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니체인가

[니체의답안지]

# 어느 날, 니체

그날도 서점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눈에 띄었다. 내용이 양호했다. 습관처럼 샀고 한달음에 봤다. 본문에 인용된 숱한 멋진 말들은 삶에 지친 나를 위한 처방전 같았다. 원문이 욕심났다. 한약 짓는 기분으로 니체 전집을 질렀다. 딱 녹용 한 재 값인 삼십여 만원을 결제했더니 사과상자 크기의 박스에 니체 전집 21권이 배달되었다. 설레는 마음도 잠시. 한 페이지를 채 읽기가 어려웠다. ‘무리수를 두었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방구석에 처박아두길 두어 달. 오랜만에 들어간 수유너머 홈페이지에 마침 니체 강의 공지가 떴다. 수업을 들었으나 들리지 않았다. ‘외국어같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심 어려웠다. (그 강의는 자퇴생 및 행불자가 속출했다) 수업시간이 괴로웠다. ‘아는 이 전혀 없는 파티에 참석해 몸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모르는 사람처럼어색하고 외로웠다. 그래도 끝까지 버텼다. 견디면서 누렸다.

자주색 하드커버의 무거운 책. “힘든 노동을 좋아하고 신속하고 새롭고 낯선 것을 좋아하지만 너희들 모두는 너희 자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너희들이 말하는 근면이라는 것도 자신을 잊고자 하는 도피책이자 의지에 불과하다.” 니체의 말에 움찔했다. “도덕은 지금까지 삶을 가장 심하게 비방하는 것이었고, 삶에 독을 섞는 것이었다.” 점입가경이었다. 근면이 도피책이고 도덕이 독이라고 니체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착한 딸, 좋은 엄마, 좋은 며느리의 도덕에 결박당해 시들어간 청춘, 스스로 부과한 도덕적 책무를 이고 지고 사느라 삶을 사막으로 만들어버린 낙타 같은 날들이 스쳤다. 정확한 뜻과 맥락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니체에게서 거대한 사유의 전복이 이뤄지고 있음을, 갈피마다 행간마다 섬세하면서도 격정적인 문체, 멋스러운 비유와 날카로운 통찰의 언어가 춤을 추고 있음은 알아챌 수 있었다. 정념 과잉의 언어. 생의 의지를 고양시키는 말들. 폭포처럼 떨어지는 아포리즘은, 그대로 시였다 

# 삶을 위한 시

고뇌하는 모든 것은 살기를 원한다.” , 이거였구나! 아이들 둘 키우고 집필 노동하면서 거기다가 공부 좀 해보겠다고 설치다보니 등골이 휘는, 서른 후반 나의 존재론적 뒤척임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을까. 백 년 전 니체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어느 여성의 삶에 팍팍 꽂히는 얘기를 풀어놓았다. 고뇌하는 모든 것은 살기를 원한다는 말은, 살아있는 것은 하나같이 힘을 향한 의지를 갖고 있으며 그 자체로 힘의 표현이라는 뜻이다. 이는 니체가 창안한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이다. 니체는 이 세계를 힘들의 바다로 규정했고 힘 관계로 생성을 설명했다.

니체는 하룻밤에 읽는혹은 ‘30분 만에 읽는으로 요약 불가능한, 그렇게 읽고 싶지 않은 철학자였다. 플라톤이나 칸트, 헤겔처럼 순수와 영원을 탐구하고 개념의 금자탑을 쌓으면서 일상과 멀어지는 사유가 아니라 이 아수라장 세속의 장을 특유의 문체로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키에르케고르 말대로 사유의 체계는 가능할지 몰라도 삶의 체계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광대하고 변화무쌍한 삶의 결을, 니체는 감히 철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진리에 대한 태도는 또 얼마나 모던한가. “진리가 아닌 다른 목표들을 추구해보시오. 건강이나, 미래, 성장, , 생명 같은 것을...” 니체는 진리의 노예이길 거부했다. 절대 진리는 없으며 진리가 힘을 갖는 게 아니라 힘을 가진 것이 진리라고 했다. 삶 아닌 그 어떤 것에도 자리를 내어주지 말라고 말하는 니체는 뼛속까지 삶의 철학자. 그래서 이 세계를 거부하고 저 세계를 신봉하는 그리스도교 도덕을 비판하면서 신의 죽음을 고지한 것이다.

