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주 - 이백

[올드걸의시집]

君不見 군불견    그대는 보지 못 하였는가

黃河之水天上來 황하지수천상래    황하 강물은 하늘에서 내려와,

奔流到海不復廻 분류도해불부회   바삐 흘러 바다로 가서는 다시 못 옴을

又不見 우불견   또한, 보지 못하였는가?

高堂明鏡悲白髮 고당명경비백발   고당명경에 비친 백발의 슬픔

朝如靑絲暮如雪 조여청사모여설   아침에 검던 머리 저녁에 희었다지

人生得意須盡환 인생득의수진환   쁨이 있으면 마음껏 즐겨야지

莫使金樽空對月 막사금준공대월   금잔에 공연히 달빛만 채우려나

天生我材必有用 천생아재필유용    하늘이 준 재능은 쓰여질 날 있을 테고

千金散盡還復來 천금산진환부래   재물은 다 써져도 다시 돌아올 것을

烹羊宰牛且爲樂 팽양재우차위락   양은 삶고 소는 저며 즐겁게 놀아보세!

會須一飮三百杯 회수일음삼백배   술을 마시려면 삼백 잔은 마셔야지

岑夫子,丹丘生 잠부자,단구생   잠부자, 그리고 단구생이여

將進酒,君莫停 장진주,군막정   술을 마시게, 잔을 쉬지 마시게

與君歌一曲 여군가일곡  그대들 위해 노래 한 곡하리니

請君爲我側耳聽 청군위아측이청   모쪼록 내 노래를 들어주시게

鍾鼎玉帛不足貴 종정옥백부족귀   보배니 부귀가 무어 귀한가

但願長醉不願醒 단원장취불원성   그저 마냥 취해 깨고 싶지 않을 뿐

古來賢達皆寂莫 고래현달개적막   옛부터 현자 달인이 모두 적막하였거니와

惟有飮者留其名 유유음자유기명  다만, 마시는 자 이름을 남기리라.

陳王昔日宴平樂 진왕석일연평락   진왕은 평락전에 연회를 베풀고,

斗酒十千恣歡謔 두주십천자환학   한 말 술, 만금에 사 호탕하게 즐겼노라

主人何爲言少錢 주인하위언소전   주인인 내가 어찌 돈이 적다 말하겠나

且須沽酒對君酌 차수고주대군작   당장 술을 사와 그대들께 권하리라

五花馬,千金구 오화마,천금구   귀한 오색 말과 천금의 모피 옷을

呼兒將出換美酒 호아장출환미주   아이 시켜 좋은 술과 바꾸어오게 하여

與爾同銷萬古愁 여이동소만고수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시름을 녹이리라.


9월 둘째주 금요일. 씨네큐브에서 조조로 <우리 선희>를 봤다. 술집-거리-여관을 순회하는 홍상수 영화 장소의 룰을 벗어나지 않는 영화. 단, 이번영화에는 여관신이 없고 대신에 술집이 지루할 정도로 길게 오래 나온다. 주인공들이 소주 혹은 맥주를 컵에 따라 벌컥벌컥 마시다가 장면이 바뀌면 소주나 맥주 너댓병이 테이블을 채우곤 한다. 커다란 스크린에서 술병을 보는 것만으로도 취기가 오르는 특이한 현상은 홍상수 영화에서만 경험할 수 있다. 꼭 낮술을 마신 것처럼 어질하다. (태)양의 기운이 승할 때 알콜로 몸에 열이 오르면, 음양의 조화가 깨져 더 취하는 법이라고 들었다. 홍상수 영화의 낮술효과도 그래서 생기나보다. 태양만큼 센 스크린의 빛에, 주인공들의 쉴새 없는 말들에, 테이블의 술병에 취하지 아니할 수 없는 거다. 

여기서 핵심은 말들인데, 말들이 꽤 지리하고 지독하다. 이자리 저자리 이사람 저사람 사이를 떠돌면서 공회전 되는 말들은 겨우 봉합해 놓은 일상계를 툭 건든다. 체면이나 허위, 가상 같은 어떤 '척'으로 유지되는 일상계의 허술한 틈이 드러난고 할까. 존재를 이루는 것들 또한 어찌나 엉성한지. 나는 누구인지 말할 수 있을까, 난데 없는 질문에 빠져든다. 극장을 나와서 점심을 먹으면서 맥주 일병을 시켰다. "홍상수 영화 보면 괜히 찔리더라.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두나두" 그런 얘기를 나누면서 홀짝홀짝 마셨다. 우리는 대개 도덕적으로 단죄할 만한 사건을 저지르고 살지는 않지만 개운치 않는 일들과 말들은 많이 양산하면서 산다. 그건 일종의 앙큼함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엉뚱한 욕심을 부리거나 깜찍하게 분수에 넘치는 데가 있다는 뜻. '앙큼하다'의 수위와 빈도조절이 안 되면 곤란하니까, 자기를 타자화할 수 있는 홍상수를 주기적으로 봐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러 <생활의 발견>의 명대사를 떠올린다. "우리 사람되는 거 힘들어. 힘들지만 우리 괴물은 되지 말자."

