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크대 앞에서 아담스미스 생각하기

[은유칼럼]

아들이 제대하고 나서 나는 ‘싱크대 앞 체류 시간’이 늘었다. 하루 한 끼 정도 집에서 먹는데 제대로 먹여야 할 것 같은 책임감에 스스로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마트, 유기농 식료품점, 백화점, 동네 슈퍼를 오며 가며 찬거리를 연신 사다 날라도 냉장고는 금세 텅 빈다. 끼니는 뭐든 먹어치우는 괴물인가. 성인 남자 입 하나 느는 게 수저 한 벌 더 놓는 일이 결코 아님을 실감하는 나날이다.

그러면서도 다 큰 아들의 밥을 계속 차려주는 게 옳은가 자책한다. 처음엔 군대에서 고생한 아이가 가여워서 해 먹였다. 당분간이라 여겼다. 그런데 아이가 바로 복학하고 학업에 아르바이트에 친교 활동으로 바빠지면서 난 하숙집 아줌마처럼 시간 맞춰 밥을 대령하고 있다. ‘너도 성인이니까 네 밥은 알아서 챙겨라’ 생각은 하면서도, 미성년자인 딸아이만 해주고 아들은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 내 몸은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앞치마를 두른다.


ⓒ시사IN 윤무영

이런 행동은 너무도 반시대적이다. 이 한 몸 ‘고생’에서 끝나지 않고 가사노동이 여성, 곧 엄마의 할 일로 ‘고착’되는 데 일조하는 것 같아서 그렇다. 물론 안다. 자식한테 밥 안 해주는 게 페미니즘은 아니다. 다만 자기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해도 매번 밥이 나오는 게 당연한 일도 쉬운 일도 아님을 깨칠 기회를 아이에게 주고 싶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건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 등 “상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긴밀한 공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가 매일 저녁 식사가 식탁에 오를 수 있도록 보살폈기 때문(32쪽)”임을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보이지 않는 손’보다 ‘보이지 않는 어머니’를 아는 교양인으로 키우기. 실은 계획이 있었다. 아이들 식사 제공 기한을 스물세 살로 정해놓았다. 그건 내가 어머니의 일방적인 돌봄 속에서 반찬 하나 만들 줄 모르다가 결혼한 나이다. 양심상, 받은 만큼은 돌려주자는 의미로 정했다. 서서히 아들이 스물셋이 되어가니 불안한 것이다. 어제까지 해주던 밥을 과연 오늘부로 안 할 수 있을까. 내가? 갑자기? 어떻게?

한 수강생이 “고맙다”라고 한 이유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희정 옮김, 부키 펴냄

“쌤, 고마워요.” 나와 같이 1년 동안 글쓰기 공부를 한 여성이 다짜고짜 고백한다. 고마운 이유는 이랬다. 처음에는 오후 5시에 수업 마치면 남편 저녁 차리러 가야 해서 가슴이 조마조마했단다. 점점 읽고 쓰면서 여자의 본분이란 사회적 갑옷이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가족 중 한 명은 모든 시간을 무보수 가사노동에 쓰고, 다른 성인 한 명은 모든 시간을 집 밖에서 보수를 받는 노동에 쏟아붓는 것이 과연 이치에 맞는가?(62쪽)” 회의했고, 죄의식에서 벗어났다며 말한다. “이젠 남편 저녁밥을 안 차려줘도 안 미안해요.”

20년간 밥을 하던 사람이 안 하게 된 것은 혁명이다. 그녀의 용기가 내게도 용기를 준다. 나야 일 때문에 집에 없을 때도 많고 가사노동을 남편과 분담하고 있지만, ‘자식 밥걱정’의 족쇄를 풀지 못했다. 강한 모성이라기보다 질긴 습관이다. 이행기를 두고 아들에게 제안해볼까 싶다. 먼저 일주일에 한 끼는 직접 메뉴를 정해서 밥을 차려보라고.

로리아 스타이넘은 페미니즘을 “여성들이 기존의 파이에서 더 큰 조각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파이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정의한다(102쪽). 내게 페미니즘은 ‘밥은 엄마’라는 등식, 아니 무의식을 해체하는 일이다. “무한정한 천연자원을 캐듯, 돌보는 손은 여성의 본능으로부터 항상 얻을 수 있다는 신화(186쪽)”는, 전 세계에서 날마다 자동으로 차려지는 밥상에서부터 만들어진다는 의심을 떨칠 수 없다.



