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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답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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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니체인가 # 어느 날, 니체 그날도 서점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가 눈에 띄었다. 내용이 양호했다. 습관처럼 샀고 한달음에 봤다. 본문에 인용된 숱한 멋진 말들은 삶에 지친 나를 위한 처방전 같았다. 원문이 욕심났다. 한약 짓는 기분으로 니체 전집을 질렀다. 딱 녹용 한 재 값인 삼십여 만원을 결제했더니 사과상자 크기의 박스에 니체 전집 21권이 배달되었다. 설레는 마음도 잠시. 한 페이지를 채 읽기가 어려웠다. ‘무리수’를 두었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방구석에 처박아두길 두어 달. 오랜만에 들어간 수유너머 홈페이지에 마침 니체 강의 공지가 떴다. 수업을 들었으나 들리지 않았다. ‘외국어’ 같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심 어려웠다. (그 강의는 자퇴생 및 행불자가 속출했다) 수업시간이 괴로웠다. ‘아는 이 전혀 없는 ..
질병을 사랑한 니체, 운명애 내가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는 철학, 내가 지금까지 실행하고 있는 철학은, 삶의 저주받고 비난받던 면 또한 자발적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얼음과 사막을 더듬는 방랑이 내게 제공한 오랫동안의 경험에서, 나는 지금까지의 철학의 주제를 전부 완전히 다르게 보는 법을 배웠다...내가 체험한 이런 실험-철학은 시험적으로 근본적인 허무주의의 가능성마저 선취한다; 그렇다고 이 철학이 부정의 말에, 부정에, 부정에의 의지에 멈추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철학은 그 정반대에까지 이르기를, - 공제나 예외나 선택함이 없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디오니소스적으로 긍정하기에 이르기를 원한다. - 이 철학은 영원한 회귀를 원한다 - 동일한 것, 매듭의 동일한 논리와 비논리를 원한다. 한 철학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
니체와 장정일 사이에서, 보다 먼 이웃사랑 목요일은 니체의 날. 토요일은 시의 날. 금요일은 괄호의 날. 육신을 가로로 뉘이고 이 괄호 끝에서 저 괄호 끝으로 빈둥거리면 하루가 저문다. 그러는 사이 니체는 나고 시는 들고 그런다. 오늘은 장소를 바꿨다. 영하9도의 바람을 가르며 도심 이끝에서 저끝으로 배회했다. 교보문고에 가서는 시집 코너 앞에서 멍하니 있는데 어떤 시집 제목이 눈에 달겨들었다. 이름하여 이제 저런 장단에 감전되는 걸 보니 국악프로 좋아하던 엄마 나이가 되어가는 건가싶어 야릇. 그래도 입에 감기는 어감과 가슴을 떠미는 듯한 회오의 정서가 좋아서 아니리, 아니리, 세번 말하여 아니리. 하고 중얼거리며 다녔다. 영화 보기 전 예상치도 않다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햄버거를 먹게됐는데 을 읽으려고 그랬나 보다. 일년에 햄버거 먹는 경우가 한..
니체와 함께 한 11월 금요일 아침 커피가 달다. 목요일 저녁에 니체 수업을 끝내고 마시는 첫 커피이기에 그렇다. 어제로 2강이 지났다. 한 고개 넘고 바위에 앉아 쉬는 느낌. 발아래 출발지점이 보인다. 차라투스트라-글쓰기 강의라는 발상.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일이다. 우월한 니체전문가 많은 연구실에서 니체강의 한다고 나서려니 민망하기도 했다. 그래도 꼭 해보고 싶었다. 내 조건에서 열심히 할 자신은 있었다. 잃을 것도 지킬 것도 없는 인생, 해보고 싶은 일은 해야 한다. 설령 망해도 별로 나빠질 게 없다는 게 엄청난 자유를 준다. ㅋㅋ 위대한 사상과 수려한 문체의 원천 ‘차라투스트라’를 읽고 밑줄을 긋고 생각을 뒤척이고 그 인식의 거울로 자기 삶을 비추어 글을 쓰고. 그러자고 공지를 내놓고는 조마조마했다. 누가 동조를 해줄 ..