밥 먹고 나오니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후드득 떨어진다. 원래는 연구실에 정수샘한테 영어과외 받으러 간다고 했는데, 문득 내가 너무 열심히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될 일이다. 문필하청업으로 맡은 일이 있는데 여름 내내 원고 붙들고 씨름하다가 전날 초고를 넘겼던 참이다. 아주 그냥, 좀, 지긋지긋했다. 일하고 공부하고 밥하고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놀고 싶어졌다. 충동적 인간답게 결심했다. 예전에 일하던 사무실에 놀러가야지. 처마 끝에서 비 떨어지는 소리 들으면 낮술 한 잔 더 해야지. 주간님한테 문자했더니 "막걸리랑 양상추가 입장료"라고 답이 왔다. 친근한 체부동 골목길을 구불구불 통과해 사무실에 갔다. 주간님 지인도 "비가 와서 마음이 동했다"며 술 한잔 하러 와 있었다. 같이 논어공부모임 하는 '김선생님'이라고 한다. 우연한 회동. 주간님은 전날 시청앞 팔도장터에서 산 멍게젓과 양상추, 두부부침, 김치전을 빛의 속도로 내오셨다. 주간님, 김선생님, 나, 후배. 넷이서 푸짐한 안주를 놓고 막걸리를 마셨다. 흥취가 오르자 김선생님이 '적벽부'를 원문 암송하셨다. 그 장강처럼 긴 시를. 요상야릇한 중국어 발음. 처음엔 웃겼다가 나중엔 뭉클했다. 다시 한국말로 번역해서 읊어주셨기 때문이다. 

시가 시의 꼬리를 물었다. 전날 글쓰기수업에서 '이성복'시 암송대회를 했는데 나는 그 때 읽은 시를 낭독했다. 김춘수의 시 '품을 줄이게'와 '소년' 서정주와 두보와 이백의 시를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검색해가면서 낭독했다. 바비킴의 노래를 듣다가 아그네스 발차의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도 듣고 김수철의 못다핀 꽃 한송이도 들었다. 풍류의 치달음. 나는 저녁에 약속이 있던 친구를 사무실로 불렀다. "너도 그냥 여기 와서 같이 놀자." 늦게 합류한 친구가 자기를 소개한다. "저는 페미니스트예요." 하하. 생뚱맞고 웃겼다. 그 페미니스트는 대낮부터 술마신 우리와 '흥트러블'이 생길까봐 독주를 복용해가면서 진도를 맞추고 같이 막걸리를 마시며 흥취를 누렸다. 김선생님이 이번에는 이백의 '장진주'를 원문과-한글로 낭독해주셨다. '마신다면 모름지기 삼백잔이지'라는 문장에 우리는 감동했다. 그 장대한 스케일의 미학. 홍상수 영화의 술병은 기껏해야 삼십잔 일텐데, 술도 아니구나 싶었다. 김선생님은 조선이 오백년을 간 이유는 풍류를 즐겼기 때문이라며, 삶에서 풍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새 낮이 밤으로 바뀌고 비는 그쳤다. 혈관에 막걸리가 흐르는 것 같았다. 사무실을 나와 골목을 도니, 이상의 '제비다방'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돈가스살롱'이 생겼다. 아뿔싸. 그 자리는 이상의 생가인데 그걸 유지하지 못하고 흔해 빠진 돈가스집에 자리를 내어주었을까. 잡식성 자본주의. 탐욕스런 자본주의에 화가 났다. 시인 이상은 인간에 대해 누설하는 시를 쓴 몇 안 되는 귀한 시인인데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이리도 홀대를 받는다. 자본주의와 시적인 삶은 상극일까. 속상한 노릇이다. 주간님이 술자리에서 예전부터 꼭 내고싶었던 책이 있다고 했다. 체사레 파베세의 일기<삶이라는 직업>이다. 자기평가와 자기심문의 기나긴 연재물로 꼽히는 명저다. 내가 애정하는 책 <거대한 고독>(나중에 알고 보니 주간님이 현대문학에 있을 때 만든 책이었다)을 읽으면서 나도 그 책이 꼭 갖고 싶었는데 아직 국내에는 출판된 게 없었다. 주간님도 자본주의에 어울리는 인간형이 아니라 지성, 풍류, 감각 다 되는데 돈이 없다. 아니, 징하게도 돈 안 되는 책만 원한다. 한옥에서 음악 듣고 시 읊고 술 마실 때는 좋았는데 문밖으로 나오니까 흥이 스르르 깬다. 내남없고 안팎없는 풍류의 순환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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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올드걸의시집]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시집, 문학과지성사

 

 

가을맞이 영어세미나를 시작했다. 푸코의 마지막 저서가 된 <진실의 용기>다. 강연록이라 구문이 어렵진 않다. 단어가 생소하지. 그 말에 속아서 용기를 내보았다. 세 번 세미나를 참여한 소감은 괴롭다는 것. 부끄럽다는 것. 어렵다는 것. 단어 찾느라 몇 시간이 후딱 가버리고 한줄한줄 내 분량을 발표하면서 버벅거릴 때는 시간이 더디 흐르고 고개가 자꾸 수그러진다. 누구와도 눈 마주치고 싶지 않다. 오죽하면 정수샘이 그런다. 평소 나답지 않게 왜 이렇게 바짝 얼었느냐고. 안 얼게 생겼느냐고 했다. 영어를 자그만치 23년 만에 들춰보는 마당인데. 몹시 기분이 얄궂다. 생각해보니 내가 뭘 못하는 사람으로 어떤 자리에 놓인 게 참 오랜만이었다. 

