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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 '렛츠 비마이너! 민주주의의 영원한 슬로건' 혹독한 추위가 물러가고 독재자 무바라크도 퇴진한다. 봄이 오는 걸까. 언론마다 이집트 민중들이 환호하는 사진을 내걸고 민주주의 승리라고 표현한다. 그것을 지켜보는 마음이 ‘거시기’ 하다. 민주주의. 그거, 내겐 꼭 단물 빠진 ‘사랑’처럼 사기 같아서다. 어설픈 민주화의 봄 겪고 나니 민주주의가 좋은 건지조차 헷갈린다. 그래도 하나는 확실히 안다. 양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 단지 오래된 감정이 참사랑은 아니듯이 다수결의 지배가 민주주의는 아닌 거다. 때마침 고병권이 민주주의를 주제로 강연을 했다. 2월 11일 장애인언론 창간 1주년 기념 특강.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열렸다. 휠체어로 가득 메워진 강연장, 그 자체로 북적북적 열기가 후끈하다. 대개 공공장소에 사람이 몰리면 휠체어가 한두 대 정도인데, 여기서는 ..
희망 / 유하 풍뎅이가 방충망을 온몸으로 들이받으며 징허게 징징거린다 (난 그의 집착이 부담스럽다) 나도 그대 눈빛의 방충망에 마음을 부딪치며 그렇게 징징거린 적이 있다 이 형광등 불빛의 눈부심은 어둠 속 풍뎅이를 살게 하는 희망? (글세, 희망이란 말에 대하여 너무 부담 갖지 말라고, 그가 속삭인다) 그 무엇보다도, 징징대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풍뎅이는 벌써 풍뎅이의 삶을 버렸으리 - 유하 시집 , 문학과지성사 아들이 졸업했다. 졸업식 전날, 아들의 등짝을 두드리며 치하했다. “욕봤다. 중학교 3년을 무탈하게 마쳐 다행이구나.” “앞으로 3년 동안 더 힘들 텐데요.” “아들, 공부가 고생스럽지?” “뭐...” “주변에 이십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더라. 엄마가 차려주는 밥 먹고 정해진 과목 공부할 그 때가..
서울시 가판대 상장, 그리고 오후의 산책 서울 사는 게 점점 부끄럽다. 어제 숙대입구역 버스정류장에서 경악했다. 금빛 테두리에 궁서체 글씨, 누런 트로피 그림이 그려진 커다란 상장이 가판대마다 나붙었다. 내용은 ‘당신이 서울을 빛낸 진정한 영웅입니다.’ 가판대마다 수상자가 달랐다. 건설노동자, 대중교통기사, 환경미화원, 식당 아주머니들, 소방공무원 등에게 주는 상이란다. 하나같이 3D업종, 저임금에다 비정규 직업군 종사자다. 홍대 청소노동자 파업사태를 의식한 모양이다. 당사자가 저걸 보면 어떤 느낌일까. 나로선 일그람의 진심도 느낄 수 없다. 우롱하는 처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서민들은 생활고가 심해 아우성인데 저런 유치찬란한 상장놀이를 기획하고 있다니, 괜히 5세 훈이 아니다. 서울시 공무원 중에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진정 아무도 없는가. ..
쉬운 글이 멋진 글이다 학교나 직장을 다니지 않더라도 살다보면 글 쓸 일이 종종 생긴다. 새 학기에 어떤 담임선생님은 자녀에 대해 참고할 사항을 써달라며 백지를 보낸다. 하얀 종이를 앞에 두면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나도 순간 난감하다. 다른 엄마들은 어떨지 괜히 염려스럽다. 글쓰기가 확실히 만만한 일은 아니다. 여러 생각이 붓을 가로막는다. ‘잘 써야한다’는 부담감, ‘뭘 쓸까’하는 막막함이 가장 크다. 왜 글을 잘 쓰고 싶을까. 아니, 글을 잘 써야한다는 건 누구의 생각일까. 내 생각에 영어광풍, 외모지상주의와 비슷한 과열현상이다. 우리나라는 의무교육에서 글쓰기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글에 부과된 권위는 지나치게 크다. 글이 곧 인격이라는 통념이 지배적이고 자기표현이 서툴면 지적인 능력을 의심받는 분위기다. 그러니 ..
