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0이 되는 일을 하려고 해요."

[은유칼럼]

내가 떠올리는 낭만은 두 사람이 버스에 나란히 앉아 줄 달린 이어폰을 한쪽씩 끼고 음악을 듣는 장면이다. 혼자지만 연결된 느낌, 좋음의 나눔, 적절한 소란과 고요의 공존, 정처 없는 떠남을 동경했다. 늘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싶었는데 그것이 혼자는 아니었다. 같이 있을 때 내 존재는 더 활성화됐다. 운 좋게도 직업으로 바람을 이뤘다. 인터뷰하느라 사람을 만났고 그들과 나눈 깊고 오롯한 대화는 매번 나를 예기치 못한 세계로 데려갔고 그 이야기를 잘 쓰고 싶어서 나는 몸이 닳곤 했다.  

2005년도에 자유기고가로 명함을 팠다. 첫 취재가 봉사 경력 30년 된 중년여성의 인터뷰였다. 그 뒤로 블로그에 모아놓은 글의 카테고리 이름이 ‘행복한 인터뷰’다. 누적 147명. 만난 사람은 더 많지만 정말 행복했던 것만 등재했다. 인터뷰집 단행본도 냈다. 마을, 숲, 축제 만들기로 더 나은 공동체를 도모한 이들을 취재한 <도시기획자들>,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서사를 기록한 <폭력과 존엄 사이>, 책 만드는 젊은 노동자들을 만난 <출판하는 마음>, 현장실습생 르포르타주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까지. 대개는 밥을 위해, 가급적 신념을 좇아 해온 작업이다. 

일간지 인터뷰 연재는 처음이라 두렵지만 설레었다. 첫회는 셀프 인터뷰로 시작한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이 무안한 일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을 때 담당 에디터가 그랬다. 자기는 월급에 ‘수모 수당’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고. 나의 고료에도 ‘무안 수당’이 포함돼 있다고 여기니까 바로 수긍이 됐다. 무엇보다 인터뷰어는 익숙해져야 한다. 인터뷰 제안을 거절당하는 것도, 상대의 이야기에서 나의 무지를 알아채는 것도 무안을 무릅써야 하는 일이다. 새로운 인터뷰 여정을 떠나며 먼저 인터뷰이의 자리에 앉았다. <한겨레> 토요판을 만드는 신윤동욱 에디터가 질문을 건넸다. 그는 내가 <한겨레>에 4주마다 연재하는 칼럼 ‘삶의 창’ 편집 담당자이기도 했다. 

__________내가 본 것들을 당신도 볼 수 있다면

―제가 (2018년 ‘삶의 창’을 담당하는) 여론팀에 있을 때 작가님의 글이 있는 금요일과 없는 금요일을 구분했어요. 항상 좋은 글을 빨리 보내줘 금요일 마감을 참 편하게, 편하게 했어요. 

“아 정말요? 고맙습니다.”(웃음)

―<한겨레>에 칼럼 쓴 지는 한 3년 반 되었죠. 쓰면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겠다 생각하는 게 있나요?

“생각한 거 있죠…. 왜 갑자기 슬프죠? (한참 말이 없다) 신문이 파급력이 있으니까 지면에 실리기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실어다 날라야겠다, 나름 각오를 했어요. ‘나는 전달자다.’ 제가 직업상 인터뷰나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듣는 이야기가 많거든요. 한 개인의 서사에 우리 사회의 모순이 집약돼 있더라고요. 깊게 들여다보면 보이는 사연이 있는데 그런 이야기들이 좀 다 슬펐던 것 같아요.”

―저도 예전에는 좀 민망한 말이지만, 기자로서 제 역할이 한국 사회 운동과 주류 언론사 사이의 컨베이어 벨트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사회 운동의 목소리를 실어 나르는, 통로가 되는 사람이다, 라고. 