 

니체 공부할 때도 막막하긴 했지만 모국어라서 두렵진 않았다. 제도교육도 그럭저럭 통과했고 회사생활도 하나하나 배워갔고 가사노동도 얼렁뚱땅 처리했다. 탁월한 요소도 없었지만 취약한 부분도 없이 살았다. 어른이 되면, 자신에게 불리한 입지는 선택적으로 피할 수 있다. 근데 난 지금 무리수를 두었다. 자발적으로 영어천민의 자리를 점했고, 견딘다. "인식에 이르는 길에 그 많은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없다면 인식의 매력은 적을 것이다"라는 니체의 말을 스스로 주입하면서 마음 다잡는다. 인식의 매력. 푸코가 던지는 사유의 말들이 아련하지만 복음처럼 다가온다. 첫 시간엔 그런 상상을 했다. 현재 상태 매우 엉망이나 한 십년 원서 붙들고 헤매고 배우면 나중에는 번역도 해보고 싶다고. 어떤 구체성도 없는 무근거한 바람이다.

 

나는 행하는 자로 산다. 금단의 땅에서 열매 구하겠다고 내동 서성인다. 이건 자기계발 담론이 부추기는 열정은 아니고 억척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불가피하다고 여길 뿐. 일부러 거러는 건 아니고 그렇게 살게 된다. 왜 그럴까. 나도 내가 궁금하여 생각해 보았다. 재작년인가. 사주명리학을 공부한 친구가 점을 봐줬다. 내가 자수성가형 인물이라고. (만세력으로 점 칠 때도 꼭 나왔던 점괘다. 부모덕이 없는 팔자라고) 그래서 공부를 해가면서 살아야한다, 지금 잘하고 있는 거라고 했다. 인간은 단독자로 살 수 없다는 건 알겠다. 사람의 후원이 없으면 책의 지원으로 살아야한다는 건가. 셀프돌봄 하라는 뜻으로 접수했다. 그런데 말이 쉽지. 물적 토대가 갖춰진 중산층 지식인 여성처럼 책만 파고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싱크대와 노트북과 밥벌이와 두아이를 오가며 틈틈이 공부하는 일은 진척도 느리고 몸뚱이도 축난다. 살기 위한 본능이 아니라면, 이 고난의 길을 왜 굳이 누가 택할까. 그런데 시련중독이 되었는지 어쩌자고 책상 앞에서가 가장 좋다.  

 

최승자는 이십대에 벼락같은 시를 써놓고 홀연 사라졌다. 행하지 않는 자로 살았다. "나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무위를 위하던 바틀비처럼 그랬다. 초월적 세계를 탐문하다가 죽기 직전까지 말라갔다. 재작년에 나온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을 시세미나에서 읽었다. '쉬임 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간다/ 시도 담배도 맛이 없다/ 세월이 하 짧아/ 시 한 편, 담배 한 대에 한 인생이 흘러간다'(<잠시 빛났던>) 정신병동에서 쓴 시들도 몇 편 있다. 시시한 삶에 발 딛은 나처럼 '책상 앞에서가 내 인생의/ 가장 큰 천국이었음을 깨닫는다'(<책상 앞에서>)고 고백한다.  한장 두장 넘기다보면 더듬더듬 흘러가는 시간들에 젖어든다. 그곳은 다른 세계다. 청송교도소처럼, 쉽게 볼 수 없고 접근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다른 세계다. 자본의 질서로 돌아가는 복닥거림에 벗어나거나 등지거나. 장애가 있어서든 의욕이 없어서든. 행하지 않으며 사는 사람들의 나라가 있다. '말하지 않아도 없는 것은 아니다'  삶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 영어 원서를 파는 것보다 덜 사는 것은 아닐 터다. 자연을 찬미하고 사색에 잠기는 가을만이 아니라 개 같고 매독같은 가을이 있듯이. 이 세상에는 지구본처럼 돌려볼 수 없는 '한 세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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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무진기행_과제 리뷰

[글쓰기의 최전선]

# 김승옥, 무진기행

 

무진으로 가야겠다. 책을 읽고 그곳으로 가고 싶어진 최초의 경험이 <무진기행>이예요. 반도의 땅 끝 어디쯤에서 일박이일쯤 헤매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요. 강력한 끌림. 어떤 힘이 등 떠미는 대로 충동적으로 미친 척 살아보길 갈망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제 모습은, <무진기행>의 재현이자 복습이기도 합니다. 편지의 세계를 동경하면서도 전보의 세계에서 호출당하면 당장 서울행 버스에 올라타는 남자처럼, 무기력합니다. 대부분 그러고 살아갑니다.

 

 

모든 훌륭한 문학이 그렇듯이 <야행>도 삶의 아이러니를 다룹니다. 아이러니의 뜻은 의도와 결과 사이의 어긋남이죠. 그 어긋남을 양산하는 시스템이 도시고요. 도회인의 삶이란 자기보존을 위해서는 자기포기의 법칙으로 살아야합니다. <야행>의 여자도 다르지 않았지요. 거대한 연극처럼 변질된 은행원의 삶. 속물성과 무기력에 사로잡힌 옹색한 존재들.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만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현실. 샌들 밖으로 삐져나온 먼지 묻은 발가락을 보고서야 여자는 자신의 존재가 오염되었음을 자각합니다. ‘존재에의 용기를 부려보지만 이 또한 녹록치 않습니다.

