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데올로기 - 지반을 떠난다는 것

[스피노자맑스]

 

홍세화 씨가 한국에 와서 TV를 보다가 가장 충격을 받은 말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부자되세요’ 하나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각각 카드회사와 건설회사 TV광고 카피이지만 범국민적 표어로 사용될 만큼 히트를 쳤다. 이는 돈이 삶의 모든 가치를 빨아들이는 대한민국의 실상을 가감 없이 드러내준 광고이기도 하다. 뭐 사실, 더 좋은 대학, 더 많은 돈,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를 인생목표로 부여받고 자란 우리는 성장과정에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얘기라 익숙했지만 ‘파리’의 택시운전사였던 홍세화씨가 볼 때는 저 물신적인 표어가 몹시 거슬렸던 것이다. 이렇듯 ‘바깥쪽에서’ 보는 일은 중요하다. 바깥쪽은 객관적인 장소가 아니라 객관성 자체가 지역적인 공동주관성에 지나지 않음을 아는 장소(가라타니 고진)이기 때문이다.


스는 독일 철학을 바깥쪽에서 바라보고 거기서 철학적 담론(독일이데올로기)의 병리적인 징후를 읽어낸다. 독일이데올로기 본문의 첫 구절을 보자. ‘독일에서의 비판은, 극히 최근의 시도에서조차, 결코 철학이라는 영역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것은 결코 자신의 전반적인 철학적 전제들을 검토해 본 적이 없으며, 사실상 그것의 모든 문제들은 한정된 철학 체계, 헤겔의 그것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비단 그것의 답변에서만이 아니라, 그것의 질문에서조차 신비화가 행해지고 있다’

맑스의 역사유물론은 보편적이고 철학적 전제들을 검토하고 문제들이 성장한 그 지반을 문제 삼아 그 토대들, 전제들, 배치들의 역사적 형상을 다루는 작업이다. 그리고 여기서 관념론적 허구들이 도출되고 있음을 밝혀낸다. 상상 내지 표상의 체계인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배치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맑스의 유명한 언명도 이 맥락에서 나온다.

맑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어떤 시대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 사상’이라고 말한다. 우리시대의 지배적 사상, 삼성이데올로기를 생각하면 즉시 이해되는 대목이다. 삼성이 경제성장의 일등공신이라는 믿음. 삼성이 망하면 우리나라도 망할 것이라는 망상. 삼성은 아무도 못 건드린다는 공포. 그래서 삼성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무노조 경영, 족벌경영이 관철되고 있으며 삼성반도체에서 백혈병과 희귀암으로 100여 명이 죽어가도 버젓이 이건희는 큰 소리치고 활보한다.

역시 ‘바깥쪽에서’ 대한민국을 사유하는 박노자 씨도 늘 안타까워한다. “왜 노동운동이 발달한 한국에서 삼성불매운동이 안 일어나는가 모르겠다”고.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의 말에 답이 있다. 김 위원장은 삼성노동자들이 이건희의 무노조경영철학을 내면화하고 있다고 그래서 직원들이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한다고 했다. 주변에 보아도 거의 임원급으로 '삼성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수적으로는 삼성족벌은 대한민국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내 안의 이건희’가 사는 시민들, 삼성의 또 하나의 가족이 되길 꿈꾸는 백만학도들이 삼성을 지탱한다. 지배적인 사상은 숫자가 아니라 경향성이다.

맑스는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을 지배계급으로 만드는 관계들의 표현”이라며 “혁명적 사상의 출현은 이전의 보편적 사상, 즉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특수한 것으로 전락시킨다”고 했다. 삼성이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는 '보편적 사상' 즉 우리사회 지배계급인 삼성家 이데올로기를 '특수한 것'으로 전락시키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삼성이 급부상하고 삼성예외론이 나온것은 20년 전즈음의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삼성이 원래부터 나라를 먹여살린 기업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마치 고구마는 1900년대 우리나라에 들어왔지만 구석기시대부터 배고플 때 밥대신 고구마를 먹었다고 아는 것과 유사하다. 

맑스는 '단지 일상적인 분명한 것'을 지각하는 속물적인 지각'을 비판한다. "감성적 확신의 대상조차도...그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옛날로부터 직접 주어진, 영원히 항상 같은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업의 생산물이고 사회 상황의 생산물"이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과 싸우는 노동자들은 마치 80년 광주처럼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고립돼 있다. 삼성이 장악해버린 우리사회의 지반과 질서를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을까. 맑스의 역사유물론은 지반을 떠나서 생각하는 것이다. 맑스의 역사유물론을  배우는 지금, 삼성의 ‘지반을 떠나서’ 삼성을 생각한다. 맑스가 말한 “실천적 전복”을 궁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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