무신론자인 나에게도 의 죽음은 중요했다. 니체가 말하는 은 그리스도교 신에 국한되지 않는다. 삶에 복무하기보다 삶에 군림하는 도덕, 종교, 철학, 과학, 국가, 돈 등 이 시대의 모든 자명성을 으로 아우른다. 즉 니체에게 의 반대개념이다. “신이란 올곧은 것 모두를 왜곡하고, 서 있는 것 모두를 비틀거리게 만드는 하나의 이념일 뿐이다.” 신을 부정한 니체가 천국으로 가는 길은 친절히 안내한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은 아니다

# 니체와 글쓰기

니체 철학을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대결구도로 접근하니 텍스트의 초점이 조금씩 맞춰졌다. 니체의 철학을 한마디로 규정하면 바로 이것. ‘삶에 대한 옹호이다. 그래서 삶은 질병이고, 철학은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생각했던 소크라테스를 니체는 비판하면서 본능에 대적하는 삶은 하나의 병증일 따름이라고 일갈한다.

니체를 읽으면서 나의 본능, 나의 욕망, 나의 충동에 관심이 쏠렸다. 충동을 억누르는 게 능사가 아니라 고급한 충동으로 고귀한 욕망으로 신체를 잘 가꾸어야 건강한 삶이 가능함을 배웠다. 이러한 자기성찰의 과정을 통해 나에 대한 무지, 나의 삶의 무능을 통감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먼 존재이며 인간은 행복조차 배워야하는 짐승이라고 일찍이 니체는 말했다. 무작정 행복만 원하지 정작 어떤 것이 행복한 삶인지에 대한 물음은 없다는 것이다.(랭보의 시구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행복은 나의 숙명, 나의 회한, 나의 벌레였다’)

나부터도 하루하루 밀려오는 일들에 휩쓸리다보면 내 정신은 뒷전이다. 주위를 보아도 많은 사람들이 내 정신으로 살기보다 사장님 정신, 학원장 정신, 목사님 정신, 연예인 정신, 보험설계사 정신 등 각종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의 정신으로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판단하고 계획한다. 그렇게 자기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좋은 것을 만들어낼 능력도 없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에 대한 니체의 처방. “첫 번째 판단을 버려라. 그것은 시대가 네 몸을 통과한 것이다.”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정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은 위대한 경멸을 촉구하는 언설들로 가득하다. 낡은 습속들. 헛된 열망들. 오랜 집착들. 내 것이 아닌 판단들을 모조리 태우라는 거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 삶이 불만스러울 때, 이 삶을 다시 살고 싶을 때, 니체의 표현대로 과거라는 돌덩이를 굴릴 수 없어 답답할 때, 나는 글을 썼다. 니체가 일러준 두 가지 가치평가의 척도. 자기보존인가, 자기초극인가. “그냥 살지?” “한번 해봐?” 두 마음의 난투극을 지켜보았다. 쓰면서 물었고 쓰면서 버렸다.

어쨌든 쓰고 나면 삶에서 집중해야할 문제들이 선명해졌다. 니체에게 훔친 아름다운 표현 하나, 문장 한 줄 벽돌처럼 끼워 넣고 싶어서 사유의 만리장성을 쌓기도 했다. 그렇게 니체와의 글쓰기는 파괴-창조의 유희를 선사했다.

 # 철학적 오페라

니체 철학에 등장하는 초인, 즉 위버멘쉬는 자기 자신을 넘어감이라는 뜻의 독일어다. 나는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를 자기초극의 운동성으로 이해했다. 어떤 우월한 사람이 구현하는 인격체가 아니라 자기를 돌보면서 살고 싶은 사람이 채택하는 삶의 원리와 태도로 말이다. 니체는, 그리고 글쓰기는 짧은 보폭이라도 나를 넘어서는 과정에 기여했고 삶의 벡터를 조금씩 틀어주었다. 내가 니체라는 연료를 넣지 않았더라면, 글쓰기라는 운전대를 잡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여기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통장은 텅 비었으면서도 짭짤한 연봉의 프리랜서를 그만두고 공부하면서 살기로 마음먹은 일, 번듯한 학위도 내세울 경력도 없으면서 글쓰기 강좌를 시작한 일, 니체를 읽고 글 쓰니까 좋더라며 손 내민 일...그렇게 용기 내어 나를 떠나는 일이 아니었으면, 나를 찾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니체를 이해하는 사람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해할 수 있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만으로는 니체를 이해할 수 없다(보임러)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니체는 다르게 말한다. “언젠가 하인리히 본 슈타인 박사가 내 <차라>의 말은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다고 정직하게 불평했을 때, 나는 그에게 그게 당연하다고 말했었다. <차라>에 나오는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 문장을 체험했다는 것이고, 사멸적인 인간 존재의 최고단계에 현대인으로서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처음 <차라>를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나는 삶은 한낱 노역과 불안뿐이거늘이라는 문장에 형광펜을 진하게 그어두었다. 그 문장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실연당한 사람이 유행가 가사에 기대듯이 나는 니체의 말에 위로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말은 니체가 죽음의 설교자들에게비난하는 말이었다. “삶은 한낱 노역과 불안이라는 둥 삶을 무겁게 만드는 온갖 말을 퍼뜨리면서도 그 한낱 고난의 연속에 불과한 생을 끝내지도 않고 달라붙어 있다고 조롱한다. 나중에서야 그 뜻이 보였다.