 

무진은 모든 혼란과 고통을 씻어주고 품어주는 모성의 공간으로서 고향이 아니라 혼란과 고통을 확인하는 산업화의 공간이죠. 무진은 목가적인 시골이 아닙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의 욕망도 서울을 향합니다. “서투르게도회화 되어버렸지요. 어느 평론가가 말했습니다. “<무진기행>은 서울로의 귀경을 위한 소설이지 무진으로서의 귀향을 위한 소설이 아니다.” 김승옥은 냉정합니다. 고향에 돌아가 홀연히 깨닫고 뉘우치고 자기를 극복하고 창조하는 영웅담으로 위로하는 게 아니라 일상과 타협하고 돌아가는 슬픈 도회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더 흔들어버립니다.

 

 

고통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이다. 드러내는 것이 유일한 해결하는 방안이라고 할 때, 그런 맥락에서 저는 김승옥을 읽습니다. 잘 드러내 주니까요. 그 책을 거울 삼아 삶을 비추어 봅니다. 자기가 어떻게 불행에 도달했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불행을 벗어날 수 있다고 했죠. 좋은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삶의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고 그 과정을 통해 자기 삶을 이론화하는 과정을 해나가는 것에 글쓰기의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먼저 편지를 쓴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현실에서 누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준다면 사랑에 빠질 것도 같다는 헛된 망상도 합니다. "아마 선생님처럼 외로운 사람이었겠죠.” 라는 슬픈 도회의 어법으로 답할 수 있도록 감성을 활성화 시키고 살아야지 다짐도 하고요.

 

 

# 욕망

 

과제 키워드 욕망입니다. 욕망은 언어와 관련이 있습니다. 라캉 공부할 때, 주로 예로 드는 것이 아이들의 투정이죠. 아이들이 칭얼거리는 것은 욕구()와 요구() 사이에 틈이 있기 때문이며 이 틈, 잉여가 욕망이라는 거죠. 아이들은 가끔 뭐가 못마땅한지 생떼를 쓸 때가 있습니다. 자동차도 아니다, 뽀로로도 아니다, 과자도 아니다, 무조건 울고 칭얼대면 해결 불가능하죠. 어른의 세계도 다르지 않습니다. 서울도 아니고 무진도 아니다, 샤넬도 아니고 구찌도 아니다, 코성형도 아니고 지방흡입도 아니다. 여튼 욕망은 욕망 자체만을 추구할 뿐입니다. 배고픔의 욕구 같이 물질적인 것, 육체적인 것은 충족되지만 그러고도 남는 것. 이미지, 기표가 욕망입니다. 욕망은 항상 그 너머를 향해 투신합니다.

 

 

라캉이 욕망을 결핍의 기제로 본 것과 달리 들뢰즈는 생성의 기제로 봤습니다. 생산하는 욕망. 저는 들뢰즈의 해석이 맘에 듭니다. 욕망을 없앨 수 없다면 욕망, 그 생의 충동을 잘 가꾸어서 자기배려의 기술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욕망을 갖는 것도 기술입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그랬죠. “오늘날 가능한 것은 금지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유혹에 대한 거절일 것이다. 이제 권력은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고 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온갖 욕망이 난립하는 이 시대에 자기파괴가 아니라 자기배려의 욕망을 갖는다는 것은 필시 어려운 삶의 기예겠지요. 삶의 에너지로써의 욕망에 대해, 김승옥 소설 <야행> 버전으로 존재에의 용기로서 욕망에 대해 같이 읽고 글을 써보고자 했습니다.

 

<구카>

- 본인이 알지 못하는 어느 새, 욕망을 거세당한 사람들. 행복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도 없으면서, 그저 타성적으로 '행복'을 원하는 사람들.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가지고 싶고 왜 해야 하는가를 모르는 채로 사는 것이 어쩌면 그토록 원하는 '행복하게 사는 법'일 것이다.

* 직장 상사 얘기, 일필휘지로 썼네요. 역시 가까이서 오래 관찰한 대상은 좋은 글감이 됩니다. 뒷담화든 예찬이든요. 글이 사례가 풍부하여 생생하고 해석도 곁들여 술술 읽힙니다. 직장 상사를 보면서 나도 10년 후면 저렇게 되겠구나싶어 퇴사했다는 사람도 꽤 있더라고요. 중년남 뿡뿡이가 촉발한 구카님의 자기성찰과도 이야기가 연결되면 글이 더 완결성 있겠네요.

 

 

<신홍엽>

- 그래서 최대한 늦게 아주 늦게 오줌보가 터지기 직전까지 안 일어난다. 아니 내일의 아침이 온 것이 또 그 아침에 내가 눈을 뜬 것이, 그 아침에 오줌보에 오줌이 끝까지 차는 것이 너무 싫었다.

* 시댁살이에 관한 아주 찰진 묘사입니다. 거침없는 입담이 육성지원 되는 듯 글이 살아있어요. 이것은 판소리의 힘?! 시리즈로 한번 써보세요. 홍엽님 내장된 리듬만 잘 불러내도 사설시조처럼 구수한 글이 될 듯합니다. 어떤 상황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후련함을 경험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자신이 주체적으로 그 정황을 묘사하고 판단하고 해석할 수 있음 그 자체가 엄청난 권력 감정을 선사합니다. , 냉정을 되찾으면 자신의 허물도 보이고요. 그게 글쓰기의 쾌감이자 미덕이겠죠. 대화체는 핵심적인 대화(야마)에 쓰면 더 효과적입니다. 글을 한바탕 쓰고 자꾸 읽으면서 다듬어 보세요. 세공의 단계를 거치면 글이 훨씬 매끈해집니다.