“네. 나는 통로다. 예를 들면 학창 시절 왕따 생존자가 성인이 되어 어떻게 사는지 그런 건 뉴스 가치가 크게 없었잖아요. 어떤 사람이 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사회의 편견이나 차별 때문에 고통받는 게 지금은 조금씩 이슈가 되지만 예전엔 아니었거든요. 어떻게든 그런 이야기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삶의 창’ 칼럼이 짧은 글인데도 그런 분위기가 잘 전달됐어요. 집필을 언제 시작하나요?

“마감 일주일 전쯤 시작해요. 많이 고쳐요. 초고를 써놓고 (출판사) 편집자 친구들한테 보내서 컨펌을 받는데 글의 문제점을 지적받으면 다시 써야 하니까 서둘러 써요.” 

―왜 그런 습관이 생겼을까요? 어떤 사람은 되게 마감에 임박해서 쓰잖아요.

“전 쫓기면 불안해요. 그리고 조심스럽죠. 일간지에 글을 쓰는 것도 어떤 면에서 권력이잖아요.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세상에 전달할 길이 없어서 고공농성도 하고 1인시위도 하는 건데요. 제게 주어진 ‘지면 권력’을 허투루 쓸 수 없다는 약간의 강박도 있고요. 저 스스로 글 쓰는 활동가 정체성도 있으니까 공을 들이고 싶었어요.”

―그런 신성함이 있군요.(웃음)

“네. 못 쓰는 것보단 잘 쓰는 게 좋잖아요.”(웃음)

_________글에서 밥이 나오는 기적

북콘서트에 가면 질문을 받곤 한다. 작가님은 어떻게 작가님이 되셨나요? 그러면 나도 천진하게 답한다. 제가 쓴 산문집에 소상히 나옵니다만. 말로 할 수 없어서 글로 썼는데 그걸 다시 말로 푸는 건 곤혹스럽다. 그래도 향후 인터뷰 독자를 위해 추려본다. 이건 무안함을 단련하는 셀프 인터뷰니까. 

은유는 필명이다. 은유 이전에는 한국 여성을 일컫는 보통명사가 된 김지영의 삶을 살았다. 소녀 지영은 여상을 다녔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취업이 결정되고 남은 학창 시절은 독서로 소일했다. 책벌레라기보다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흠모하던 국어 선생님이 추천해주는 ‘사회과학 서적’을 주로 봤다. 1989년 졸업하고 증권회사 지점에서 일하다가 노조 집행부에 들어갔다. 홍보를 담당하며 노조 소식지와 신문을 펴냈다. 글 쓰는 밑천은 그동안의 독서, 그리고 대학 운동권 출신 동료들의 ‘첨삭 지도’였다. 꾸준히 배우고 쓰면서 글쓰기의 쾌락과 효용을 절감했다. 그때 만난 동지와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고 전업주부로 살다가 집안의 경제 위기를 맞아 재취업을 시도했다. 고졸에 서른다섯 경력단절 여성이 글 쓰는 직업을 얻을 확률은 예나 지금이나 제로에 수렴된다. 자포자기 단계에서 노조 시절 글쓰기 사수였던 선배의 도움으로 사보에 글 쓰는 일을 구했다. 한해 두해 지나면서 국내의 웬만한 대기업 사보 다수에 필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렇게 일의 재미와 또 삶의 실의에 빠졌던 즈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나는 김선주 전 <한겨레> 기자가 여는 강좌에 참여한 적이 있다. 거기서 그와 인터뷰 짝이 되는 ‘행운 티켓’을 얻었다. (대박!) 당대 최고의 기자이자 닮고 싶은 선배가 나를 인터뷰하고 글로 써준 것이다. 오랜만에 추억의 서랍을 열어보았다. 첫 문장은 이랬다. “마흔살의 김지영은 글 쓰는 여자다.” 그리고 마지막 단락은 이렇게 끝난다. “한곳에 머물지 않는 김지영, 그의 몸은 비록 가정이라는 땅을 디디고 있지만 그의 정신은 계속 세상을 떠돌고 있는, 아마도 그는 진정한 유목민의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10년쯤 뒤 그는 또 어느 곳에 서 있을지.”