니체의 말은 자신의 신체 상태에 따라, 체험에 따라, 욕망에 따라 다르게 들리고 다른 게 보인다. 그것이 묘미다.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과 시선과 대화와 감성이 어우러지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읽기가, 들뢰즈 말대로 철학적 오페라가 되리라 기대한다.

 

* 어쩌다 니체를 좋아하게 되었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변, 니체가 어떻게 나의 글쓰기를 자극했는가에 관한 고백.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강독 수업을 시작하며 써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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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을 사랑한 니체, 운명애

[니체의답안지]

내가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는 철학, 내가 지금까지 실행하고 있는 철학은, 삶의 저주받고 비난받던 면 또한 자발적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얼음과 사막을 더듬는 방랑이 내게 제공한 오랫동안의 경험에서, 나는 지금까지의 철학의 주제를 전부 완전히 다르게 보는 법을 배웠다...내가 체험한 이런 실험-철학은 시험적으로 근본적인 허무주의의 가능성마저 선취한다; 그렇다고 이 철학이 부정의 말에, 부정에, 부정에의 의지에 멈추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철학은 그 정반대에까지 이르기를, - 공제나 예외나 선택함이 없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디오니소스적으로 긍정하기에 이르기를 원한다. - 이 철학은 영원한 회귀를 원한다 - 동일한 것, 매듭의 동일한 논리와 비논리를 원한다. 한 철학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 삶에 디오니소스적으로 마주 선다는 것 - 이것에 대한 내 정식은 운명애다. (니체전집 21. 16[32])



니체는 평생 질병에 시달렸다. 열두 살이던 1856년에 머리와 눈의 통증으로 김나지움을 휴학했다. 이후 내내 두통과 근시에 시달렸고 신체상의 통증이 없을 때는 자주 소화 장애와 우울증을 겪었다. 말년에는 발작 등 정신장애에도 시달렸다고 한다. “어떤 날에는 밤이 지나면 더 이상 살아 있을 것 같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1879년 편지)는 기록이 남아있으나, “나는 중병을 앓고 있던 때도 결코 병적이지 않았다며 자신의 저서를 위대한 건강의 표현물로 칭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문건과 저서를 종합해보면, 니체는 질병을 변신의 기제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병은 내 모든 습속을 바꿀 권리를 나에게 부여했다. 병은 나에게 망각을 허용했고 또 그것을 명령했다. 병은 나에게 조용히 누워있을 것을, 여가를 가질 것과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함을 일깨워주었다... 나는 내 생애에서 병 속에 시달리고 고통스러웠던 순간보다 더 큰 기쁨을 느껴보지 못했다.” <이 사람을 보라>

가장 큰 고통에서 가장 큰 기쁨을 느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꾸 남들한테도 몰락하고 생성하라, 파멸하고 창조하라고 말하는 걸까. “하늘에 이르는 환호를 배우기 위해서는 죽음에 이르는 비애를 각오해야한다는 표현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었다. 고통기와 회복기를 반복하면서 새로운 감각을 경험하고 사유를 벼려가는 한 철학자의 모습을 그려본다. 니체는 스스로를 의사이면서 환자인 나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가 위대한 건강이라는 명명을 얻어내기까지 겪었을 엄청난 고통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래도 살아야할 삶. 도대체 인간은 왜 사는가, 수시로 물었을 것 같다.

