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이 병을 만든다 - 병원 앞의 생

[비포선셋책방]

이반일리히의 책 <병원이 병을 만든다>를 절반 가량 읽었다. (나머지는 다음주에 읽는다.)  제목만으로도 주제의식이 명확히 드러나는 책이다보니, 안 읽어도 읽은 거 같았다. 워낙 건강한 편이어서 크게 병원 갈 일 없이 성장했는데 결혼하고 불임클리닉을 다니게 됐다. 의사는 매뉴얼화된 지식과 자료, 통계 등으로 나의 몸을 진단하는데 그 해석이라는 게 그닥 신뢰가 가지 않았다. "이 사람이 나보다 더 모르나?" 하는 생각을 몇 차례 했다. 나는 기초체온을 재고 몸을 계속 관찰했지만 의사는 아니지 않은가. 진찰하는 시간도 10분 내외이고. 그 이후에 아이를 키우면서 소아과를 갔을 때도 대기시간이 진료시간보다 길고 의사의 태도도 형식적이어서 화병이 더 날 것 같았다. 여기에 끌려다니면 끝도 없겠구나 싶었다. 가급적 병원에 의존하지 말고 아이를 돌봐야겠다 결심했고 그렇게 아이 둘을 길렀다. 암튼 내 몸과 아이들 몸을 나보다 남이 더 잘 안다는 것도 뭔가 불합리하게 생각됐으니까.  

이반일리히는 나의 다듬어지지 않은 불만과 화남을 구조적으로 체계적으로 설명해주었다. <학교 없는 사회>도 그랬지만 40년도 전에 유럽에서 나온 책이 한국사회에 이렇게 적합하게 맞아떨어지다니 신기해하면서 읽었다. 한줄로 요점정리하면, 병원병의 문제점은 자기치료 의지의 회복의 기회가 원초적으로 차단되고, 치료에 대해 의사의 직업적 독점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 병원에 가서 병을 얻다

 

병을 앓는 사람들, 병을 앓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의료가 개입한 결과, 새로운 질병이 많아진다. 이처럼 의사가 만드는 병을 병원병이라고 부른다. ‘임상적인 병원병이란, 치료, 의사 또는 병원이 병원, 곧 병을 발생시키는 인자因子가 되고 있는 모든 임상적 상태를 포함한다. 나아가 의료가 단지 개인에게 직접적인 손해를 주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회적 조직체가 전체 환경에 주는 영향을 통하여 건강을 침식한다. 개인의 건강에 대한 의료적 손해가 사회 정치적 전달양식에 의해 산출될 때, 그것이 사회적 병원병이다

그 예로 드는 것. -옛날에는 치명적이었을 저양양의 수준에서도 인간의 3분의 1은 생존할 수 있었으나 반면에 보다 부유한 사람들은 그들의 식사를 통하여 더욱 많은 독물과 돌연변이를 초래하는 원인을 흡수시키고 있다. -메사추세츠 주에서는 질병도 아니었으나 심장치료 때문에 불구가 된 아이들의 수가, 심장병으로 유효한 치료를 받고 있는 아이들의 수를 초과하고 있다.

 * 20세기 의사, 건강치료를 독점한 최초의 직업

프랑스 혁명 때까지 의사는 장인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소수의 의사는 부유했으나 다수의 의사는 장인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소수의 의사는 부유했으나 다수의 의사는 빈곤 속에서 죽었다. “즐겁게 죽는 변호사 하나 없고, 즐겁게 사는 의사 하나 없다.”고 하는 속담은 유럽의 어느 나라에나 있다. (59)

안그래도 아침에 파리에서 인턴하는 후배랑 통화를 했는데 의사가 인기 신랑감 30위 안에도 못 든다고 한다. 왜냐하면 돈은 많이 못 벌고 바쁘기만 해서라고. 프랑스는 아이를 낳으면 부부가 공동육아를 하는데 남편이 일이 바쁘면 여자 혼자 애를 봐야하니 그렇다고 했다. 한국 의사도 즐겁게 살지 못하겠지만 돈은 많이 벌어서 그것으로 벌충하는데 프랑스 의사는 사정이 다르다. 의대 학비 연 45만원. 수업 교재도 나라에서 빌려준다. 돈이 안 드니까 졸업해서 본전 뽑을 일도 없는 것. 국가 공무원과 비슷한 직업이므로 직업적 소명감으로 해야하는 것이다. 피부과랑 성형외과는 의대 성적 가장 하위권이 간다니 여러모로 한국과 차이가 컸다. 

