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최전선 9기 강사 인터뷰

[글쓰기의 최전선]

은유선생님과의 간단 서면 인터뷰 

 


1:

글쓰기의 최전선이 벌써 아홉번 째 기수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뭐에 하나 꾸준하기 쉽지 않은데, 

꾸준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어 진 것 같습니까?

(글쓰기 최전선 수업만이 가진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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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족 느낌? ^^ 고상한 말로 ‘공적 독서’, 그러니까 이야기의 난장이 펼쳐지는 것이다. 어제 한국에 온 일본 철학자 우츠다 타츠루씨 강연을 들으러 갔다. 그런얘길 하더라. 대가족 제도에서 살 때 어른들은 서로 저마다 다른 얘기를 했다. 엄마는 ‘이렇게 살아라’ 아빠는 ‘저렇게 살아라’ 삼촌, 할아버지 다 다르다. 그 혼란스러운 말들에서 아이는 ‘갈등’을 느끼고 풀면서 어른이 되었다. 대가족 제도에는 그게 가능했는데 지금은 가족이 해체되고, 욕망도 균질화 되었고, 아이가 갈등 상황에 노출이 안 되니까 성숙하지 않는다, 뭐 이런 요지였다.글쓰기의 최전선에는 다양한 책을 읽고 다양한 사람들이 글을 쓰고 같이 읽는다. 한번 쯤 치열한 자기 성찰을 거친 어른들(저자들), 이번 기수 같으면 ‘김수영’일테고,또 잘 살고 싶어서 방황하는 어른들(학인들). 그 말들, 경험들이 충돌하면서 ‘좋은 배움’이 일어나는 것 같다.      



2:

기존 글쓰기의 최전선에서는 다양한 분야, 여러 작가의 책을 읽어왔습니다. 강의 개요를 볼때 마다 꼼꼼한 요리사가 정갈하게 차려낸 식단을 마주하는 느낌. 글쓰기가 단번에 늘지 않아도, 책만 다 제대로 읽어도 배가 든든할 것 같은 기분. 그런데 이번에는 김수영 전집만을 읽는다.

뭔가 노림수가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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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한 작가의 삶에 깊이 빠져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시가 매우, 몹시, 읽고 싶었고 김수영이 그리웠다.

 



3:

왜 지금, 김수영을 함께 읽고 싶어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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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정신으로 살고 싶어서! 하하. 4월부터 직장을 다닌다. 책과 관련된 일이긴 하지만 묶인 생활이 좀 갑갑했다. 나를 잃고 살게 될까 걱정스럽고. 김수영은 밥벌이로 번역하고 글을 쓰는 생활을 고달파하는 산문을 많이 썼다. 이름을 팔고 글을 파는 매명, 매문을 치욕스럽게 생각하면서도 평생 했다. 생활난 때문에 아니할 수 없었는데,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무얼 하고 사는지는 명확히 인식했다. 나도 내가 무슨 일을 하면서 사는지는 인식하면서 살고 싶고, 김수영이라는처방이 절실했다. 나 같은 처방이 필요한 사람들, 대환영이다. ㅋ

 



4:

이번 글쓰기의 최전선 9기 수업의 제호는 " 자유와 사랑의 글쓰기"다. 예전 글쓰기 최전선 수업을 들었던 나에게 자유, 사랑 이란 단어 사용은 좀 의외입니다.

은유샘이 수강생들에게 글을  멀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대놓고 "큰 단어(추상적)"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선생님이 김수영에게서  자유-사랑- 글쓰기를 키워드로 뽑아낸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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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은 (남들처럼 욕망 하는 게 아니라) 본래적 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자유와 사랑이란 단어로 표현했다. 우리 자유롭게 살자고 주장한 시인이 아니라, 난 이럴 때 부자유스럽고 언제 자유로운지 예민하게 인식하고 자기 분석을 한 사람이다. 자유는 절대 보편적 개념일 수 없다. 실천형 동사다. 김수영 글에서 영감을 받고, 난 언제 자유롭고 언제 억압을 느끼는지 자기만의 자유,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를 각자 쓰게 될 것이다.   

 



5:

시는 말, 언어라는 것을 똘똘 뭉쳐 놓은 반죽을 (입시때는 이런 것을 시의 특징='함축적')  수제비 끓일 때 마냥 뚝뚝 끊어 던져 놓은 것 같이 느낍니다. 김수영은 좀 '읽히는 ' 시를 쓰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  김수영 전집을 살펴보니 전기의 시가 어려웠습니다. '외침'은 변함없는 정서인 듯한데.' 무엇'을 외치는지 도무지 들리지 않네요. 아마 다른 수강생도 마찬가지 일텐데, 전문적인 수준의 독해나 설명을 기대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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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각자의 삶-경험-감각으로 읽는 거다. 사유보다 느낌의 영역이다. 2년 동안 시 세미나 할 때도 내가 아는 시도 있고 모르는 시도 있었지만, 여럿이 읽으면 어떻게든 읽어졌다. 물론 강사니까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노력은 한다. 시를 읽고 산문을 읽을 것이다. 시인은 시로 만나는 게 가장 좋긴 하니까 먼저 읽는다. 한 사람의 생각의 변화, 삶의 풍경을 따라가면서 연대 순으로 읽고, 그것에 영감과 자극을 받고 자기 생각을 발전시켜 글을 쓸 것이다.

 



6:

우리들(수강생)이 미리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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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예습보다 복습이다.ㅋ 수업이 일요일이니 데이트 미리 해두기 정도. ^^  

 



5:

예전수업을 들으면서 선생님은 아무래도 잘쓴 글 보다는 좋은 글을 지향하는 것 같았습니다. 좋은 글 /잘 쓴 글 구분은 설명하기 애매하긴 하지만. 선생님이 생각하는 좋은 글, 글쓰기 최전선에서만 쓸 수 있고 배워나갈 수 있는 글은 어떤 글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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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배반하지 않은 글. 삶의 목적은 직업이 아니고 해탈도 아니다. 그냥 사는 거다. 지겨운 반복을 견디는 거다. 김수영은 시도 썼지만 번역도 했고 양계장도 했다. 이 세상이 엉망이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게 서러워서, 설움에 술 한사발 타마시고 방황했고 그 일상의 구질구질한 디테일, 자기모순을 낱낱이 글로 쓴 사람이다. 글쓰기의 최전선에서는 일단 나를 믿고 글을 써보는 정신, 김수영 식의 깡다구, 치열함, 뻔뻔함 그런 걸 배워갈 수 있다.