 

 

 

<맑음>

- 지루해. 사람들은 왜 이런 지루한 만남들을 의미도 없이 자꾸 만들어내는 걸까? 나와의 만남이 반갑지도 않으면서 왜 반가운 듯 가장하는 걸까.

- 혼탁한 머리로 찌푸린 아침을 맞이한 지 벌써 오래였지만 그 날만은 달랐다. 그에게 얘길 하며 나는 엉엉 울었다. 내 서러운 울음을 위로하며 P의 눈에 어리던 질투.

- 검붉게 휘어치는 사나운 파도. 찐득한 검은 피의 향연. 나는 그의 눈이 상처 입은 맹수만큼 음산했다고 기억한다. 벌어진 상처에서 흐르던 피의 강렬함. 으르렁거리듯 낮게 포효하던 그의 목소리. 문득 깨닫는다, 이건 우연이 아니야. 우연일 리 없잖아. 우연은 이렇게까지 간절할 수 없어

 

 

* 지루한 모임인데 나가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심리묘사도 곁들이면 어떨까요. 그에게 자줏빛 원피스 그녀를 말하면서 엉엉 울기까지, 왜 그런 정념에 휩싸였는지 설득력이 약해요. 어떤 사건이나 심리를 보강 해주면 더 공감할 수 있겠죠. k와의 간절한 우연, 욕망에 대한 부분도 그렇고요. 글이 전체적으로 이중수식이 많아요. 형용사는 자제해야 효과가 있거든요.

 

 

혼탁한 머리로 찌푸린 아침보다는 혼탁한 머리로 아침을 맞는다.’가 낫습니다. 검붉은, 찐득한, , 상처, 맹수, 강렬함, 으르렁, 포효는 비슷한 계열의 말들이 한 단락에 우르르 쓰이는 건 피해야 됩니다. 또 짧은 글에 등장인물 - p, 정우, , 친구, 친구의 그녀(자줏빛 그녀), k이 많네요. 이들의 에피소드가 하나로 수렴되면서 내적인 필연성을 가져야 의미가 있죠. 좀 어려운 창작 단계인데 그것이 힘들면 처음에는 간소한 구도로 시작해보는 게 좋습니다. 글을 읽고 나서 한 여성의 은밀한 욕망을 엿보거나 공감하기에는 모호합니다. 감성 과잉의 말들을 제거하고 줄거리에 더 충실해 주세요. 맑음님 만의 고유한 정서와 필치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의지와 노력이 빛을 발하게요.

 

 

 

<베로>

- 이 모습은 마치 내가 남자같고 그와 나 사이에 형제애, 동지애만을 확신시켜 줄 것 같아 나의 넓은 가슴을 열어젖혀 보여줄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고 활짝 벌린 양 팔은 조용히 내려야겠습니다.

- 아이처럼 파고들어 그와 사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지긋이 그의 눈을 바라보겠습니다. 진실만을 이야기할 것 같은 하느님 같은 예수님 같은 전태일 같은 무섭도록 깊고 진지한 그의 눈을 바라보겠습니다.

* 간질간질 매우 간지러운 토막 글입니다. 이제 막 첫사랑에 빠진 여고생의 시 같이 귀여우면서도 언뜻 내공도 돋고요. ‘의 신상에 대해 비밀로 부쳐버리니 글이 시작하려다 마네요. 누굽니까? 베로님을 욕망의 용광로에 빠뜨린 그가.

 

 

 

<율마>

- 낯설다는 말은 매력적이라는 말과 거의 동일하다. 낯섦 속에는 항상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숨겨져 있다. 궁금하다. 나에게 낯섦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들이. 맛보지 못한 음식들,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 느껴보지 못한 감정들,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 그 모든 것들이 궁금하다.

- 그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 번지점프대 위에 올라와 있는 것 같다고. 번지점프대 위에 올랐을때에야 나는 그것이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 지난번 글에 비하면 줄거리 비중이 커서 힘 있게 변했습니다. 숨죽이면서 읽었네요. 글에서 자유로운 기운이 느껴져요. 같이 신나게 베네치아 다니고 기차에 무임승차 하고 번지점프대에서 떨다가 내려온 것 같아요. 베니치아 연애담과 번지점프 좌절담을 연결시켜 보세요. 그와의 얘기. 상황 변화와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님을 알게 된 사건을 공개해야 합니다.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세요. 문학은? 용기다!

 

 

 

<sd>

- 삶에 대한 설움과 아내에 대한 죄책감으로 열심히 살아도 사랑하는 아내하나 지켜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과 나약함을 비관하며 세상을 원망하는 울음이 나에게 와 닿았다.

-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사내의 삶을 생각하면서 세상이 변하고 세월이 좋아졌다지만, 지금도 저 사내와 같이 삶의 무게가 힘겨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을 떠올려 본다.

 

 

* 짧은 감상 잘 보았습니다. 하필 저 부분이 sd님 마음에 탁 걸린 건 왜 일까요. 자신의 무능과 나약함에 속상했던 기억 한 자락 더해서 써보세요. 그리고 지금도 저 사내처럼 삶의 무게로 자살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신문에 많이 나오니 기사를 인용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글쓰기는 자료 찾기라는 측면에서 노가다거든요. 그런저런 이야기를 덧붙이면 글이 점점 풍부해져가겠죠.

