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에 대해 말하지 못할 때

[은유칼럼]

김순자는 1979년에 삼척고정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원가족 12명과 함께 잡혀갔다. 남편은 딴살림을 차렸고 열 살, 일곱 살, 네 살 삼남매만 남겨졌다. 외가 쪽 친척은 다 구속됐고 친가에선 외면했다. 엄마의 복역기간 5년간 아이들은 이집 저집 떠돌며 컸다. 학교에선 ‘여간첩의 아이들’로 놀림과 따돌림을 당했다. 큰딸은 학교 갈 차비도 없는데 설상가상 생리를 시작했다. 한번은 하굣길에 생리가 터져서 아무 부잣집에 들어가 청소해드릴 테니 돈 좀 달라고 해 생리대를 샀다고 한다.

3년 전 국가폭력 피해자 인터뷰에서 들은 얘기다. 고문보다 오래가는 상처로 김순자는 큰딸의 생리대 일화를 언급했다. 나 역시 인상깊었다. 큰딸이 나랑 동갑이었다. 간첩사건은 <수사반장> 같은 드라마에나 나오는 딴 세상 일로 알았는데 내 또래가 이토록 구체적인 피해를 입고 있었다니…. ‘분단국가의 상처’가 일상의 맥락에선 생계부양자의 급작스러운 부재이고 그 자식이 생리대를 구걸하는 상태로의 몰락인 것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더니 가난도 디테일에 있었다. 그즈음 신발 깔창 생리대 사건이 보도됐다. 사연도 놀라웠지만 40년 시차가 무색하게 빈곤 여성청소년의 처지가 그대로라는 게 나로선 더 충격이었다. 그제야 의문이 들었다. 밥 굶고 추위에 떠는 가난은 공론화되는데 생리대 못 사는 사안은 왜 이제껏 잠잠했을까.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 된다(에이드리엔 리치)고 했나. 그럴 만도 했다. 생리하는 날은 ‘그날’이고, 생리대는 ‘그거’고, 광고의 생리혈은 파란색이고, 생리대는 까만 비닐봉지에 칭칭 묶어 운반하는 현실. 인구의 절반이 경험하는 월경은 강력한 금기어였고 철저히 비가시화됐으므로 문제점도 은폐된 거다. 그나마 신발 깔창에 덧대어 ‘생리대’란 단어가 공공연히 거론되면서 해결책도 모색하기 시작했다.

빈곤 청소년 생리대 무상지급과 관련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설전이 오갔을 때, 그럼 남자도 수염이 나니까 면도기를 공짜로 달라는 의견이 ‘예상대로’ 나왔다. 누군가 응수했다. 남자도 길 가다가 수염이 갑자기 막 솟아나고 바지를 뚫고 나와 생활에 지장이 생기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그렇다. 월경은 제 몸에서 다달이 일어나는 일이지만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하기에 고통이다. 생리대가 없으면 앉지도 서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하기에 기본권이고 생존권이다.

동료 시민의 처지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우린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서 얼마 전 생리대 무상지원에 관한 국민여론 설문조사가 이뤄졌다. 빈곤 여성청소년만이 아니라 모든 여성청소년으로 대상을 확장하는 사안이었는데, 예산을 이유로 반대한다는 의견이 절반을 넘었다. 정작 여성청소년은 설문 대상에 없었다. 그건 마치 이성애자끼리 ‘동성애에 찬성합니까?’ 묻는 것처럼 질문 자체가 인권을 거스른다. 사람의 사랑이 그러하듯 사람의 안위도 찬반을 묻는 게 아니라 존중을 구할 사안이다.

