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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만남의 최전선 글쓰기 수업을 두 번 마쳤다. 그 사이 시아버님이 ‘일과성뇌허혈’로 쓰러졌다가 열흘 만에 퇴원했다. 뇌경색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마비는 없다. 가슴이 철렁했다. 존재를 고민했다. 며느리라고 해서 특별히 하는 일은 없다. 병원 몇 번 드나드는 것쯤이야. 헌데 그냥 서글펐다. 나는 기차시간표처럼은 살 수 없는 인생인 거 같아서다. 예외상태가 정상상태인 그런 삶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잔잔하다가 휩쓸리다가 가라앉다가 떠내려간다. 바다가 집이다. 글쓰기 수업은 재밌다. 사람 만나는 일은 비슷한가 보다. 집단 인터뷰하는 느낌이다. 귀 쫑긋. 토끼처럼 듣고 참새처럼 떠들고 애인처럼 교감한다. 에너지가 엄청 쓰인다. 일 하는 동안은 즐겁지만 끝나면 봉인이 풀리는 듯 피로가 확 몰려오는 증상까지 인터뷰랑 똑같다..
김호식 노들장애인야학 학생 - 루쉰에 빠지다 서울메트로 4호선 수유역. 당고개행 열차 종착역 부근이다. 마을버스로 네다섯 정거장 더 들어간다. 횡단보도 앞에 꽃집이 반갑다. 노란 프리지어를 한 묶음 들고서 골목 안쪽 뻥튀기 가게를 기웃거린다. 온갖 종류의 옛날 과자와 추억의 난로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주인을 부르자 아저씨가 어디선가 한달음에 달려온다. 아직은 CCTV가 아닌 불 꺼진 난로가 빈 가게를 지키는 동네, 한적한 주택가 지하 셋방에서 김호식은 ‘루쉰’을 기다리고 있다. 김호식은 뇌병변1급 장애인이다. 학습활동보조인 노규호의 도움으로 매주 일요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책을 읽는다. 커다란 모니터에 스캔한 책 파일을 띄워놓고 한 줄 한 줄 따라가며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이날은 루쉰 산문집 제3장 ‘유화진 군을 기념하며’를 읽을 차례..
박혜숙 교사 - 학교 밖으로 행군하라 남산골, 개나리꽃보다 먼저 그가 왔다. 사뿐사뿐 비둘기걸음으로. 커다란 배낭 매고 주렁주렁 선물꾸러미 들고 수유너머를 찾았다. 첫 방문이 아니다. 슬며시 혹은 우르르 여러 차례 들렀다. 소문에 따르면 그는 ‘울산에서 아이들 데리고 다니는 선생님’으로 통한다. 공식용어로는 풍경지기 박혜숙. 올해로 15년차 교사, 독서모임 을 8년째 이끈다. 풍경이 낳은 아이들이 400여 명. 아이들과 매달 책을 읽고 토론한다. 방학이면 떠난다. 저자와의 만남은 덤이다. 조국, 홍세화 강연장을 찾아가고 우석훈, 고미숙을 초청해 생얼을 대면한다. 책장에서 날아간 앎의 씨앗이 풍요로운 인연의 꽃밭을 피워냈고 울산에서 시작된 풍경소리가 맑고 향기롭게 울려 퍼졌으니, 이름대로 뜻을 이뤘다. 드물고 귀한 실천. 지난 수년간의 풍경 ..
어부 / 김종삼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 김종삼 시집 민음사 내가 사랑하는 것들. 할증요금 올라가는 택시에서 듣는 옛날가요. 십대후반부터 이십대 초반까지 듣던 주옥같은 노래들. 밤마다 심취해 베껴쓰던 노랫말들. 토씨하나 안틀리고 재생가능. 오늘같은 경우라면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 촛불. 한강변 끼고 달리면서.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했는가. 바람아 멈추어라 촛불을 지켜다오. 모든 사랑은 바람 앞의 촛불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약 일이십분정도. 밤과 침묵의 현전. 경험할 순 있지만 말할 수 없는 바깥을 유람한다. 눈치..
