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시집'에 해당되는 글 166건

  1. [2016.05.18] 오월 광주의 시, 입 속의 검은 잎
  2. [2016.02.19] 올드걸의 시집 - '책방 비엥'으로 (2)
  3. [2015.10.04] 김수영 - 봄밤 (4)
  4. [2014.12.03] 휴면기- 허연 (6)
  5. [2013.09.17] 장진주 - 이백 (13)
  6. [2013.09.11]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16)
  7. [2013.08.05] 오은 - 이력서 '밥 먹기 위해 쓰는 것' (6)
  8. [2013.05.01] 헌책들 / 이영광 (6)
  9. [2013.03.13] 아름다운 적(敵) / 강정 (8)
  10. [2013.02.28] 감각 / 랭보 (2)

오월 광주의 시, 입 속의 검은 잎

[올드걸의시집]

# 괴로워할 권리 


이곳에서 너희가 완전히 불행해질 수 없는 이유는 

신이 우리에게 괴로워할 권리를 스스로 사들이는 법을 

아름다움이라 가르쳤기 때문이다.  

- ‘포도밭 묘지2’ 중


시집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구이자 기형도의 미학적 태도가 함축적으로 드러난 시구 같아요. 가난 체험을 통과하고 80년대 군부 독재의 암흑기에 성년이 된 기형도에게 ‘세상’은 어떤 곳이었을까. 세상이 어떻게 보였을까를 생각하면 이 시집의 첫 시가 '안개'인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불안하고 모호하고 불투명하죠. 시인은 그렇게 자기 언어로 구축한 폐허에서 괴로움의 권리를 안전하고 예민하게 누립니다. 거기서 고백적 화법이, 잠언 같은 시구가 터지고요.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같은. 




# 위대한 잠언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 시작 메모 



이 구절에 대해 시인 김행숙은 이렇게 해석해요. 자연이라는 거대한 세계는 나라는 존재가 다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더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고 더 비극적인 것일 수도 있다고, 기형도가 생각한 게 아닐까. 이 체념도 저항도 아닌 겸허를, 기형도가 자연에서 배우고 저는 그가 쓴 시에서 배웁니다. 시를 읽으면서 내 굳은 감각이 놓치는 것들, 편협한 삶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느끼거든요. 읽어도 읽어도 모르는 게 나오는 시집, 살아도 살아도 어려운 삶이랑 비슷하죠. 가장 위대한 잠언은 살아냄 속에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  입 속의 검은 잎


이 시집의 표제시입니다. 기형도가 시집 출간을 준비하다 갑자기 죽어서 직접 책을 내지 못했고, 소설가 성석제랑 문학평론가 김현이 의논해서 유고시집을 펴냈지요. 그들이 고른 표제시이고 제목입니다. 기형도는 원래 ‘정거장에서의 충고’로 계획했대요.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고 선언한 그 시요. 그에게 괴로워할 권리와 희망을 노래할 권리와 다르지 않았던 거 같아요. 괴로워할 권리를 누렸기에 희망을 노래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고요. 


입 속의 검은 잎. 시가 어려운데 기형도 절친이었던 평론가 박해현의 증언과 기형도의 시를 옮겨놓습니다. 마침 오늘이 5월 18일이네요. 오월 광주는 제 인생을 바꿔놓은 사건이기도 합니다. 올해의 5.18은 기형도 시로 애도하고 기억하네요. 



“기형도의 그 시는 그가 여름휴가 중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참배하고 온 뒤 쓴 작품입니다. 당시 그는 대구에서 광주에 갔습니다. 그 당시 모든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기형도 역시 5.18 광주에 대한 부채 의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에 나오는 대로 광주에 가서 택시를 타고 망월동에 찾아갔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에서 ‘그 일’은 5.18이고 ‘그’는 시인이 상상한 일종의 전형적 인물이 아닌가 합니다.” (박해현)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서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 ‘입 속의 검은 잎’ 전문


신고

'올드걸의시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월 광주의 시, 입 속의 검은 잎  (0) 2016.05.18
올드걸의 시집 - '책방 비엥'으로  (2) 2016.02.19
김수영 - 봄밤  (4) 2015.10.04
휴면기- 허연  (6) 2014.12.03
장진주 - 이백  (13) 2013.09.17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16) 2013.09.11

올드걸의 시집 - '책방 비엥'으로

[올드걸의시집]

첫 책 <올드걸의 시집>이 절판되었다. 여러가지 사정 상 그렇게 되었고 개정판을 다른 출판사에서 내기 위해 이야기 중이다. 청어람미디어에서 나온 초판본. 그러니까 남은 책 100권이 집으로 왔다. 출판사가 내게 묻지도 않고 절판과 남은 책의 '처분'을 결정했다. 그나마 이것이라도 챙겨주는 걸 고맙게 여겨야하는 이런 상황. 사과상자 두 상자에 담긴 책을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무슨 유품을 받은 거 같기도 하고. 내 한 시절 떠돌다가 돌아온 아이 같기도 하다. 

아무튼 시중에서는 구입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판매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더 아름답고 유의미한 방법을, 나눌 방법을 찾고 싶다. (하루 뒤, 그 방법을 찾았습니다. 서점의 제안으로^^)

---------------------------------------------------------------------------------------------------------

<올드걸의 시집>  동네 카페-서점 '책방 비엥'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책방 비엥은 '독립출판물과 MD 사심으로 고른 책을 파는 동네서점'으로, 은평구의 완소공간 북앤카페 쿠아레 안에 있는 서점입니다. 이 세상에 남은 책 80권 독점공급!

작년에 '글쓰기의 최전선' 나왔을 때 북콘서트를 한 곳이기도 해요. 북한산 품에 안겨 너른 창으로 햇살이 드는 아늑한 공간, 커피도 맛나고 잉여롭게 공부하기 참 좋은 공간입니다. 