세상 쓸데없는 게 연예인 걱정이라지만 나는 여성아이돌을 걱정한다. 저 딱 붙는 짧은 옷을 입고 생리 양이 많은 둘째 날엔 어찌 춤을 출까. 얼마 전 여성아이돌의 한 멤버가 공황장애를 이유로 활동을 중단했다. 다른 질병처럼 ‘생리통이 심해서’ 같은 사정도 거리낌 없이 얘기되면 좋겠다. 그럴 때 “1970년대엔 생리대 살 돈이 없어서 남의 집에 가서 일했대” “2010년대엔 신발 깔창을 썼대” 하는 말들이 흑역사로 남고 자판기에서 무상으로 생리대를 뽑아 쓰는 날이 올 거다. 어떤 부모를 만났느냐에 상관없이, 즉 가난을 증명하는 절차 없이 급식도 생리대도 지급되어야 아이들이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성장할 수 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06919.html?_fr=mt5&fbclid=IwAR2H-_ZoAkbkRydmZvZppYbGXuw8d4yXkC7PiecP9nbjQI-I1RKfcfY5dHU#csidx54a7452589d4e409c4f90daa5109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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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이라고 말하고 싶어

[은유칼럼]

“무지에게 ‘응’이라고 말해주고 싶어. 무지는 다 옳으니까.” 
교복을 입은 수레가 식탁에 앉아 계란후라이를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며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나는 보리차를 따르다 말고 멈칫했다. 시인이 앉아있나? 고개를 돌려보니 딸아이가 맞고, 시계를 보니 오전 7시다. 이불에서 십분 전에 빠져나온 아이의 말이 시적이다. 무조건 무지가 옳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응’이라는 방석을 먼저 내어 주는 말. 지극한 존중이 묻어난다. ‘응’이라는 말이 이렇게 순정하고 온전했던가 싶다. 내가 고백을 들은 양 울컥한다.
 
며칠 후 나는 아껴둔 질문을 아이에게 꺼내 놓았다. 
“수레야, 왜 무지에게 응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어?” 
“무지가 좋으니까.” 
“근데 무지는 왜 다 옳아?” 
“무지는 거짓말을 못 하잖아.” 

수레의 무지에 대한 애정 세례는 새삼스럽지 않다. 아는 핸드폰 대리점에서 돌보던 길냥이가 낳은 새끼들 4남매 중 혼자만 입양이 되지 않고 남아있던 아기고양이를 손수 데려온 4년 전부터 시작됐다. 흰색, 갈색, 검은색이 조화롭게 자리잡은 ‘삼색이’ 무지를 보며 연신 감탄한다. “무지는 무늬가 너무 예뻐!” 무지도 수레 곁을 충신처럼 지킨다. 수레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슬며시 아이의 방으로 거처를 옮긴다. 수레가 공중에서 휘젓는 낚싯대를 따라 신나게 한판 놀다가, 숙제를 하는 수레 옆에서 잠이 들곤 한다. “무지는 나의 베스트프렌드”라고 으쓱하며 말하던 수레는, 열네 살 땐 커서 무지랑 결혼할 거라는 선언으로 날 놀래켰다. 그런 세속적 말들과 달리 이번에는 다른, 보다 너른 차원의 사랑으로 나아갔다. 졸음의 바닥에서 주워 올린 말. 선적이고 시적인 말. 그러고 보니 시도 있다. 문정희 시인의「응」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그때 너 시인 같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 했지만 도로 삼켰다. 시인 같다는 건 시인이 아니라는 전제를 둔 말이니까. 시인과 시인 같은 사람의 경계를 아이에게 주입하고 싶지 않다. 인간과 고양이의 구분을 두지 않고 ‘결혼’하겠다는 아이니까. 시인이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를 쓴 사람이 시인이다. 살면서 우리는 죄인지도 모르고 죄를 짓듯 시인지도 모르고 시도 짓는다. 잠결의 아이처럼. 