이반일리히는 또 역사적으로 건강 치료를 독점한 직업이 없었다고 말한다. " 환자나 환자를 둘러싼 환경의 물리적, 생화학적 구조에 기술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의료제도의 유일한 기능이 아니고 그랬던 적도 없었다. 병원의 제거 그리고 약품의 투여는 결코 인간과 질병의 관계를 조정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마술이나 의식을 통한 치료는 명백히 의료가 갖는 중요한 전통적 기능이다...치료자는 신들의 승려일 수도, 입법자일수도, 이발사 겸 의사(중세 유럽에서는 이발사가 외과의사를 겸했음)일수도, 과학적 충고자일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의사라고 부르는 말에 포괄되어 있는 뜻의 범위를 대부분 포함할 수 있는 고통의 이름은, 14세기 이전의 유럽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며 못 박는다. "건강 치료를 독점한 최초의 직업은 20세기 말의 의사라고 하는 직업이었다."

* 검사와 진료의 순례로 변모한 인생  

이반 일리히의 의료체제 비판은 (학교가 그렇듯이) 병원이라는 제도적 장치에 의한 개개인 삶의 장악이다. 현대인의 생애주기는 병원에 의해 기획되고 구획된다. 부자에게도, 가난한 자에게도 인생은 검사와 진료를 통하여 출발점까지 돌아오는 순례로 변모되고 있다. 인생은 이리하여 좋든 나쁘든 제도적으로 계획되고 형태를 갖추어야만 하는 통계적인 현상, 곧 하나의 기간으로 깎아내려지고 말았다. 생존 기간은, 의사가 태아를 출산해야하는가 어떤가, 그리고 어떻게 출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출생 전의 검사로 시작되어, 의사가 인공호흡 장치를 멈추라는 지시를 차트에 기록할 때 끝난다.” (89)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것이다. "위기의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병원이 맡게 되면 병원은 사회에 새로운 죽음의 형식을 강요한다." 사람들이 스스로 행위하고 스스로 만드는 능력을 빼앗아버리고 신체와의 투쟁 능력을 상실하며 독립하여 늙을 기회를 상실하고심지어 죽음의 형식까지 강요한다는 것이다. 의존하는 것은 언제나 가혹한 것이고, 노인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94) 의료가 존재하지 않는 죽음은 낭만적 고집, 특권 또는 재앙과 같은 뜻으로 여겨지고 있다. 환자는 자기에게 스스로 죽는 능력(그것은 건강의 마지막 표출이다)이 있다고 하는 신념을 상실하였고, 전문가에 의해 살해되는 권리를 중요한 문제로 만들어 왔다 

니체도 자유죽음, 내가 선택하여 죽을 권리를 말했고 난 동의한다. 얼마전 프랑스 노부부가 안락사의 합법화를 요구하며 동반 자살한 기사도 떠올랐다. 인간세상 한번 태어나서 백년도 못 살고 죽는데 산다는 게 어째 삶에 대한 전반적인 통제권을 빼앗긴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병원이 한 몫하고 있었다. 죽음을 관장하는 유일한 곳이 되어버렸으니까.   