지하철 6호선 역촌역 1번 출구 바로 앞입니다. <올드걸의 시집> 구입하길 원하시는 분은 마실 삼아 지하철 타고 핑허니 댕겨오셔도 좋고, 택배도 가능합니다. 그냥 팔기는 뭔가 쓸쓸하고 유의미한 지점을 고민했는데, 이참에 좋은 동네 서점도 알리고 저도 한짐 덜고 두루두루 잘 된 거 같아요.^^ 

- 책방비엥: 독립출판물과 MD 사심으로 고른 책을 파는 동네서점
- 전화문의 070-8830-7870 / 서울시 은평구, 6호선 역촌역 1번 출구 
- 페이스북 메신저 문의 북앤카페 쿠아레
- 저자 사인 원하시는 분, 책방에 메모 남겨주시면 제가 가서 해놓을 게요. ㅎ






신고

'올드걸의시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월 광주의 시, 입 속의 검은 잎  (0) 2016.05.18
올드걸의 시집 - '책방 비엥'으로  (2) 2016.02.19
김수영 - 봄밤  (4) 2015.10.04
휴면기- 허연  (6) 2014.12.03
장진주 - 이백  (13) 2013.09.17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16) 2013.09.11

김수영 - 봄밤

[올드걸의시집]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 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 김수영 '봄밤'


제11회 서울와우북페스티벌 '시인은 살아있다' '시인 김수영의 밤' '시인 이상의 밤' 사회를 봤고 잘 마쳤다. 김수영의 시 봄밤을 이영광 시인이 낭독할 때 눈물이 났지만 꾹 삼켰다. 왜 이리 좋은 것이냐. 시는. 시를 읽는 밤은. 

'자기언어 발명하기 - 인문적 자서전을 쓰자' 강연도 잘 마쳤다. 근데 좀 부끄러웠다.  


신고

'올드걸의시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월 광주의 시, 입 속의 검은 잎  (0) 2016.05.18
올드걸의 시집 - '책방 비엥'으로  (2) 2016.02.19
김수영 - 봄밤  (4) 2015.10.04
휴면기- 허연  (6) 2014.12.03
장진주 - 이백  (13) 2013.09.17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16) 2013.09.11

휴면기- 허연

[올드걸의시집]

오랫동안 시 앞에 가지 못했다. 예전만큼 사랑은 아프지

않았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비굴할 만큼 비굴해졌고, 오만

할 만큼 오만해졌다.

 

세상은 참 시보다 허술했다. 시를 썼던 밤의 그 고독에 비

하면 세상은 장난이었다. 인간이 가는 길들은 왜 그렇게 다

뻔한 것인지. 세상은 늘 한심했다. 그렇다고 재미가 있는 것

도 아니었다.

 

염소 새깨처럼 같은 노래를 오래 부르지 않기 위해 나는

시를 떠났고, 그 노래가 이제 그리워 다시 시를 쓴다. 이제

시는 아무것도 아니다. 너무나 다행스럽다.

 

아무것도 아닌 시를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길 바라

며 시 앞에 섰다.

 

- <휴면기>, 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직장인이 된다는 건 매일 같은 시간에 출퇴근 하는 일이다. 물론 퇴근이 불규칙한 경우가 더 많다. 노동력을 파는 게 아니라 일상을 통째로 넘기는 일이다. 12월이 다가온다. 4월부터 지금까지 8개월간 받은 월급을 계산해보았다. 그 금액에 내 마흔넷이 그렇게 거래되었다. 마음이 가라앉는다. 손에 쥐어진 돈이 크지 않아서 더 그렇고, 그 초라한 월급 외엔 또 남은 게 없다는 사실이 황망하다. 집을 이사하고 빚이 생겨서 매월 일정액을 갚아야 한다. 큰 돈보단 고정급이 필요해서 회사에 들어간 거니까 내몫이다. 일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온갖 일을 시도하고 축제를 치러내기도 했지만 그 만족은 금새 빠져나갔다. 미미하다. 내 삶의 위기는 월급이 적다는 게 아니라 읽고 쓰는 삶이 불가능해졌다는 것. 퇴근 후 책 읽고 글 쓰고 싶었는데 야무진 꿈이었다. 대체로 비실거리다가 잔다. 아니, 잠이 든다.   

 

매주 화요일에 연구실 회의도 자주 가지 못한다. 어제도 불참했다. 원래는 행신동에서 외부 미팅이 있었고, 그걸 끝내고 갈 참이었는데 이야기가 길어져 끝나니 7시. 그 때 연구실에 가면 8시, 회의하고 집에 올 길을 헤아리니 오밤중. 회의 하고 나면 진이 빠져 기운이 바닥난다. 또 민망하게 못간다고 단톡방에 남겼다. 병권샘은 못 본지 오래됐다며 담주에는 꼭 오라고 하고, 나는 '직장인에 육아인에 집이 해방촌이 아닌 사람은 연구실 활동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스럽다'며 '밤 되면 눕고만 싶다'는 신세한탄 문자를 보냈다. 정수샘은 요새 '미생'을 본다며 '직딩의 고단함'을 이해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드라마 미생을 하기 전에 정수샘은 내가 힘들다고 하면 "그래요?" 하면서 눈을 멀뚱멀뚱 뜨고 바라보곤 했었다. 알아주니 고맙고 서럽다.

 

시를 읽는 삶. 시에 감응하여 글을 쓰는 삶. 시를 읽고 남루한 일상의 위로 받고 삶을 추스리던 시기가 있었고 무언가 열심히 올라오는 상념을 털어놓으면 가벼운 마음에 또 살아갈 힘을 얻곤했다. 그런데 그게 시시했다. 맨날 칭얼대는 어린애가 된 거 같아, 염소새끼처럼 같은 노래를 부르는 거 같아 부끄럽고. 언제부턴가, 아마 시세미나가 끝나고부터 일 것이다. 시도 드문드문 읽고 글도 잘 안 쓰게 되었다. 시도 삶도 뻔하고 시시하고. 헌데 그 뻔하고 시시하단 자각조차 시가 아니면 하지 못했다. 시가 빠져나간 삶은 급속도로 퇴락했다. 시는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시가 아무것도 아닌 내 삶의 근거이자 이유였단 말인가.  고백하자면 내가 다시 몸부림을 치게 된 건 시 때문이다. 요즘 나는 다시 시를 읽는다. 오래 끊었던 술을 마시는 것처럼 빨리 취한다. 심수봉 노래같이 바로 자극이 오는 허연의 시도 읽고, 유희경이라는 낯선 시인의 시집도 읽는다. 몸부림이 시작됐다. 이 시들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신고

'올드걸의시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올드걸의 시집 - '책방 비엥'으로  (2) 2016.02.19
김수영 - 봄밤  (4) 2015.10.04
휴면기- 허연  (6) 2014.12.03
장진주 - 이백  (13) 2013.09.17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16) 2013.09.11
오은 - 이력서 '밥 먹기 위해 쓰는 것'  (6) 2013.08.05

장진주 - 이백

[올드걸의시집]

君不見 군불견    그대는 보지 못 하였는가

黃河之水天上來 황하지수천상래    황하 강물은 하늘에서 내려와,

奔流到海不復廻 분류도해불부회   바삐 흘러 바다로 가서는 다시 못 옴을

又不見 우불견   또한, 보지 못하였는가?