 

 

<매디>

- 쉽게 이분법으로 나누기 보다는 몸과 마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규칙과 규율에 얽매인다. 간혹 몸은 저급한 것으로 평가 받기도 한다. 특히 여성의 몸은 평가절하된다. ‘슬럿워크도 그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을 오히려 가둔다. 스스로를 믿기보다는 규칙을 믿게 되니 말이다. 질문조차 막아버리는 사상은 무언가 잘못되었다...욕망에 이끌려 만들어버리는 혼돈을 겁낸다. 하지만 욕망은 질서와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 몸을 단련하고, 땀을 내고, 손 끝과 발 끝까지 스스로를 움직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전에는 미쳐 몰랐다...몸이 조금 단련되면 춤도 배워보고 싶다. 말 이상의 언어를 알아보고 싶다.

 

 

* 욕망을 일깨운 몸에 대한 글. 다른 내가 될 가능성을 모색하고 시도하고 이뤄가는 모습, 매디다워요. 위의 몸과 마음의 이분법에 대한 해석은 좀 헐거워요. 여성, 이데올로기, 규칙, 질문, 사상, 질서... 등 사용한 단어의 뜻이 너무 넓어서 그래요. 촘촘하게 몸을 하대했던 직간접 경험이나 정보를 인용해주면 낫겠어요. 손끝 발끝 움직임의 어려움에 대한 묘사와 말 이상의 언어로 춤을 정의내린 마무리는 참 좋네요.

 

 

<김현미>

- 새벽녘 기운은 잠결에도 이불을 찾게 만든다. 계절은 서로에게 요구하지 않고 제 몫 만큼씩만 변한다.

 

 

- 사실 나는 사람을 살피는데 있어 섬세하지 못하다. 아니 차라리 무디다. 천성인지 내가 자라 온 환경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그래서 감수성이 섬세한 사람이 내게도 똑같이 섬세한 촉수를 내 놓으라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 계절은 서로에게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 멋집니다. 뒤의 이야기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되고요. 사람들은 서로에게 자신의 정서와 이성의 함량을 가질 것을 전제하고 요구하니까요. 현미님이 사람을 살피는 일이 무딘 것 같지 않아요. 폭발하지 않고 상대를 위해 참았으니까요. 다음에 계속... 써보세요.

 

 

 

 

<촘촘>

- 그날 하늘의 색을, 그날 구름의 모습을, 그날의 햇빛이 나에게 쏟아지던 순간을 기록했다. 빠르게 달리는 지하철에서 내가 포착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모든 순간에 대하여.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는 그런 기록을 나는 했다. 한 계절 안에서 같은 요일, 같은 시간, 늘 똑같이 정체되어 있는 풍경이지만 그것들은 모두 달랐다.

-"(오기 렌)는 세상의 어느 작은 한 모퉁이에 자신을 심고 자신이 선택한 자신만의 공간을 지킴으로써 그 모퉁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일을 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안은 말한다. "그건 얘기가 됩니다. 그 사실은 완전히 김 형의 소유입니다." 어쩌면 그것들은 1964년 겨울의 서울에서 그들이, 2011년 겨울의 서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행동이었을 지도 모른다.

 

 

* 은재의 스케치, 오기렌의 사진작업, 안과 김의 대화. 시공간은 다르지만 공통적인 무엇을 잘 추려냈네요. 풍부한 독서경험을 연결 지어 은재만 쓸 수 있는 글을 썼네요. 진한 여운이 남아요. 나도 어떤 장소가 눈에 들면 그걸 그윽하게 반복적으로 응시해보고 싶다. 읽는 동안 그런 소유욕을 유발하니까, 좋은 글입니다. 고단한 알바생인 은재의 존재론적 허전함의 정보도 추가한다면 더 의미 있는 글이 될 듯.

 

 

<소리>

- 나의 욕구는 언제나 변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변치 않는 욕구도 있고, 변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욕구도 있다. 그리고 정제되지 않은, 충분히 탐색되지 않은, 비문으로 표현된 날 것의 것들도 있다.

- 이 시간 속에서, 우리 서로의 인생이 지나치는 이곳에서, 지금에만 만날 수 있는 당신들을 잃고 싶지 않아.

 

 

* 욕구의 목록표. 욕망의 집결지. 열거법으로 글을 쓰는 게, 생각을 밀고 나가고 구체화하는 데 훈련이 돼요. 좋은 시도에요. 근데 여기다 살을 붙여야겠죠. 스토리가 없고 목록만 있으면 차림표만 보고 음식 안 먹은 것처럼 허전해요. 또 왜 그리 많은 것을 욕망하는지도 설명이 되어야 저 욕구리스트가 저마다 빛날 거예요.

 

 

 

 

<푸른>

-몸이 살려달라고 발악을 하는 와중에도 내 머릿속은 수능으로 가득 차있었다...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눈을 감으면 다시 못 뜰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팔다리가 느려지고, 숨쉬는 것이 힘들어지고 심장박동이 점점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수능 시험장으로 가는 오르막길조차 거의 기어가다시피 올라가는 나의 다리 때문에, 교문 앞에서 선배들을 응원하다가 해골같은 나의 몰골을 보고 놀라는 후배들의 시선 때문에, 난방을 틀었음에도 불구하고 체온 조절이 되지 않아 필기구조차 겉옷으로 감싼 뒤 잡을 수밖에 없었던 나의 손 때문에, 웬만한 4점짜리 문제도 암산으로 풀어냈지만, 체중과 함께 줄어든 뇌 탓에 2점짜리 문제도 식을 써 내려가며 푸는 모습에 나는 눈물이 났다.