*시사인 은유 읽다

분위기 깨는 자의 선언

[은유칼럼]

스마트폰에 카메라 앱을 깔았다. 셀카를 찍어보니 소문대로 신통했다. 주름 제거, 미백은 기본에 눈동자가 크고 또렷해졌다. 메이크업 기능이 내장된 듯 칙칙한 얼굴이 지중해 햇살 받은 해사한 분위기로 변모했다. 흡족함도 잠시, 곧 도덕 감정이 올라왔다. 이건 속임수이며 나 아닌 거 같다고 했더니 누군가 말했다. 오렌지 과즙 3%만 들어가도 오렌지주스라고 하는데 본래 얼굴 3%만 있으면 자기 얼굴 맞는다고.


나의 죄책감은 더 근원적인 부분에 닿아 있다. 일회용컵 사용을 줄이듯 외모에 대한 언급을 자중하고 싶었다. ‘외모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일주일 살아보기’가 오랜 목표다. 이 슬로건은 2016년도에 여성민우회에서 진행한 캠페인으로 꾸밈 노동을 강요하고 외모중심주의를 부추기는 세태에 맞서는 실천으로 제시됐다.


외모에 대해 말하지 않기는 단 하루도 성공하기 힘들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인사말부터 시작이다. “어쩜 그대로냐~” “살 빠졌다!” 외출을 안 하는 날엔 거울을 보고 혼자 중얼거렸다. 배가 나왔네, 잡티가 생겼네, 라며 제 몸의 감시자를 자처했다. 내 몸은 세월과 경험이 만든 고유한 신체 표현인데도 일단 못마땅하게 본다. 무의식 중에 마른 몸, 희고 갸름한 얼굴이라는 미의 획일적 기준을 잣대 삼아 남을 보고, 남을 보는 눈으로 나도 보는 것이다.


이런 시선의 관습적 경로가 만들어진 역사는 길다. 인간생활의 기본조건을 의식주라고 하는데, 집도 밥도 아닌 옷이 왜 일순위인지 늘 궁금했다. 입성을 중시하는 체면 문화의 반영 같다. 그리고 외모지상주의의 피해는 여성, 노인,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게 쏠린다. 딸들은 연중 다이어트다. 살만 빼면 예쁠 거란 말을 엄마에게서부터 듣고 자란다. 항공사에는 여자 승무원이 못생겼다는 민원도 들어온다고 한다.


일전에는 버스에서 결혼식장 근처 정류장 안내 방송에 이비인후과 광고가 나왔다. “결혼식에서 콧물 흘리는 신부 본 적 있나요? 어서 비염을 치료하세요”라는 내용이었다. 콧물까지 성별로 간섭하는 게 몹시 거슬렸다. 여성의 질병은 개별적 고통에 사회적 비난까지 이중 처벌이 내려진다. 그뿐인가. 뚱뚱한 몸, 뒤틀린 몸, 노쇠한 몸은 곧 추한 몸으로 간주돼 모욕, 배제, 차별에 쉬이 노출된다.


외모 평가는 걱정도 덕담도 아니다. 무비판적 습관이다. 보여지는 것 이면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읽어내고 표현하는 능력이 인간 종 전체적으로 감퇴하고 사라지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는 ‘카메라 앱’도 바람직하지 않은 장난감이다. 셀카 놀이가 ‘기분 전환’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미의 표준화된 각본에 유희하는 사소한 행동이 외모 위계의 ‘의식 고착’에 기여하는지도 모른다.


젊은 여성들 중심의 탈코르셋 운동이 반가운 이유다. 하이힐, 브래지어, 풀 메이크업, 긴 머리가 꾸밈의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것.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아도 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인다. 외모 품평이 아닌 품평 행위 자체에 대한 논의가 오가는 게 훨씬 성숙한 풍경이다.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저자 사라 아메드는 “모욕을 유발하는 농담에 웃지 않을 작정”이라며 “하지 않고 되지 않으려는 자의 선언문”을 썼다. 일명 ‘분위기 깨는 자의 선언’이다. 제목이 딱이다. 개성 있는 몸이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사회문화적 분위기를 형성하려면, 지금의 획일적 분위기가 깨져야 한다. 극소수가 외모-매력 자본을 독점하고, 대다수는 자기 자신을 미달된 몸으로 보는 현상, 순도 97% 얼굴을 왠지 떳떳하지 못하게 여기는 문화는 이상하고 불행하니까.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51279.html?_fr=mt5#csidxa69af279d19f69a86b42a5791ff2f9d

수영장에서 불린 내 이름

[은유칼럼]

“자기가 돈 좀 걷어. 선생님 드리게.” 스승의 날 무렵, 수영장 같은 반 ‘언니’가 명했다. 나밖에 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 울고 싶었다. 내가 다니는 월·수·금 오전 9시 반은 50~60대 여성 서넛, 애가 어려서 수업에 잘 빠지는 젊은 엄마, 20대 젊은 남성으로 구성됐다. 결석 없는 제일 ‘어린’ 회원으로 지목되는 바람에 지난번 설 명절에도 내가 떡값을 걷었다.

