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튀와 말하기대회

[차오르는말들]

얼마 전 새로운 말을 접했다. 만튀. 분식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오떡순(오뎅·떡볶이·순대)’ 같은 계열을 상상했다. 만두() 튀김의 줄임말? 아니다. ‘만지고 튄다의 약자다. 여성의 특정부위를 만지고 튀는 행동을 뜻한다고 한다. 잠이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나가는 여성의 몸을 만지고 달아나기를 반복한 김모군(18)이 경찰에 붙잡혔다는 내용의 기사에서 처음 보았다. 관련 기사를 더 검색해봤더니 만튀라는 신조어는 이미 엉만튀, 가만튀 등 만지는 신체의 부위를 타고 괴물처럼 증식해버린 상태였다.

나만 너무 늦게 안 모양이다. 성희롱을 일상화하고 희화화 하는 말이 버젓이 일상에 매복되어 있었다. 언론은 천연덕스럽게 받아쓰기를 한다. 기사 말미에는 장난삼아 하는 일이 범죄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지만, 맥락은 반대다. 범죄 행위를 장난처럼 보도하고 있다. 으으. 가해자를 주어로 내세워 몹쓸 짓 일거수일투족을 중계한다. 피해자는 직장여성과 여대생으로 사물화 되어 있다. 당사자의 목소리와 아픔은 한 줄도 없다. 이 사회는 여성이 겪는 고통과 불편을 참 요란하게 묵인한다.

 

갑자기 누군가의 자기 몸을 만질 때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번이라도 피해를 당했다면 오늘도 가슴 조이며 종종 걸음 치거나 빙빙 돌아가는 형벌을 자처할 것이다.

나는 이십대 초반에 좌석버스 뒷자리에서 졸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허벅지를 만진 이후 한동안 좌석버스를 타지 못했고 지금도 남자 옆에는 웬만하면 안 앉는다. 내 친구는 더하다. 운전면허시험 강습을 받다가 강사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10년 동안 면허시험장을 치르지 못했다. 분개했다. 기득권자들이 어떤 경우에 자기 기회를 10년씩이나 유예하겠느냐고. 그러고 보니 어떤 점에서 만지고 튀는이들은 그래도 낫다고 해야 할까. 만지고도 버티는저 운전학원 강사를 비롯해 수시로 지면을 장식하는 의원님들, 목사님들, 교수님들, 직장 동료나 상사들, 벌레 같은 아버지들에 비하면 말이다. 적어도 자기행동에 대한 인식은 있으니 

그 무렵이다. (만두와 튀김이었으면 좋았을) 분별없는 그 말을 접한 즈음인 지난 1023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가 열렸다. 이름 그대로다. 성폭력을 당한 사람이 자신의 피해 내용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하는 연례행사다. 올해로 11회 째. 나는 작년에 처음 갔고 올해도 두 번째 참여했다. 말하기 참여자 5명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자신의 피해경험을 성폭력세 글자로 인지하기까지의 과정과 이후 대처 상황을, 혼란과 자책과 각성과 돌파의 말들을 대체로 또박또박 때로는 꺼이꺼이 꺼내어 놓는다. 그 장면은 삶의 용기와 진실이 해처럼 불쑥 솟아나는 숭고함을 준다. 구체적인 내용은 외부로 유출하지 않는 것이 듣기 참여자의 약속이라서 상세히 말할 수는 없으나, 가해자가 얼마나 사악한가는 중요치 않다. 피해자는 왜 말하려 하는가. 말해야만 하는가. 그것이 말하기대회의 관전 포인트다. 한 참가자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동안 말하기 대회 준비하러 다닐 때 친구가 어디 가냐고 물으면 대답하지 못했어요. 답답했어요. 나한테 이런 일이 있었고 그래서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에 나간다고, 그런 걸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싶어서 여기서 연습하려고 나왔어요.”

살기 위한 말이다. 생존자로서 말하는 게 아니라, 말하면서 생존자가 되는 거다. 두 시간이 탱글탱글한 말들의 입자로 꽉 찬다. 관객도 같이 그 순간을 호흡한다. 한 존재가 한 존재의 말-삶에 몸을 수굿이 숙이고 귀 기울이고 정서가 뒤엉키는 그 자리, 뜨거운 감정이 흘러 다니는 그 시간이 무척 귀하고 값지다. 삶은 얼마나 위대한가. 과연 그럴까 의심했는데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한다는 니체의 말을 그 때는 절감한다 

 