 



6

이번 9차시에서 가장 기대하는 바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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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신랄한 김수영 뒷담화. ㅋㅋ 누구나 글을 쓰고 누구나 책을 내는 시대가 과연 좋은 것인지는 논의해 봐야겠지만, 난 긍정적인 부분을 본다. 글쓰기가 자기 삶의 고유한 색깔과 깊이, 결을 만들어갈 수 있다. 일본이나 영미권에서는 전업으로 쓰는 순문학 작가가 아닌  생활인 작가가 많다. 우리도 그렇게 되는 추세다. 자기 삶의 경험이나 관심사, 사유를 잘 가꾸어 글로 쓰고, 그것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좀더 ‘공적’으로 이 세상에 환원하고 갈 수 있으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글쓰기의 최전선이 그걸 도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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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연-친족성폭력 첫수기 작가

[행복한인터뷰]

지옥 9년 기록 10년 작가 2년차, 난 평범해지고 있다

 

한겨레 박승화

 

 

딴사람, 참 좋은 말이다. 나는 이 말에 입을 맞춘다.

-김수영, ‘생활의 극복’ 중

 

휴일이면 종종 도심의 한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영어 공부 삼매경에 빠진다. 잠시 고개를 들어보면 자신처럼 다들 혼자서 꾸역꾸역 뭔가를 하고 있다. 한 층이 거의 비슷한 표정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그 개별적이면서도 집단적인 풍경이 새삼 놀라워 중얼거린다. “나는 너희와 다 얘기해보고 싶다. 혼자서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거니?”

그러는 당사자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서울 거주 30대 싱글 여성이다. 장마철 습한 공기를 머금은 바지통이 다리에 감기는 게 싫어서 반바지를 입었지만 책상물림 생활에 실해진 장딴지가 영 신경에 거슬린다. 젖은 머리 물기 탈탈 털어 고무줄로 짤막하게 동여매고 까만 안경테에 목에는 하얀 헤드셋을 걸치고 어깨에 멘 에코백에는 형광펜 그어진 영어교재가 한가득. 직장을 그만두고 ‘적금 깨서’ 영어학원에 다니는 중이다. 같은 학급 20대 초반 학생들은 남다른 열공과 연륜 포스를 내뿜는 그녀를 ‘골드미스’로 인식하나 자신들과 죽이 잘 맞다보니 언니 혹은 누나라고 부른다. 눈치 없는 젊은 강사가 그녀를 ‘이모님’이라고 칭하는 바람에 듣는 사람 발끈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늦깎이 유학 준비생의 고군분투. 한국 사회의 30대 여성치고 흔치 않은 일상을 산다. 그녀는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의 저자 은수연. ‘어느 성폭력 생존자의 빛나는 치유 일기’라는 부제를 달고 세상에 나온 그 책은 ‘인면수심’ 친부의 성폭력 실상을 가감 없이 묘사해 한국 사회에 충격을 던져주었고, 저자 은수연은 얼굴 없는 유명인이 되었다. 신문 및 TV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그림자 연극의 주인공처럼 실루엣 혹은 목소리만 드러났다. 그런 상황들이 성폭력 피해자는 어둡고 침울할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확인시켜주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매체 밖에서 만난 은수연씨는 들장미 캔디처럼 표정이 다채롭고 말투도 활달하다.

눈에서 살기가 빠진 유학 준비생

“제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성폭력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웃음)”

그녀의 10대는 더욱 평범치도 평탄치도 않았다. 아빠에게 9년간 성폭력과 가정폭력을 당한 아동 피해자로 살았다. 집을 뛰쳐나온 20대는 겹치기 출연 배우가 따로 없었다. 혼자 있을 때는 수치심과 두려움에 몸부림치는 성폭력 생존자로, 밖에서는 밝고 야무진 금순이 캐릭터로 오락가락 지냈다. 틈틈이 글을 썼고 30대 들어서 작가의 이름을 얻었다. 작가이거나 학생이거나, 일상을 두 가지 버전으로 산다. 어느새 평범과 비범을 자유로이 즐기는 생의 곡예사가 됐다. 주변에서 그녀의 변화를 느끼는 지점은 따로 있다.

“저를 20대부터 봐온 선생님이 그러더라고요. 그때에 비하면 눈에서 살기가 빠졌다고요. 제가 봐도 대학생 때 증명사진을 보면 눈이, 완전 무서워요. 하하.”

눈빛이 달라지는 것만큼 확실한 ‘딴사람’의 징표가 있을까. 이제 그녀는 선한 반달눈을 하고 하얀 치열이 다 보이도록 환하게 고개 젖혀 자주 웃는다. 카페에 서식하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까지 호기심이 발동할 정도로 오지랖이 넓어졌다. 증오와 원한과 울분이 스르르 빠져나간 마음자리에 웃음과 수다, 공감 같은 것이 속속 들어차고 있다.

은수연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했다. 가족치료를 공부할 때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사례를 참조했다. 이 가족의 문제점은 무엇이고 희생양은 누구인지 분석하고,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정리해 글로 썼다. 어떤 생각과 감정이 떠다니던 게 말로 나오고 말을 글로 정리하면서 개념이 잡혀갔다. 이게 아니었구나, 이게 이거였구나. 논거를 찾지 못했던 감정이 정리돼가는 기쁨이 컸다. 또한 세상 밖에 나와서 지내보니 자신은 여러 면에서 운이 좋은 편이었다. 아빠라는 사람이 이상했던 거고,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피해 사실을 숨기고 수치스러워했는데, 수치심을 오롯이 느껴야 하는 사람은 아빠였다. 성장기의 고통과 치욕의 상황을 논리적으로 풀어갈 수 있게 되자 조금씩 홀가분해졌다. 공부의 효능을 안 이상 중단할 순 없다. 더 하기로 했다.

“여성학을 할지 사회복지를 할지, 아직 고민이에요. 네가 세상과 소통하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게 뭐니, 스스로 묻고 있어요. 나 자신을 위해서도 공부가 필요한데, 내가 살아낸 삶에 대해서 그냥 악바리처럼 잘 살았어 이러는 게 아니고, 나의 감정 중에 뭐가 잘못됐는지 스스로에게 이해시키고 싶어요. 수치심이나 죄책감이 나를 붙잡고 있었던 시간이 꽤 길었으니까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내 몸이 붙잡고 있는 기억이 있어요. 공부해서 생각을 일깨우고 싶어요.”