―작가님 경력이나 글쓰기 세계를 구축해온 과정이 상당히 독특하다고도 할 수 있어요. 

“그렇죠. 예상하지 못했던 삶으로 흘러온 거 같아요. 글 써서 돈을 벌리라는 것, 글쓰기 수업을 하리라는 것, 책 내는 것도요.” 

―근데 그걸 지난 15년에 걸쳐서 차근차근 이뤄온 거잖아요. 저는 작가님 같은 분이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웃음)

“이거보다 어떻게 더 성공해요? <한겨레> 신문에 글 쓰면 출세한 거 아닌가요.”(웃음)

―글쓰기 작업을 하면서 생각한 ‘인터뷰는 뭐구나’ 같은 나름의 정의가 있을 듯해요. 

“인생 수업이요. 식상한 표현인데 정말 그랬어요. 글 쓰는 일을 시작할 무렵이 엄마도 돌아가시고 오빠도 병을 얻고 가세도 기울고 애들 둘이 손이 많이 가고 남편과 갈등도 크고 총체적 난국이었는데 인터뷰 다니면서 많이 치유받았어요. 대기업 대표이사부터 촉망받는 신입사원들, 기초생활수급자들, 유명한 예술가들, 온갖 결의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 듣고 글로 쓰다 보니까 정리가 되더라고요. 사는 게 이런 거구나. 사람들은 고통과 불행을 겪으면서도 묵묵히 살아가는구나, 보는 세상이 넓어지니까 내가 가진 고통이 작아졌어요. 덕분에 힘든 시기를 잘 건너왔죠. 또 인터뷰를 하려면 준비가 필요하고. 자료를 찾고 관련 책도 웬만하면 다 읽었어요.” 

―아이고, 성실하기도 했네요. 

“그런가요? 원래 그렇게 해야 되는 줄 알고. 그게 대학에서 관련 학문을 배운 게 아니라 글쓰기에 대한 초기 세팅 없이 시작하다 보니까, 되게 원칙적으로 했던 것 같아요. 어디다가 물어볼 수도 없으니까 서점에 가서 글쓰기 책을 찾아보고 내가 맞게 쓰고 있나 확인하고. 자신감이 바닥나면 훌륭한 작가들이 남긴 말 읽고 심기일전해서 또 쓰고요. 그때 모아놓은 글쓰기 명언들로 <쓰기의 말들>도 펴낸 거예요.” 

___________인생수업 심화반, 글쓰기 강좌

아, 자유기고가! 취재를 가서 명함을 주면 직장인들이 부러워했다. 얽매이지 않는 삶이라나 뭐라나. 그런데 이 자유는 마르크스가 얘기한 ‘굶어 죽을 자유’이고 고용 형태로는 ‘호출형 근로자’다. 한건씩 취재를 의뢰받고 원고를 납품했다. 내 글은 매번 자본의 시험대에 올랐다. 나를 증명할 학벌 자본, 경력, 직함이 없으니 내가 쓴 글들이 곧 명함이고 이력서였다. 원고료는 건당 15만원, 20만원, 가끔씩 30만원. 원고를 보내면 두세달 뒤 통장에 찍혔다. 먹고살려면 꾀를 부릴 수가 없었다. 언어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이 책 저 책 파헤치다가 니체를 만났고, 니체를 제대로 읽으려고 남산에 있는 수유너머에 강좌를 등록했다. 수유너머는 인문학 연구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대학 바깥 공동체로 철학, 고전, 문학 등 대중강좌가 상시 열렸다. 

―인문학에 관심을 본격적으로 가지게 된 계기가 있나요?

“내 고통을 이해하고 싶었던 게 가장 컸던 거 같아요. 왜 나한테 힘든 일이 일어나고 심지어 안 끝나는지 알고 싶었어요. 내 일에 몰두할수록 애들은 방치되는 것 같고, 몸이 힘들고 생활이 빠듯하니까 한숨만 늘고 예민해지고. 이 내면의 괴물을 어떻게 다스리지. 사람이 미운데 어떻게 사랑하고 같이 살지? 그런 문제를 풀고 싶었어요.”