* 과로사회, 노동자의 건강검진은 필수  

언젠가 가정의학과 명의를 취재 갔을 때 그가 물었다. “우리나라 남성들이 당뇨, 고혈압, 암 같은 성인병이 왜 많은 줄 아세요?” 나는 , 담배가 과해서요.”라고 했더니 아니란다. “과식이라고 했고 과식의 이유는 과중한 업무 부담에 따른 스트레스라고 했다. 술담배보다 과식이 더 안 좋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많이 하고 일을 많이 해서 병에 걸리고 병에 걸리면 병원에 와서 돈을 다 갖다 주면 이게 전태일이 말한 밑지는 생명아닌가? 그 뒤로 세브란스, 서울대병원, 이대병원 같은 초대형 병원은 물론이고 거리에 꽉 들어찬 무슨 크고 작은 의원들을 보면 자본주의와 공모해서 살아가는 거대한 기계 시스템으로 보였다.

이반일리히도 '조기진단의 실시'를 꼬집는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계이고 자주 수리 공장에 가지 않으면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하는 신앙을 강요받는다."(107) 병을 앓지 않는 사람들은 장래의 건강을 위하여 전문적 치료에 의존하게 되었다. 산업의 확대 단계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비정상이고 치료를 필요로 하는 자라고 정의되고 만다. 모든 사람들이 어떤 점에서는 병자의 경향을 보여주는 현재에 있어 임금노동은 치료적 특징을 획득한다. 평생 동안의 건강교육, 카운슬링이나 건강진단, 건강 유지는 공장이나 사무실의 일상 업무에 포함되어 있다. 시민으로서 정치적으로 성장되어간 인류는 이제 평생을 산업화 세계에 거주하는 자로서 훈련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산업화 사회의 의료화는 그 제국주의적 성격을 궁극적으로 성취하고 있다. (136)

아이들은 공부하느라, 어른들은 일하느라 고달프다. 치과나 내과 등 동네병원은 대부분 야간진료를 하고, 12시에도 치킨을 배달해주는 곳이 있고, 맥도날드와 커피전문점이 24시간 운영된다. 그렇게 과로 구조로 세팅된 사회는 구성원이 모두 다 병원의 잠재 고객이 될 수밖에 없다. 회사에 영혼을 저당 잡히고 살다가 죽을 때는 병원에 저당 잡힌다. 그 생각을 하면 얼마나 구슬픈지 모른다. 학교와 군대는 자본주의 신체에 적응하는 노동자를 양성하고 병원은 노동자를 수선하고 관리하면서 유지되는 피로사회다. 우리가 초과노동을 하는 임도농자 신분의 궤도에서 벗어난다면, 즉 적게 벌어서 적게 먹고 인간다운 삶의 속도로 살아간다면 병원에 가는 일이 줄어들까.

이반일리히 책을 보면서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나는 고민한다. 보험공단에서 12월말까지 건강검진 하라는 문서가 와 있다. 또 동네 산부인과에서는 자궁암 위험 바이러스가 있다면서 더 자주 해야한다고 3개월마다 정기검진을 하라는 문자가 온다. 난 지금 몸도 안 아픈데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의사도 그랬다. 바이러스가 암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사라질 수도 있다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는 거라고. 예방이 목적인 것이다. 근데 병원가서 내진하면 스트레스 지수 올라가서 바이러스 다시 생길 것 같다. 병원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는 진료비도 비싸지만 회사에 들어가기 싫은 이유랑 비슷하다. 저 병원이라는 설국열차에 올라타야 하는가 싶어서다. 

 

 

신고

삶이 다소 견딜만해진다는 것

[글쓰기의 최전선]

11월 15일 합정동에서 작은 북토크쇼가 열렸다. 지난5개월 성폭력피해여성들과 글쓰기수업 하면서 쓴 글을 모은 문집의 발표회 자리다. 제목은 <굿바이 회전목마>. 성폭력이 반복되는 현실, 고통이 영원회귀 하는 상태와 굿바이 하자는 의미가 담겼다. 참가자들에게 공모해서 뽑힌 제목이고, 표지디자인도 디자이너로 일하는 참여자의 손끝에서 태어났다. 