 

 

-내가 욕망을 품은 것인지, 욕망이 나를 품은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겉을 감싸고 있는 고차원적인 욕망을 지배하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나의 중심에 있는 본능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거식증에 걸리고, 죽음의 문턱에까지 가서 내가 느낀 것은 욕망의 상반된 두 가지 특성이다. 첫 번째는. 가장 힘든 욕망은 욕망을 포기하는 욕망이고, 두 번째는, 가장 강한 욕망은 삶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이다. 죽기 바로 직전의 순간에 욕망으로 인해 모두 타버리고 눈물로 모든 것을 게워내고 나서 내 안에 남은 하나는 살고 싶다는 욕망이었고, 이 욕망만큼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나는 욕망에 있어서 피해자인 동시에 수혜자이다.

 

 

* 삶으로 써내려간 글. 고유한 경험이라고 하기엔 무서운 경험이지만 이렇게 글로 재구성할 수 있으니 푸른씨 말대로 이제 슬프지 않아요가 됐네요. 욕망의 기원을 더 넣어주세요. 자신을 낳고 유학을 떠난 엄마, 이성적이고 바쁜 아빠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내용, 푸른씨가 느낀 눈빛의 변화가 들어가야 죽기 직전까지몰고 간 욕망에 또다시 휘말리지 않을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잘못 산 시간은 없다.’ 고통의 자산화. 지금 글도 좋지만, 예민한 촉수로 계속 사유하고 관찰하고 기록한다면 앞으로 글은 더 좋아질 거예요. 푸른씨 눈망울처럼 깊고 그렁그렁한 글 기대합니다.

 

 

<벌꿀>

-난 길을 잃어버릴 땐 오줌이 마려워요. 그걸 뭐라고 해요? 어른 말로 뭐라고 말하죠?

글쎄...오금이 저린다? 아 맞아요. 그거 맞는 거 같아요.

-아이는 꼭 쿠키에서 떨어져 나간 쪼그라든 건포도나 백화점 주차장 구석에서 먼지 덩어리와 함께 발견되곤 하는 말라비틀어진 귀뚜라미나 술집에서 안주로 나오곤 하는 김 가루가 뿌려져 있는 반 토막 난 과자 따위처럼 보였다.

-아이가 빤히 쳐다보니 나도 빤히 쳐다보게 되었다. 아이의 얼굴은 너무 작고 하애서 꼭 중국산 면봉 대가리처럼 보였다. 아이는 조그만 손가락을 내밀어 내 뺨을 부드럽게 꾹 눌렀다. 마치 현관문 앞에서 벨을 누르듯이. 띵동.

-무당개구리와 마른 가죽 은행잎이 가득 들어찬 서랍장에 관한 작은 이야기를 만들어 보자. 나는 그 몰래 속삭인다. 흠뻑 젖은 새벽이 지나갔다. 무참히 연약하며 무심히 건강한 당신과 나는 오늘 아침, 설화석처럼 무사하다.

 

 

* 설화석. 흰빛의 작고 치밀한 알맹이들의 덩어리로 된 석고네요. 설화석은 왠지 벌꿀님 글에 쓰이기 위해 만들어진 석고 같아요. 빛깔이 단단하고 고와요. 모르는 단어를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글. 환상문학 같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하고. 저 서랍속의 등장인물들은 다 벌꿀님의 분신들인가요. 어지럽고 몽환적인 꿈을 몇 편 꾼 것 같이 이야기가 흩어져요. 내용은 모호하고 어떤 정서와 느낌에 휩싸인 채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그대로 멍하니 있듯이 저는 지금 그럽니다. 이런 글이 주제의식까지 드러나길 바라면 욕심을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제가 못 찾는 거 같기도 하고, 헷갈려요.^^

 

 

그 와중에 눈에 드는 걸 얘기하자면, 과자에서 튀어나온 건포도 비유는 완전 좋은데, 백화점 주차장 귀뚜라미는 정서가 갑자기 튀네요. 작고 오밀조밀한 서랍 이야기에 나오는 비유들에는 안 어울린다는 생각입니다.

 

 

<스말러>

-지금은 대부분 전업주부로 살아가고 있기에 일상 생활패턴을 놓고 보자면 지금의 나는 그들 보다 훨씬 넓은 공간을 이동하며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있다. 하지만, 인생 전체를 놓고 보자니 나는 그저 그런 높이로만 이루어진 밋밋하기 짝이 없는 단조로운 산길같다.

-내가 가진 것을 놓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랜 시간 쌓아놓은 경력, 그에 합당한 인정과 신뢰를 보여주는 직장. 어찌 보면 시간의 세례를 받아 저절로 얻어진 것들일 뿐.

-단지 직업을 바뀌고 삶의 공간이 달라졌다는 것으로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변화의 계기로 삼아 내가 지금까지 와는 다른 쓰임새로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 다른 삶을 욕망하는 글. 스말러님의 글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많이 착해요. 그게 미덕이면서 굴레예요. 글을 시간계열이나 감정계열로 정리하기보다 한 부분을 확대해서 더 치밀하게 파고들어가 보세요. 안정된 필력으로 더 깊은 이야기 끄집어낼 수 있어요. 글이 조금 더 질척하면 좋겠어요. 위의 글도 욕망이 주제인데 다른 사람 얘기 비중이 너무 커요. 내가 쥐고 있는 것들. 내가 가로지른 시공간들, 만나는 사람들, 직장에서 인정들, 밋밋함이 준 안정감들, 엄마와의 친밀한 관계들, 이대로 놓기엔 아까운 것들을 세세히 쓰면 자신의 상태와 욕망을 더 잘 알게 되겠죠.