高堂明鏡悲白髮 고당명경비백발   고당명경에 비친 백발의 슬픔

朝如靑絲暮如雪 조여청사모여설   아침에 검던 머리 저녁에 희었다지

人生得意須盡환 인생득의수진환   쁨이 있으면 마음껏 즐겨야지

莫使金樽空對月 막사금준공대월   금잔에 공연히 달빛만 채우려나

天生我材必有用 천생아재필유용    하늘이 준 재능은 쓰여질 날 있을 테고

千金散盡還復來 천금산진환부래   재물은 다 써져도 다시 돌아올 것을

烹羊宰牛且爲樂 팽양재우차위락   양은 삶고 소는 저며 즐겁게 놀아보세!

會須一飮三百杯 회수일음삼백배   술을 마시려면 삼백 잔은 마셔야지

岑夫子,丹丘生 잠부자,단구생   잠부자, 그리고 단구생이여

將進酒,君莫停 장진주,군막정   술을 마시게, 잔을 쉬지 마시게

與君歌一曲 여군가일곡  그대들 위해 노래 한 곡하리니

請君爲我側耳聽 청군위아측이청   모쪼록 내 노래를 들어주시게

鍾鼎玉帛不足貴 종정옥백부족귀   보배니 부귀가 무어 귀한가

但願長醉不願醒 단원장취불원성   그저 마냥 취해 깨고 싶지 않을 뿐

古來賢達皆寂莫 고래현달개적막   옛부터 현자 달인이 모두 적막하였거니와

惟有飮者留其名 유유음자유기명  다만, 마시는 자 이름을 남기리라.

陳王昔日宴平樂 진왕석일연평락   진왕은 평락전에 연회를 베풀고,

斗酒十千恣歡謔 두주십천자환학   한 말 술, 만금에 사 호탕하게 즐겼노라

主人何爲言少錢 주인하위언소전   주인인 내가 어찌 돈이 적다 말하겠나

且須沽酒對君酌 차수고주대군작   당장 술을 사와 그대들께 권하리라

五花馬,千金구 오화마,천금구   귀한 오색 말과 천금의 모피 옷을

呼兒將出換美酒 호아장출환미주   아이 시켜 좋은 술과 바꾸어오게 하여

與爾同銷萬古愁 여이동소만고수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시름을 녹이리라.


9월 둘째주 금요일. 씨네큐브에서 조조로 <우리 선희>를 봤다. 술집-거리-여관을 순회하는 홍상수 영화 장소의 룰을 벗어나지 않는 영화. 단, 이번영화에는 여관신이 없고 대신에 술집이 지루할 정도로 길게 오래 나온다. 주인공들이 소주 혹은 맥주를 컵에 따라 벌컥벌컥 마시다가 장면이 바뀌면 소주나 맥주 너댓병이 테이블을 채우곤 한다. 커다란 스크린에서 술병을 보는 것만으로도 취기가 오르는 특이한 현상은 홍상수 영화에서만 경험할 수 있다. 꼭 낮술을 마신 것처럼 어질하다. (태)양의 기운이 승할 때 알콜로 몸에 열이 오르면, 음양의 조화가 깨져 더 취하는 법이라고 들었다. 홍상수 영화의 낮술효과도 그래서 생기나보다. 태양만큼 센 스크린의 빛에, 주인공들의 쉴새 없는 말들에, 테이블의 술병에 취하지 아니할 수 없는 거다. 

여기서 핵심은 말들인데, 말들이 꽤 지리하고 지독하다. 이자리 저자리 이사람 저사람 사이를 떠돌면서 공회전 되는 말들은 겨우 봉합해 놓은 일상계를 툭 건든다. 체면이나 허위, 가상 같은 어떤 '척'으로 유지되는 일상계의 허술한 틈이 드러난고 할까. 존재를 이루는 것들 또한 어찌나 엉성한지. 나는 누구인지 말할 수 있을까, 난데 없는 질문에 빠져든다. 극장을 나와서 점심을 먹으면서 맥주 일병을 시켰다. "홍상수 영화 보면 괜히 찔리더라.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두나두" 그런 얘기를 나누면서 홀짝홀짝 마셨다. 우리는 대개 도덕적으로 단죄할 만한 사건을 저지르고 살지는 않지만 개운치 않는 일들과 말들은 많이 양산하면서 산다. 그건 일종의 앙큼함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엉뚱한 욕심을 부리거나 깜찍하게 분수에 넘치는 데가 있다는 뜻. '앙큼하다'의 수위와 빈도조절이 안 되면 곤란하니까, 자기를 타자화할 수 있는 홍상수를 주기적으로 봐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러 <생활의 발견>의 명대사를 떠올린다. "우리 사람되는 거 힘들어. 힘들지만 우리 괴물은 되지 말자."

밥 먹고 나오니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후드득 떨어진다. 원래는 연구실에 정수샘한테 영어과외 받으러 간다고 했는데, 문득 내가 너무 열심히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될 일이다. 문필하청업으로 맡은 일이 있는데 여름 내내 원고 붙들고 씨름하다가 전날 초고를 넘겼던 참이다. 아주 그냥, 좀, 지긋지긋했다. 일하고 공부하고 밥하고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놀고 싶어졌다. 충동적 인간답게 결심했다. 예전에 일하던 사무실에 놀러가야지. 처마 끝에서 비 떨어지는 소리 들으면 낮술 한 잔 더 해야지. 주간님한테 문자했더니 "막걸리랑 양상추가 입장료"라고 답이 왔다. 친근한 체부동 골목길을 구불구불 통과해 사무실에 갔다. 주간님 지인도 "비가 와서 마음이 동했다"며 술 한잔 하러 와 있었다. 같이 논어공부모임 하는 '김선생님'이라고 한다. 우연한 회동. 주간님은 전날 시청앞 팔도장터에서 산 멍게젓과 양상추, 두부부침, 김치전을 빛의 속도로 내오셨다. 주간님, 김선생님, 나, 후배. 넷이서 푸짐한 안주를 놓고 막걸리를 마셨다. 흥취가 오르자 김선생님이 '적벽부'를 원문 암송하셨다. 그 장강처럼 긴 시를. 요상야릇한 중국어 발음. 처음엔 웃겼다가 나중엔 뭉클했다. 다시 한국말로 번역해서 읊어주셨기 때문이다. 