 

과정이 쉽지 않았다. 어떤 글을 실을 것인가, 누가 참가할 것인가, 글의 제목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낭독할 분량과 내용은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결정과 선택의 순간이 회전목마처럼 돌아와서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버겁고 막막한 상황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조율하고 이해하고 행하면서 한 고비 한 고비 넘겼다. 비교적 효율과 성과 위주로 살아온 삶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나의 감각은 전면 새롭게 세팅되어야 했다. 내가 어디까지 타인과 수용하고 변화하면서도 조응할 수 있는가, 시도하는 좋은 배움의 과정이었다. 함께 한 참가자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우리는 흔들리면서 주저앉았다가 털고 일어났다가 더듬더듬 왔고, 회전목마를 떠나보냈다.

 

마지막에 발표자들이 그간의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최연소 열세살 참가자 유정이가 했던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처음에는 나오기 싫었고 지루했는데 좋은 이모들(ㅋ) 만나서 재밌어졌다는 뜻의 말을 하면서 "제가 겪은 일이 큰 일인 거 같기도 하지만 아무 일 아닌 거 같기도 하다"고 했다. 나는 이것이 당사자가 말할 수 있는 가장 진실에 근접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고통을 해석하는 다른 하나의 관점을 더 얻었으니, 그걸로 고마운 거다.

 

 

 

 

프롤로그: 글쓰기 워크샵을 마치며

삶이 다소 견딜만해진다는 것

 

내가 성폭력피해경험자들과 글쓰기 수업을 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가 피해경험이 없는데 그들과 같이 수업할 수 있을까?” 하나같이 당연히 내가 성폭력 경험이 없다는 전제 하에 얘기했다. 없을 수도 있고 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나 역시 그랬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여성들에게서 성폭력 피해의 가능성은 한 번도 떠올려본 적이 없다. 성폭력 피해자는 언론에나 나오는 이들로 타자화 하고는 당연히 지금-여기에는 없는 듯이 행동했다. (마치 모든 사람이 대학을 다녔음을 전제하고 초면부터 학번과 전공을 묻는 사람들처럼) 그런데 여기저기서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관계가 깊어지면서 여성이기에 겪어야하는 아프고 내밀한 피해경험을 몇 차례 들을 수 있었다.

 

언젠가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하는 친구가 말해주었다. 통계에 잡히지 않아서 그렇지 여성의 40%는 성폭력을 경험한다고. 그래서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펴낸 '성폭력피해자를 위한 DIY가이드'북 제목이 <보통의 경험>이라고 했다. “네가 수업을 하든지 모임을 가든지 그 무리에서 최소한 두 명은 있다고 생각하면 돼.” 친구의 말을 듣고는, 그간 나도 모르는 사이 뱉었을 서툰 말들을 생각하니 뜨끔했다. TV나 뉴스에 선정적으로 보도되는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 에휴, 저 아이 (혹은 저 여자)는 이제 어떻게 살까.” 속상하다며 무심코 한 마디씩 간섭을 하는데, 그 말이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는, 현재진행형 일상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성폭력피해자에게 비수가 되어 꽂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통이 만연한 세상이다. 무지는, 아니 알려고 하지 않음은, 분명 죄다. 그런데 나는 사회문제에 관심이 큰 편이다. ‘노동자의 고통’ ‘88만원 세대의 고통’ ‘여성의 고통은 그런대로 학습이 되었는데 왜 이렇게 성폭력피해자에 대해 무지할까 생각해보았다. 그와 관련해서는 거의 정보를 접할 기회가, 특히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성폭력피해 당사자가 주어로 된 기사조차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관련 기사는 대부분 가해자 중심의 보도가 나간다. ‘서울 어디에 사는 김 모 교수는 제자를 수차례 성폭행했다는 식이다. 순결이데올로기 같은 사회적 편견, 너무도 사적 영역인 몸에 각인된 수치심 등 때문에 피해자는 죄인처럼 어디에다 말 못하고 이중 삼중의 고통과 소외를 당하는 게 성폭력 사건이었다. 미디어에서 통제 혹은 밀봉된 당사자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당사자가 아프지만 당당하게 세상에 목소리를 내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나는 성폭력피해경험자의 글쓰기를 같이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약자는 달리 약자가 아니다. 자기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할 때 누구나 약자가 된다. 노동자의 심정을 자본가가, 장애인의 입장을 비장애인이, 동성애자의 아픔을 이성애자가 대신 말하는 것은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고착시킬 뿐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의 고통, 성폭력 피해의 고통을 남성의 언어로 설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피해자의 언어가 필요하다. 자기 언어가 없으면 삶의 지분도 줄어든다. 피해경험자들과 같이 사건의 서사를 구성하고 아픔을 나누고 의미를 발견하면서 피해자의 언어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고통을 자기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을 때 2, 3차 피해의 가속화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글쓰기 수업이 진행됐다. 어떻게 무엇을 쓸지 글쓰기 방법론에 관해서 학습했다. 그리고 소설, 에세이, , 여성주의이론서 등 매주 정해진 한 권의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내용과 느낌을 돌아가면서 발표했다. 이 부분이 왜 좋으며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자신의 구체적 삶과 연결 지어 생각하고 말하는 기회를 가졌다. 인류 최대 비극인 아우슈비츠수용소의 생존자가 직접 쓴 르포르타주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으면서 우리는 인간의 존엄을 얘기했다. 아들이 쓴 엄마에 대한 기록문학인 <소망 없는 불행>을 읽으면서 우리 역시 엄마에 대한 글을 썼다. 고통에 대한 아름다운 응시를 담은 최승자의 시집 <이 시대의 사랑>을 읽으면서 고통을 들여다보고 언어로 길어 올리는 시간을 가졌다. 일상의 성정치학을 다룬 <페미니즘의 도전>을 보면서 여성으로서 피해자다움이라는 성 역할을 강요당한 사례, 나이듦, 모성 등에 관해 질펀한 수다를 떨었다.