선악의 저편 4장 - 잠언과 간주곡 4장은 짧은 잠언으로 이뤄졌다. 맥락에서 걸어 나온 한줄 문장을 해석하는 건 위험하고 부질없다. 그래도. 울림을 남기는 좋은 문장을 읽고 나누는 일은 아름답고 유용하다. 65. 인식에 이르는 길 위에서 그렇게 많은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없다면 인식의 매력은 적을 것이다. = 안다는 것은 나의 무지와 편견과 빈구석을 아는 것. 그 손발 오글거리는 쪽팔림을 견디는 것. 자기를 알아가는 투쟁. 그것을 인식의 매력으로 표현하다니 니체는 대인배다. 72. 높은 감각의 강함이 아니라, 지속되는 것이 높은 인간을 만든다. =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구랑은 느낌이 왠지 다르다. 매일 한 쪽씩 글 쓰는 것으로 높은 인간이 될 수 있을까. 그건 아닌 거 같다. 기계적 반복이 아닌 영혼의 단련 차원은..
선악의 저편 3장 종교적인 것 - 금욕의 두 가지 버전 어디선가 신보다 신앙이 먼저 생겼다는 말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는데 같은 맥락에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보다 종교적인 것이 문제라고. 신의 죽음으로 종교는 사라졌지만 종교적인 것은 여전히 위세를 떨친다는 것, 즉 우리시대에는 도덕, 과학 등이 ‘신 없는 신앙’으로 종교의 기능을 대신한다는 비판이다. 종교적인 것의 어떤 부분이 문제이냐 하면 희생, 금욕 같은 것들의 강조이다. 삶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종교를 위한 삶이 되는 가치전도. “그리스도교적 신앙은 처음부터 희생이다: 모든 자유와 긍지, 모든 정신의 자기 확실성을 바치는 희생이다. 동시에 이는 노예가 되는 것이며 자기 조소이자 자기 훼손이다.” 니체는 종교적인 것을 ‘종교적 신경증’이라고도 표현한다. “거기에는 늘 고독, 단식, 성적 금욕이라는 ..
선악의 저편 2장 - 독립, 가장 위험한 놀이 니체는 심리학자가 아닐까. 니체의 저서를 읽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파헤치고 짚어내고 들춰내는 거침없음에 놀라고, 강자부터 약자까지 그가 제시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간상에 ‘맞아’ ‘아, 그랬지’ 맞장구를 치게 된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고귀한 인간에게는 ‘고독’과 ‘독립’이라는 필연적 수사가 붙는다. 고독을 모르는 인간, 독립이 안 된 인간을 ‘평균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악의 저편 2장 ‘자유정신’은 새로운 철학자의 도래에 대한 니체의 간절한 염원이 읽힌다. 그가 제시하는 고귀한 인간상의 유형 몇 가지만 살펴보자. “정원 같은 사람 - 또는 하루가 이미 추억이 되어버린 저녁 무렵 물 위를 흐르는 음악 같은 사람이- 그대 주위에 있도록 하라: 멋진 고독을, 어떤 의미에서 ..
선악의 저편 1장 - 정지의 철학 vs 운동의 철학 니체를 오랜만에 읽었다. 첫 장을 읽자 다시금 당혹감이 덮쳤다. 어? 니체가 뭐래? 이야기의 초점이 맞춰질 때까지 두어 번을 읽어봐야 한다. 이 대목이 시방 비판인지 옹호인지 조차 분간이 쉽지 않다. 그것은 ‘습관화된 가치 감정’이 피부처럼 들러붙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니체는 ‘진리를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진리를 의심하라고 “삶의 조건으로 비진리를 용인하라”고 말한다. 또 고통을 피해야할 그 무엇으로 여기는 ‘평균인’의 태도를 비판하는데 니체가 볼 때 진리만큼이나 거짓, 행복이상으로 고통 등이 삶에서 가치와 쓰임을 갖기 때문이다. 니체는 진리처럼 주장되어 온 것들을 모두 파헤쳐 보면 단순한 맹목이나 독단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아주 근엄하고 단정적인 냄새를 풍긴다고 해도 그것은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