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잎의 女子1 / 오규원

[올드걸의시집]

 

-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의 모자다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잎같이 쬐그만 여
, 그 한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
그 한잎의 맑음, 그 한잎의 영혼, 그 한잎의 눈,
그리고 바
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여
,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
림자 같은 슬픈 女子
.



-
오규원 시집 <사랑의 감옥> 문학과지성사

 

목이 말랐다. 아침부터. 시를 안 읽었다. 일주일 동안. 공친 느낌. 잘 못 살았다는 자책. 더 바쁠 때도 시를 읽었는데, 내가 지금 시 한편 생각나지 않을 만큼 살만한가. 물으면 그건 또 아닌데. 밀린 적금 붓듯이 한꺼번에 일시납 해버릴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시집을 곧장 꺼내지 않기로 한다. 아름다운 글 한 편 수배한다. 벤야민의 문예이론을 폈다. <병과 인내심> 분량과 내용 모두 맞춤한 소품이다. 식탁으로 갔다. 등 뒤가 따땃하다. 남동향이라 아침이면 해가 푸지게 든다. ‘누군가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자 하는 내면의 욕구는 훗날 나로 하여금 내가 어떤 여인을 오랫동안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그 여인이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였다이 순간 나는 기다리고 싶다. 누군가의 가슴으로 직진하는 여인이 되지 못하고, 기다리는 자리를 탐낸다. 기다림이 속편하다. 적당한 쓸쓸함. 적당한 초조감. 시간이 팽팽히 펴지는 그 순간이 좋다. 커피머신이 기적소리처럼 요란한 음향효과를 내며 떤다. 아침의 고요, 커피의 낙하, 언어의 친절이 급진적인 시적경험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는 행복하다.

김치찌개 한 솥이랑 단호박 부침 달랑 놓고 저녁 먹는 자리. 기타가 화제다. 왕년에 다들 조금씩 쳐봤다는 사실에 놀란다. 특히 박나 잘 놀았어. 롤라장도 갔다. 유행이었지. . 뒤로가기. 전영록의 불티가 배경음악으로 깔리고. 노래방에도 가고. 고등학생 땐 미팅하고 고수부지 가서 헌팅하고. 완전 날날이었네. 공부도 했어그게 고딩 문화였어. 디스코텍에도 갔고, 난 온갖 통속문화는 다 즐겼다. 대학가선 운동했지. 맞네. 80년대는 운동권이 대유행이었으니 그야말로 통속이네. 서강대 앞에 운동권들 가는 술집 있었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지하에 아주 컸어. 밤새 투쟁가 부르고. ? 우산속? 우산속은 또 뭐야. 완전 제목 오글거린다. 우산속에서 뭘 어쩐다는 거야. 웅성웅성. 아 맞다. 우산속은 술집이 아니라 디스코텍이구나. 그녀가 끼어든다. 나는 나이트클럽 세대에요. 홍대앞 발전소 다녔어요. 우산속과 발전소가 마주보고 웃는다. 접시위에 단호박도 반달눈으로 스마일. 시큼털털한 수다를 마치고 매혹적인 '바깥에서'를 읽고  돌아오는 밤길. 문득 아주 통속적인 시가 읽고프다. 오규원의 한잎의 여자 같은. 벤야민의 여인과 오규원의 여자. 아름다운 언어가 낳은 두 여자.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詩集 같은 女子.




신고

'올드걸의시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푸르른 들판 / 여간  (6) 2011.04.18
절명시 / 성삼문  (8) 2011.04.12
한 잎의 女子1 / 오규원  (4) 2011.04.06
어부 / 김종삼  (5) 2011.03.23
꽃단추 / 손택수  (2) 2011.03.09
희망 / 유하  (6) 2011.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