나는 이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에 더 많은 남성이, 여성이, 어른이, 청소년이, 언론인이 듣기 참여자로 왔으면 좋겠다. “잠이 안 와서혹은 심심해서 작정하고 습관적으로 성폭력을 저지르는데 그것이 한 사람의 몸-삶에 어떤 불편과 치욕과 고통과 절망을 가하는지, 이성복의 시구대로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것들, 입이 없는 것들로 살아가는 고역이 어떤 것인지, 상관의 성추행에 시달리다 자살한 여군의 경우처럼 끝내는 죽음에까지도 이르게 하는지, 눈빛 마주하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길 바란다 

진실말하기. ‘만튀같은 비겁하고 영혼 없는 신조어를 유통하고 소비하기보다는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같은 당당하고 존엄에 찬 말들을 언론이 나서서 널리 소개하면 좋겠다. 피해자 유발론이 아니라 가해자 책임론으로 성폭력 논의의 관점이 바뀌는 게 순리다. 집이나 학교에서 딸들에게 밤길 조심해라, 짧은 치마 입지 마라, 교육하기보다 아들들에게 행여 이상한 짓 하고 다니지 말라고 인간 존중의 태도와 고통 공감의 능력을 가르치는 게 맞다. 물론 쉽지 않다. 나도 그러지 못했으니까. 부끄럽게도 자기 자식이 (피해자가 될까 우려할 뿐) 성폭력 가해자가 될 가능성을 고려하는 엄마는 없는 것 같다. 누구도 삶의 재난을 피해갈 수 없다면 성폭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 가해자로도 피해자로도 더는 만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들 딸 손잡고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에서 조우하면 좋겠다.

 

-수유너머 R-VIEW (연구원들이 돌아가면서 글을 싣기로 한 잡지?)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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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이별에 대처하는 법 - 김혜순 '한 잔의 붉은 거울'

[차오르는말들]


지난여름 친구가 별안간 이별을 겪었다. 동거하던 애인과 멀어지다 헤어졌다. 친구는 상실이 컸다. 늘 옆에 있던 사람이 없으니 외롭고 허전하고 상대의 변심이 분하고 믿기질 않고 사탕처럼 녹아 없어진 사랑의 실체가 허무한 거다. 입맛을 잃어갔다. 사랑이 사람을 반짝반짝 생기 돌게 한다면 이별은 육신의 스위치가 하나둘 꺼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거의 3주가 되자 낯빛이 거무튀튀해지고 살이 쑥쑥 내렸다. 치마가 헐렁해져 주먹이 쑥 들어갔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 할 말은 아니지만, 다이어트에 마음고생만한 게 없다는 말을 절감했다.

 

한 관계의 분리를 지켜보는 나는 무력했다.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게 개별자의 구체적 사건이 되면 의미와 기호로 가득한 작가주의 영화가 된다. 행복한 이유는 비슷하지만 불행한 이유는 제각각이라는 톨스토이의 말대로 고통은 철저히 개별적이다. 내밀함의 영역인 연애사는 더하다. 보편적 극복매뉴얼이 없다. 저마다의 안간힘이 있을 뿐. 친구는 ‘나를 앉혀놓고’ 지난 시간을 일일이 떠올리고 과거를 복기했다. 그 장대하면서도 자질구레한 서사의 재구성은 권태를 모르고 반복되었다. 이런 과정은 딱히 대화를 나누는 상담(相談)이라기보다 한 사람의 독백을 경청하는 일에 가까웠다.

 

“끝나버린 이유라도 알고 싶다.” 친구는 급기야 헤어진 남자를 만나고 왔다. 대화내용을 녹음했고 녹취를 풀었다며 노트를 폈다.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기자의 취재수첩처럼 글자가 어지러이 빼곡했다. 그 말들을 근거 자료 삼아 이별의 이유를 추론하는 것이다. 이 타자를 향한 끊임없는 탐색, 안달, 몸부림. 이쯤 되면 유행가 가사 대로 사랑이 죄다. 더 많이 사랑한 죄로 ‘을’이 된 자가 자처하는 밤샘 노역이다. 스스로 납득할 논리를 만들어가는 무모한 노동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별을 못 견디는 게 아니라 이유 없는 이별을 못 견디는지 모른다. 하지만 직간접 경험을 종합해볼 때 대개의 이별에는 이유가 없다. 통보와 수용만 있을 뿐.

 

‘아직도 여기는 너라는 이름의 거울속인가 보다…내 안에는 너로부터 도망갈 곳이 한 곳도 없구나’ (김혜순 「한 잔의 붉은 거울」 중)

 

감옥 같은 시간을 여전히 어정거리는 친구는 이런 말을 했다. “그동안 누가 이혼하거나 헤어졌다고 하면 차라리 잘된 일이야. 빨리 잊고 새 출발하라고 말했는데, 내가 쉽게 말했더라. 수시로 불쑥 닥쳐오고 그때마다 견뎌야하는 것들이 있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은 거였어.” 속으로 뜨끔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더니 긴 이별에 지치던 참이었다. 아픔을 외투처럼 간단히 벗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어서 잊으라고 채근한 내가 부끄러웠다.