고령화 시대라서 농촌에 가면 60대가 ‘청년부장’이고 막내라서 ‘막걸리 셔틀’을 한다더니, 내가 그 짝이 된 심정이었다. 수영장에서 얼굴 보는 사람마다 언제까지 돈을 가져오라고 당부하고, 탈의실에서 머리 말리는 사람 붙들고 돈을 받아내고, 현금이 없다는 사람에게 계좌번호를 찍어주어 입금을 받고, 몽땅 현금으로 챙겨서 돈이 젖지 않도록 비닐로 싸서 강사에게 금일봉을 전달한 바 있다. 그 짓을 또 하라니. 평생 가계부 한 줄 안 쓰고 촌지 한번 안 주었으며 돈 계산에 서툰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수영장에서 난 다른 세계, 다른 몸을 산다. 육지의 상식과 언어가 수중에선 통용되지 않는다. 왜 꼭 나이 적은 사람이 해야 하냐며 연령주의를 비판할 수도, 남자 회원이 걷으라며 성평등을 주장할 수도 없다. 이번에도 추석이랑 설에만 선물을 드리면 안 되냐고 말했다가 “노래교실에서도 스승의 날엔 안 하는 경우가 없다”라는 반박에 입을 닫아야 했다. 수영 강습 50분, 샤워 20분인데 맨몸으로 논쟁하기도 멋쩍거니와 그들만의 관습을 부정할 용기도 없다.

특히 난 ‘수영 약자’다. 시력이 나빠 건너편 강사도 못 알아본다. 샤워장에서 먼저 인사하는 다른 회원을 지나쳐 오해를 사기도 했다. 운동신경 둔하고 폐활량 낮고 겁은 많다. 초급반에서 가장 늦게 자력으로 물에 떴다. 배영, 평영, 접영 등 새로운 영법 자세를 똑같이 배워도 유독 어설프고 우스꽝스럽다. 그럭저럭 써온 몸뚱이가 무력해지는 상황, 남겨지는 사람이자 뒤처지는 몸으로 존재하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었다.

어영부영 10개월이 지났고 수영장 생활에 적응 중이다. 떡값을 일인당 2만원 걷는데 자신은 1만원만 내겠다고 고집을 부리거나 샤워기 하나로 신경전을 벌이고, 레벨과 속도로 자존감을 겨루는 ‘언니’들은, 내게 “팔꿈치 펴라”며 원포인트 레슨을 자청하는 전문가이자 ‘락스 물’을 잔뜩 먹고 꺽꺽거리는 걸 보고 “오늘도 보약 먹었네~”라며 용기와 웃음을 주는 동료들이기도 하다.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60쪽)”을 목도한다. 

수영을 배우며 “이질적인 사람들과 접촉을 통해 스스로를 성숙시켜나갈 기회(166쪽)”를 가진 것 같다. 그간 내가 얼마나 동질 집단에서 안전하게, 혹은 오만하게 살았는지 실감했으니까. 남들이 다 나처럼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알았다. 또한 ‘몸에 힘을 빼라’ 같은 수영 이론을 머리로 아는 것과 몸이 따르는 것의 괴리를 체감하고 나니, 글쓰기 수업에서 내가 말하는 ‘설명하지 말고 보여줘라’ 같은 원칙들이 학인들에겐 얼마나 막막하게 느껴질까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실패까지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230쪽)”는 말을 곱씹어본다.

며칠 전에는 수영장에서 오가며 눈인사만 나눈 한 회원이 말을 걸었다. “언닌 이름이 뭐예요?” 순간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지영이요. 지영….”

내 본명인데 한동안 불러주는 사람이 없던 이름이라 발음조차 낯설었다. 비대해진 ‘은유’ 자아를 비활성화하고, ‘지영’ 자아로 사는 시간을 늘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 시사인 은유 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