에게 보여줄 것이다.” 노동자는 어느 정도 절약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설 수는 없다. 다만 환상으로서의 일반적 부가 그를 추동할 뿐이다.

 

* 맑스의 조언: 어느 정도 저축이 가능할 때 (노예와 구별하는 몫) 정서적 향유 범위를 넓혀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선동, 신문구독, 강의청취, 자녀양육, 취향발전 등.

 

* 부르주아적 박애의 위선적 구호. “어떤 자본가든 그의 노동자들이 저축할 것을 요구하지만, 단지 그의 노동자만 저축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에게 노동자로 마주 서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노동자 세계는 결코 저축해서는 안 되는데, 그들은 자본가에게 소비자로 마주 서 있기 때문이다.”

 

** 노동자가 절약을 통해 자본가가 될 수 있다는 환상. 절약을 통해 집적한 화폐가 자본이 되려면, 그것은 다시 노동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것은 비자본인 노동을 가정하고 요구하는 것. “한 점에서는 지양되어야할 대립이 다른 점에서는 수립된다.” 자본이란 비노동으로서만 자본이므로, 자본이 자본이기 위해서는 노동이 자본에 마주서야 한다.”

 

3) 자본은 비노동이고 노동은 비자본이다: 노동자가 끊임없이 반복된 노동 후에 언제나 살아있는 직접적인 노동 자체만을 교환해야한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매일 반복할 생명력을 주는 게 아니라 노동자의 생명력을 낭비한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20년 동안 지출할 그의 전체 노동능력을 가져간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매번 생명을 부여하는 게 아니라 20년의 생명을 매번 조금씩 나눠 쓰고 있는 것이다. -> 자본은 노동자의 시체더미다.

 

* ‘자본은 필요하지만 자본가는 필요하지 않다는 일부 사회주의자들의 주장 반박: 대자적으로 실존하는 노동이 노동자이듯 대자적으로 실존하는 자본 역시 자본가이다. 자본을 개별적인 자본가에서 분리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유일한 노동자에게 맞서 있는 유일한 자본가로부터 분리시킬 수는 없다계급적 재생산. 뼈아픈 적대의 확인. 자본이냐 생명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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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인간의 나라'

[스피노자맑스]

‘이게 인간의 나라인가’ 신문을 펴는 순간 움찔했다. 어제(11/16)김종철 선생님이 한겨레에 쓴 칼럼 제목이다. 이게 인간의 나라인가. 시의적절한 물음. 아니 질타, 한숨... 나의 괴로움을 대변해주는 한줄 요약. 얼마 전부터 깊은 통증을 느꼈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부터 같다. 인간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다. 물질화된 세상, 믿기지 않는 험악한 가난과 착취의 실상들. 인간이 징그러웠다. 저 인정머리 없는 기업주들. 못 자고 못 먹고 신음하는 어린 아이들을 데려다 화장실도 못 가게하고 일을 시키다니. 그들은 왜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 타인에 대한 배려와 도리를 모르는 타락한 인간들. 개인의 성정 탓은 아닐 것이다. 사장의 자리가 끊임없이 화폐증식을 욕망하도록 하는 것이니 어찌 보면 그들이 자본주의의 가장 큰 희생양이다.  

이어서 ‘G20 그리고 인권’ 토론회에서 또 한 차례 엄청난 얘길 들었다. 토끼몰이식 단속을 피하던 네팔 노동자가 창문에서 뛰어내려 사망한 것이다. 한국에 8년이나 머물렀고 결혼해서 4개월 된 아기도 있다고 한다. 가정을 꾸리고 성실히 일하던 사람인데, 단지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로 죽었다. 한국 사람은 하루도 못 견디는 고된 작업을 소처럼 일 하다가 지렁이처럼 밟혀죽었다. 미친 것들이 이틀 동안 회의하려고 사람 하나 죽어가는 것쯤은 예사로 안다. 출입국사무소 직원들이 사과도 하지 않더라고 이주노조 이정원 씨가 말했다. 다음 날, 삼성노조 위원장님을 만나서 삼성의 비이성적 행태에 거듭 충격을 받았고 그 와중에 용산참사 가족에게도 무거운 형벌이 내려졌다. 아무리 지배자가 만든 법이라해도 이렇게 대놓고 가진자들의 편을 드나.