 

그리고 직업을 바뀌고 장소가 바뀌면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해요. 시골에서 아이들과 지내면 유치원 교사 본능 외에 대지의 모신 본능 튀어나올지 누가 압니까. 다른 환경, 다른 관계는 다른 나를 불러냅니다. 스말러님 다른 삶 응원할게요.

 

 

 

<오지훈>

-머리부터 꼬리까지

온통 콜타르처럼 까만 개가

이 도시를 어슬렁거린다

드문드문 흰색털이 어릴 적 기억처럼

바람에 흩날린다

 

 

당신의 밀실만큼 검은 개 한 마리가 밤을 어슬렁거린다

우윳빛 보름달 밑으로 하얀 고래 한 마리가 지나가고

검은 개는 코를 킁킁 거리며

도시의 후미진 골목길을 어슬렁거린다

주홍색의 자지가 오늘 밤 쉬이 잠들지는 않겠다

 

 

*욕망과 검은 개의 묘사에 대한 연결고리. 제목이 뭔가 압도적입니다. 제목 그대로, 검은 개 처럼 돌아다니는 욕망을 엿본 기분입니다. 검은 개에게 드문드문 난 흰 털은 하얀 욕망을 가진 순수했던 어린 나의 모습인가요. 직접적인 연상 밖에 못하는 제가 밉네요. 분홍색 자지라는 비속어, 결정적 한마디가 시의 격을 높입니다.

 

 

<이슷트>

-물론 저도 노력은 때로 고귀한 것이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이들은 특별한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 세계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이란 고작 이런 종류가 아닐까 싶습니다. 노력의 결과라고 해봤자 최후에 노후에 저런 맨숀을 지어 12천이 없는 이들을 더 외진 곳으로 이사 가게 만들거나, 40만원이란 돈을 주고도 살만한 집을 구할 수 없게 만들어 말이 좋아 원룸인 단칸방에 처넣거나, 실 입주금 2,500만원이라 써 놓고 나머지 9,500만원은 대출로 묶어 은행에 노예로 내다 팔고는 자기의 노예 생활에서 탈출하는 정도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비슷한 일을 겪는 영화 주인공을 그날 하루 친구 삼기로 동병상련을 적극 실천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날 하루 친구가 된 그녀가 몸소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가 딛는 바닥은 치고 올라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허우적대면 허우적댈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진흙 바닥이란 것을요.

 

 

* 노력의 비천함, 희망의 잔인함. 등 밑바닥 삶에서 이뤄낸 통찰이 힘을 얻기에는 내용이 좀 산만하여 아쉽네요. 본인 지적대로 안 풀린 글입니다. 그래도 일단은 말이 되든 안 되든 기죽지 말고 어떤 이야기를 장황히 풀어내고 묘사하고 풀어내고 울컥하고 표현해요. 사유와 표현이 서로를 북돋는 글이 나올 가능성을 높이게. 모든 훌륭한 예술은 반복에서 폭발한다. 글쓰기도 예외 아님. 계속 쓰길.

 

 

 

<무재>

-3이 되니 모든 것이 한 꼭짓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 곳으로 권력의 새로운 중심이 모아졌다. 이 새로운 게임은 이미 시작되었고 진작부터 그 분위기가 수상했다.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성공이었는지 자본이었는지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열렬한 신자들은 또한 무지도 함께 섬기기 때문이다. 자신이 숭배하는 것에 대해 다 알고 있으면 숭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그 때 나는 문자를 상당히 남용했었다. 이렇다보니 다소 폐쇄적인 주제와 폐쇄적인 수단으로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져 왔던 것인데, 그만. 이제 과거 얘기는 그만하고 덮어두자.

 

 

*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치밀함, 지치지 않고 풀어내는 긴 호흡은 본받고 싶을 정도입니다. 글 쓰려면 엉덩이가 질겨야하는데 그 점에서 대합격. 전국 수석^^요즘 스피노자를 공부해서 그런지 글이 이과생의 글처럼 밀도 있고 증명과 분석으로 이뤄져 독특함이 있어요.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할 고유함도 칭찬. 이십대만 가능한 자의식과 열정 과잉의 글.

 

 

이 장점이 고스란히 단점이기도 하죠. 자신의 카오스를 갖고 있어야 별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니체도 그랬어요. 혼돈을 가질 수 있는 삐딱함과 단호함은 좋은데, 그걸 가감 없이 다 드러내니까 글이 혼란스러워요. 중간에 쉼표도 있어서 쉴 곳을 마련해주세요.

 

 

문장에 ’ ‘같은 지시대명사, ‘과 수동태가 많아요. 이것만 바로 잡으도 한결 글이 명료해질 거예요. 글 고치기 시간에 배웁니다. 무재는 기본 필력이 있으니까 다양한 경험을 통한 삶의 사례를 풍부하게 제시해준다면 더 재밌고 똑똑한 글이 되겠죠. 자고로 글에는 경험의 피가 돌아야합니다. 좋은 글의 요건은 경험, 관찰력, 상상력이라지요. 살고 사랑하고 배우고. 쉽게 타협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끝까지 밀고나간다면 좋은 글쟁이가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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