Mendelssohn- Piano Trio No.1 Mendelssohn- Piano Trio No.1 in D minor, op.49 2월, 겨울밤이 깊어간다.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애수어린 느낌이 좋다. 오래된 것은 왜 위로가 될까. 200년 전 멘델스존이 남긴 음악이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 선율타고 눈발처럼 날린다. 서리낀 창틀 아래.. 사모바르가 하얀 입김 뿜으며 끓고 있는 그림이 그려지네.. 20년 전에 산 책, 누렇게 바랜 김현의 를 읽으며 나는 지금 우주의 조화로움을 경험한다. 오래된 음악과 책과 시간에 감사하며.
혜화,동 - 스물셋, 멀리해야 할 남자 위험한 혜화, 動 엔딩 장면에서 시작해보자. 여자(혜화)가 문을 나선다. 가는 데마다 얼쩡거리는 옛 남자(한수)가 와 있다. 무시한다. 차를 몰고 남자를 지나쳐간다. 백미러로 남자의 전신이 잡힌다. 힐끔 쳐다보는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카메라가 손을 클로즈업한다. 후진기어를 넣는다. 남자를 향해 다가가는 여자. 여신의 미소를 짓는다. 영화가 끝난다. 아마 용서와 화해의 결말 같다. 나는 그 장면에서 후진 기어 넣고 내리 달려서 여자가 남자를 확 쳐버리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이 땅의 ‘지질한 남자’의 비참한 최후를 보고 싶었다. 줄거리는 이렇다. 18살 고등학생 혜화와 한수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혜화가 임신을 하자 한수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5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 앞에 한수가 나타난..
명절을 생각한다 * 생애를 생각한다 ‘오래 사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어요’ 며칠 전 아는 동생이 댓글로 달았다. 표현이 적절하고 절실해서 뭉클했다.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선 나야 말로 산다는 것이 뭘까, 인생은 왜 이리 긴가, 상념이 많은 요즘이다. 아이들 밥 세끼 거둬 먹이다보면 어느 새 부엌 창문으로 어둠이 깔린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한 하루살이. 앞으로도 큰 틀에서 달력의 질서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일상은 이리도 단조로운데 인생은 왜 이리 험난한가. 아이러니다.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 어릴 때 학교 다니고 어른 되어 일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자식 키우다가 병들어 죽는 인간의 일생. 이대로 살기도 벅차다. 고난도 기술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렇게 쩔쩔매면서 내 한몸 챙기고 내 새끼들만 거두다가 저..
방금 젊지 않은 이에게 / 황인숙 너는 종종 네 청년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나는 알지 네가 켜켜이 응축된 시간이라는 것을 네 초상들이 꽉꽉 터지도록 단단히 쟁여져 있는 존재라는 것을 지나온 풍경들을 터지도록 단단히 쟁여 지니고 날아다니는 바람이 너라는 것을 그 때 너는 청년의 몸매를 갖고 있었다 희고 곧고 깨끗한 아, 청량한 너의 청년! 그 모습은 내 동공 안쪽 뇌리에 각인돼 있고 내 아직 붉은 심장에 부조돼 있다. - 황인숙 시집 , 문학과지성사 이십대는 아름다운 나이다. 나의 삶이 아닌 남의 삶에서 느낀다. 내가 이십대를 지날 때는 ‘이십대’에 관심이 없었다. 긴 터널을 다 지나고 나니 이제야 이십대가 보인다. 나의 이십대 막바지부터 연을 맺어 피보다 진한 우정을 나눈 태지매니아 친구들. 불 같았다. 어디로 옮겨 붙을지 몰랐다. 어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