게임중독으로 엄마를 죽이고 자살한 중학생 기사도 났다. 아빠가 중국에 있단다. 사실상 별거중이고 엄마는 일 나가고 아이는 초딩 때부터 게임에 몰두했다고 한다. 하층민에게 가족은 해체됐고 아이들은 방치된다. 국가는 아무런 보호막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도 우린 국가가 우리 삶을 보호한다고 여기며 꾸역꾸역 세금내고 모여산다. 
이게 인간의 나라인가. 이게 인간이 할 짓인가. 여전히 그런 물음들이 딸꾹질처럼 불쑥 불쑥 치밀어 그치질 않는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원래 그런 종자니까 ‘통탄해서도 안 되고 비웃어서도 안 되며 혐오해서도 안 되고’ 거기서 출발하라고 했는데, 나는 인간을 통탄하고 혐오하면서 실의에 빠진 채 <정치론>마지막 부분과 <전복적 스피노자>를 읽는 둥 마는 둥 읽었다.  

“국가가 제정된 것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안전한 상태에서 자신의 할 일을 다 하기 위해서이며 증오나 분노 또는 간계를 행사하지 않기 위해서이고, 악의 없이 서로가 서로를 관용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국가의 목적은 실로 자유인 것이다.”   - 신학정치론


신학정치론에 나온 대로, 스피노자는 국가를 중시했고 국가의 참다운 존속을 위해서 '절대적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스피노자의 민주주의란 "이성의 명령 아래 있는 자유로운 집단적 삶"이다. 이는 우리가 쓰는 일반적인 민주주의 개념과 좀 다르다. 대개 민주주의라고 하면 투표권이나 상부구조의 정치적 형태를 떠올리는데 스피노자에게 민주주의는 존재론적으로 내재하는 근본적 실천형식이다. 

또한 스피노자가 말하는 '절대성'도 절대군주의 권력의 절대성과는 전혀 다르다. 절대성이란 법 바깥, 혹은 법 위의 힘이 아니다. 절대군주가 법의 제약을 받지 않고 법을 중지시키거나 실행시키면서 임의로 행동하고 판을 갈아엎는 것과는 정 반대의 뜻이다. 스피노자의 ‘절대성’은 법과 권력의 분리불가능성이다. 즉, 어떤 상황에서도 예외와 제약을 두지 않음을 뜻한다. 나아가 절대적인 것은 영원하기에, 민주주의는 ‘영원의 상 아래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본다. 스피노자에게 영원성은 능동적 변신의 과정을 함축한다.  

네그리의 정리. "민주주의의 절대성은 양적으로 함께 모인 모든 시민들의 총체로서 파악된다. 질적으로는 사회화의 과정 그 자체인 공동체를 향한 개인의 변신으로 파악된다. 이 때 민주주의는 단지 가능한 통치 형태들 중 하나로만 규정되지 않으며 '정치적인 것의 영원한 본질'로 파악된다. 민주주의는 멈추지 않고 결코 끝이 없는 변신이다. 거기에는 힘의 질서와 구성적 실천의 소진할 수 없는 생산성이 들어 있다. 민주주의는 전적으로 절대적이기에, 영원성에 의해 생명을 얻기에 어떤 제헌으로도 한계 지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더 완전한 것이 될 수 있다."

스피노자의 국가론은 절대적 민주주의로 요약된다. 그것은 '인간이 사는 나라'다.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안전한 상태에서 자신의 할 일을 다 하고 자유롭기 위해 모인 공동체.' 이곳에는 잉여가 없으려나. 잉여가 없으면 착취도 없을까. 아니다. 스피노자는 천부적으로 주어진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있다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권이 아니라, 그러한 권리를 위해 투쟁할 의지와 능력이라고, 그러니 통탄하지 말고 ‘영원한 -되기’를 위해 나서라고 ‘실천’을 촉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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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데올로기 - 지반을 떠난다는 것

[스피노자맑스]

 

홍세화 씨가 한국에 와서 TV를 보다가 가장 충격을 받은 말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부자되세요’ 하나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각각 카드회사와 건설회사 TV광고 카피이지만 범국민적 표어로 사용될 만큼 히트를 쳤다. 이는 돈이 삶의 모든 가치를 빨아들이는 대한민국의 실상을 가감 없이 드러내준 광고이기도 하다. 뭐 사실, 더 좋은 대학, 더 많은 돈,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를 인생목표로 부여받고 자란 우리는 성장과정에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얘기라 익숙했지만 ‘파리’의 택시운전사였던 홍세화씨가 볼 때는 저 물신적인 표어가 몹시 거슬렸던 것이다. 이렇듯 ‘바깥쪽에서’ 보는 일은 중요하다. 바깥쪽은 객관적인 장소가 아니라 객관성 자체가 지역적인 공동주관성에 지나지 않음을 아는 장소(가라타니 고진)이기 때문이다.