수레는 고2가 되니까 문학을 배워서 좋다고 지나가듯 말했다. 어느 밤엔 내 옆에서 자려고 눕더니 묻는다. 
“엄마,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 알아?”
“응. 알지. 우리 집에 시집도 있을 걸.” 
“근데 왜?” 
“문학시간에 배웠는데 그 시가 좋아…… ‘귤값을 깎으며 기뻐하던 너를 위해/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수레는 제법 결연한 어투로 시구를 두 행 읊더니만 이내 잠이 들었는지 잠잠하다.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는 그 나이를 두 번 산다. 열일곱 무렵부터 나도 시가 괜히 좋았다. 시집 표지가 나달나달해지도록 읽고 노트에 정성스레 베껴 쓰곤 했다. 슬픔, 기쁨, 사랑, 그리움 같은 단어가 만든 감정의 둘레에서, 나는 마치 꽃그늘 아래 앉은 것처럼 더없이 안전하다 느꼈다. 아이는 왜 그 시의 그 부분이 좋았을까. 
수레는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 집 곳곳에 책이 있지만 나는 굳이 아이에게 권하지 않는다. 나도 한 때는 책 읽으면 똑똑해진다는 신앙에 얽매이는 엄마였지만, 똑똑한 게 사는 데 좋은지 나쁜지 어느 순간부터 헷갈린다. 그리고 책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교감하며 느낄 것은 느끼고 배울 것은 배운다는 걸 이젠 안다. 나이가 들고 오가는 타인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아이의 성장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자연스레 터득했다. 수레에겐 고양이 무지가 책이다. 있는 그대로 존재를 대하는 법을 일러주는 지침서이자, 도도한 상대와 관계 맺는 법을 알려주는 탁월한 심리에세이, 한 번도 같은 장면이 나오지 않는 마술 같은 그림책. 매번 설렘으로 첫 장을 여는 책.

 

#무크지'언유주얼' #10매소설 #무지와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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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진, 작업하는 사람

[행복한인터뷰]

인터넷 검색창에 ‘백현진’ 세 글자를 넣으면 가수, 화가라는 인물 정보가 뜬다. ‘위키백과’엔 그가 참여한 영화와 음반 목록이 주르르 펼쳐지고, ‘동영상’엔 최근 종영한 TV 드라마 <붉은달 푸른해> 개장수로 분한 모습이 나온다. ‘이미지’엔 강렬한 색채의 그림들이 시선을 끈다. 바다 물결처럼 매 순간 다른 존재를 펼쳐내는 멀티플레이어 아티스트 백현진. 한때 ‘연남동 사는 백현진’으로 자신을 소개하던 그는 자신이 사는 동네가 힙스터의 성지로 주목을 받자 ‘노래하고 그림 그리는 백현진’으로 바꾸더니, 지금은 그저 ‘작업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백현진은 아침에 눈뜨면 가장 먼저 붓을 잡는 사람이고,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보에 오른 독보적 화가다. 그가 2년 만에 개인전을 연다.

삼청동 PKM갤러리는 청와대 춘추관 옆에 위치한다. 한마디로 명당 자리다. 서울 도심의 소음이 제거된 한적하고 풍광 좋은 곳에서 열리는 전시 제목은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요: 흙과 매트리스와 물결>. 작업 능률을 높이기 위해 부르는 상식적 의미의 노동요가 아니라, 오히려 적막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고안한 ‘또 다른 노동요’를 뜻한다고 한다. 왜 아니겠는가.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아니 그 경계를 흔드는 백현진의 작품을 보는 일은 길들여진 두뇌에 자극을 주는 일이고, 자기 내면의 고요한 세계로 넘어가는 귀한 노동이기도 하다. 

첫 개인전 후 10년 정도 흘렀다. 중견작가로서 전시를 하는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점점 다가오는 전시를 덜 예민하고 덜 특별하게 느낀다. 그래서 좋다. 작업하다가 때 되면 작업 반출하고, 전시 시작하는 날 되면 전시장 가고, 이러한 과정을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더 평범하게 만들고 싶다. 몸시 부담스럽다거나 어깨에 힘이 들어갈 일은 없고, 크게 무리가 없다. 음, 무리가 덜하다. 

이번 전시 부제 '흙과 매트리스와 물결'은 어떻게 만든 조합인가? 
전시를 준비하면서 흙바닥에 매트리스가 있고 아지랑이가 피어있는 이미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원체 누워 있는 거, 멍 때리면서 물결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걸 끌고 들어왔다. 정말 체계 없이 낱 말들이 떠돌다가 어느 순간 결정되는 거라서 제목을 어떻게 지었는지 논리적으로 꼼꼼하게 설명을 못 한다. 

그동안 인터뷰한 내용이나 전시 자료에도 무질서, 체계 없음, 직관, 즉흥 같은 단어가 자주 나오더라. 
사람 사는 게 정말 체계가 없는 것 같다. 무질서나 체계 없음을 추구한다기보다 작업 과정이 사람 사는 것처럼 체계 없고 두서없는 걸 인정하는 거다. 