인문학은 위험했다. 철학을 공부할수록 기업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글이 쓰기 싫어졌다. 데이트처럼 두근거리던 인터뷰도 더는 짜릿하지 않았다. 누굴 만나도 비슷한 얘기를 쓰는 느낌. 나는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있었다. 인터뷰의 참된 의미를 훼손하는 것 같아서 인터뷰를 ‘끊었다’. 

1년 정도 휴지기를 갖고 2010년 용산참사 1주기에 맞춰 연구실 동료들이랑 <위클리 수유너머>라는 웹진을 만들었다. ‘전선 인터뷰’라고, 지금 생각하면 참 비장한 제목을 짓고 나는 다시 인터뷰에 나섰다. 지면과 대상의 제약 없이, 원고료도 없이,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서 쓰고 싶은 만큼 썼다. 

주류 언론에서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방침으로 대상을 섭외했다. 잡년행진 참가자, 트랜스젠더 이주노동자, 홈리스행동 대표, 한국군 ‘위안부’ 연구자…. 격주로 한명씩 100호 넘게 진행했다. 본 적 없는 불온한 삶은 심장을 다시 뛰게 했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자유기고가 일을 완전히 접고 글밥 먹던 노하우를 정리해 글쓰기 강좌를 열었다. 2011년 3월, 첫 수업에 입었던 재킷과 운동화, 뺨에 닿던 서늘한 공기를 지금도 기억한다. 

―은유 작가 글을 보면서 글쓰기 강연을 하면서 참 많은 걸 얻고 있구나 생각했어요.

“맞아요. 내가 가진 정보나 지식을 나누는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해보니까 배우는 시간이었어요. 배움은 주입할 수가 없잖아요. 글쓰기 팁을 몇개 안다고 글이 써지지도 않고요. 서로 자기 이야기를 내놓고 같이 모여 있음 자체로 서로가 성장하는 걸 경험했죠. 그걸 ‘배움이 일어난다’고 표현하고 싶어요. 그 연결감 때문에 오래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퍼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받기도 해서.” 

나는 학인들을 통해 다른 세계로 접속했다. 성소수자들, 이혼가정 자녀들, 장애를 겪는 이들, 시민단체 활동가들, 착취당하는 딸들과 더 정확히는 그들이 겪는 고통과 연결됐다. 그러면서 내가 모르는 아픔이 참 많다는 것을, 그걸 내가 무척 알고 싶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만큼 재밌는 일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 수업은 내겐 형식을 달리한 인터뷰, 인생수업 심화반이었다. 

_________연결이 많아질수록 성숙해진다

―‘은유의 연결’은 지금까지 해온 인터뷰보다 더 넓은 범위의 다양한 사람을 만나야 하는, 새로운 인터뷰 그라운드잖아요. 인터뷰를 오래해와서 피로감도 있을 텐데, 어떤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지 궁금합니다.

“지나고 보니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보다는 어려운 일을 하는 게 더 낫더라고요. 열심히 하게 돼요. 잘 모르니까 상대의 얘기를 말 배우는 아이처럼 귀담아 듣게 되고요. 제 식으로 표현하면, ‘내가 0이 되는 일’을 하려고 해요. 안 그러면 진부한 글이 나오고 그건 나도 싫고 내가 싫으면 독자도 싫겠죠.” 

―0이 되는 불안은 없나요?

“불안 크죠. 신문 인터뷰는 대상이 광범위해서 카테고리가 없다는 게 부담이죠.” 

―작가님이 전해온 우리 사회의 전해지지 않는, 몫 없는 자들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몫 있는 자들(웃음)을 만나야 할 수 있잖아요. 