9년의 폭력, 10년의 기록

은수연의 책이 나온 건 2012년 8월, 세상에 널리 알려진 건 그 다음달이었다. 매체의 영향력이 컸다. 특히 <한겨레> 9월16일치 ‘조국의 만남’ 코너에 지면을 통으로 할애한 은수연 인터뷰는 당시 큰 화제를 모았다.

“아마 월요일이었을 거예요. 기사가 나간 날 아침에 조국 교수님한테 문자가 왔어요. 조회 수가 100만 건이 넘었다고, 이 정도면 1년에 손꼽는 대박이라고 하더라며 제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인터뷰 분위기는 따뜻하고 편안했다. 눈물은 딱 한 번 흘렸는데 그 장면이 공교롭게 기사화됐다. 은수연은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과거를 새롭게 해석하고 의미화할 수 있었다. 집을 나온 뒤 가해자를 맞닥뜨린 적이 있는지 조국 교수가 물었을 때, 은수연은 아버지의 출소가 1년 앞으로 다가오자 해코지의 두려움에 떨다가 직접 교도소에 찾아간 기억을 떠올렸다. 면전에 대고 말했다. ‘나는 당신이 망가뜨리려고 해도 망가지지 않았고, 더럽히려고 해도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걸 말하려고 왔다.’ 조국 교수는 물었다. “그게 왜 책에서 빠졌죠?” 이 극적인 장면, 성폭력 피해자가 눈앞의 거대한 악이자 자기 안의 끔찍한 공포와 대결하고 발언하는 장면은 그대로 기사 제목이 되었다. “아버지의 성폭력에도 난 더럽혀지지 않았어요.”

은수연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이렇다. 1994년 대학에 들어간 해, 집에서 탈출해 한국성폭력상담소 열림터에 갔다. 당시 최영애 소장이 책을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그냥 흘려들었다. 책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고, 피해 경험이 글감이 된 전례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막 집을 나왔을 때라 너무 힘들고 정리도 안 돼 있고 무엇보다 피해 경험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네 잘못이 아니다’ 같은 말이 계속 내 안에서 쌓여갔다.” 도전 의식이 생겼다. 한번 정리해보자.

직장을 다니면서 문화센터에서 글쓰기 강좌를 수강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겪은 일들을 써나갔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식지에 수기를 연재하면서 작업에 탄력이 붙었다. 글쓰기 전담 선생에게 글쓰기 묘사와 표현 등 개별지도를 받았다. ‘괴물 같은 사람이…’로 시작하면 안 되었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줘라, 내러티브 원칙에 따라서 그 배경이나 표정, 말투, 심정을 되도록 상세히 묘사해라. 그 상황에 있는 피해자가 어떤 감정일지 읽는 사람이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너무 몰입해 공포와 분노에 휩싸이기도 했다. 눈물의 방류 사태로 글쓰기를 중단해야 했다. 그럼에도 독자와 마감이 있어 글을 쓸 수 있었다. 회원들이 소식지를 받으면 가장 먼저 찾아본다는 피드백이 왔다. 끔찍하지만 재미있다고 했다. 상담자들도 피해자의 마음을 알 수 있고 많이 배운다고 했다. 피해자들에게 큰 용기와 위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힘든 시기를 써야 할 때는 끔찍한 기억에 붙들렸다. 길게는 2년 정도 손을 못 댔다.

“수능 전날 호텔에 갇혀서 폭행당했던 장면을 쓸 때는 겁이 나서 글이 나아가지 않았죠. 그래서 버스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가보았어요. 아, 나 지금 저 안에 있지 않지. 그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글을 썼어요.”

재판이 진행됐던 법원 앞에도 찾아갔다. 글 쓰다가 막히고 찝찝하고 내가 왜 여기에 계속 붙들려 있지 그런 느낌이 들면 혼자 여행 가듯이 기억의 현장을 찾아갔다. 그렇게 한 장면씩 마주하고 사유하다보니 20대 후반에 시작해서 30대 후반까지, 10년이 걸렸다. 피해 기간보다 더 긴 집필 기간을 보내고서야 자꾸만 삐져나오는 통곡 같은 기억을 가지런히 언어화할 수 있었다. 피로 쓰고 온몸으로 쓴 덕분일까. “글이 사진처럼 생생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무얼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준다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고 시인 이성복은 말했다. 정말 그랬다.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의 내용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그것처럼 끔찍하나 책의 표지는 곱디고운 순백색이다. 이 책이 실제 은수연에게 숫눈길처럼 귀한 시간을 열어주었다.

2013년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최한 제29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은수연은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를 쓴 공로로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받았다. 처음엔 ‘이 상을 왜 나에게 주지?’ 하는 마음에 당혹스러웠으나 이제부터라도 그 상에 부응하는 역사를 만들어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성폭력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일에 기꺼이 행동하고 있다. 강의나 좌담회, 인터뷰 등에 응하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전국에서 모인 성폭력 전담 판사 120명과 토론회를 갖기도 했다. 판사, 언론인, 가해자 전담 국선변호사, 의료인, 법조인 등과 얼굴을 맞댔다. 생존자가 직접 책을 내고 하는 강의는 처음이라고 했다. 은수연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여러분이 무얼 상상하셨을지 모르겠지만 그 이상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왠지 긴장된 공기로 팽팽하게 당겨진 강연장 분위기가 다소 헐거워졌다. 은수연은 교통사고 경험에 빗대어 이야기를 풀어갔다. 직장에서 출장을 다녀오다가 하루에 두 번이나 사고가 났다. 나는 가장 먼저 보험회사에 연락하고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일을 처리했다. 운전자에게 ‘너 왜 이렇게 운전을 못하냐’ ‘하필 왜 그 시간에 이 터널로 갔느냐’ 식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 계신 판사님들은 법정에서 성폭력 사건을 특별하게 접근한다. ‘여자애가 왜 그 시간에 거기에 있었어?’ ‘치마 길이는 왜 짧지?’라는 식으로 묻는다. 성폭력 사건도 똑같이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교통사고처럼 사건 자체로 봐달라.

경청과 공감의 박수가 나왔다. 당시 판사모임의 좌장 판사는 성폭력이나 성추행을 교통사고 같은 사건사고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며 생존자의 목소리를 들려줘 고맙다고 각별히 인사를 전했다.