체계 없는 삶, 두서없는 예술 
백현진은 말을 예민하게 고른다. 바둑을 두듯 낱말을 둔다. 이미 뱉은 말을 되물리고 다른 말로 정정하길 거듭했다. 작업 이야기라서 더 그렇단다. 언어로 할 수 없어서 음악을 하고 그림을 그린 건데 그걸 다시 언어로 설명하는 건 그에게 “힘든 일이고 이상한 일”이다. 얼핏 언어에 대한 불신처럼 들리는 이 말은 실은 언어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매 맞은 기억밖에 없는” 학창 시절에 소년 백현진은 시를 썼다. 미대생이던 누나를 통해 막연히 예술가의 삶을 동경하던 터라 문예창작과에 지원했다가 낙방했고, 조소과에 들어갔다. 그가 체험한 미대 입시는 참 별로였다. 누가 누가 구구단을 그림으로 잘 외우나 같은 평가 방법이 도대체 맞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적나라한 실체를 봤다. “안 다녀도 되겠구나.” 그즈음 ‘어어부 프로젝트’라는 밴드를 만들었다. 음악 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 학교를 계속 안 나갔더니 제적 통지서가 날아왔다. 어어부 프로젝트 백현진으로 청춘을 태우고 21세기로 넘어왔다. 제도 교육의 문을 박차고 나온다고 다 예술가가 되는 건 아니지만, 시스템에 순응하는 예술가라는 것도 형용모순임을 그의 20대가 보여준다. 

음악을 하면서도 그림을 놓지 않았다. 화가로서 자기 재능을 믿게해준 운명의 한마디가 있나? 
2000년대 초중반에 현대 무용 안무가 피나 바우슈Pina Bausch의 초청으로 몇 차례 독일에서 공연했고, 몇몇 작품에 어어부 프로젝트가 음악을 맡았다. 그 인연으로 피나를 만났다. 작업하면서 많이 헷갈리던 시기였다. ‘다른 걸 해야 하나’가 아니라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그때 피나가 내 그림과 음악에 큰 칭찬을 해줬다. 저 정도 예술가가 내작업을 좋게 봐주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무척 큰 힘이 됐다. 그가 유명해서가 아니라 내가 독일에서 피나의 작품을 쭉 보면서 이 사람은 어마어마한 예술가라고 느낀 상태에서 그 얘길 들으니까 힘이 된 거다. 

작가로 운신의 폭이 넓어지는 건 운이라고 말했는데, 피나 바우슈를 만난 것도 멋진 운 같다. 또 어떤 일을 운이 좋았다고 기억하나? 
대학 때부터 먹고살겠다고 일러스트레이터와 그래픽디자이너로 소소하게 일하다가 30대 초반에 그만두었다. 내가 한 일을 클라이언트에게 컨펌받는 게 체질적으로 안 맞았다. 최소 생활비도 못 버니까 막막하던 차에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전속 작가 제안이 왔다. 5년 동안 작업실과 재료비 걱정 없이 일했다. 큰 행운이었다. 

2016년 <들과 새와 개와 재능> 전시 이후 2년 만인데 신작 페인팅이 무려 60여 점이다. 작업 시간을 정해놓고 일하는지? 
이번 개인전에서 선보이는 작품 중 반 이상은 오전 7~8시부터 오후 1시까지 붓질한 거다. 오후 시간엔 놀거나 음악 작업을 하거나 산책도 하고 낮잠도 잔다. 흐트러짐 없이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며 작업하는 범주에 속하는 작가는 아니다. 엄청 흐트러진다.(웃음)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한다. 

재능은 곧 성실함이라는 말이 있는데 동의하나? 
내 생각에 작가로서 성실함은 곧 작업량이다. 죽었건 살아 있건 작가 중 ‘이 사람은 진짜 근사한 예술가구나’라고 내가 생각하는 사람들은 작업량이 굉장하다. 그렇게 치면 나는 멀었다고 본다. 


