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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이해하고 내 자유를 복원하는 '생존형 독서' 가끔씩 아침 일찍 책을 싸들고 집을 나선다. 마을버스로 세 정거장 지나 내린다. 내가 즐겨 찾는 콩다방은 H사 건물 1층에 자리했다. 집 앞에 별다방 맥다방 다 두고 굳이 버스까지 타고 출장을 가는 이유는 한적함이 좋아서다. 로비 구석에 있어 잘 눈에 띄지 않고 규모도 아담하다. 직장인들이 점심을 먹고 쏟아져 들어오는 12시 반 전까지는 절간처럼 조용하다. 삼면이 커다란 통유리다. 살구빛 볕이 들어차고 포근한 음악이 융단처럼 깔리고 거의 사약 농도의 까만 커피의 짙은 향이 번지는 지복의 환경에서 나는 얌전한 고양이처럼 등을 굽혀 책장을 넘기곤 한다. 그날도 들기름 발라 김을 굽듯 한 장 한 장 햇살에 책장을 굽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영화 보러 갈래요?’ ‘아, 무슨 장르인가요?’ ‘코미디요.’ ..
봄날, 내 삶의 기막힌 법정 드라마 쥐그림 그래피티 제 3차 공판이 있던 지난 금요일, 교대방면 녹색열차에 몸을 실었다. 전화벨이 울린다. 어제부터 나의 핸드폰은 24시간 재난대책본부다. 친구다. 어디 가느냐고 묻는다. “법원 가.” “어멋, 거긴 왜?” “서태지랑 이혼하러.” 잠꼬대가 아니다. 지난 1박 2일 간 나는 이지아에 빙의될 정도로 기사를 읽고 또 읽었다. 손가락으로 덧셈과 뺄셈을 해가며 연도별로 서태지의 타임라인을 짜맞춰보았다. 일련의 정황이 맞아떨어지나 현재의 상황은 논리적으로 독해불가다. 사랑하다 헤어지는 건 이해되지만 왜 하필 지금 ‘소송’까지 이르렀을까. 고심의 와중에 ‘전(前) 남편 서태지’ 이런 기표가 참으로 성가시고 불쾌했다. 처자식 딸린 유부남 서태지는 몰라도 이혼과 태지의 순서쌍은 단 한 번도 그려본 적이 없었..
곡강이수 / 두보 一片花飛 減却春 일편화비 감각춘 風飄萬點 正愁人 풍표만점 정수인 且看欲盡 花經眼 차간욕진 화경안 莫厭傷多 酒入脣 막염상다 주입순 江上小堂 巢翡翠 강상소당 소비취 苑邊高塚 臥麒麟 원변고총 와기린 細推物理 須行樂 세추물리 수행락 何用浮榮 絆此身 하용부영 반차신 한 조각 떨어지는 꽃잎에도 봄은 줄어드는데 만점 꽃잎이 바람에 날리니 참으로 시름에 잠기네. 봄을 마음껏 보려고 하나 꽃잎은 눈을 스치고 지나가니 어찌 몸이 상할까 두렵다고 술을 마시지 않으리. 강가 작은 정자에는 비취새가 둥지를 틀었고 부용원 뜰가 높은 이들 무덤에 기린 석상도 뒹구는구나. 세상이치를 따져 보건대 마땅히 즐거움을 따를지니 어찌 헛된 영화에 이 한몸 얽맬 필요가 있으랴. 하늘에서 보면 아파트 단지가 새하얗지 않을까. 벚꽃잎이 바닥에 다..