지난해 전북 전주에서 북콘서트를 했을 땐 진땀을 흘렸다. 어떤 나이 든 남성이 질문을 한다더니, 아가씨가 너무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거 아니냐, 자기 합리화가 심한 거 아니냐고 말한 것이다. 그 자리에는 성폭력 생존자 아이들도 와 있었다. 은수연은 꾹 참고 답변했다. 자기 합리화가 필요하다고,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고. 그러곤 관객을 향해 말했다. 생존자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상처받을 수 있는데 무시하고,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 자기 합리화 많이 해주시라고. 겨우 행사를 끝냈지만 놀라고 속상한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무대 뒤에서 “엄청 울었다”. 얼마 전 양성평등원에서 직원 대상 강의를 할 때도 편견의 벽을 마주해야 했다. 한 중년 남성이 이런 교육인지 몰랐는데 얼굴이 빨개진다고 말한 것이다.

피해자다움과 피해자답지 않음 사이에서

“성폭력이란 얘기를 들으면 ‘폭력’보다 ‘성’과 관련된 걸로 받아들여요. 그런데 참가자들한테 매체에서 본 성폭력, 친한 사람이 겪은 성폭력, 자신의 성폭력 사례를 물어보면 이야기가 끝도 없이 쏟아져나오거든요. 저는 말하죠. 내 얘기는 별로 할 거 없고, 얼마나 일상적으로 성폭력이 일어나는지 우리의 이야기로 풀어가자고.”

성폭력을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로 감각한다는 건 무엇일까. 은수연은 막내올케의 반응을 들려주었다. 언니한테 어떤 일이 어느 정도 있었을까 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는데 되게 많이 울었다며 말했단다. “근데 나는 언니가 참 존경스러워. 옛날에는 내 딸들이 절대 어디 가서 그런 일 당하지 말기를 바라는 맘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그런 일을 겪어도 언니처럼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맘이 생겼어….”

한 몸에 쏟아져내린 험난한 인생사를 통과한 사람. 오직 생존이 목표였던 지옥에서의 9년. 그녀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어떻게 그 힘든 시기를 통과했느냐는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울면서 기도하는 게 취미였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너는 성격 때문에 산 거 같다”고 했다. 이 또한 사실이다. 은수연은 나쁘게 보려는 마음이 없고 일상을 반듯하게 살려는 자세가 있다. 강인한 면, 나약한 면, 새침한 면, 예민한 면, 호탕한 면, 그것들 모두 은수연이 기르는 자아의 모습이다. 그런데 책 속에서는 우울하거나 카리스마가 넘치는 모습만 그려진 것 같다며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성폭력 피해자의 이미지는 일상에서 반복되고 재생산된다. 영화 <여자, 정혜> <텔미 썸딩>이나 드라마 <보고 싶다> <야왕> 등에서 나타난 성폭력 피해자는 대부분 어릴 때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우울하거나 무기력하거나 복수욕에 불타거나 보호받아야 하는 여자 어른으로 나오는데, 그게 은수연은 못마땅하다. 성폭력 피해가 지독한 상처를 남기지만 그렇다고 피해자가 그 시간, 그 감정에 꼼짝 못하고 멈춰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거다. 금방 씻기는 상처도 아니지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도 아니다. 은수연도 경험적으로 알아갔다. 스무 살엔 ‘성폭력 피해자’라는, 만들어진 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벗어나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찾아가자마자 한 일이 정신과 검진이다. ‘성폭력 피해를 당한 내가 과연 정상일까’ 심리검사를 받고 전문가의 정상 판정에 안도했을 정도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상과 비정상, 그 유동하는 경계에서 오뚝이처럼 흔들리며 산다. 누구라도 그러하다면 은수연도 그러하다.

“자기를 다뤄간다고 할까요. 그게(고통이) 올라오면 또 느껴주고. (웃음) 인생의 목적이 상처를 치유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냥 사는 거죠. 계속 따라오지만 병적인 반응을 하지 않게 된 거고요.”

더 이상 상처와의 동거가 불편하지도 일상을 방해하지도 않는 삶. 이걸 평범한 삶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그녀는 자신의 삶이 평범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너무 많이 울었어요. 예전에는 대구지하철 참사나 서해 페리호 참사같이 큰 인명 피해 사건에도 아무 느낌이 없었거든요.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할 때 사이코드라마가 진행됐어요. 다른 사람이 힘든 얘기를 하면 다들 안타까워하는데 나는 사과를 씹어 먹으면서 구경하고 있었대요. 누가 얘기해줘서 알았지, 내가 그러는 것도 몰랐어요. 왜 저런 걸로 힘들다고 난리야, 생각했겠죠. 내 아픔이 너무 크니까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일주일 동안 공부도 못했어요. 내가 온 국민과 하나가 된 것처럼 슬퍼하고 있더라고요.”

일상의 평범함, 오래 동경한 삶이다. 현모양처가 어릴 때부터 꿈이었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앞치마 두르고 간식을 차려주고 놀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품었다. 해보지 못한 일이라 더 해보고 싶고 막상 해보면 “오글거려서 앞치마를 벗어던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평범한 가정, 평화로운 일상을 소망한다. 나중에 결혼해서 남편과 야참으로 라면 먹기도 꼭 해보고 싶은 일 중의 하나다. 평범한 일상을 영위할 자세와 능력도 이미 갖춰져 있다. 가사일을 좋아한다. 웬만하면 손빨래를 하고 물걸레질도 즐긴다. 햇살 좋은 날 이불을 널고, 밤이면 햇볕 냄새 든 이불을 덮을 때 더없이 만족스럽다.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청소하곤 하는데 “요샌 화가 안 나서 집이 무척 더럽다”며 또 깔깔 웃는다.

용서는 숙제가 아니다

“내 문제에 스스로 충분히 애도하고 다른 사람들도 애도해줘서 슬픔을 건넌 것 같아요. 나 인복 완전 넘치는데 집에서 부모복만 없어, 그러거든요. (웃음) 인생의 멘토들, 친구들의 도움으로 트라우마가 극복됐어요. 사실 사람에 대해 신뢰를 갖지 못하는 것만큼 큰 상처가 없잖아요. 사람에 대한 상처를 사람으로 잘 극복한 것 같아요.”

은수연의 목에는 십자가 목걸이가 반짝인다.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에 추천사를 써준 인연으로 이금희 아나운서에게 받은 선물이다. (“촌스럽게” 이거 너무 자랑하고 싶으니 꼭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TV 프로그램 <아침마당>에 나오는 이미지 그대로 실제 봐도 푸근하고 자상한 큰언니 같은 분이라며 자랑에 여념이 없다. 이처럼 은수연은 사람이 살면서 사람들한테 받아야 하는 것들, 부모가 무너뜨린 것들을 좋은 인연으로 채울 수 있었다.