연기 아닌 연기, 그림 아닌 그림 
백현진의 삶은 크게 두 축이다. 미술가로서 시간과 삶, 음악가로서 시간과 삶. 보통 작곡할 때 입으로 멜로디 만들어서 시작하니까 그림 그리면서도 흥얼흥얼 동시에 작업이 진행된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는 노래를 부르면서 전시장 벽면에 작은 붓으로 녹색을 칠하는 퍼포먼스 ‘뮤지컬: 영원한 봄’을 선보인다. 미술과 음악 작업에 임하는 그는 흡사 배우처럼 보이기도 한다. 생활과 연기가 구분되지 않던 그는 일찍이 김지운 감독의 권유로 영화 <반칙왕>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 후 품앗이로 이런저런 작품에 출연하다가 장률 감독의 <경주>에서 최 교수역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가 속물 역할을 찰떡처럼 해낼 수 있는 비결은 “그들이 얼마나 어떤 면에서 후진지, 적들을 좀 알기 때문”이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붉은달 푸른해>에서는 개장수 역으로 인기를 끌었다. 

연기 잘한다는 리뷰가 많더라. 인기를 실감하나? 
연남동이 뜨기전부터 이 동네에 쭉 살았으니까 음악 하고 미술 하는 백현진으로 아는 젊은 사람이 드문드문 있었다. 요즘에는 지나가다 대뜸 (손가락질하면서) “어, 어, 어 탤런트!” “어? 그, 김선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가 나온 드라마에서 나를 봤다는 의미겠지. 그러면 “저는 김선아가 아닙니다” 하고 지나간다.(웃음) 

배우 활동이 당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 
일시적 소속감을 느끼게 해준다. 보통은 합주할 때 빼고는 그림이나 음악을 다 혼자 한다. 배우 일은 1년에 한 달 남짓 하는데 그런 일시적 소속감이 삶의 균형을 잡아준다. 음악이나 그림만큼은 아니지만 현장 가서 연기할 때 재미있다. 

(그림설명: 백현진 작가는 스케치를 하지 않는다. 나중에 뭐가 나올지는 그도 모른다. 계속 그리다가 그림을 보고 몸이 불편하지 않으면 멈춘다.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하지만, 긴 시간 계속하면 육체적으로 힘들다. 그래도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멈추지 못한다. 그런 그림을 보고 있으면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연기, 노래, 미술 세 분야를 아우르는 공통된 게 있다면 무엇인가. 
굳이 꼽는다면 셋 다 즉흥적이고 직관적으로 일한다. 배우로는 약점일 수 있는데, 연기할 때도 테이크마다 다르게 간다. 연기 철학 같은 게 아니라 대본대로 똑같이 하는 걸 잘 못한다. 이번 드라마에서 사람들이 개장수 역할이 재밌다고 하던데, 작가랑 연출가가 거의 열어줬다. 그런 조건에서만 기존 배우와 다른 매력이 나오는 것 같다. 

어느 인터뷰에 보니까, "저게 무슨 연기냐" 소리를 듣는데, 음악 할 때도 "저게 무슨 음악이냐"는 얘길 들어서 괜찮다고 했더라. 
그림을 보고도 그렇게 말한다. “저게 무슨 그림이냐.”(웃음) 

그런 말 들으면 기분이 어떤가? 
청년 시절엔 ‘웃기시네’ 하는 마음도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각자 마음대로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작업하는 사람으로서 일종의 맷집 키우는 훈련이 됐다. 한국에서 인디 뮤지션으로 활동하면, 보통은 작업에 대한 피드백이나 시장에서 성과와 무관하게 일할 수밖에 없다. 내가 좋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 것이다. 인디 뮤지션으로 오래 시간을 보낸 게 사람들의 무관심 혹은 혹평에 맷집을 길러줬다. 

음악 하고 그림 그리면 추하지 않게 늙을 수 있을 거 같다고 했다. 왜 그런가? 
누굴 미워하거나 우쭐하는 마음이 후진 생각이지 않나. 주눅 들고 낙담하고 시기하고 우쭐하는 이런저런 생각이 사람을 추하게 만드는 것 같은데, 그림 그리고 음악 하고 글 쓸 때는 그런 생각이 들어올 겨를이 없다. 깨어 있는 동안 하루의 절반 가량을 뒤숭숭한 마음으로 지내는 거랑, 그냥 멍하니 우두커니 시간을 통과하는 것을 비교하면 대자연의 일부로서 후자가 훨씬 더 깔끔하고 좋은 것 같다. 