스는 독일 철학을 바깥쪽에서 바라보고 거기서 철학적 담론(독일이데올로기)의 병리적인 징후를 읽어낸다. 독일이데올로기 본문의 첫 구절을 보자. ‘독일에서의 비판은, 극히 최근의 시도에서조차, 결코 철학이라는 영역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것은 결코 자신의 전반적인 철학적 전제들을 검토해 본 적이 없으며, 사실상 그것의 모든 문제들은 한정된 철학 체계, 헤겔의 그것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비단 그것의 답변에서만이 아니라, 그것의 질문에서조차 신비화가 행해지고 있다’

맑스의 역사유물론은 보편적이고 철학적 전제들을 검토하고 문제들이 성장한 그 지반을 문제 삼아 그 토대들, 전제들, 배치들의 역사적 형상을 다루는 작업이다. 그리고 여기서 관념론적 허구들이 도출되고 있음을 밝혀낸다. 상상 내지 표상의 체계인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배치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맑스의 유명한 언명도 이 맥락에서 나온다.

맑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어떤 시대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 사상’이라고 말한다. 우리시대의 지배적 사상, 삼성이데올로기를 생각하면 즉시 이해되는 대목이다. 삼성이 경제성장의 일등공신이라는 믿음. 삼성이 망하면 우리나라도 망할 것이라는 망상. 삼성은 아무도 못 건드린다는 공포. 그래서 삼성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무노조 경영, 족벌경영이 관철되고 있으며 삼성반도체에서 백혈병과 희귀암으로 100여 명이 죽어가도 버젓이 이건희는 큰 소리치고 활보한다.

역시 ‘바깥쪽에서’ 대한민국을 사유하는 박노자 씨도 늘 안타까워한다. “왜 노동운동이 발달한 한국에서 삼성불매운동이 안 일어나는가 모르겠다”고.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의 말에 답이 있다. 김 위원장은 삼성노동자들이 이건희의 무노조경영철학을 내면화하고 있다고 그래서 직원들이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한다고 했다. 주변에 보아도 거의 임원급으로 '삼성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수적으로는 삼성족벌은 대한민국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내 안의 이건희’가 사는 시민들, 삼성의 또 하나의 가족이 되길 꿈꾸는 백만학도들이 삼성을 지탱한다. 지배적인 사상은 숫자가 아니라 경향성이다.

맑스는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을 지배계급으로 만드는 관계들의 표현”이라며 “혁명적 사상의 출현은 이전의 보편적 사상, 즉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특수한 것으로 전락시킨다”고 했다. 삼성이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는 '보편적 사상' 즉 우리사회 지배계급인 삼성家 이데올로기를 '특수한 것'으로 전락시키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삼성이 급부상하고 삼성예외론이 나온것은 20년 전즈음의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삼성이 원래부터 나라를 먹여살린 기업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마치 고구마는 1900년대 우리나라에 들어왔지만 구석기시대부터 배고플 때 밥대신 고구마를 먹었다고 아는 것과 유사하다. 

맑스는 '단지 일상적인 분명한 것'을 지각하는 속물적인 지각'을 비판한다. "감성적 확신의 대상조차도...그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옛날로부터 직접 주어진, 영원히 항상 같은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업의 생산물이고 사회 상황의 생산물"이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과 싸우는 노동자들은 마치 80년 광주처럼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고립돼 있다. 삼성이 장악해버린 우리사회의 지반과 질서를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을까. 맑스의 역사유물론은 지반을 떠나서 생각하는 것이다. 맑스의 역사유물론을  배우는 지금, 삼성의 ‘지반을 떠나서’ 삼성을 생각한다. 맑스가 말한 “실천적 전복”을 궁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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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절대적 민주주의와 다중

[스피노자맑스]