“용서하려고 애쓰지 마라.” 친한 목사님의 말씀도 일상을 회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녀는 용서가 의무나 숙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용서가 어느 순간에 되는 것도 아니고 매일매일 하는 거더라고요. 자신의 요구, 자기의 필요에서 나와야 해요. 누구를 미워할 때 나도 같이 썩어가는 것 같잖아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자기를 위해서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어학 공부에 몰두하느라 ‘그 사람’이란 단어가 떠오를 시간이 없어요. 예전에는 같이 방구석에 있어도 두렵지 않은 존재이길 바랐는데 지금은 마음에 들여놓을 영역이 없는 거죠. 그 사람은 지금 저에게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은수연 개인도 변하고 사회적 통념도 변했다. 스무 살 때 처음 만난 상담교사는 성폭력과 가정폭력 사실을 말하자 “아빠가 들어오지 못하게 방문을 꼭 잠그고 자라”고 충고했다. 그랬다간 가해자의 분노를 사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당시엔 친족 성폭력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그녀조차 자신이 당한 일을 뭐라고 명명할지 몰랐다. 강간? 느낌이 이상했다. 지금은 성폭력이란 단어를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쓰니 변하긴 변한 거다. 성폭력을 소재로 한 영화 <도가니> <소원>도 흥행했다.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는 지금까지 5쇄가 나갔다. 전례 없는 출판 불황과 소재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놀라운 수준이다.

이 모든 정황으로 볼 때, 일단 성폭력이 사회 일반적인 문제로 인식되는 단계에 접어든 것은 분명하다고 그녀는 본다. 대학원 석사 논문 주제가 성폭력 피해 생존자에 대한 사회복지적 지원에 관한 것이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놀랍게도” 그것들이 얼추 갖춰졌다. 기본적인 하드웨어가 바뀌었으니 소프트웨어가 바뀌는 일이 남았다. 생존자의 변화, 그리고 생존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의 변화.

“성폭력 피해 경험이 내 직업도 아니고 나를 특별하게 하는 것도 아니에요. 나를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갖춰지기 전까지는 얼굴을 안 보이고 싶어요. 꼭 성폭력이 아니어도 각자 자기 상처를 편하게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쟤, 그런 일 있었어’ 하면서 아래로 보거나 쑥덕거리지 않고 같이 아픔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거죠.”

은수연은 그날을 그려본다. 나의 기쁨과 세상의 필요가 만나는 일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필명보다 더 예쁜 본명으로, 어쩐지 쓸쓸한 뒷모습이 아닌 선한 눈빛을 나누며 마주할 수 있기를. “얼굴을 돌리고 나는 너를 기다린다”는 독일 시인 넬리 작스의 시구처럼, 그렇게 은수연은 ‘얼굴을 돌리고’ 기다린다.

 

한겨레 <나들> 내 몸, 파르헤시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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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 교수 - 혁명가의 성폭력? 예쁜 개한테 물렸다!

[행복한인터뷰]

 

 

 

몸은 세계를 떠안는다. 현경의 몸은 우주를 업은 듯 가볍게 춤춘다. 이유가 있다. 약한 것들의 ‘신’을 연구하는 신학자로, 참된 존재의 ‘길’을 묻는 수행자로 100곳이 넘는 나라에 머무르고 거주했다. 마르크스주의자부터 인디언 추장까지 그야말로 인류를 만나고 다녔다. 마치 돌아가는 지구본처럼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표정이 이는 이유도 국경, 종교, 계급, 나이, 학문, 예술의 경계에 부딪히고 그것을 횡단하며 자유로이 살아온 까닭이리라.

현경은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 종신교수이자 불교법사이다. 일명, 기독인불자다. 신학을 퍼포먼스와 제의로 표현하는 ‘신학적 예술가’이자 여성·환경·평화를 접목시킨 ‘에코페미니스트’로 불리며 생명을 살리는 ‘살림이스트’를 자처한다. 화려한 사회적 명성의 반대편에 고독한 실존의 이름도 갖고 있다. 보수 기독교계에서 ‘마녀’ ‘혼합주의자’로 지탄받았고 대학 사회에서는 엄숙한 학문 질서를 교란시키는 ‘직녀’(찍힌 여자) 교수였다. 유학생 시절 니카라과 평화대회에 갔다가 성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난폭하든 고귀하든 이 모든 경험의 잔치를 치르면서 새로운 삶의 질서로 건너간 현경은, 세계를 무대로 내 안의 여신을 발견하는 “신(神)나는” 삶을 설파한다.

“어릴 때는 못생겼다는 말을 듣고 자랐어요. 그런데 뉴욕, 히말라야, 니카라과에 가니까 저를 보고 예쁘다, 섹시하다고 하더군요. 그때 알았어요. 아, 사람 팔자 시간 문제가 아니라 장소 문제구나!”

‘와하하’ 웃음이 터진다. 이날의 무대는 SBS <지식나눔 콘서트- 아이러브[人]> 녹화장이다. 현경은 빨간 장미 꽃다발을 들고 나와 관객에게 뿌리고는 ‘스스로 행복한 여신이 되는 방법’을 주제로 2시간 남짓 열정적으로 강연했다. 강연 뒤 진행자가 방청객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런 질문도 있었다. 다시 태어나면 남자와 여자 중 무엇이 되고 싶은가. 며칠 뒤, 인터뷰를 위해 만났을 때 현경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나한테 물어봤으면 우주인으로 태어나고 싶다거나 남자·여자 성기가 다 달린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하려고 했어요. 남자 하고 싶으면 남자 하고 여자 하고 싶으면 여자 하겠다고요. 그랬으면 편집에서 잘렸겠지만요. (웃음)”

발칙한 소녀이거나 초월한 현자 같은 말투다. 애초 금기의 언어, 위험한 발상이란 그에게 없다. 자기 경험에 대한 성찰과 자아에 대한 상상이 있을 뿐이다. 성폭력 피해 경험도 거리낌 없이 터놓는다. 2001년 펴내 이미 수만 부가 팔린 스테디셀러 <미래에서 온 편지>(열림원)에도 다 들어 있는 얘기라며 그는 덤덤히 기억을 불러왔다.