대개 사람들이 자기 단점, 결핍 때문에 위축되고 남을 미워하고, 도전을 망설인다. 자기 단점에 대한 태도가 궁금하다. 
단점으로만 구성된 인간일 것이다.(웃음) 그런데 인간이 여기까지 끌고 온 문명에 대해 혼자 깊게 생각해보면 문명에서 발전은 없다. 거기엔 변화, 변경만이 있다. 어떤 기준이 있어서 잘하면 장점, 못하면 단점인데 그런 게 없다는 뜻이다. 내 작업이 다른 작업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전혀 겸손이 아니다. 그럼 뭐가 가치 있냐고 묻는데, 내가 정말 좋아하는, 가령 피나 바우슈 작품들은 더 가치가 있는 무엇일까? 그냥 내게 크게 좋은 작품이다. 어쨌든 내가 싫어하고 못 견뎌 하는 건 여전히 많은데, 가급적 그 근처에는 가고 싶지 않다. 

가족들과는 어떻게 지내나? 
아버지는 오랜 세월 외항선 선장이어서 1년 만에 집에와서 한 달 정도 살다 다시 나가셨다. 그래서 아버지도 아버지 역할이 어떤 건지 모르고, 나도 자식으로서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할아버지도 정치인이라 집에 항상 안 계셨고, 할머니도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다. 아버지에겐 내리사랑의 경험이 부재했을 거다. 거기까지 헤아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 어머니는 또 어머니대로 따로 노셨다. 청년 시절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할 때 부모님을 효도 차원에서 모셨다. 기분 좋게 공연이 끝나고 부모님께 절을 하며 장난으로 변변히 사랑도 안 주시고 완전히 방치를 해줘서 내가 이렇게 예술가로 재미있게 산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어흠” 헛기침하고, 어머니는 웃으시더라. 어머니는 10년 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1934년생인데 늘 건강하셔서 정말 고맙다. 

그에게 행복하냐고 묻자 늘 재미있다고 답했다. 아무래도 그 청년 덕분 같다. “번쩍번쩍 정신을 들게 하는 젊은 사람”이다. 과거의 자신처럼 꼬여 있고 독한 젊은 청년이 내 작품을 보면? 내 음악을 들으면? 그게 섬뜩섬뜩해서 너무 깝치지도 말고 입 닥치고 작업을 잘 해봐야겠다고 다짐한다. 그 내면의 감시자는 “인정사정 안 봐주니까 걔한테 걸리면 다 작살난다”며 웃는다. 그는 인터뷰 내내 거의 모든 답변에 “혼자 깊게 생각해보면”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날 선 청년 정신과 고요한 성찰에서 나온 백현진의 작품은 겨울 땅처럼 언 마음에 청신한 봄기운을 한 줌 불어넣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살기 위해 백현진이 하지 않은 것들

1 작업의 규모를 키우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난 1인 사업자다. 혼자 그림 그리고, 흥얼거린 것으로 노래를 만든다. 작업을 계속하며 규모를 키운 사람을 많이 봤는데, 나와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많이 생길 테니까. 

2 가능한 한 전문가 집단과 어울리지 않았다.
휘둘리거나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예술가가 전문가 집단과 어울리려면 자신의 작업을 계속 언어로 설명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갖고 있는 복잡하고 다양한 무언가를 그들의 시각에 계속 맞춰가고,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닌 전혀 다른 작업을 하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3 변명거리를 찾지 않았다.
작업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2004년, 먹고 살기 위해 소소하게 하던 일을 모두 정리했다. 작업을 할 수 없는 조건이나 환경에 대해 변명 거리를 스스로 갖지 못하게, 재료비나 작업실 없이도 작업 가능한 0.3mm 샤프를 선택해 <염기 섞인 붉은 책>이라는 드로잉 북을 만들었다. 그 책이 갤러리의 눈에 띄어 전속 작가로 작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행복이가득한집 2019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