사회계약론

17세기 계약론적인 테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회계약론은 인간의 결사와 시민사회의 구성을 설명하는 기능보다는, 정치적인 사회의 구성과 시민사회의 권력이 국가로 양도되는 것을 합법화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다. 또한 권력의 양도가 실효성을 거둘 수 있도록 합법화 되어, 국가라는 법적인 개념의 토대를 마련한 명백히 사회학적인 허구일 뿐이다. 사회계약론은 초월적 성격을 갖고 있으나 형식적으로 제한됐다. 국가라는 관념을 구성할 수 있는 제반 의미들 가운데 군주제적 개념, 즉 명목적 권력의 단일성과 절대성 그리고 초월성에 관한 개념이 기본적인 중요성을 지녔다. 사회계약론은 근대적 성격을 띠는 절대주의 국가의 다양한 통치 형태들을 합법화하려는 내적 경향을 실질적으로 갖는다.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
마키아벨리, 알투시우스의 입장. 정치란 형식적으로는 권력의 양도에 관한 생각을 배제하지 않은 채 그것을 사회적인 것에 대한, 제반 실천들에 대한 구성적 힘들의 다수성과 고유성에 대한 물질적 규정들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정치학을 구성하고 있던 지배적인 입장들, 가치상대주의와는 상관없다. 정치현실주의는 결코 가치 상대주의가 아니라 구체적인 것으로서의 진리에 대한 단호한 수용이다.

사회계약론이 일반적으로 절대주의 국가에 대한 이론이라면, 이 이론을 거부하거나 혹은 권력의 양도라는 생각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은 공화주의적인 전통을 대변하는 것이며, 이야말로 국가적 소외를 대변하고 정당화하는 모든 이데올로기와 실천에 맞서는 논쟁적인 전통인 것이다. 스피노자의 <정치론>은 어떤 계약론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법과 정치는 계약주의의 변증법적이고 부정적인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법과 정치의 절대성은 행동으로서의 진리를 입증해준다.

스피노자의 ‘민주주의 절대성’
어떻게 자유를 절대성으로 상승시킬 수 있을까? 계약론자들은 자연적인 상태의 자유를 유지하는 것이 법적으로 상대화되고 다시 정의될 때에만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자유들의 절대성이란 혼돈이며 전쟁상태라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민주주의가 절대적인 구성조직이라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민주주의 절대성을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1. 형이상학 일반의 관점) 스피노자의 절대개념은 힘의 일반적 지평으로서, 그것의 발전 및 현재성이다. 절대는 구성이다. 즉 자신을 구성하는 힘이 증가함에 따라 더욱 더 복잡해지는 열려 있는 현실이다. “서로 합치하는 사람들이 더욱 더 많아질수록, 그들 모두는 더욱 더 많은 권리를 갖게 된다.” 절대는 고유한 본질로서의 힘. 힘의 실현 결과로서 실존이 된다. 절대=힘=자유. 힘의 확장=자유의 강도. 절대적 통치는 권력의 단일성을 의미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런 권력의 단일성이 주체들로부터 나오는 힘들의 투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힘들의 총체성이야말로 언제나 열려 있는 내재적인 삶이며, 유기적 전체의 역동적인 분절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2. 개념의 관점 -정치이론에서 절대적 통치)
(1)권력의 합법성에서 절대적 통치; 명목적 권력과 그 실제적 행사의 구분을 허용하지 않는다. 양자가 결합되어 있기에 절대적인 통치 형태다. 존재의 힘은 모든 통일적인 힘으로 나타난다.
(2)권력의 형태에 관한 결의론의 전통 속에서 절대적 통치; 민주주의의 타락할 가능성. 그것은 어떤 이타성의 산물이 아니라 그 반대로 동일한 유기체의 삶이거나 혹은 죽음인 것이다. 국가의 절대성은 발전과 타락과 재정립의 역동성을 동시적으로 갖는 모습으로 주어진다.
(3) 국가행정 내부의 관점에서 절대적 통치; 스피노자적 민주주의는 입헌 민주주의로 정의될 수 없다. 즉 권력의 분립과 균형 및 상호변증법에 기반 하는 통치 형태가 결코 아니다. 통제와 균형을 위한 몇몇 직제들 고려하지만 이것은 권력의 분립, 변증법적인 입헌상태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직제들은 제헌적 힘의 표현적 형상들, 체제의 단일제적 긴장에 관한 단상들이나 해석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법적 기능은 자유와 단일성의 가장 높은 잠재력을 발현하는 계기인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절대적인 권위는 만일 그것이 존재할 수 있다면 대중 전체에 의해서 점유되는 바의 것이다.”(TP,8:3)