니체는 왜 살았을까. 인간을 허무적 위험에 빠뜨리는 그리스도교 이성중심주의 이천년 철학역사와 한판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 이것은 사는 이유다. 저마다 사는 이유는 다르다. 돈 때문에, 자식 때문에, 글을 쓰기 위해,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등등 경험적인 영역이다. 이렇듯 사는 이유(reason)가 상대적이라면 사는 원인(cause)은 절대적이다. 심연의 철학자 니체의 탐구영역은 사는 원인에 가 닿는다. 인간은 무조건 살아야한다는 것. 아니, 이 세상에 던져진 이상 살게 되어있다는 것. 내가 살고자 목적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는 산다. 내 이성이 아니라 몸이나 감정이 사는 방향으로 나를 미는 힘이 있다. 이것은 논리적이거나 사유적이지 않고 자연적이며 신체적이고 본래적이고 감정적인 영역의 일이다.

삶을 살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신체다. 금기와 원죄의 영토였던 몸의 재발견. 생에 대한 놀라운 복구본능의 체험. 니체가 육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긍정의 철학 나아가 운명애를 말하는 것은, 질병과 동고동락한 그의 삶의 조건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조증과 울증의 반복은 상승과 하강의 변화무쌍한 문체로도 드러났다. 사실 자체는 없으며 해석만 있다는 니체의 말대로, 삶에서 좋고 나쁨은 어떤 지평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질병에 시달렸던 니체는 그 경험에서 얻은 이익을 이렇게 규정한다. 

"오랫동안 끔찍할 정도의 고통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지성이 흐려지지 않는 병자의 상태가 인식의 획득을 위해 가치가 없지는 않다. 깊은 고독과 모든 의무와 습관에서 갑자기 허용된 자유가 수반하는 지적인 이익을 전적으로 도외시하더라도, 무서운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은 자신의 상태에서 섬뜩할 정도로 냉정하게 세계를 내다본다. 그에게서는 건강한 사람의 눈이 보는, 사물을 둘러싸고 있는 저 보잘 것 없고 기만적인 매력들이 사라진다." <아침놀 114>

병을 통한 최고의 냉정함 회복한 니체는 또한 "수많은 종류의 건강상태를 거듭해서 통과하고 또 통과해야 하는 철학자는 그만큼 많은 종류의 철학을 뚫고 지나가게 된다"고 자신한다니체에게 질병은 순전히 고통스럽고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개체의 파괴적 고통은 세계 전체를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신체를 탄생시킨다. 


.... 어느덧 내일이면 니체글쓰기 수업 9차시다. 두번 남았다. 시원섭섭증이 도진다. 운명애를 주제로 강의안을 쓰는 중에 앞장을 가져왔다. 글을 쓰면서 새삼 놀란다. 니체가 삶을 긍정하라는 것은 고통을 긍정하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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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장정일 사이에서, 보다 먼 이웃사랑

[니체의답안지]

목요일은 니체의 날. 토요일은 시의 날. 금요일은 괄호의 날. 육신을 가로로 뉘이고 이 괄호 끝에서 저 괄호 끝으로 빈둥거리면 하루가 저문다. 그러는 사이 니체는 나고 시는 들고 그런다. 오늘은 장소를 바꿨다. 영하9도의 바람을 가르며 도심 이끝에서 저끝으로 배회했다. 교보문고에 가서는 시집 코너 앞에서 멍하니 있는데 어떤 시집 제목이 눈에 달겨들었다. 이름하여 <아니리> 이제 저런 장단에 감전되는 걸 보니 국악프로 좋아하던 엄마 나이가 되어가는 건가싶어 야릇. 그래도 입에 감기는 어감과 가슴을 떠미는 듯한 회오의 정서가 좋아서 아니리, 아니리, 세번 말하여 아니리. 하고 중얼거리며 다녔다. 영화 보기 전 예상치도 않다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햄버거를 먹게됐는데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읽으려고 그랬나 보다. 일년에 햄버거 먹는 경우가 한 두번인데. 장정일 '찌찌뽕~'

"쏟아지는 햇살 가운데 하얀 십자가 하나
롯이 세워질 때 나는 생각했다
신은 하늘에 있고 벽돌이 아무리 높아진들
육체는 지상에서 견디는 것" 

이 대지를 사랑하라는 니체의 말과 근접한 구절. 육체는 지상에서 견디는 것. 좋구나. 니체를 읽어도 반니체적인 인간이 있듯이 니체를 읽지 않고도 니체를 사는 이들은 많다. 니체를 통과한 신체가 햄버거를 섭취하고 나니 장정일 시의 맛이 또 다르다. 맛있게도 냠냠. 