박혜숙 아동문학평론가 - 인문학과 아동문학이 만났을 때 # 0. ‘글 쓰는 사람’을 글로 알려야할 땐 꾀가 난다. 그냥 글 한 편 복사-붙여넣기 해서 보여주면 간단할 텐데 싶으니 말이다. 사실, 모든 글은 자기고백이다. 타자를 경유한 진실 드러내기 혹은 자기가 감각한 세계 잘라내기다. 단편적인 글에서도 ‘존재의 슬로건’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위클리수유너머의 더 리더: 동화책 읽어주는 여자, 박혜숙(달맞이) 글이라면 이런 대목이다. ‘이런 게 바로 우리가 지향하는 삶이 아닌가! 누군가에 의해 촉발되고, 누군가를 촉발할 수 있는 생명력.’ 파스텔 색감 몽글몽글한 그림동화에서 생의 이치를 콕 끄집어내는 달맞이. 그의 글엔 늘 뭔가 있다. 예리하고 공정하고 따뜻하고 총체적으로 웅숭깊다. 달맞이꽃이 피기까지, 삶의 행로가 궁금했다. 어찌 나 뿐이겠는가. 댓글 따윈 ..
김대경 교사 - 강남에서 교사로 산다는 것은 계절이 네 번 바뀌었습니다. 다양한 제목과 모양의 책이 오십 권 넘게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위클리수유너머 에는 창간부터 세 분 선생님이 책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달맞이 박혜숙(아동문학평론가) 풍경지기 박혜숙(국어교사) 김대경(국어교사)입니다. 둘은 이름이 같고 또 둘은 직업이 같습니다. 우연히 짝을 이뤘습니다. 그래서 편집팀에서 가끔 혼선을 빚기도 합니다. ‘이번에 어느 박혜숙 선생님이지?’ ‘저번에 김대경샘 학교 아이들 얘긴가?’ 이럽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나무처럼 글에도 결이 있으니, 세 분에게서 느껴지는 글의 파장이 다른 듯 닮아있는 까닭입니다. 어쩌면 예정된 인연입니다. 그들은 반평생 읽어온 책, 갈망한 삶이 놀랍도록 비슷했습니다. 책과 씨름하며 열심히 산다고 살다가 어느 날 다다른 방황의 ..
박정수 - 청소년을 위한 꿈의 해석 "새책 왔숑~ 새책 왔숑~" 박정수 수유너머R연구원의 책이 나왔어요. 제목은 바로 어제. 3월 15일 (화) 이날은 수유너머R 화서회 있는 날. 라고 ㅋㅋ 연구원들이 모여서 책 읽고 회의하고 수다 떨고 그럽니다. 지난 겨울, 박정수가 말했죠. "우리 화서회 하는 날, 하루라도 밥 같이 해먹자~" 그래서 시작됐습니다. 화서회 밥회동. 첫 메뉴는 산채비빔밥. 연구실 주방시설이 열악한 관계로 각자 집에서 나물을 준비해왔죠. 고사리, 콩나물, 시금치, 무나물, 오뎅볶음, 멸치, 묵은 김치 등등. 풍성한 밑반찬이 오르고. 현식이는 난로 위에서 계란후라이를 했다죠. 소꿉놀이에 들어있는 모형보다 더 정교한 계란후라이로 산채밥의 화룡점정을 찍었습니다. (비빔밥에) '색감이 살아있다!' 탄성을 지르며 참기름 한방울 떨어..
깨어나기 컨베이어벨트 돌아가듯 날마다 원고 찍어내던 때가 있었다. 재봉틀 드르륵 박고 (문장을 쓰고) 단추 달고 (제목 달고) 끝도 없이 나오는 실밥 뜯고 (교정하고) 그러다 보면 하루가 훌쩍 저물었다. 이젠 그 짓을 못하게 됐다. 몸이 녹슬었다. 아주 다행이다. 쉽게 글이 써진다는 사실이 반은 대견하고 반은 수치였다. 익숙한 생각, 진부한 표현들을 국수 가락처럼 쭉쭉 뽑아낸다는 것이 부끄러웠고, 노동을 통해 생산에 참여하고 아이들 입에 밥을 넣어준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었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고.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그래서 아무 것 아닌 정지의 느낌. 인생은 너무 길다는 한탄이 나를 지배했다. 깨어 있는 것도 아니고 잠든 것도 아닌 불면의 감각으로 일 년 쯤 산 것 같다. 나 이제 사보에 글 쓰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