시가 시의 꼬리를 물었다. 전날 글쓰기수업에서 '이성복'시 암송대회를 했는데 나는 그 때 읽은 시를 낭독했다. 김춘수의 시 '품을 줄이게'와 '소년' 서정주와 두보와 이백의 시를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검색해가면서 낭독했다. 바비킴의 노래를 듣다가 아그네스 발차의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도 듣고 김수철의 못다핀 꽃 한송이도 들었다. 풍류의 치달음. 나는 저녁에 약속이 있던 친구를 사무실로 불렀다. "너도 그냥 여기 와서 같이 놀자." 늦게 합류한 친구가 자기를 소개한다. "저는 페미니스트예요." 하하. 생뚱맞고 웃겼다. 그 페미니스트는 대낮부터 술마신 우리와 '흥트러블'이 생길까봐 독주를 복용해가면서 진도를 맞추고 같이 막걸리를 마시며 흥취를 누렸다. 김선생님이 이번에는 이백의 '장진주'를 원문과-한글로 낭독해주셨다. '마신다면 모름지기 삼백잔이지'라는 문장에 우리는 감동했다. 그 장대한 스케일의 미학. 홍상수 영화의 술병은 기껏해야 삼십잔 일텐데, 술도 아니구나 싶었다. 김선생님은 조선이 오백년을 간 이유는 풍류를 즐겼기 때문이라며, 삶에서 풍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새 낮이 밤으로 바뀌고 비는 그쳤다. 혈관에 막걸리가 흐르는 것 같았다. 사무실을 나와 골목을 도니, 이상의 '제비다방'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돈가스살롱'이 생겼다. 아뿔싸. 그 자리는 이상의 생가인데 그걸 유지하지 못하고 흔해 빠진 돈가스집에 자리를 내어주었을까. 잡식성 자본주의. 탐욕스런 자본주의에 화가 났다. 시인 이상은 인간에 대해 누설하는 시를 쓴 몇 안 되는 귀한 시인인데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이리도 홀대를 받는다. 자본주의와 시적인 삶은 상극일까. 속상한 노릇이다. 주간님이 술자리에서 예전부터 꼭 내고싶었던 책이 있다고 했다. 체사레 파베세의 일기<삶이라는 직업>이다. 자기평가와 자기심문의 기나긴 연재물로 꼽히는 명저다. 내가 애정하는 책 <거대한 고독>(나중에 알고 보니 주간님이 현대문학에 있을 때 만든 책이었다)을 읽으면서 나도 그 책이 꼭 갖고 싶었는데 아직 국내에는 출판된 게 없었다. 주간님도 자본주의에 어울리는 인간형이 아니라 지성, 풍류, 감각 다 되는데 돈이 없다. 아니, 징하게도 돈 안 되는 책만 원한다. 한옥에서 음악 듣고 시 읊고 술 마실 때는 좋았는데 문밖으로 나오니까 흥이 스르르 깬다. 내남없고 안팎없는 풍류의 순환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할까.


 

신고

'올드걸의시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수영 - 봄밤  (4) 2015.10.04
휴면기- 허연  (6) 2014.12.03
장진주 - 이백  (13) 2013.09.17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16) 2013.09.11
오은 - 이력서 '밥 먹기 위해 쓰는 것'  (6) 2013.08.05
헌책들 / 이영광  (6) 2013.05.01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올드걸의시집]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시집, 문학과지성사

 

 

가을맞이 영어세미나를 시작했다. 푸코의 마지막 저서가 된 <진실의 용기>다. 강연록이라 구문이 어렵진 않다. 단어가 생소하지. 그 말에 속아서 용기를 내보았다. 세 번 세미나를 참여한 소감은 괴롭다는 것. 부끄럽다는 것. 어렵다는 것. 단어 찾느라 몇 시간이 후딱 가버리고 한줄한줄 내 분량을 발표하면서 버벅거릴 때는 시간이 더디 흐르고 고개가 자꾸 수그러진다. 누구와도 눈 마주치고 싶지 않다. 오죽하면 정수샘이 그런다. 평소 나답지 않게 왜 이렇게 바짝 얼었느냐고. 안 얼게 생겼느냐고 했다. 영어를 자그만치 23년 만에 들춰보는 마당인데. 몹시 기분이 얄궂다. 생각해보니 내가 뭘 못하는 사람으로 어떤 자리에 놓인 게 참 오랜만이었다. 

 

니체 공부할 때도 막막하긴 했지만 모국어라서 두렵진 않았다. 제도교육도 그럭저럭 통과했고 회사생활도 하나하나 배워갔고 가사노동도 얼렁뚱땅 처리했다. 탁월한 요소도 없었지만 취약한 부분도 없이 살았다. 어른이 되면, 자신에게 불리한 입지는 선택적으로 피할 수 있다. 근데 난 지금 무리수를 두었다. 자발적으로 영어천민의 자리를 점했고, 견딘다. "인식에 이르는 길에 그 많은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없다면 인식의 매력은 적을 것이다"라는 니체의 말을 스스로 주입하면서 마음 다잡는다. 인식의 매력. 푸코가 던지는 사유의 말들이 아련하지만 복음처럼 다가온다. 첫 시간엔 그런 상상을 했다. 현재 상태 매우 엉망이나 한 십년 원서 붙들고 헤매고 배우면 나중에는 번역도 해보고 싶다고. 어떤 구체성도 없는 무근거한 바람이다.

 

나는 행하는 자로 산다. 금단의 땅에서 열매 구하겠다고 내동 서성인다. 이건 자기계발 담론이 부추기는 열정은 아니고 억척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불가피하다고 여길 뿐. 일부러 거러는 건 아니고 그렇게 살게 된다. 왜 그럴까. 나도 내가 궁금하여 생각해 보았다. 재작년인가. 사주명리학을 공부한 친구가 점을 봐줬다. 내가 자수성가형 인물이라고. (만세력으로 점 칠 때도 꼭 나왔던 점괘다. 부모덕이 없는 팔자라고) 그래서 공부를 해가면서 살아야한다, 지금 잘하고 있는 거라고 했다. 인간은 단독자로 살 수 없다는 건 알겠다. 사람의 후원이 없으면 책의 지원으로 살아야한다는 건가. 셀프돌봄 하라는 뜻으로 접수했다. 그런데 말이 쉽지. 물적 토대가 갖춰진 중산층 지식인 여성처럼 책만 파고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싱크대와 노트북과 밥벌이와 두아이를 오가며 틈틈이 공부하는 일은 진척도 느리고 몸뚱이도 축난다. 살기 위한 본능이 아니라면, 이 고난의 길을 왜 굳이 누가 택할까. 그런데 시련중독이 되었는지 어쩌자고 책상 앞에서가 가장 좋다.  