 

이것은 해석의 힘을 길러주었다. 철학자 니체의 말대로 고통은 해석이다. 우리는 고통 그 자체를 앓는 게 아니라 해석된 고통을 앓는다. (성폭행을 당했으니) 여자 인생 끝이라는 해석, 여자가 행실이 부주의해서 생긴 일이라는 해석, 치욕스러운 일이니 입을 다물라는 해석 등등 난무하는 말들의 장대비까지 맞는다. 책을 읽고 더 사려 깊은 말들과 다양한 해석과 입장을 접하는 과정은 우리의 고통이 도대체 어디서 오고 왜 나를 아프게 하는지 더 침착하고 냉철하게 인식하는 기회와 말들, 피해자의 언어를 모을 수 있었다.

 

매주 읽고, 말하고, 생각하고, 썼다. 그 반복적 행위는 존재를 외부로 펼치고 안으로 다져주었다. 이것이 내공일까? 뭔지 모를 자존감과 돌파력이 점점 생긴 참가자들은 하나둘 자신의 속 이야기를 꺼냈다. 가족사를 쓰고, 피해경험을 쓰고, 일상의 곤란을 썼다. 삶을 교란 당했던 그 과거의 기억, 가슴 한 켠에 구겨 던져 버렸던 종이 뭉치를 다시 펴고 과거의 아픔을 정면으로 하나씩 응시하는 시간을 견디면서 A4용지 한두 장은 거뜬히 넘기는 이야기를 담아왔다. 그렇게 고통으로 뭉개졌던 시간은 가지런히 언어로 재배치되었다.

 

우리는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 자극을 받았다. 각자의 글을 자신의 목소리로 또박또박 읽어내고 눈물 흘리면서도 낭독을 포기하지 않았다. 몸이 기억하는 말은 밖으로 나오려하고 고통은 들어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다른 사람들은 온몸이 귀가 되어 들어주었다. 남의 이야기는 자기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거울이 되어주었다. 같은 성폭력 피해자로 만났지만 그 안에서 차이는 존재했다. 저마다 상황의 특수함, 사건의 각별함, 실존의 절실함을 그래도 서로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피해경험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선을 얻게 되는 것, 자신의 아픔으로 꽉 찼던 자아에 타인의 아픔을 들여놓게 된 것은 우리가 덤으로 얻은 고마운 선물이다. 우리 품은 넓어졌다. 자아가 확장되면 상대적으로 고통은 줄어들기 마련이니 일석이조다.