참고* 헤겔의 절대적 통치 스피노자에게 소외의 거부는 절대적인 반면, 헤겔에게는 주체들과 욕구들의 특이성에 대한 어떤 인정도 모두 변증법적 운동의 모범적인 전개과정을 통해 절대의 형이상학 속으로 흡수. ‘절대’는 결과로서 향유물로서 주어진다. 따라서 헤겔의 절대적 통치는 특이성들을 초월해 있으며, 이로부터 나오는 부정적 규정들을 거부해야만 한다. 이 절대적 통치는 대중의 무지와 나폭함 속에서 해체될 것이다. 이런 절대적 통치는 절대적 평정. 현존자의 절대적 동일성. 모든 특이한 힘들을 초월하는 절대적 운동에 대한 관념이다. 그것은 무한하며 나누어질 수 없는 총체성이다.

다중 스피노자의 민주주의는 ‘다중’의 주체들을 통과하면서 절대성이 된다. 밑으로부터, 자연적 조건의 동일성으로부터 출발해 모든 사회적 힘들을 추동하기 때문이다. 절대적 통치로서의 민주주의는 권력의 양도가 없고, 어떤 소외도 없다. 모든 사회적 활력을 만인의 자유를 조직화하는 일반적인 노력 속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자유와 절대성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다중이라는 주체를 중심으로 재고찰될 필요가 있다.

“다중은 파악되기 쉽지 않지만, 법적인 주체, 사회적인 것의 필연적 전가, 정치적 구성과 단일성을 위한 가정이다.(TP, 3:7)" 다중은 특이성들로 구성되는 파악될 수 없는 물리적 다수적 본성과 헌법과 법을 제정하는 법적 주체적 본성 사이에서 형성되는 역설이다. 절대와 다중 사이의 관계, 힘의 두 가지 변환 사이의 관계는 서로 포섭되지 않는다. 전자가 정치적인 것의 단일성을 향해 응축해가고 있다면, 다른 하나는 주체들의 다수성을 향해 확장해가고 있다.

다수성 (1)물리적 관점: 물리적 엮임과 조합, 결합과 분리, 불안정한 운동과 형체화의 세계 (2)동물적 관점: 중은 정념들과 상황들의 지속적이고 모순적인 얽힘이고 더 나아가 새로운 위치이동을 통해서 그 자체로 제도들을 구성하는 이성과 의지의 축적이다. (3)이성의 관점: 민주주의 심급의 절대성에 대한 제안. 스피노자에게 모두의 의지는 만일 그런 것이 주어지도라도 일반의지가 될 수 없다. 다중은 군중이 아니며 평민대중도 아니다. 다중은 보편적 관용과 자유의 토대이다.

다중의 개념과 관련된 결론들은 그것의 아포리아를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아포리아적 성격을 더욱 강조한다. 이런 아포리아 형태는 지극히 생산적이며 바로 절대성과 자유 사이의 이런 불균형이야말로 민주주의적 정체를 최상의 것으로 만들 수 있게 한다.

“다중은 집단적 힘의 존재론적 기획으로서 주체들의 상호 엮임이다.”

도의심 “도의심은 우리가 이성의 인도 아래 생활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하는, 선을 행하려는 욕망”이다. 도의심은 힘이 이성에 합당한 욕망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는 긍정적인 정념의 계열에 속하며, 욕망 자체를 덕으로 변환시킨다. 도의심은 다중의 영혼이다. 도의심은 존재론적으로 구성적인 방식으로 다중에게 열려 있는 특이성과 관련된 개념이다. “우리는 특이한 것들을 이해할수록 신을 더욱 더 많이 이해하게 된다”(E5. 정리24) 

* <전복적스피노자> 3장-후기 스피노자의 민주주의개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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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론- 자연권

[스피노자맑스]

<홉스와 스피노자- ‘자연’을 보는 차이>

스피노자에게 끌리는 점. 위계가 없다.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을 동일선상에 놓는다.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벗어났다. (홉스를 잘 모르는 관계로 고병권의 글을 참조했다. 스피노자와 홉스가 확연하게 갈리는 지점이 자연에 대한 태도라는 설명이다.) 