#니카라과 평화대회, 혁명을 보다

현경은 1975년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 들어갔다. 얼마 뒤 계엄령이 내려졌고 학교에는 무기한 휴교가 선포됐다. 학교 주변에는 무장 군인이 배치됐다. 삼엄한 시절, 현경은 뚝방 빈민촌과 성매매 집결지에서 야학교사로, 청계피복노조에서 오락교사로 일했다. 신의 존재를, 삶의 온전성을 회의했다. 신이 계시다면 이런 가난과 비참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동지들을 숨겨주었다가 미행과 도청, 모진 고문을 당했다. 어릴 때부터 써온 일기장을 몽땅 빼앗겼다. 박정희가 살해당한 뒤 전두환 정권이 무력으로 들어서고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다. 시대적으로나 실존적으로나 환멸과 공포와 상실이 가득했다. 삶이 극도로 위축된 현경은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장원 교수의 소개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공장에 위장 취업하는 게 아니라 ‘제국주의 심장부’로 유학을 가는 일은 운동권에서 배반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미국 클레어몬트 신학교는 ‘지구시민’을 강조하는 열린 학교였다. 목회학 석사를 하는 동안 인도와 중남미 나라들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니카라과에서는 산디니스타 혁명군이 소모사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혁명의 성공을 전세계 사람들과 나누기 위한 국제평화대회가 열렸다. 현경은 교수·학생 몇 명과 함께 참가했다. 혁명 각료의 절반이 가톨릭 신부였다. 한국에서 처참한 패배만 보았던 그는 해방신학이 현실로 역사화된 현장에 와 있다는 사실에 감격과 환희로 들떴다. 그때 혁명 과정을 주도한 똑똑하고 잘생기고 카리스마 넘치는 혁명의 교사가 나타났다.

“요즘 말로 상남자예요. 투철한 역사의식, 날카로운 분석…, 스토리텔링은 압도적이었어요. 니카라과에서 있었던 일을 강의로 들으면서 눈물, 콧물을 흘렸죠. 한국인들은 스승에게 깍듯하잖아요. 자연스럽게 선생님에게 음료수까지 갖다드리며 챙겼는데, 그러는 사람이 한국 학생인 나밖에 없었어요. 그는 남미 사람이니까 내 행동을 호감의 표시로 이해했을 수도 있어요.”

그 혁명가도 낯선 나라에서 온 학생운동 출신의 현경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한국의 반독재 투쟁, 반미 투쟁에 대해 틈만 나면 물었다. 서로 한마디 하면 열 마디를 알아들으며 완벽한 교감이 오갔다. 그 혁명가는 여성운동에도 관심을 보이며 자기의 아내와 딸들 이야기까지 들려주었다. 아내가 혁명에 대해 쓴 여성 관련 자료를 줄 테니 자신의 방으로 오라고 했다. 고마운 마음을 안고 약속 시간에 방으로 갔다. 혁명가는 방문을 걸어 잠갔다. 현경은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술회했다.

‘지금 소리를 지르면 옆방에 있는 미국·유럽 사람들이 달려와서 이 사건을 알게 되겠지. 니카라과 혁명은 가짜 혁명이라고 비웃을 거야. 어린 학생을 성폭행한 혁명가의 혁명이 무슨 혁명이냐고. 그러니까 이 남자가 아니라 미 제국주의를 타도한 니카라과 혁명을 보호하기 위해 소리를 지르면 안 돼.’

현경이 따졌을 때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네가 너무 섹시하니까.” 내 방에 들어온 것은 너도 의도가 있었던 거다, 만약 몰랐다면 남녀 간의 언어를 모르는 거다, 혁명을 하겠다는 여자가 뭘 그렇게 성을 중시하느냐, 서로 이렇게 통하는데 왜 섹스를 안 하느냐며 외려 당당했다.

“지금 같으면 당장 기자회견을 했을 테지만 그때는 자책이 심했죠. 춤추자고 했을 때 괜히 추었나? 내가 꼬리를 쳤나? 너무 파인 옷을 입었나? 선생님을 너무 존경했나? 남편한테도 학교에도 어디에도 말을 못했어요. 네가 꼬리를 쳐서 그랬지, 외국에서 어떻게 행동했느냐. 이럴 때 항상 여자를 추궁하잖아요. 그 모든 게 이유가 되죠.”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뒤, 현경은 니카라과에서 온 여성학자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니카라과 혁명정부의 대통령 다니엘 오르테가의 딸이 자기 아버지가 11살 때부터 10년간 성폭력을 했다고 양심선언을 하고 아버지를 고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경은 자신의 피해와 그 딸의 피해, 니카라과 혁명정부의 몰락 사이에 필연성이 있다고 해석한다. 아무리 미국의 공세가 집요했다고 해도, 일상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이 반복되는 혁명의 말로는 자명한 것이 아니겠는가.

# 보스턴 여성신학센터, 몸을 씻다

“품종 좋고 예쁜 개한테 물렸다. 너무 예뻐서 쓰다듬었더니 물었다.” 지금은 자신의 피해 경험을 이렇게 정의한다. 그러나 스물다섯의 현경은 피해 경험을 분석할 수 있는 이론적 도구와 정서적 힘이 없었다. 다른 괴로움까지 더해졌다. 미국 이민사회의 한인교회는 한국 교회보다 더 보수적이고 권위적이다. 어릴 때부터 자유로운 분위기의 경동교회에서 자란 현경으로서는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학생운동의 선배이자 동지였던 남편은 한국의 변혁운동에 큰 회의를 느끼고 점점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는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깊은 우울감에 빠져서 1년간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예일대학의 레티 러셀 교수가 클레어몬트대학에 ‘파트너십과 페미니스트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왔다. 강의를 들으면서 가슴에 꽉 막혀 있던 것이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교수에게 남성 중심의 기독교에서 느끼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분노’를 터놓았고 보스턴에 있는 여성신학센터(Women’s Theological Center)를 소개받았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만들어진 페미니스트 실험학교다.

그곳은 커리큘럼을 교수와 학생이 같이 짠다. 일주일에 16시간을 감옥이나 난민수용소, 여성들을 위한 정신병원, 성폭력 피해여성이나 매 맞는 여성을 위한 쉼터에서 일하고 그 경험으로 여성 문제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왜 여자들이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란 무엇인가, 치유는 무엇이고 성령의 힘이란 무엇인가. 그런 공부를 마치고 예술가들과 여성들을 위한 제례를 만든다.