 -이상-의욕하지 않기, -이상-평가하지 않기, 그리고 더-이상-창조하지 않기!
, 이들 크나큰 피로가 나를 떠나 아주 먼 곳에 머물러 있기를!

어제 수업에서 논의가 됐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한 구절이다. 생명은 힘에의의지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의지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창조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닌 것. 무기력증이 얼마나 '크나큰 피로'인가를 얘기하는 대목이다. 그런 얘길 하는데 '아!'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말. 평소에 행복해야지~ 나는 잘 살거야! 다짐을 일삼고 그리 살아보려다가 등골 휘었기에, 니체가 "너무 의욕부리지 말아라"는 뜻인줄 알았다고. 크게 공감하며 밑줄을 그었다고 했다.

창조적 오독이지만 분명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 우리는 '행복하라'는 지상명령에 심신을 혹사시키곤 하니까. 행복에 대한 강박만 있지 어떤 게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나만의 욕망과 능력을 알고 나만의 행복을 만들어가지 못한다. 스펙 쌓고 배낭여행 가고 어학실력 쌓고 명품백 사고...행복이라고 규정된 사회적 모델을 추구하는 행위를 따르고, 외부인증에 의한 삶을 살다보면 정말 크나큰 피로가 덮친다. 그런 의욕하기, 노예적 의욕하기라면 아주 멀리 해야한다. 왜냐하면 나중에 '나'는 없고 '자격증'만 남고 허탈하다. 이같은 반동적 허무주의에 휩싸여 "모든 것이 똑같고 모든 것이 헛되다"며 삶을 놓아버리지 말라는 얘기를 니체는 하는 거다.   

장정일은 이렇게 말한다.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구절을 빗댄 구절. 보다 먼 이웃을 사랑하라. 이 말은 이웃사랑은 편협한 자기애의 표출이라는 것.  나를 가꾸기보다 이웃을 돕는 일이 더 표나고 쉬우니까 그리하는데 그 '타인지향적 헌신'의 정체는 알고보면 자기로부터의 도피 아니냐 니체가 묻는다. 이 구절도 오해하기 십상이고 실제로 초롱샘은 '이웃사랑이 왜 나쁜가' 물었다. 니체가 옆집에 떡돌리지 말고 등돌리고 살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러니 이웃과도 친하게 지내고, 조카 수학도 가르쳐야 한다. 다만 자기자장에만 맴돌기보다 조금씩 시야와 관심을 넓혀가면서 망원렌즈로 세상을 보자는 것. 수학 잘하는 이모를 두지 못한 아이들도 공부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한번쯤 궁리해보자는 거라고 설명했다.

환경운동 하는 분들, 교육문제로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선생님들.이런 활동이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대형로펌에서 기업인수합병에 관한 일을 하던 변호사가 참여연대 간사로 들어간 것도 자기 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라고 하더라는 예를 들어주었다. 초롱샘이 물었다. "그분이 나갔다고 로펌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당연하다. 맑스가 자본론 써도 자본주의 건재하고, 안티조선 운동해도 조선일보 영향력 1위는 변함없고, 김진숙 고공농성승리해도 비정규문제는 남고, 한비야가 몇 십년 구호천사로 활약해도 빈곤아동은 여전하다. 그나마 그 미련한 사람들이 버둥거렸기에 99%는 저항한다고 말이라도 하는 거다.

우리 수업에서 아아님이 돌쟁이 애기 데리고 수업을 받는다. 강의신청 전에 묻길래 "된다. 해보자"고 했다. 니체수업이니까, 니체식으로 창조적인 우리만의 수업방식을 만들자고 했다. 공부는 원래 하고 싶은 사람들이 '길'에서 모여서 했다. 아이와 함께 공부하는 게 민주주의 학습이고 우연을 필연으로 삼는 법이니 다른 학인들에게도 좋겠지. 물론 수업시간에 아이가 떼써서 산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아님으로 인해 다른 아기엄마, 예비주부 학인들에게 공부의 물꼬를 터준 셈이 되니까, 그 또한 보다 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니체는 그리 어렵고 까다로운 얘기를 하지 않는다. 알고보면 소박한 남자;인데 잘난척 한다고 오해를 받는다. 차라투스트라에 나오는 온갖 허무적 인간유형, 천민근성 쩌는 사람들, 니체의 페르소나로 나는 읽힌다. 그 충동들, 거친 열정들을 크나큰 덕으로 가꾸어 멋진 책으로 엮어냈으니 그 질긴 엉덩이의 힘이 부러울 뿐이다. 