 

최승자는 이십대에 벼락같은 시를 써놓고 홀연 사라졌다. 행하지 않는 자로 살았다. "나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무위를 위하던 바틀비처럼 그랬다. 초월적 세계를 탐문하다가 죽기 직전까지 말라갔다. 재작년에 나온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을 시세미나에서 읽었다. '쉬임 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간다/ 시도 담배도 맛이 없다/ 세월이 하 짧아/ 시 한 편, 담배 한 대에 한 인생이 흘러간다'(<잠시 빛났던>) 정신병동에서 쓴 시들도 몇 편 있다. 시시한 삶에 발 딛은 나처럼 '책상 앞에서가 내 인생의/ 가장 큰 천국이었음을 깨닫는다'(<책상 앞에서>)고 고백한다.  한장 두장 넘기다보면 더듬더듬 흘러가는 시간들에 젖어든다. 그곳은 다른 세계다. 청송교도소처럼, 쉽게 볼 수 없고 접근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다른 세계다. 자본의 질서로 돌아가는 복닥거림에 벗어나거나 등지거나. 장애가 있어서든 의욕이 없어서든. 행하지 않으며 사는 사람들의 나라가 있다. '말하지 않아도 없는 것은 아니다'  삶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 영어 원서를 파는 것보다 덜 사는 것은 아닐 터다. 자연을 찬미하고 사색에 잠기는 가을만이 아니라 개 같고 매독같은 가을이 있듯이. 이 세상에는 지구본처럼 돌려볼 수 없는 '한 세월이 있다.'

 

 

  

 

 

 

신고

'올드걸의시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휴면기- 허연  (6) 2014.12.03
장진주 - 이백  (13) 2013.09.17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16) 2013.09.11
오은 - 이력서 '밥 먹기 위해 쓰는 것'  (6) 2013.08.05
헌책들 / 이영광  (6) 2013.05.01
아름다운 적(敵) / 강정  (8) 2013.03.13

오은 - 이력서 '밥 먹기 위해 쓰는 것'

[올드걸의시집]

 

밥을 먹고 쓰는 것.

밥을 먹기 위해 쓰는 것.

한 줄씩 쓸 때마다 한숨 나는 것.

 

나는 잘났고

나는 둥글둥글하고

나는 예의 바르다는 사실을

최대한 은밀하게 말해야 한다. 오늘밤에는, 그리고

 

오늘밤에도

내 자랑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

혼자 추는 왈츠처럼, 시끄러운 팬터마임처럼

 

달콤한 혀로 속삭이듯

포장술을 스스로 익히는 시간.

 

다음 버전이 언제 업데이트 될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 쓰고 나면 어김없이 허기.

아무리 먹어도 허깨비처럼 가벼워지는데

 

몇 줄의 거짓말처럼

내일 아침 문서가 열린다.

문서상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다.

 

 

- 오은 시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문학동네

 

 

 

이주 전 즈음, 수능 100일 앞두고 처음으로 입시설명회를 가보았다. 양천구민회관에 유명한 입시전문가가 온다며 별일 없으면 같이 가보자고 아는 언니가 권유했다. 도대체 아들이 고3인데 원서는 어디에 어떻게 써야하는지 까막눈처럼 답답하기도 했던 참이고 마침 집 근처이기도 해서 따라나섰다. 2시에 가까스로 맞춰 도착했다. 강연장 입구부터 열기가 후끈했다. 두두두두. 분주한 발걸음이 심장 박동 소리 같았다. 설렘, 긴장, 초조의 에너지가 조여 오는 느낌이다. “1층은 자리가 없습니다. 2층으로 가세요.” 2층에 올라가서도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맨 앞자리에 겨우 앉았다. 2시에 시작해서 5시 반까지. 두툼한 자료집을 펴놓고 설명을 듣노라니, 우매한 고3엄마는 당황하고 감탄하고 탄식했다.

 

1부는 작년에 서울대학교를 가장 많이 보낸 명문귀족고 하나고등학교 선생님이 한 학생의 자기소개서를 샘플로 띄워놓고 입학사정관제에 대비한 자기소개서 작성 요령을 설명했다. 2부는 이대부고 선생님이 각 대학별 논술, 적성 전형의 특징을 개괄적으로 정리해서 알려주었다. “문과학생인데 수학 점수가 안 나온다, 그럼 이 대학을 참고하면 되겠죠.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식이었다. 다 듣고 나니까 안개가 걷히는 것도 같았고, 어차피 수능점수만 좋으면 선택지가 넓다는 점에서는 과거 입시제도와 크게 바뀐 게 없어 시시하단 생각도 들었다.

 

몇 해 전 아는 선배가 아들이 고3이 되자 딱 일을 그만두고 입시설명회만 따라다녔다. 도대체 엄마의 역할이 뭐 길래 저렇게까지 열성인가 궁금했다. 그 아들이 서울대를 갔다. 워낙 어릴 때부터 탁월한 아이였으니 당연한 귀결 같기도 했는데 그 선배는 공부를 아무리 잘 해도 안심할 수 없다며 정보와 전략의 중요성 강조했다. 우리 동네 엄마들도 마찬가지다. 수능은 정보 싸움이라고, 성적은 별로인데 무슨 전형을 뚫어서 명문대 보냈다는 엄마들 얘기가 무용담처럼 들려 왔다.

 

그럴 때마다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먹고 살기 바빠서 하루 종일 일 나가야 하거나 배움이 짧아서 저 방대한 암호덩어리 같은 입시요강을 독해할 수 없는 부모를 둔 아이들은, 어쩌란 말인가. 지금의 입시제도는 이 사회의 취약계층을 이중삼중으로 배제시키고 소외시키는 제도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아마 이런 제도를 고안한 사람들은 학원 자본과 특목고 재단의 이익과 결탁한 기득권 세력일 것이다.

 

입시설명회에서 소개한 아이들이 쓴 자소서라는 것도 기성품 반짝이 패션처럼 번드르르했다. 친구들과 자전거여행 다녀온 것조차 사진을 첨부해서 자신의 리더십을 강조하고 포장하는 수단이 되어버리다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주변의 사람과 경험과 사건을 있는 그대로 대하고 느끼지 못하고 자기의 목적에 - 결국은 자기 상품화에- 편입시키는 기술을 십대 때부터 배우고 있었다. 그래도 가장 계산 없고 순수해야할 나이에 말이다. 자기 존재증명을 외부 권력의 요구와 틀에 맞게 능숙하게 때로는 비굴하게 해내는 것을 왜 가르쳐야 하는가. 공부하다보니 서울대를 갈 수는 있어도, 나는 서울대 가기 위해 태어났고 살아왔다고 말해진다는 것에 수치를 느껴야할 게 아닌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극기와 극복부터 강요하는 해병대 캠프의 일상화 버전이 아닌가.