‘스피노자에게 자연이 도달해야할 본연의 모습이라면 홉스는 자연을 극복해야할 나약한 상태로 본다. 홉스는 개인은 사회를 구성하는 원자처럼 취급함으로써 인간 본성에 대한 일반적 가정을 내놓는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에서 만인들은 비슷한 본성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개인을 환원불가능한 단위로 설정할 수 없다고 봤다. 개체는 항상 무수히 많은 부분들로 이뤄진 조성체다. 고정된 원자는 없다. 스피노자에게는 항상 이것이나 저것이 문제되지 일반적인 어떤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 

양도의 문제. 홉스는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넘어가는 중요한 계기로 자연권의 양도를 제시했다. 생존을 위협하는 영구적 전쟁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자신의 권리를 제3자인 국가에게 양도하고 국가의 가공할 위력 아래서 계약을 맺고 그 이행을 보장받는다는 것.

스피노자는 자연상태와 사회상태를 연속적으로 이해하므로 양도가 발생하지 않는다. 다만 개인들이 연합하여 사회체나 정치체를 구성할 때 권리의 변화가 나타난다. 개인은 개인적 변용이 아닌 집합적 변용을 수행한다. 양도가 있다면 제3자에 대한 게 아니라, 그 자신이 부분으로 참여하는 전체에 대한 것이다.”  

스피노자를 야만적 별종이라고 부를 만하다. 당대 지배적 세계관이었던 기독교는 신과 인간, 신과 자연의 질적인 차이를 강조했는데 그는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을 ‘감히’ 동일선상에 놓았으니 말이다. 또한 스피노자에게는 ‘인간이 자신의 힘을 제대로 조작하지 않는 것’ - 자기 본성을 다 펼치고 사는 것을 제외한 어떠한 악도 없다. 항상 ‘외부’(악마)의 유혹에 따른 죄와 타락이라는 기독교적 이해와 갈라지는 지점이다. 외부의 유혹, 정념의 지배를 받는 것은 자연의 질서를 인식하지 않은 개인의 무능이라는 스피노자의 지적질에 동감한다.  

<이성적일수록 자유롭다>

스피노자에게 자유란 아무것이나 임의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도박중독자가 도박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예속이다. 그에겐 도박하지 않을 자유가 없다. 이처럼 정념에 종속된 인간은 무능력하지만 “인간은 대체로 이성이 아니라 욕망에 끌린다.”  

우리의 목표는 욕망의 제거가 아니라 전환이어야 한다. 건강을 위해서 식욕을 없애는 게 아니라 육식욕을 채식욕으로 바꾸듯이 말이다. 암 환자가 자기 몸 상태를 ‘인식’하고 술과 담배 끊는 것처럼 정신 상태의 건강을 위해서도 결단이 필요하다. “무지하고 정신이 허약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현명하게 영위하기 위해서 자연법에 대해서 의무를 갖고 있지 않는 것은, 몸이 약한 사람이 몸의 건강에 의무를 갖고 있지 않는 것과 같다.”  

자유를 어떻게 획득할까. 인식의 확장이 자유의 증대다. 인간은 이성적일수록 자유롭다. “이성적인 삶을 복종이라고 말할 수 없고...스스로를 거슬러서 명하는 정신의 자유를...노예상태라고 부른다.” 스피노자는 금욕주의일까? 아니다. 금욕, 고행을 희생을 주장하는 사상들을 비난한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삶, 굴욕스러워하는 지성, 자기 자신을 마비시키는 행동과 같은 것들은 거짓이며 오류이고 부조일 뿐이다.  

정리하자. 도박 그 자체가 악이 아니라 도박으로 인한 힘의 약화가 악이다. 더 많이 종속될수록 힘은 약화된다. 고로, 절제도 나름이다. 어떤 절제인가. 힘의 증대를 가져오나, 강화를 가져오나. 자기파괴와 자기배려의 차이이다.  

스피노자에게 인식은 행위 속에 내재한다. 행한 만큼이 인식의 정도다. 지행합일. 앎과 삶의 일치. 이성은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작동한다. 스스로의 힘을 행할 수도 있는데 안 한 게 아니다. “우리 애가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성적 안 나오”는 건 스피노자 사전에 없다. 공부의 필요성을 알지만 공부를 안 하는 게 아니다. 공부를 안 하는 것은 공부의 필요성을 모르는 거다. 알고 나서 행하는 게 아니라 행해진 만큼이 인식의 정도라는 것.  