미국의 어느 섬에서 한 여성이 밤에 산책하다가 괴한에게 흉기로 위협받으며 성폭력을 당했다. 그 뒤 삶이 망가졌다. 밤길을 다니지 못하고 남자와 섹스도, 결혼도 할 수 없었다. 자기가 더럽혀졌다는 생각에 좌절했다. 사이코테라피로도 고해성사로도 고통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여성을 위해 제례를 준비했다. 보름달이 휘영청 뜬 어느 밤 미국의 아름다운 자연공원에 다 같이 가서는 그 친구를 폭포에 세웠다. 몸을 정성스레 씻어주었다. 죄의식, 수치심, 모멸감을 다 물에 떠내려 보냈다. 그러고는 여성들이 둥글게 손잡고 보름달 아래서 강강술래를 했다. 여신의 축제였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죠. 거기서도 나는 내 경험을 얘기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를 치유하면서 저도 치유가 됐어요. 내 잘못이 아니었구나. 성폭력을 당한 여자들이 얼마나 벗어나기 어려운지 알게 되었지요.”

여성신학센터에는 미국 최고의 여성신학계 거장들이 와서 쌍방향 수업을 진행했다. 아는 것의 힘, 인식의 기쁨은 날로 컸다. 현경은 ‘데이트 성폭력’ ‘부부 성폭력’이란 개념을 처음 배웠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고 10년을 사귀었어도, 같이 호텔방에 갔어도, 옷을 벗었어도, 여자가 싫은데 하는 건 성폭력이라는 거였다. 이전에 없던 개념이었다. 이론이 없으면 세상을 읽을 눈이 없다. 페미니즘 이론은 세상을 새롭게 읽게 하는 눈이었다.

현경은 여성이 성폭력으로부터 치유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꼽았다. 첫째, 이론. 해석의 도구가 있어야 한다. 둘째, 자매.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네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셋째, 전문가. 성폭력만 전담하는 상담가들과 대화하는 게 참 중요하다.

“그다음에는 영성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이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일까, 큰 그림을 그려보는 거죠. 이게 꼭 나쁜 의미만 있나. 나는 성폭력을 경험한 뒤 성에 대해 더 많이 배워야 한다는 걸 알게 됐고,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이런 걸 당할까, 즉 다른 여성들 마음을 이해하게 됐어요. 또 하나는 우울증의 바닥을 치고 올라오면서 내가 훨씬 더 강해지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았어요. 나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이 항상 나쁜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현경은 여성신학센터에서 “세포 하나하나까지 페미니스트로 바뀐 것 같은” 경험을 거쳐 여성신학자로서의 삶을 결심한다. ‘아시아의 여성해방신학’이라는 연구계획안을 세웠다.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이라는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았고, 10여 년간의 파란만장 유학생활을 마쳤다. 그 긴 시간, 현경이 서양신학을 공부하며 마주한 것은 남성적 백인신학의 끝이었다. 신학마저 인종차별주의와 식민주의, 제국주의, 남성우월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기존 신학에 인종적·문화적·종교적 다양성을 선사해 신학의 지평을 확장하겠다는 뜻을 품고 1989년 5월, 모교인 이화여대 조교수 임명장을 받았다.

 

#오스트레일리아 세계교회협의회, 초혼제를 벌이다

난폭하든 고귀하든 모든 경험의 잔치를 치르며 새로운 삶의 질서를 넘나든 현경의 이름 뒤에는 기독인불자, 신학적 예술가, 에코페미니스트, 살림이스트, 마녀, 혼합주의자, 직녀(찍힌 여자) 등 온갖 혼종적이고 때로는 부정적인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아무려나 현경은 세계를 무대로 내 안의 여신을 발견하는 ‘신나는 삶’을 설파한다. 한겨레 박승화

 

현경은 젊고 독창적인 여성신학자로 주목받으며 국내외에서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냈다. 세계학술대회에 참석하느라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아졌다. 실험적 강의로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이대에서 교수로 조용히 잘 지낼 수 있는데 그 사건이 벌어졌다”. 1991년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제7차 세계대회 주제 강연자로 참석했다. 주제는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옵서소!’ 여성, 아시아, 제3세계 민중의 입장에서 성령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해석을 내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아시아 전역을 다니면서 1년간 발표를 준비했다.

큰 줄기를 잡았다. 첫째, 아시아 신학. 조상으로부터 받아온 전통 영성, 즉 불교·무속·도교를 버리지 않고 그 토양에 뿌리를 내리는 성숙한 기독교를 알려주겠다. 둘째, 페미니스트 신학. 여성의 몸을 비하하는 가난한 정신의 신학에 도전하겠다. 셋째, 민중 신학. 엘리트 교회 지도자가 만드는 신학이 아니라 매일매일 고통받는 제3세계 민중의 입장에서 신학을 써보겠다.

내용은 형식을 창조했다. 먼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땅을 축복하는 제례로 강연을 시작했다. 인류 역사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남녀들의 한 많은 영을 불러 해원하는 초혼제를 지냈다. 한국 젊은이 20명이 풍물을 쳤다. 그동안 연구한 성령에 대한 새로운 신학 이해를 이야기식으로 풀어서 강연하고, 마지막으로 살풀이를 하며 큰 광목을 몸으로 찢고 나아갔다. 중간에 한국 여성을 만나서 포옹하고 성령의 해방적 힘을 보여주는 춤을 추는 것으로 끝이 났다. 결정적인 하나가 남았다. 서양에서 성령은 서양 남자들의 모습으로 표상된다. 현경은 중국 관세음보살 사진을 보여주면서 내가 자궁으로부터 느끼는 성령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나는 식민지 신학은 하지 않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근거해서 기독교를 세웠는데, 그건 정통이고 토속과 불교에 세운 신학은 이단인가. 기독교 제국주의지. 너희가 2천 년 동안 여자한테 잠잠하라고 했지만 너희는 앞으로 200년 동안 잠잠하고 우리 말 좀 들어라. 그랬더니 교회가 발칵 뒤집혔죠.”

기독교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강연으로 거론되는 이 사건은 <뉴욕타임스> <슈피겔> <르몽드> 등 세계 유수 언론에 기사로 실렸다. 한국 언론도 떠들썩했다. 보수 교단에서 나온 신문은 ‘마녀, 혼합주의자, 이단’ 등 갖은 저주와 비판을 쏟아냈다. 아무려나 신학자 현경은 날개를 달았다.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강연과 세미나를 다녔다. 이화여대 총장실에는 학부모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어떤 근본주의자는 ‘무당의 딸은 무당에게로, 교회는 교회에게’라고 쓰인 전단지를 교회마다 돌리며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이 무당을 잡아 죽이랬다고 부추겼다. 현경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학교에 휴직계를 냈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초빙교수로 가서 1년간 ‘종교와 여성’ 분야를 가르쳤다. 그리고 1996년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은 160년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여성 종신교수로 현경을 초청했다.