푸르른 들판 / 여간 들판의 갈매빛은 봄하늘과 합쳐져 하늘 파랗고 들판빛 높다. 나 이제 푸르름 속으로 가노라니 힘은 쑥대 위를 날아오를 듯 이 몸 멀리 있는 것 이미 깨닫고 돌아가는 기러기의 고달픔 애처롭다. 날카로운 활시위 소리 변방에 가득한데 외로운 그림자는 강 물결에 떨어진다. - 여간, 내가 외로움을 모르고 살았다는 것을 얼마전에 알았다. 그날 아침에 애들 학교 보내고 빨래 개키고 설겆이 하고 집 대충 치우고 우리동네 새로 생긴 파스쿠치 2층 명당자리에 아침 8시 50분에 도착했다. 파란 하늘이 들어찬다. 안은 한적했고 밖은 화창했다. 2층에서 본 거리. 의자에 눕듯이 앉아 차가 다니고 연둣빛 이파리가 한들거리는 길가를 보고 있자니 내가 꼭 6인실 창가자리에 입원한 환자 같았다. 노곤했다. 천원 내고 커피를 리필하고..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니까 거리, 도서관, 모텔, 버스, 술집...기억에 남는 장소다. 남편과의 연애는 삶과 분리되지 않았다. 주말마다 집회에 같이 나가고 술 마시는 자리나 공부할 때나 항상 옆에 있었다. 사노맹에서 하는 무슨 강좌에도 손잡고 다녔다. 종로 어디쯤 골목길 같은데 장소와 배운 내용이 하얗게 지워졌다. 낡은 책상의 삐그덕 거리는 소리랑 옆자리 남편의 착한 웃음만 흐릿하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했다. 잉꼬 같은 동지였다. 그 시절엔 그랬다. 며칠 전 다퉜다. 이과지망생 아들한테 남편이 ‘너 카이스트 가라’고 말한 것이 화근이다. 세 명이 자살했을 시점이다. 나는 순간 발끈했다. (물론 성적도 안 되지만) 그 죽음의 소굴에 왜 아들을 넣으려고 하느냐고 말했다. 남편이 자살은 어느 대학이나 있는데 한겨레가 부풀려 보도했고 ..
절명시 / 성삼문 북소리 둥둥둥 이 목숨을 재촉한다. 고개를 돌이키니 해는 벌써 서산을 넘네. 황천 가는 길에 주막 하나 없으니 오늘밤 뉘 집에서 이 밤 새울꼬. - 성삼문 Beethoven's Tempest Sonata -- Wilhelm Kempff 외로움과 다툰 어제 하루. 김광석을 듣고 빌헬름 켐프도 듣고. 유하의 세상의 모든 저녁을 읽고 성삼문 시조도 읽어 보고. 술 마시면 글을 못 써 술을 안 마셨는데 글도 못쓰고 잠들었다. 주막 하나 없는 삶에 실망한다. 내가 예전에 클린트이스트우드 등 중장년 예술인에 환호하면 늙은 사람만 좋아한다고 친구들이 구박했는데 저런 깊고 순수한 눈빛과 치열한 파장만이 나를 사로잡는다. 외로움이란 인간의 표정을 아는 사람. 이해가능성 바깥의 세계를 열어주는 음악.
아들 따라 남고에 가다 남고를 처음 가봤다. 생후 40년 만에. 운동장에는 푸르딩딩한 수박색 추리닝을 입은 남학생들이 공을 차고 있다. 인조잔디가 깔리지 않은 흙바닥에 구름먼지가 인다. 전봇대만한 아이들의 그림자가 뒤엉킨다. 완전 어른이구나. 남고가 꼭 ‘군대’같다고 생각한다. 학부모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강당으로 간다. 넓은 공간이 꽉 찼다. 평일 오후인데 양복차림 남자가 많다. ‘요즘은 아빠가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많다더니 이런 자리에도 온단 말인가’ 새삼스럽다. 스크린이 내려오고 복잡한 도표와 통계치를 내민 입시현황을 보고한다. 서연고 정원이 몇 명 인서울 이과 문과 정원이 각각 몇 명. 그래서 우리학교 전교에서 몇 명이 서울소재 대학을 진학한다는 말씀이다. “이과는 2.5등급까지 경기권 대학에 들어갑니다. 문과보단 훨씬 ..
한 잎의 女子1 / 오규원 -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의 모자다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잎같이 쬐그만 여 자, 그 한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잎의 영혼, 그 한잎의 눈, 그리고 바 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여 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여 자,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 림자 같은 슬픈 女子. - 오규원 시집 문학과지성사 목이 말랐다. 아침부터. 시를 안 읽었다. 일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