 

며칠 전에는 선배의 친구에게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와 있었다. 선배의 집안 행사 때, 그러니까 십년에 두어 번 마주치는 정도이고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닌 관계이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전화를 했더니, “내가 너무 사랑하는 조카가 특목고 다니거든, 고3인데 고려대 입학사정관제 원서를 넣을 예정이니 자기소개서를 좀 봐줄래?그런다. 너무 당황해서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 언니는 이러는 게 큰 실례인 줄은 알지만이라는 추임새를 넣어가면서 평소 선배가 내가 글을 잘 쓴다고 해서 부탁한다는 발언을 덧붙였다. 다 듣고 나서 조용히 말했다. “제 아들도 고3인데요, 자소서 안 봐줬는데당황한 눈치였다. 내 아들이 고3인 것은 물론이고 내가 생계형 글쓰기로 정신없이 산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듯했다.

 

이 나라 학벌사회 상징자본의 위력이 어마어마하게 대단하긴 하구나. 한 사람을 저렇게 염치없이 만들 정도이구나. 큰 실례인 줄 알면서 부탁하는 건, 얼마나 실례인지 아는 게 아니라 전혀 모르는 것이다. 특목고 아이들이라고 다 싸잡아 얘기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인 삶의 이력이나 가치관을 알아서 꼭 내가 돕고 싶은 학생도 아니고, 자기소개서 하나 자기 힘으로 쓰지 못하고 일가친척의 자원까지 총동원해서 오직 자기 앞가림에만 매달리는 아이를 돕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내가 얼마나 만만하게 보였으면 저런 부탁을 할까. 앞으로 내 가치와 지향을 더 분명히 드러내고 언행일치하면서 살아야겠구나, 계급재생산에 복무하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다짐은 다짐이고. 거절하지도 수용하지도 못하겠는 상황에 빠진 게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나도 부실한 사람이다. 실수와 허점이 많고 민폐도 끼치고 이율배반적으로 갈등하면서 산다. 이기적인 엄마로 살아온 미안함과 뭔지 모를 부러움으로 인한 반발일 수도 있다. 근데 사실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자소서나 수행평가의 글쓰기 과제를 단 한 번도 봐준 적 없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요청하지도 않았다. 작고 보잘 것 없더라도 자기 힘으로 하는 게 중요하니까, 망쳐보는 것도 배움이니까, 또 고유성을 간직하는 게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보다 내가 끼어들어 더 나아진다는 보장이 없어서, 결정적으로는 내 일이 더 중요해서 밥만 잘 챙겨먹이면서 지켜보고 있다. 아이가 뒤처지는 것도 못마땅하지만 이 모순되고 부조리한 체제에 순응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거의 방치와 방목 사이에서 이뤄진 양육행위를 나는 그렇게 합리화하고 있다.

 

수능이 백일도 안 남았다. 아들이 영어 수학에만 매달리더니 과탐 성적이 너무 안 나와서 물리 과외를 시작했다. 영어수학 학원비 굳은 돈을 과탐으로 돌렸다. 어제 첫 수업을 하고 나서 엄마, 한 달만 일찍 할 걸 그랬어요한다. “인생에서 제 때라는 건 없어. 네가 결단하고 시작하면 그게 제 때지. 지금부터도 열심히 하면 되잖아의연한 엄마 행세를 하면서 말했다. 한 달을 아쉬워하더니 수업 끝나고서는 덥다고 또 누워서 세월아 네월아 마냥 뒹굴 거리는 아들을 답답한 심정으로 지켜본다. '저것이 나중에 밥은 먹고 살아야할 텐데...' 결국은 밥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한 인간의 존엄과 대결하고 거래하는 구도가 되어버렸다. 이 세계의 비참을  어떻게 견디고 살아갈까. 고3 아들도 힘들겠지만, 하는 일 없는 고3 엄마도 고달프다.

 

 

 

 

 

 

 

 

 

신고

'올드걸의시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진주 - 이백  (13) 2013.09.17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16) 2013.09.11
오은 - 이력서 '밥 먹기 위해 쓰는 것'  (6) 2013.08.05
헌책들 / 이영광  (6) 2013.05.01
아름다운 적(敵) / 강정  (8) 2013.03.13
감각 / 랭보  (2) 2013.02.28

헌책들 / 이영광

[올드걸의시집]

 

원수의 멸망을 보려거든 그가 늙을 때까지 기다려라

늙으면 필연코 추해진다

 

화장으로 가릴 수 없는 시든 주름들과

힘 빠져 늘어진 뱃가죽,

저 웅크린 매음녀의 짧은 한평생을

보라, 침처럼 흘러내리는 중얼거림이

그 옛날의 흔해빠진 사랑의 고백이거나

노골적인 호객의 대사임을 듣고

그대는 놀라리라, 스스로를 팔기 위해

악착같이 이 거리에 매달린 생이

늦은 11월, 떨어져 비 젖은 나뭇잎과

쓰레기를 닮아간다는 사실,

문득 술 취한 어느 손길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가 깜짝 놀라 물러설 때도

희마하게 그 어둔 눈빛 반짝인다는 사실,

이 거리의 어느 누구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팔리기를 포기하는 법은 없다, 그러나

그녀의 늙음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그녀의 늙음은 너무 쉽게 노출된다

상처를 이루지 못한 비싼 사랑의 흔적들이

정액처럼 표지 위에 얼룩져 있다

 

신간 코너에서 베스트셀러 코너로,

재고 도서로 쌓였다가 다시 무수한 손을 거쳐

지루한 세일 기간 동안 싸구려로

드디어 제값으로 팔리기 위해 나와 앉은 헌책들

 

 

- 이영광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 창작과비평사

 

 

 

'청춘은 빨리 깔깔 웃고 빨리 눈물을 흘린다. 청춘은 빨리 용기를 내고 빨리 공포스러워 한다...청춘은 빨리 참여하고 빨리 이탈한다.' 사무실에 굴러다니는 도올의 책을 넘기다가 눈이 멈춘 부분이다. 저 구절을 보고 나 청춘인가? 했다. 별일 아닌 일에도 혼자 웃기도 잘 웃고 눈물도 펑펑 잘도 쏟아진다. 한번 해보자 덤볐다가 기겁하기도 한다. 결정적으로 '빨리 참여하고 빨리 이탈한다'는 부분이 와닿았다. 나, 지금 하는 일을 내던지고 이탈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시구를 친구한테 보여주었더니 무엇에 '공포'를 느끼느냐고 물었다. 얼른 대답했다. 공문서. 라고. 지난 3개월 동안 하루 종일 문서와 대면했다. 그 결과 나는 지금 도큐멘트 포비아가 되어버렸다. 폰트 12에 헤드라인 서체에 막대기같은 문투로 용건만 간단히 나열된 그 문서는, 조금도 날 유혹하지 않는다. 밀어낸다. 어디에 정을 붙여야할지 모르겠다.  