#유니온 신학대학, 법사가 되고 신학을 하다

사람 팔자 장소 문제라고는 하나, 다른 장소에 삶을 들여놓는 일이 쉬울 리 없다. 팔자를 바꾸는 건 운명을 바꾸는 일.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2년여를 보냈다. 심신이 깨어나는 만큼 지쳐갔다. 30대에 잇따라 일어난 존재 변신에 현기증을 느꼈다. 커다란 쉼표가 필요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땅, 히말라야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21세기는 히말라야에서 맞으리라는 막연한 계획으로 안식년을 받아놓고 이전 1년간 독일, 프랑스, 우간다, 쿠바, 스위스 등의 세계 여성들과 열심히 교류했다.

1998년 짐바브웨에 세계 각국에서 온 3천 명이 넘는 여성들이 모였다. 여성 10여 명이 앞으로 나와 자신들이 교회에서 겪은 갖은 폭력에 대해 고백했다. 여성들이 교회에서 받아왔던 억압과 폭력은 인종, 계급, 신앙 노선과 관계없이 어디에나 존재했다. 캐나다에서 온 여성은 목사인 아버지에게서 어린 시절부터 당했던 친족성폭력에 대해 고백했다. 현경은 치유예배를 이끌었다.

“여성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1천 번도 더 살해된다.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주는 폭언으로, 폭력으로, 그리고 미워하는 눈빛과 보디랭귀지로 우리의 영혼과 감성과 지성은 살해된다.” 예배를 통해 아픔과 부서짐을 치유와 변혁의 힘으로 바꾸는 과정을 진행했다. 마지막에 여성들이 같이 신나게 춤을 추면서 서로의 상처를 만지며 축복해주었다.

현경은 ‘많은 여자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아픔,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긴장, ‘나를 비우고 싶다’는 열망을 안고 히말라야로 향했다.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한 수도원에서 날마다 명상하고 손가락이 얼얼하도록 글을 썼다. 이후에도 불교에 대한 관심과 공부를 놓지 않았다. 뉴욕의 숭산 스님을 만나고는 가르침에 매료돼 1년간 머리 깎고 안거에 들어가기도 했다. 2008년에는 대선사 전통의 미국 관음선원에서 불교법사 자격을 받았다.

“학생들이 물어요. 선생님은 예수님과 결혼하고, 부처님과 잠자시나요? 그러면 이렇게 말하죠. 나는 숨어서 하지 않는다. 셋이서 같이 산다. 하하. 그건 농담이지만, 나는 불자 기독교인이에요. 21세기 코드라고 생각해요. 유대인불교. 힌두크리스천. 이슬람신비주의 같은 종교의 이중 국적자가 많아요. 틱낫한 스님께서는 적극적으로 불교도와 기독교인이 결혼해서 아이를 포용력 있는 사람으로 키우라고 권하죠. 불교라는 뿌리와 기독교라는 뿌리가 합쳐져 더 큰 나무가 되면 더 큰 그늘과 더 큰 열매가 열려요. 두 종교가 접목해서 더 큰 지혜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철학자 니체는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 사상에 정통했다. 그랬기에 삶에 복무하지 않고 삶을 억압하는 기독교(목사)의 타락을 누구보다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런 맥락에서 쓴 <안티크리스트>에서 니체는 불교에 대한 호감을 슬쩍 표현한다. ‘불교는 더 이상 죄에 대한 싸움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인정하면서 고통에 대한 싸움을 말한다’는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 현경도 기독교 논리에 따라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 한다고 믿었던 많은 도덕감정의 사슬과 고통의 고리를 불교를 통해 끊어버리고 더 큰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기독교와 불교를 아우르며 좀더 너른 가슴을 가진 신학자로서 자아의 윤곽을 그려간다. 그렇게 힘을 키워 남북여성 평화통일 모임 ‘조각보’ 공동대표를 맡고 ‘종교 간 세계평화위원회’ 자문위원을 맡는 등 더 많은 타인의 고통-해방에 관여한다.

최근 현경이 연구하는 학문적 주제는 신비주의와 사회혁명이다. 역사적으로 수도원 운동이 사회변혁 운동으로 연결된 사례 등을 통해 어떻게 해서 내면의 변화가 사회질서 시스템의 변화로 연결됐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지금 여기, 여성학과 남성학이 대화해야

마지막으로 현경에게 물었다. 과연 전세계에 구조화된 젠더폭력을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까. 현경은 여성운동이 없으면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경우도 여성운동의 노력이 없었으면 영원히 묻혔을 것이다. 아직도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드러내놓고 얘기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의식의 변화, 수치의 대상에서 치유의 대상으로 재정의하는 것 등을 통해서 열린 지평이다.

“성폭력 문제도 드러내놓고 이야기해야지 치유가 돼요. 남자들도 여자와 함께 싸워야 해요. 그래야 자기들도 잡놈이 되지 않아요. 남자도 성폭력 피해자가 됩니다. 남자가 남자를 폭행하는 경우도 있고 어린 남자가 권력 있는 여자에게 당하기도 하죠. 성이 인간의 너무 내밀한 문제라 큰 상처를 받으면 남녀 누구라도 벗어나기 어려워요. 성폭력은 여성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죠.”

‘모든 학문은 남성학이다’라고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모든 학문은 남성학이 아니라 가부장적 학문이라며 현경은 ‘남성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모든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는 게 얼마나 폭력적인가. 여성이 한 인간으로서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여성학을 하듯이 남성도 남성학을 해야 하고, 남성학을 통해 여성학과 대화해야 한다고 했다.

삶의 실험가는 언제나 삶의 유혹자로 나타난다는 니체의 말대로, 현경의 말은 유혹한다. 모든 경계에 걸터앉아 끊임없이 다름을 잇고 화두를 던진다. 새로운 생성을 재촉한다. 내 안의 여신을 깨우라고 말을 건넨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진리도, 가위눌리게 하는 선도 아니고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스무 살 쪽방촌에서 신에게 던진 최초의 물음, “신이란 무엇인가” 아니 “신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화답’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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