 

애초에 나는 내심 바랐다. 글쓰기 치유워크샵이 끝나고 나면 참가자도 나도 조금씩 달라져있기를.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이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정체성의 재확인이 아니라 다른 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가고 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희망했다.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나는 변했다. 끝내 몰랐으면 부끄러웠을 고통의 한 세계를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고맙고 귀한 시간을 살았다. 참가자들도 변했다. 눈빛, 표정, 발걸음, 사용하는 단어 같은 것들. “힘들 때면 맥없이 자거나 TV보거나 폭식을 했는데 이제는 책을 본다며 시간을 보낼 또 다른 오락거리가 생겼노라 말하고 글쓰기가 조각이랑 비슷하다며 창작의 희열을 수줍게 터놓는다. “우리 힘들었지만 이겨내고 잘 살아왔다며 서로의 존재를 쓰다듬고 칭찬한다. 우리는 책과 사람, 그리고 글쓰기라는 이전에는 없던 친구가 생겨 있었다. 삶이 다소 견딜만해진 것이다. 인생이라는 책에서 한 페이지만 찢어낼 수 없다면, 견디는 것도 삶의 좋은 방편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순도순의 힘으로 어제를 잘 살았듯이 우리는 오늘도, 살아갈 것이다.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꾸면서

 

2013. 10.은유 

 

 

 

신고

글쓰기의 최전선 8기 시작합니다

[글쓰기의 최전선]

글쓰기는 자신과의 대화입니다. 대화를 위해서는 생각과 표현을 담아낼 자기 언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책을 읽고 지식을 쌓아도 자기를 아는 것, 즉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자기 인식의 방편으로써 글쓰기는, 외국어를 공부하듯 새로운 언어 감각을 기르는 일입니다. 지속적인 동기 부여와 반복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글쓰기의 최전선’은 읽고 대화하고 쓰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사람은 곧 자신이 읽고 쓰는 것으로 정체성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에세이, 결코 사적인 문제일 수 없는 사랑과 가난에 관한 사회학적이고 섬세한 통찰의 글, 세상과 사물을 보는 감각을 길어낸 빼어난 시와 산문을 읽습니다. 책의 내용에 구체적 삶을 비추어 글 쓰는 일은, 나의 욕망과 능력을 알아가고 다른 내가 될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기본적인 글쓰기 방법론은 강의안으로 전달합니다.

 

 

 

일정 : 2014년 1월 4일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 6-9시까지, 총 14주

강사 : 은유 수유너머R ‘글쓰기의 최전선’ 외에 여기저기서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도시기획자들』, 『올드걸의 시집』 등이 있다.

반장 : 백납 (baeknab@gmail.com), OIO-З845-6칠칠З

정원 : 15명, 수업료 30만원 (계좌번호: IBK기업은행 272-028144-01-018 수유너머R)

신청 : 수유너머R 강좌게시판 -> 바로가기

 

 


 

 

< 수업 일정표 >

 

읽고 쓰기

1/4 올드걸의 시집 (은유, 청어람미디어)

1/11 침묵의 미래 (김애란, 문학사상)

1/18 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길)


사랑 가난

1/25 사랑은 왜 아픈가 (에바 일루즈, 돌베개)

2/1 설 연휴

2/8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문학과지성사)

2/15 가난한 사람들 (도스토예프스키, 열린책들)

2/22 * 중간 합평


젠더 계급

3/1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예문)

3/8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교양인)

3/15 경제학-철학 수고 (칼 마르크스, 이론과 실천)


예술 감각

3/22 화사집 (서정주, 문학동네)

3/29 이상 전집- 수필 (이상, 뿔)

4/5 그을린 예술 (심보선, 민음사)

4/12 * 졸업 엠티

 


신고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