 

토요일 시세미나에서 '헌책들'을 읽고 나 늙은인가? 했다. 일을 하지 않고 일에 대해서 판단만 하고 있다. 난 그것을 늙음의 징조로 본다. 살지 않고 삶을 판단하는 것. 자판기처럼 문서든 책이든 말이든 넣으면 글을 뽑아냈는데 이제 그 생산 능력이 마비된 것인지, 이번이 예외적인 경우인지 알 수 없으나, 업무성과보다 불평불만이 쌓여가는 작금의 상태는 낯설고 난감하다. 고용형태에 대한 부당함도 견디기 힘들다. 정식 고용계약을 하면 실수령액이 더 작아지니까 더 많은 급여를 쳐주기 위해 편법인데 원고료 개념으로 매달 일정액을 받는다. 나를 위한 배려이고 나도 동의했는데 막상 일하는데 그 시스템이 질곡처럼 느껴진다. 이건 아닌데 싶으면서도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하던 일은 마무리하고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고 한달이 남았는데, 그 한달 동안 나를 또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동시킬 생각하니 비참했다.

 

어제 퇴근 길에 선배가 '낼 아침에 업무 얘기 좀 하자'고 했다. 그 때 "못하겠다"고 얘기를 해야하나 아침에 버스를 타고 가면서 한 시간 내내 고민했다. 이럴까 저럴까 생각하다가 또 청춘의 징조인지 청승의 징후인지 모를 눈물이 왈칵 흘렀다. 뭐냐면, 나는 그동안 살면서 너무 참지 말아야 할 일까지 잘 참은 것은 아닐까, 하는 약간의 후회, 자조, 원망으로 생각이 번졌다. 감정이 커져서 급기야는 그간 살아온 생에 대한 자기연민이 밀려왔다.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알고 보자보자 하면 보자기로 안다고, 내가 모든 것을 다 견디고 참고 꿋꿋하고 씩씩하고 태연하게 가정생활을 영위해나가는 게 어쩌면 내가 파놓은 함정이 된 것 같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참지 못할 일과 참을 일을 분간하는 기능이 퇴화버렸는지도 모른다. 왕상무 승무원 폭행 사건을 계기로 나오는 온갖 사례들을 보면, 그간 노동자들이 참 무던히 눈 감고 귀 닫고 입 닫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놈의 먹고사니즘 때문에.

 

아침에 선배와의 미팅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은 마쳐야지 싶어서 잘 마무리해보겠다고 대답했다가, 사무실에서 하루종일 고민하다가 선배한테 편지를 썼다. 일필휘지로. 일종의 항복문서였다. 최선을 다하고 싶은데 최선을 다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글쓰기 능력이 장착되어 있어 금방망이처럼 뚝딱하면 책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고 선배도 생각하고 저도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내 노동력과 가시적 성과물의 즉물적인 교환을 이렇게 실시간으로 자각해야 하는 게 너무 자본주의적이고 야만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엉성한 고용방식 때문에 내가 임노동자도 아니고 부속품 같다는 자괴감이 든다, 짐도 덜어드리고 일도 배우고 돈도 벌려는 애당초 기획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죄송하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써놓고 보내기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임시저장' 해놓았다. 노동절 하루, 나의 노동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시세미나에서 '헌책들'이 창녀 비하하는 시 같다는 얘기가 나왔다. 평소 과묵하던 한 친구가 반론했다. "전산 전공을 살려서 프리랜서로 일할 때 여기 가라면 여기 가고 저기 가라면 저기 가서 일 해주고 오는데, 내가 몸 파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창녀의 직업과 크게 다른 노동을 한다는 생각을 갖기 어려웠다"고 했다. 일순 침묵이 흘렀다. 스스로를 팔기 위해 악착같이 이 거리에 매달린 생. 이라는 대목에선 우리들은 저마다의 처지로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을 사고 파는 일의 쓸쓸함은 정녕 피할 수 없는가. 분업화되고 파편화되는 삶의 양식에, 합리성과 효율성과 생산성에 저항해야지, 이 야만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에 길들여지지 말아야지, 팔 때 팔더라도 알고 팔려야지. 팔리기를 포기하지 못하면서 버둥거리는 노동절 전야.    

 

 

신고

'올드걸의시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16) 2013.09.11
오은 - 이력서 '밥 먹기 위해 쓰는 것'  (6) 2013.08.05
헌책들 / 이영광  (6) 2013.05.01
아름다운 적(敵) / 강정  (8) 2013.03.13
감각 / 랭보  (2) 2013.02.28
피의 샘 / 보들레르  (6) 2013.01.27

아름다운 적(敵) / 강정

[올드걸의시집]

 

 

나의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 너는 죽어야 한다 맨발

로 걷는 많은 꽃들을 피워야 한다 부풀어오르는 공기

를 뜯으면 뜯을수록 너는 더욱 선명한 나의 적이 된

다 유일한 대안, 유일한 결론, 유일한 삶이 된다 공

기처럼 나는 없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는 내가 아

름다운 적인 너에게 내 큰 입을 내민다 내 입이 닿았

기 때문에 너는 아름답다 네 입과 닿았기 때문에 추

해진 나를 너는 더욱 추하게 하라 나는 너를 모른다

나의 아름다운 음악이 네가 만든 추함마저 아름

답게 하라 나는 너를 모른다 알면 알수록 네가 추해

진다 너도 나를 몰라라 숱한 꽃들이 자기 이름마저

지울 만큼 부풀어 너를 보는 나의 추함을 지운다 너

의 아름다움에 칼을 쑤시는 내 아름다운 음악을 맨발

로 더듬는다 더듬으며 보이지 않는 한끝으로 나를 내

몬다 너와 부딪치니 내 아름다운 음악마저 추하다 죽

어라, 죽어라, 너를 벗어던진 나여, 한번도 제 소리

로는 빛나지 못하는, 입술을 닫은, 도저한 직유의 세

계여

 

 

- 강정 시집 <처형극장>, 문학과지성사

 

 