<스피노자의 코뮨주의>

“서로 도움 없이 인간은 삶을 지탱할 수 없으며 정신을 배양할 수 없다”

만약 두 사람이 함께 하여 그들이 세력을 합친다면, 그들은 연합하여 더욱더 많은 세력을 갖고 결과적으로 그들이 서로 떨어져 있을 때보다 자연에 대해 더 많은 권리를 가질 것이라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인간은 의존과 독립의 조화 속에서 관계를 형성한다. 고로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기적인 것은 자기파괴다. “모든 인간은 서로에게 종속되어 있고 독립적인 개체는 생각할 수 없으므로, 다른 이들에게 행한 악은 자신에게 행한 것이다.”  

자연법을 통해 ‘도덕적 형이상학’을 구축하지 않으려는 스피노자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도덕법칙이 아니라 기쁨과 슬픔의 정서의 증감이라는 물리법칙으로 사유한다. 다수가 배부르고 기쁨의 정서가 증가하면 그게 정의이고 좋은 정치체이다. 스피노자에게 정의는 관념이 아니다 물질적이다.

알수록 사랑스러운 스피노자 오빠~  (나이든 남자를 좋아하는 나의 연상취향의 극한이 아닐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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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론: 서론 - 인간본성에서 출발하는 정치적 기획

[스피노자맑스]

왜 읽는가. 스피노자의 <정치론>이 내게 왔다. 아니 내가 찾아갔다. <에티카>를 읽고 나니 스피노자에게 욕심이 생겼다. ‘이 오빠, 뭐 있다’는 촉이 왔다. 체내 당분이 부족할 때 케이크만 봐도 군침이 돌듯이 그는 내 사유에 필요한 영양소를 담뿍 함유하고 있는 철학자였다. 내가 공부하는 이유는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나만 아니라 자식, 친구 그리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까지 모두가 고귀하게 살았으면 좋겠고, 책장을 넘길수록 방법이 아주 없지 않다는 희망이 보인다. 다 같이 잘사는 법이란 결국 정치문제로 귀착된다. 현실의 정당정치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정치. 삶을 다스리는 측면에서 볼 때 <정치론>은 맞춤한 책이다.


왜 스피노자인가. 스피노자는 1600년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당시 서구는 오랫동안 지켜오던 것들이 흔들리며 새로운 방향을 위해서 몸부림치던 시대이다. 격동의 시대를 통과하며 그는 자신의 철학을 삶의 현실에 연결시켜 보았다. 체제에 안주하지 않았고 정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계획했다. 그의 책은 이단으로 몰려서 출판조차 불가능했다. 그만큼 불온했다. 그렇다고 스피노자를 17-18세기에 가두고 시대적 맥락에서만 본다면 텍스트를 풍부하게 읽어낼 수 없다. 2010년 신자유주의의 독소가 뿌리처럼 넓게 퍼진 대한민국에서 ‘반시대적 사상가’의 정치적 기획은 어떻게 쓰임을 가질 수 있을지는 읽는 자의 몫이다.

왜 윤리학=정치학인가.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곧 윤리학이다. 자기 삶의 좋음과 나쁨을 분간하는 법이 윤리학이라면 그러한 자유로운 개인들이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지키기 위해 더 큰 힘의 증대를 도모하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게 정치학이다. 신즉자연을 주창한 스피노자의 자연학=윤리학=정치학 등식이 성립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인간에게 가장 유리하다며 본성이 같은 개체가 결합했을 때 두 배의 힘이 생긴다고 말해왔다. 스피노자에게는 개체가 이미 하나의 복합체다. 우리가 개인이라고 부르는 개체도 단순한 신체가 아니라 오장육부와 팔다리 등등의 복합체다. 정치체도 마찬가지다. 스피노자에게 국가라는 공동체 형성은 코나투스(존재확장노력)라는 인간 본성으로부터 연유한다.   자연에서 개체를 다루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다룬다. 국가는 더 큰 개체화를 이루며 모든 사람이 하나의 정신으로 인도되는 것과 같다. 이는 고립된 인간으로서 개인과 개인의 결합으로서의 국가를 동일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개인도 국가도 모두 개체지만 그 능력과 본성은 완전히 다르다.