학인들이 써온 과제 읽으면서 세상 살아가는 다양한 얘기들 보고 듣고 느끼는 것도 보다 먼 이웃에 대한 애정행위의 근간이 된다. 고3담임 학인이 쓴 어느 학생이야기. 소위 노는 아이이고 대학진학을 포기했고 집안형편이 어려운데도 1학기에 야자를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대학생 오빠 학비 마련 등을 이유로 2학기부터 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공부는 안 하면서도 '등교'와 '야자'에 충실한 아이들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뭘까, 왜일까. 한준샘의 해석으로 우린 그 아이를 이해하게 됐다. "집에 가면 아무도 없어 외롭고, 가족들 다 일하는데 나만 놀고 있으면 미안한데 일하기도 싫고, 그래도 학교에 가면 공부는 안 해도 친구는 있잖아요. 나 같아도 야자 할 거 같아요. 어쩔 수 없을 때까지."  

보다 먼 이웃을 사랑하라. 니체를 읽으면서 니체바깥에도 눈 돌리라는 것. 장정일 버전으로 이거다.

 

"학교에서 세상을 배우고 있을 때
세상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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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함께 한 11월

[니체의답안지]

금요일 아침 커피가 달다. 목요일 저녁에 니체 수업을 끝내고 마시는 첫 커피이기에 그렇다. 어제로 2강이 지났다. 한 고개 넘고 바위에 앉아 쉬는 느낌. 발아래 출발지점이 보인다. 차라투스트라-글쓰기 강의라는 발상.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일이다. 우월한 니체전문가 많은 연구실에서 니체강의 한다고 나서려니 민망하기도 했다. 그래도 꼭 해보고 싶었다. 내 조건에서 열심히 할 자신은 있었다. 잃을 것도 지킬 것도 없는 인생, 해보고 싶은 일은 해야 한다. 설령 망해도 별로 나빠질 게 없다는 게 엄청난 자유를 준다. ㅋㅋ 위대한 사상과 수려한 문체의 원천 차라투스트라를 읽고 밑줄을 긋고 생각을 뒤척이고 그 인식의 거울로 자기 삶을 비추어 글을 쓰고. 그러자고 공지를 내놓고는 조마조마했다. 누가 동조를 해줄 것인가, 과연...가을강좌 모집도 끝나고 연말이 다가오는 어수선한 11. 개강시점으로 참 애매한 때다. 근데 공부를 꼭 3월이나 9월부터 해야 하는 건 아니므로. 나의 준비가 그때서야 완료됐으므로 공지를 띄웠다 

참 이상한 기다림. 연애할 때 전화를 기다리는 것처럼 설렘과 불안이 공존한다. 내가 왜 나를 시험대에 올려놓고 이 얄궂음을 당하는지, 며칠 동안 후회했다. 나를 외부에 개방하는 일은 역시 쉽지 않았다. 폭풍마감은 아니고 가랑비에 젖듯이 열다섯 명이 찼다. 기분이 좋았던 것이 글쓰기의 최전선 12기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이 정원의 절반을 차지했다. 지난 강의를 허투루 하지 않았다는 위안, 계속 헛살지 말자는 다짐을 하게 했다. 허나 강의를 준비하면서 차라투스트라 말고도 두꺼운 니체저서를 다시 뒤적여야했고 난해한 니체의 언어에 짓눌릴 때, 싸돌아다니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일 때 또 번뇌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이 난리인가. 대충 살지, 나도 참 애쓴다... 근데 그 터널만 지나고 나면 또 반짝 살만했다. 빈대떡보다 더 자주 뒤집히는 마음. 대범함과 심약함의 진자운동.  