요즘 내가 하는 일이란 '헤드라인체'로 쓰인 공문서를 보고 상황과 내용을 파악해서 산문으로 풀어내는 일이다. 건조한 공무원의 언어를 부드럽고 박진감 넘치는 내러티브 기법으로 번역해야한다. 팩트에 기반하되 상상력이 발휘되어서는 안 되고 문학적인 요소는 가미되면 좋지만 사실관계는 명확해야 한다. 뭘 어떡해야 하지. 난감한 노릇이다. 그 전에 프리랜서로 일할 때도 유사한 일을 했다. 퀵 서비스로 문서와 브로셔가 한 가득 들어있는 서류 봉투를 받아서, 읽고 또 읽고 내용을 파악하고 서사를 만들어서 원고지 50매 정도로 줄여서 쓰는 일이다. 이번 일은 그것과 좀 다르다. 일단 참조 자료가 훨씬 부실하다. 그러다보니 암호해독 수준이고 밀밭에서 칼국수 끓여내야 하는 격이다. 그 작업이 한 달 정도 반복되었고, 지난 주에는 뒷목부터 욱시근거렸다. 그나마 사무실 사람들이 뜻이 맞고 분위기가 단란해서 다행이긴 하다. '살다보니 별 일을 다하는구나.' '집필노동자, 직업의 세계는 무궁무진하구나.' 푸념 끝에 자괴감이 엄습했다. 온종일 메마른 어휘들을 끼워맞추고 마른행주 짜듯이 글을 쥐어 짜면서 시간을 보내는 내 자신이 하찮게 느껴졌다. 자아존중감 급하락. 스트레스 급상승. 그 속내에는 나는 더 고상한 글을 써야하는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작동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 와중에 글쓰기 수업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강독 수업과, 시세미나 시즌5를 시작했다. 책을 더 꼼꼼히 읽고 강의 준비 더 하고 같이 이야기 나누면서 느낀 것을 글로 쓰고 싶었다. 요즘은 단편적인 글 쓸 기운마저 없다. 나 혼자라면 적게 벌어서 적게 쓰고 살 수 있을 텐데, 결혼하고 아이낳고 생활인 모드로 세팅이 되어버리고 물리적으로 나이까지 먹으니까 불가능해져 버렸다. 언제나 생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궁리한다. 내가 이 얘기하면 주변에서 꼭 그런다.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글 쓰는 사람들의 사례. 카프카도 그랬다. 조앤 롤링도 아이 키우면서 글 썼다. 박완서는 마흔에 데뷔했다. 등등. 회사 다니는 사람한테 이건희되는 건 어렵지 않다고 말하지 않으면서 글 쓰는 사람들에겐 상위 1%의 사례를 꼭 적용시킨다. 마흔 넘어 아이 둘 키우고 돈 벌면서 살림도 하고 글 쓰는 건 때때로 신체가 해체되는 일이다. 한없이 아름다운 나의 아이들이 때로 나를 흡혈하는 적으로 보인다. 아름다운 적. 아름다운 딸. 그 적으로 인해 나는 자주 구석으로 내 몰린다. 으깨진다. 이 아름다운 가학과 피학의 향연.

 

 

 

 

신고

감각 / 랭보

[올드걸의시집]

 

여름 야청빛 저녁이면 들길을 가리라,

밀잎에 찔리고, 잔풀을 밟으며.

하여 몽상가의 발밑으로 그 신선함을 느끼리.

바람은 저절로 내 맨머리를 씻겨주겠지.

 

말도 않고, 생각도 않으리.

그러나 한없는 사랑은 내 넋속에 피어오르리니,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보헤미안처럼,

계집애 데려가듯 행복하게, 자연 속으로.

 

 

 

- 김현 옮김,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민음사

 

 

 

 

날씨가 풀려서 아이폰이 생겨서 음악을 들으면서 출근길에 지하철역까지 걸었다. 마을버스로 네 정거장. 이십분 정도 걸린다. 찰흙으로 빚은 것처럼 귀에 착 들어맞는 이어폰으로 들으니 음악이 찰지다. 차들이 지나가는 소음이 완전 차단되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길이 쭉쭉 열렸다. 2월의 쌀쌀맞은 아침 공기가 뺨을 어루만지고. 여기가 영화 촬영장이고 카메라가 나만 비추기라도 하는 것처럼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벽에서 뽑힌 못이 바닥에 뒹굴듯이 나만 세상에서 쏙 뽑혀버린 느낌도 들었다. 뭐든 좋았다. 말도 않고 생각도 않고. 느낌만 가득. 이게 하이데거가 말한 '인간은 땅 위에 시적으로 거주한다'는 것이로구나 싶었다. 내가 이해하는 시적인 것은 느낌의 끝에 이르는 것이다. 이이언의 낮고 음울한 목소리는 아침 8시의 대책없는 눈부심도 컴컴한 밤으로 만들어버린다. 외로운 내적환경에 최적화된 목소리. 언제부턴가 어떤 정서 상태로 나를 데려다 놓는 것들에 맥없이 끌린다. 충만한 느낌상태에서 왕성한 생명활동을 자각하기에 그런가. 이 또한 생의 에너지를 갈망하는 노화의 징후일까.

 

글쓰기수업을 시작했다. 오늘로 벌써 3주차다. 슬슬 도반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오고 정이 들려 한다. 한주 한주 글이 한편씩 더해질 때다마 감정이 한 겹씩 쌓여가는 관계의 형성 과정이 더없이 신기하고 소중하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만나서 책을 읽고 생각을 전하고 서로의 글을 읽고 감정의 결을 맞춰가면서 진심어린 인생 비평을 해나간다. 소외된 노동을 하느라 오래토록 웅크리고 쪼그렸던 자기 펼침의 시간. 공포감과 해방감의 에너지가 강의실 안에 자욱하다. 20여 명의 감각과 지능과 정서의 고도의 몰입 상태. 후끈하다. 삶의 사연들이 이어폰 끼고 듣는 음악처럼 살갗을 파고든다. 그걸 듣노라면, 문득 혼자인듯 외롭다가 아프다. 수업이 끝나면 배고프다. 예전에 아기 젖먹일 때도 그랬다. 주사바늘로 채혈 당하듯 5대 영양소가 일시에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고 아기가 천사같다가 괴물같았다. 모유수유가 끝나면 실제로 물이나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켜야했다. 그러면 새로운 피가 채워지곤 했다. 글쓰기수업도 존재와 존재가 이어져서 민낯을 마주하고 희비의 감정을 나누고 감각을 일깨우고 삶의 양분을 나누는 일이다. 그래서 배가 고픈가보다.     

 

 

 

  

 

   

신고

'올드걸의시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헌책들 / 이영광  (6) 2013.05.01
아름다운 적(敵) / 강정  (8) 2013.03.13
감각 / 랭보  (2) 2013.02.28
피의 샘 / 보들레르  (6) 2013.01.27
마포구립서강도서관 <올드걸의 시집> 독자와의 만남을  (4) 2013.01.24
황지우 / 눈보라  (0) 2013.01.16
TAG. 랭보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