왜 인간본성에서 시작하는가. 스피노자가 이단인 이유는 모든 철학자가 인간의 고매함을 들먹이고 도덕적 통치를 말할 때 스피노자는 인간의 밑바닥을 들추고 거기서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정치학>첫 문장을 보라. “철학자들은, 우리를 괴롭히는 정념의 변화들을 사람들 스스로의 잘못으로 생겨난 악덕이라고 생각한다.”  정념? 악덕 아니다. 본성 맞다.  철학자가 꿈꾸듯이 인간은 이성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지극히 정념에 의해 움직인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철학자보다 정치가를 높이 친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성적인 이유에서보다 두려움에 따라 행동함”을 알고 인간의 악덕 방지를 연구하는 정치가가 철학자보다 훨씬 현명하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 정념을 지배할 수 있다고 본 스토아학파를 비난한다. 

“나는 인간의 행동들을 조롱하고 비난하고 공격하지 않고, 그것들을 이해하고자 신중을 더 했다.”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인간 본성’에서 출발한다. 초월적이고 선험적인 이상이 아닌, 경험과 현실을 참고해서 정치학을 구상한다. "
사랑, 증오, 질투, 야망 등등의 정념을 인간 본성에 있는 악한 빛이 아니라 본성에 내재한 고유한 특징"으로 간주한다. 더위, 추위, 폭풍, 천둥처럼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현상들이라는 것이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자연만물은 긍정이고 필연이다. 상어가 정어리를 잡아먹는 것은 선도 악도 아니다. 자연의 법칙이다. 해충/익충을 가르는 것은 인간의 목적론적 시각이다.) 이러한 정념들, 자연의 질서를 '인식'하는 것이 곧 그에겐 '이성'이다. 그리고 "이성과 경험은.. 구성원들의 힘을 하나의 신체, 사회체에 집중시키는 확실한 수단을 가르쳐준다"는 것이다. 

왜 힘이 권리인가. "국가는 마치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정신으로 인도되는 것과 같고, 국가의 신체와 정신은 사람들이 자연상태에서 그런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국가의 행복이 다른 누군가의 선한 믿음에 의지하여" 성사된다고 보지 않는다. 덕성을 갖춘 지도자의 출현과 인도로 세상은 좋아지지도 자유로워지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엘리트주의에 반대한다. 그렇기에 "국가의 영원성을 보증하기 위해서는.. 불충실하거나 비열한 행동에 이끌리지 않도록 법을 제정해야 한다." 고 말한다. 여기서 '법'은 처벌과 심판체계로 이루어진 실정법이 아니라 만물조응의 원리 즉, 운동과 정지, 조성과 해체가 이루어지는 물리적 법칙을 뜻한다. 스피노자는 국가를 도덕이나 정의같은 형이상학으로 설명하지않고 힘의 증가와 축소를 가져오는 배치의 구성, 즉 물리학으로 분석한다.

힘과 권리의 관계. 스피노자 <정치학>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상당부분 기댄다. “얼마만큼 힘이냐에 따라 오직 그만큼의 권리를!”  군주론의 이 표어는 스피노자 철학의 원리를 잘 설명한다. 개체는 능력만큼의 권리가 주어진다. 하늘에서 저절로 뚝 떨어지는 도덕, 천부인권 그런 것은 없다. 힘만큼 확대된 권리가 있을 뿐이다. 정치체가 하나의 신체라면 자신이 표현하는 능력만큼 권리를 가지며 그것을 규제하는 법칙을 따른다. 스피노자의 정치론은 정치적 공동체, 즉 정치적 개체가 어떻게 자신의 안전과 능력의 확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관한 기술이다.

* 매주 월요일 7시 수유너머R  <스니카즈> 세미나 합니다. 스피노자, 니체, 카프카, 들뢰즈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 <하룻밤에 읽는 철학사> 같은 지루한 철학공부도 하룻밤에 끝장내는 공부도 아닙니다. 튜터 박정수와 좋은 동료들과 함께 강도높게 공부합니다. 쉽다고는 말못하지만 고통이 쾌락이 되는 지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 좋은 사람과 좋은 가을 보내실 분 언제든 환영합니다. 스피노자 <정치론>으로 지난주에 시작했고 보조교재로 네그리의 <전복적스피노자>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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