“그게 제일 걱정이에요. 주류 인사, 기득권층의 서사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니까 호기심이 별로 안 생겨요. 그러면서 제 안에 어떤 편견이 쌓인 것도 있겠죠. 그 편견을 넘을 필요도 있겠단 생각을 하던 중이었어요. 어쩌면 제로가 아니라 마이너스에서 시작하는 건데 반감을 극복하고 평상심에서 시작하는 인터뷰, 아 정말 어렵겠다.”(웃음) 

―은유의 ‘연결’이라는 말을 선택한 의미가 어떤 건지? 참 좋은 말이지만 좀 오래되고 보편적인 단어일 수 있어서요.

“제가 쓴 책들 리뷰를 검색해보면 ‘사람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다’는 독자의 반응이 제일 많아요.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는 말이 있는데 강해지는 건 확신할 수 없어도 사람이 성장하는 건 많이 봤어요. 저도 사람들과 연결되면서 좀 나은 인간이 된 거 같고요. 타인에 대해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근데 우리 일상은 파편화되어 있고 보는 사람만 봐요. 페이스북이나 유튜브에서 자기 편향대로 정보를 택하고요. 의견 차이는 피곤하니까 가급적 피하고, 상처받은 기억으로 더 멀어지고. 그런데 어떤 계기로 남의 사는 얘기를 듣게 되면 이해가 생기더란 말이에요. 인터뷰가 나랑 상관없어 보이는 사람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는 물꼬를 터준다면 그 자체로 느슨한 연대의 형식이 될 수 있겠다 싶어요.”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살아보긴 힘들어도 알고는 있다, 이거는 좀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다 살아볼 순 없는데, 누군가의 삶을 아는 게 미처 몰랐던 자기를 발견하는 계기도 되거든요. 제가 쓴 <다가오는 말들> 부제를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이라고 했어요. 누군가의 말이 다가왔을 때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면 연결되고 연결이 많아지면서 존재가 단단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지난봄 유럽 언론들이 1만7천명의 사람들에게 정치성향을 기입하게 한 다음에 대척점에 있는 사람끼리 만나 일대일 대화를 나누게 했더니 오히려 서로 이해가 깊어졌다고 해요. ‘연결’을 통해 하고 싶은 작업도 이와 비슷한 게 아닐지. 

“와, 그러면 너무 좋겠네요.”

―인터뷰 끝나고 필자와 독자가 어떤 걸 느끼게 되면 좋겠다, 이런 게 있다면요?

“그걸 지금 몰라야 이 연재가 좋은 인터뷰가 될 거 같은데요.”(웃음)

셀프 인터뷰를 마치고 바로 다음 인터뷰를 준비했다. 첫 인터뷰이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담당 기자가 연락했는데 성사되지 않았다. 나는 이메일을 띄웠다. 곡진한 마음으로 쓰다 보니 2825자였다. 결국 인터뷰는 불발됐지만 낙담하지 않는다. 만날 사람은 삶이 만나게 한다. 그 신비로운 믿음으로 은유의 연결을 시도한다. 녹취 이유진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19943.html?_fr=mt2#csidxccfa4ea97301f42bb7be5930d028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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섞여 살아야 배운다

[은유칼럼]

필라테스 강습 시간에 선생님이 나에게 지구만한 고무공을 건네주며 말했다. “팔을 쫙 펴서 남편분 안듯이 꽈악 끌어안으세요.” ‘네? 아니, 왜요, 그다지 그러고 싶지 않….’ 운동기구에 누워 복부 근육에 힘을 주느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순간 공을 놓칠 뻔했다. 나이 든 여성이라도 남편과 자식이 없기도 하다. 저 사랑 넘치는 이성애 가족 판타지를 대체할 표현이 없을까. 고양이? 나무? 베개 안듯이? 그냥 두 팔을 최대치로 늘이라고만 해도 충분했을 것 같다.무심코 쓰는 일상어에 차별과 배제가 배어 있다. 청소년은 무조건 학생이고 고3이면 묻지도 않고 ‘수험생’이다. “공부하느라 힘들겠다”는 말을 위로로 건넨다. 탈학교 청소년, 비진학 학생, 특성화고생은 안중에 없는 존재다. 성인은 결혼-출산이란

이성애 생애주기로 초기값이 설정돼 있다. 나부터도 그랬다. 여성에겐 남친 있냐, 남성에겐 여친 있냐 무람없이 묻곤 했다. 이젠 상대의 성정체성을 고려해 ‘애인’ 있는지 묻거나 호구조사를 삼간다.