흔들리는 소리가 학인들 사이에서도 들린다. “, 이렇게 써도 되나요?” “이게 맞나요?” “니체 원전을 더 읽고 차라를 봐야하는 게 아닐까요?” 삶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공부를 위한 삶을 강요해온 교육환경에서 성장한 이들은 니체를, 니체의 위험함을 견디지 못한다. 이론적 정합성을 따지고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진리모델을 찾으려는 열망을 갖고 있으면 니체는 영원히 잡히지 않는다. 니체는 자기의 사유를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하고 분류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 이단아다. 불친절함의 최고봉은 차라투스트라이고. 그러니 문학적 감수성과 독해력이 없으면 삶의 경험치가 적으면 읽기가 힘들다. 니체도 말했다. “차라투스트라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은 그 삶을 체험했다는 얘기다" 하이데거는 말했다. 몇몇 문장에 도취되지 말고 반드시 자기의 사유를 바꿔가는 방식으로 차라를 읽어야 한다고. 첫 시간에 제안했다. 나는 이 수업에서 저마다의 다양한 경험과 인식과 지식이 어우러지는 철학적 오페라를 기대한다고 

거창한 출사표. 과한 의미부여가 때로 필요하다. 그러고 보면 지식-진리를 대하는 태도는 삶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다. 약간의 사치를 부리는 삶에 대한 나의 선호. 다른 세상에 대한 나의 눈물겨운 동경그렇기 때문에 누구와 어떤 책을 읽든 원점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물음이 있다. ‘어떤 앎이어야하는가’ ‘나는 얼마나 더 달라질 수 있을까’  '다른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계보학 관련해서 푸코 책을 뒤적이다가 나의 원초적 물음에 응하는 빼어난 문장을 만났다.

"철학적 담론이 밖으로부터 타인들을 지배하고, 그들에게 그들의 진리가 어디에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찾는가를 말해주고자 할 때, 혹은 순수하게 실증적으로 그들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다고 자부할 때, 그 철학적 담론은 얼마간은 터무니없는 것이다...‘시도’-이것은 의사소통의 목적에 맞게 타인을 단순화시키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진실의 작용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변형시키려는 시험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데-는 철학의 살아있는 본체이다."  -<성의역사2>







Chopin's Waltz Brilliante Op. 34, No. 1 in A Flat Major by Lang L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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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 4장 - 잠언과 간주곡

[니체의답안지]

4장은 짧은 잠언으로 이뤄졌다. 맥락에서 걸어 나온 한줄 문장을 해석하는 건 위험하고 부질없다. 그래도. 울림을 남기는 좋은 문장을 읽고 나누는 일은 아름답고 유용하다.   

65. 인식에 이르는 길 위에서 그렇게 많은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없다면 인식의 매력은 적을 것이다.

= 안다는 것은 나의 무지와 편견과 빈구석을 아는 것. 그 손발 오글거리는 쪽팔림을 견디는 것. 자기를 알아가는 투쟁. 그것을 인식의 매력으로 표현하다니 니체는 대인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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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 3장 종교적인 것 - 금욕의 두 가지 버전

[니체의답안지]

어디선가 신보다 신앙이 먼저 생겼다는 말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는데 같은 맥락에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보다 종교적인 것이 문제라고. 신의 죽음으로 종교는 사라졌지만 종교적인 것은 여전히 위세를 떨친다는 것, 즉 우리시대에는 도덕, 과학 등이 ‘신 없는 신앙’으로 종교의 기능을 대신한다는 비판이다. 종교적인 것의 어떤 부분이 문제이냐 하면 희생, 금욕 같은 것들의 강조이다. 삶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종교를 위한 삶이 되는 가치전도. “그리스도교적 신앙은 처음부터 희생이다: 모든 자유와 긍지, 모든 정신의 자기 확실성을 바치는 희생이다. 동시에 이는 노예가 되는 것이며 자기 조소이자 자기 훼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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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 2장 - 독립, 가장 위험한 놀이

[니체의답안지]

니체는 심리학자가 아닐까. 니체의 저서를 읽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파헤치고 짚어내고 들춰내는 거침없음에 놀라고, 강자부터 약자까지 그가 제시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간상에 ‘맞아’ ‘아, 그랬지’ 맞장구를 치게 된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고귀한 인간에게는 ‘고독’과 ‘독립’이라는 필연적 수사가 붙는다. 고독을 모르는 인간, 독립이 안 된 인간을 ‘평균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악의 저편 2장 ‘자유정신’은 새로운 철학자의 도래에 대한 니체의 간절한 염원이 읽힌다. 그가 제시하는 고귀한 인간상의 유형 몇 가지만 살펴보자.

<정원 같은 사람>

“정원 같은 사람 - 또는 하루가 이미 추억이 되어버린 저녁 무렵 물 위를 흐르는 음악 같은 사람이- 그대 주위에 있도록 하라: 멋진 고독을,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에게 여전히 잘 사는 권리를 부여하는 자유롭고 변덕스러우며 경쾌한 고독을 선택하라!”