 

한 가지 배웠다. 친구가 되기는 쉬워도 친구로 살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친구는 지기(知己)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란 뜻이다. 한 존재를 안다는 것은 그의 어둠을 아는 것. 슬픔공동체 되기다. 난데없는 일들에 같이 분노하기. 두서없는 말들을 묵묵하게 들어주기. 그건 단기 속성반도 완전 정복도 없다. 영어사전을 씹어 먹으며 외국어를 익힌다는 공부법처럼 친구의 단단한 아픔이 물컹물컹 해질 때까지 같이 오래오래 ‘수다의 입김’으로 녹여주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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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장례식

[차오르는말들]

 

엄마, 오늘 하리 죽은 지 24일째야.” 딸아이가 무심히 말했다. 하리는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다. 아니다. 키웠다고 말하기엔 해준 게 없다. 심지어 나는 얼굴도 몇 번 못 보았고 쓰다듬어 보지도 못했으니까.

나는 그간 애완동물을 키우자는 아이들의 집요한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키우는 건 너네로 족하다고 공언했다. 집에 화초 한 포기 갖다 놓고 물주는 일도 내키질 않았다. 한 생명을 책임지는 일이 우주를 떠받드는 일과 다르지 않았기에 개나 고양이 털 한 올이라도 더해진다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아들의 친구가 기르던 고양이가 왔다. “생후 10개월 밖에 안 됐는데 두 번이나 주인이 바뀌는 고양이가 딱하다는 말에 나도 맘이 흔들렸다. 아들은 용돈을 아껴 사료비를 대고 대소변을 치우는 등 정서적 물질적 양육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고양이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허나 세상사 얄궂다. 고양이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두문불출 칩거했다. 나는 발길이 자꾸 갔다. 집안 어느 구석에 체온덩어리가 있다는 게 마음 쓰이지 뭔가. 이것이 말로만 듣던 밀당인가. 살금살금 들어가면 쌀쌀맞게 야옹~’ 했다. 그러길 일주일 지나자 고양이는 아들의 품에 공처럼 폭 안겨 있곤 했다. 아들은 고양이랑 새벽까지 놀다가 잔다고 으스댔다. 녀석은 마침내 내게도 야광봉 같은 눈길을 주었다. 정면으로 용안을 마주한 날, 나는 하리야부르며 정식으로 통성명을 했다. 아들은 고양이가 적응을 한 것 같다며 중성화 수술을 시키러 병원에 간다고 했고, 그날 오후 비보가 날아들었다. 하리가 마취 쇼크로 운명했다는 것이다.

열사흘 만이다. 만나자 이별이다.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다. 비유가 아니라 수의사는 골프 치다가 골프채에 벼락 맞아서 죽을 확률만큼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 아들은 눈물바람 하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개나 고양이가 죽으면 어디로 어떻게 가는가. 알아봤더니 일반쓰레기 봉투에 분리배출 하는 것이라고 규정이라고 했다. 철렁했다. 속이 비치는 홑겹 비닐에 싸여 오물들과 뒤섞여 내동댕이쳐지는 존재라니. 남편은 반려동물 장례식장을 알아봤다. 딸아이는 고양이 장례식에 간다며 검은 옷을 챙겨두고 잠들었다. 남편과 아이들, 아들 친구는 하리의 장례 절차를 마치고 강화도의 한 사찰 근방에 뿌려주었다.

한달 후, 고양이 장례비용으로 쓴 20만원의 카드대금이 나왔다. 사랑의 시간이 가면 통속의 시간이 온다더니, 아니 사랑은 끝나도 카드 값은 남는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예기치 않은 지출로 잠시 근심하는 엄마와 달리 딸아이는 오늘도 하리의 생전 동영상을 틀어놓고 화면에다 얼굴을 들이밀고 같이 갸르릉거린다. “엄마, 하리가 10개월에 죽었잖아. 그게 사람 나이로 치면 17살이래. 2. 세월호에 죽은 언니오빠들이랑 신세가 같아.” 애도란 자기 안에 타자의 묘소를 마련하는 일(자크 데리다)이라고 했던가. 엄마가 세속의 시간을 사는 동안 열세 살 딸아이는 애도의 시간을 살고 있다. 하리가 죽은 지 24. 단원고 아이들이 죽은 지 164. 어른들 잘못으로 별안간 떠나간 무구한 영혼들, 그곳에서 다 같이 행복하길.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굴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황인숙,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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