글쓰기 수업에서 성소수자 학인들과 깊게 만나면서 생긴 변화다. “나는 서른살 레즈비언입니다. 이 말을 하는 데 30년이 걸렸다”는 첫 문장의 좋은 사례로 기억한다. 연인이 동성이면 바깥에서 손을 잡거나 “자기야” 같은 친밀한 호칭으로 부를 때 눈치를 봐야 했다. 배우자가 아플 때 수술동의서에 사인할 수 없고 법적 가족이 아니라서 주택자금 대출을 이용하지 못했다. 내가 이성애자로 살면서 고민한 적 없는 성정체성 서사는 놀랍게도 나의 좁은 세계관과 한국의 낙후된 인권과 제도, 섬세하지 못한 언어와 표현의 문제를 드러냈다.


자신을 양성애자로 정체화한 한 친구는 부모의 몰이해와 탄압을 글로 썼다. 네가 전에는 남자를 사귀었으니 여자를 만나더라도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 관계 맺는 성소수자가 딸이라면 부모의 충격도 이해가 간다. 성소수자가 사는 모습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으니까 두렵고, 두려움은 판단을 흐린다. 잘 모르면 얘기를 듣고 공부하며 알아가는 게 순리지만 이해는 멀고 분노는 가까워 대개는 자기 불안을 혐오로 방어한다.


글쓰기의 관점에서 나는 부모가 걱정하는 불행한 미래가 아니라 치열한 과거가 보였다. 글로 써서 남들 앞에서 읽기까지 생각의 뒤척임, 단어 선택의 신중함, 자기부정과 인정의 반복을 견뎠을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랑을 하는가. 자기를 알아가는 노력은 답도 없고 돈도 안 되고 힘에 부친다. 그러니까 스님이나 전문가에게 사는 법을 물어본다. ‘양성애자’라는 오염된 표상이 아니라 그 말이 편견을 뚫고 세상으로 나오기까지 그가 발휘한 힘과 용기, 자기 배려의 의지를 생각하면 자식이 자랑스러울 일이다. 영화 <벌새> 주인공 은희도 양성애자인데 이것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은희에게 매우 자연스럽다고 감독은 말했다.


섞여 살아야 배운다. 사랑도, 용기도, 글쓰기도. 그런데도 일부 국회의원은 평등권 차별의 침해행위에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차별을 삭제하는 등 국가인권위원회법 개악안을 발의했다. 차별금지법 제정도 감감무소식이다. 여기저기 지하철역 앞에는 성소수자 혐오 방송이 요란하다. 참 열심히들 혐오를 조장하지만 더 많은 이들이 꿋꿋하게 사랑을 살아낸다. 그 용기에 감화받고 전염된다.


시대는 변하고 있다. 글쓰기 수업 10년차에 접어들면서 체감한다. 성정체성을 서슴없이 밝히는 이들이 늘고 있다. 수업이 끝나면 여자 학인의 ‘남친’이 밖에서 기다리기도 했는데 최근엔 한 청년이 동성 애인을 소개했다. 이런 포부를 전하는 친구도 있다. “쌤, 저는 돈 많이 모을 거예요. 최초로 커밍아웃한 교사가 될 거예요. 잘릴 때를 대비해서 먹고는 살아야죠.(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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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들의 급소

[은유칼럼]

‘이게 마지막이야’라고 살면서 결심해본 적 있으세요? 연극이 끝난 뒤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양구 연출가가 물었다. “담배 끊을 때요.” “회사를 자주 옮겼는데요, 입사할 때마다 이게 마지막이야 결심해요.” 몇명이 답하자 객석에서 와하하 웃음이 터졌다. 나도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프리랜서 시절 원고료 떼이고 사장님한테 독촉 전화 걸 때마다 제발 이게 마지막이었으면 했던, 잊고 살던 좀 우울한 일화다.