니체의 풍류가 깃든 문학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문장. 풍류와 유머가 공존하는 니체. 사랑스럽다. 정원 같은 사람이 뭘까. 향기로움. 아름다움. 어우러짐. 순간적임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아마도 기화요초 피어난 정원처럼 내면에 다양한 아름다운 충동이 자라는 사람을 말하는 것 같다.

 <독립적인 인간>

“독립한다는 것은 극소수 사람의 문제이다.” 독립은 강자의 특권이다. 독립적인 인간은 자발적으로 “미궁”으로 들어가며 “삶 자체가 이미 동반하고 있는 위험을 천배나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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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 1장 - 정지의 철학 vs 운동의 철학

[니체의답안지]

니체를 오랜만에 읽었다. 첫 장을 읽자 다시금 당혹감이 덮쳤다. 어? 니체가 뭐래? 이야기의 초점이 맞춰질 때까지 두어 번을 읽어봐야 한다. 이 대목이 시방 비판인지 옹호인지 조차 분간이 쉽지 않다. 그것은 ‘습관화된 가치 감정’이 피부처럼 들러붙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니체는 ‘진리를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진리를 의심하라고 “삶의 조건으로 비진리를 용인하라”고 말한다. 또 고통을 피해야할 그 무엇으로 여기는 ‘평균인’의 태도를 비판하는데 니체가 볼 때 진리만큼이나 거짓, 행복이상으로 고통 등이 삶에서 가치와 쓰임을 갖기 때문이다. 니체는 진리처럼 주장되어 온 것들을 모두 파헤쳐 보면 단순한 맹목이나 독단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아주 근엄하고 단정적인 냄새를 풍긴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겉보기에만 그런 것이고, 사실은 온갖 미숙함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금까지 독단론자들이 구축해 놓은 철학적 건물들이 실제로는 정말로 빈약한 것들이라는 사실이 머지않아 밝혀질 것이다.’(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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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계보 - 망각력 기억증에 대하여

[니체의답안지]

<도덕의 계보>는 그의 사상이 집약된 매우 중요한 저작이다. 그중에서도 제2논문, 기억과 망각에 관한 해석은 내게도 무척 감동적이고 유용했다. 그전만 해도 기억은 우월한 능력(기억력), 망각은 골치 아픈 병(건망증)이었다. 공부할 때나 일할 때나 일상에서 망각신이 강림해서 일을 그르친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 또 정작 악몽 같은 일은 생생히 떠올라 괴로웠다.

그런데 니체는 망각이 단순한 타성력이 아닌 “적극적인 저지 능력”(망각력)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적, 자신의 고난, 자신의 비행을 오랫동안 생각하는 것, 즉 약자의 원한을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강자는 그런 기억에 대단한 망각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좋은 예가 미라보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한 모욕과 비열한 행위를 기억하지 못했고, 이미 잊어버렸기 때문에 용서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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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삶, 학자적 삶에 대하여

[니체의답안지]

니체 공부하면 행복해져요? 누가 물었다. 순간, 당황했다. 흑마늘의 효능을 묻는 것이나, 요가하면 살 빠지느냐는 질문처럼 들렸다. 단답형의 명쾌한 답변을 해줘야할 것 같은데 확신이 없었다. 니체가 행복의 특효약이라면 이론상으로는 우리나라에 내로라하는 니체전문가들. 번역자들이 가장 행복해야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머뭇거렸다.

니체를 읽으면서 행복과 고통을 동시에 느꼈다. 책장을 넘기는 동안은 엄청 괴롭고 자학했다. 문장이 난해하고 맥락이 안 잡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가 좋으니까 봤겠지. 어려워서 낑낑대고 열 불나는 ‘스팀현상’이 은근히 중독성 있다. 끝 맛이 달달하다. 어떤 사람이 자기 시대와 전면적으로 대결하면서 세계와 인간을 치열하게 분석하고 자신만의 사상적 결과물을 정리했다는 게 보통 생의 의지는 아니지 않나. 그 에너지가 주는 힘이 큰 거 같다. 고생 끝에 산에 올라 대자연의 품에 안기면 기운이 나는 것처럼. 다른 산에서 보는 풍광은 어떨지 궁금해서 도전해보고 싶고, 힘든 길 같이 올라간 친구들과도 정이 흠뻑 들고. 그 과정이 고통이면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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