연극 <이게 마지막이야>는 무산되는 약속의 연쇄와 그로 인한 일상의 여진을 담았다. 주인공 정화는 편의점에서 일하는 중년 여성이다. 남편이 고공농성에서 승리해 내려왔지만 방 안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회사가 ‘복직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다. 생활에 쪼들리고 급기야 두 아이의 학습지 대금 지불 약속도 지키지 못한다. 딱한 사정을 아는 학습지 교사 선영은 회비를 대납하는 호의를 베푼다. 그런데 연체가 석달이 되어가자 지국장의 압박이 심해지고, 선영은 정화를 찾아간다.

“정말 14만원도 없어요?” 고개를 숙인 정화에게 선영은 목청을 높인다. 정 그렇다면 매일 1만원씩 받으러 오겠다고, 돈이 없어도 지갑에 만원은 있을 거 아니냐고 다그친다. 거기에다 전 알바생 보람도 임금체불내역서를 편의점주에게 전해주기로 한 약속을 안 지켰다며 정화를 원망한다. 가진 자들이 약속을 어길수록 ‘을들의 다툼’은 처절하다. 처지가 비슷한 나머지 그들은 눈앞에 있는 사람의 ‘급소’를 너무도 잘 아는 것이다.

14만원은 두 아이 학습지 3만5천원짜리 4과목 수업료다. 누군가 뮤지션 공연 티켓으로 결제하는 금액이고, 질 좋은 양모 니트 한장 사는 가격이다. 중산층 사교육비의 십분의 일 정도이고, 집필노동자가 원고지 14장 써야 받는 돈이다. 나는 부자가 되고 싶기보다 통장에 14만원이 없는 삶, 만원을 받아내려고 웃으며 인사하던 지인을 모욕하는 사람이 될까봐 겁이 나는데 그것이 개인의 의지나 노력의 문제가 아님을 연극이 잘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은 촌각을 다투며 일한다. 난 편의점 점원이 서서 계산만 하는 줄 알았다. 내가 계산만 하고 나오니까. 그런데 물품을 정리하느라 무거운 박스를 들어야 하고 무례한 고객을 응대하고 폐기 도시락까지 챙기는 점주의 눈치도 봐야 한다. 학습지 교사와 배달 노동자는 약속 시간이 지났다는 고객들의 독촉 전화에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산다. 어떤 일도 깊게 들여다보면 단순노동이라고 폄하할 수 없다. 식사 시간과 장소도 없는 열악한 일자리가 있을 뿐이고, 그런 자리는 이 사회의 부실한 약속의 안전망으로 인한 피해자들로 채워진다.

이 연극은 ‘파인텍 굴뚝농성’을 모티브로 삼았다. 고공농성이 지상의 일임을 편의점을 무대로 이야기한다. ‘노동존중 사회’라는 촛불 대통령의 약속이 요원한 가운데 고공농성은 진행형이다. 가스안전점검 여성 노동자가 ‘성폭력 없는 안전한 근무를 위해 우리도 형사처럼 2인1조 근무를 보장하라’며 고공에 올랐었다. 톨게이트 수납원 노동자들도 지붕을 점거했었고, 삼성과 싸우는 김용희도 철탑 위로 오른 지 백일이 넘었다.

왜 하필 그 높은 곳인가, 목숨을 건 위태로운 싸움에 나는 눈감고 싶었다. 연극을 보고 나니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지 않기 위해서 올라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래서 소심한 약속 하나 걸었다. 부쩍 사망 사고도 잦은데 배달음식이 늦더라도 전화하지 말자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같이 큰 약속을 어기는 권력자들, 김수영 식으로 말하자면 나라님이나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설렁탕집 주인, 야경꾼에게만 분개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로.

 

*한겨레 삶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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