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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공간 - 카프카와 작품의 요구 모리스 블랑쇼가 누구냐. '쓴다는 것은 매혹이 위협하는 고독의 긍정으로 들어서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사람이다. 더없이 클래식한 표현. 왠지 프랑스에서 태어나 걸음마 떼면서부터 철학을 시작하여 문청을 거쳐 사상가로 깊은 주름을 만들어낸 프렌치코트 깃 세운 노신사가 떠오른다. 맞다. 1907년에 태어나서 2003년에 돌아가셨으니 참 오래 사셨다. 철학과 문학비평 등등 작품이 많다. 이 주저서로 알려졌다. 그 책을 넘기면 '철학책'스러운 관념어들이 나열돼 있다. 본질적 고독, 문학의 공간, 작품과 떠도는 말, 릴케와 죽음의 요구, 영감, 문학과 근원적 경험 등등. 예상대로 읽기가 수월치 않다. 강밀도가 높다. 그러니 고급수제초콜릿처럼 한번에 읽어치우지 말고 혀에 품고 녹여야한다. 글을 눈에 바르고 있으면..
명동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 짙은 보라색 어둠이 칠해진 거리. 군데군데 간판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황량한 대로변엔 삶의 배설물이 낭자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캔이 구르고 비닐이 저 홀로 춤춘다. 옷깃을 세운 남자가 단역배우처럼 구부정한 뒷등을 보이고 사라진다. 정지화면 같은 적막함 뚫고 어디선가 쓰륵쓰륵 싸리비질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산사의 정적을 깨우는 목탁소리 같기도 하고 아침밥을 짓는 어머니의 쌀 씻는 소리 같기도 하다. 반복적인 만물의 기척에 산새가 파닥거리고 아이들이 눈 뜨듯이, 연두색 빗자루가 지나간 이곳 거리도 서서히 잠에서 깨어난다. 새벽 5시 반, 해님보다 먼저 찾아온 환경미화원으로부터 명동의 하루가 시작된다. “새벽 4시 넘어 일어나서 첫차 타고 나와요. 겨울이 추우니까 제일 힘들죠. 더운 게 낫긴 한데..
2011년 1월 22일, 명동유람 2011년 1월 22일 토요일 오후 2시. 수유너머R에서 마련한 이상엽 사진강좌 출사수업이 명동에서 진행됐다. 이상엽 선생님 꼬드겨서 강좌를 기획한 사람으로서 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그날이 나의 생일이라도. 처음엔 생일이라서 빠지려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생일이니까 가보고 싶었다. 서울을 사랑한 여인, 마흔 살 생일에 국내 최대 번화가 명동을 걷는다. 카메라를 들고서. 사진강좌 제목이 ‘마틴파처럼 찍기’이다. 난 마틴파를 모른다. 앞의 이론수업도 안 들었다. 게시판에 올라온 사진 석 장 훑은 게 전부였다. 처음엔 그저 선생님과 수강생에게 인사만 하고 따라다니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엽 선생님이 내 디카를 플래쉬 강제발광으로 설정하고는 테이블에 놓인 케첩 한 장 찍어주고 ‘이렇게 찍으면 마틴파 사진’..
홍대 청소노동자 농성장에서 지난 월요일에 홍대 앞에서 약속이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3년 만에 연락이 닿은 과거 동지들과의 모임이었다. 1월 2일 청소노동자 170명 해고된 후부터 홍대 앞은 더 이상 나의 놀이터일 수만은 없었다. 원래 계획은 일찍 나서서 홍대 농성장에 들르려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회포를 풀기 위해 만난 선배들에게 빨리 밥 먹고 가보자고 할 수도 없었다. 여태 뭐하다가 이제 와서 유난 떠는 거 같아서. 암튼 차일피일 하다가 오늘 저녁에 홍대 근방에 아는 언니와 일이 있었다. 밥을 먹으면서 눈치를 보다가 슬쩍 운을 뗐다. “잠시 가보자. 월급이 75만원이었대. 점심갑은 한달에 9000원이래. 홍대 총학생회장이 외부세력 운운하는 헛소리 들었어?” 난 괜스레 흥분해서 횡설수설 떠들었다. 다행히 언니가 동의해서 편의점에서..
글러브 - 울기엔 좀 미안한 청각장애인 신파극 이것은 청각장애인야구단 영화다, 라고 할 때 자동으로 연상되는 감동코드가 있다. 는 그것을 배반하지 않고 정확히 그려낸다. 재밌고 뭉클하다. 두 시간 반이 지루하지 않게 휙 지나가고 눈물 한 사발 뽑아낸다. 대사발 유려하고 배우들 연기 탄탄하다. 남자주인공 정재영은 진짜 야구 선수 같다.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야구선수다. 근데 영화를 보고 나면 허전하다. 교과서적인 메시지로 꽉 차있어 울림을 주는 여백이 부족하다. 장르적인 전형성을 비켜가지 못해 안타깝다. 어쨌거나 똑 떨어지는 영화란 점에서 이야기꾼 강우석 감독의 우월한 능력은 맞는데, 삶의 이면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그가 ‘장인’은 아닌 거다. 예전에 장애인 단체 간행물을 2년 간 맡았었다. 장애인스포츠 동호회 취재를 거의 매달 다녔고, 서..
편지 지금 파리는 새벽 한 시 반이고 남자친구도 강아지들도 다 잠이 들었어요. 공부하던 책을 내려놓고 멍하니 앉았다가, 잠 안 오면 한잔씩 마시려고 사다둔 술을 병 채로 마시고 있어요. 그러니까 새벽이고 술을 마셨으니까 감정적이어도 이해해달라고 자기변명을 하는 중이에요. 아니 이렇게 해야 누군가에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쓸데없는 어리광을 부려보는 중이에요....떠나...온...거 후회해요. 이제는 밤에 잠도 잘 이루지 못할 만큼. 왜 그때 떠나왔을까. 뭘 배우겠다고 떠나왔을까. 나 살던 공동체에서도 못 찾던 답이 여기에 있을 리 만무한데. 전 이제 비판 따위 할 자격도 없는 놈인 거 같아요. 언니는 자본주의가 뭐라고 생각해요? 소작농들의 처절한 일 년 농사를 다 앗아가는 지주나 노동자들의 노동의..
삼성노동자 자살 "12시간 근무 기본…나 죽었다" '삼성LCD 고 김주현님(남,26) 빈소 순천향천안병원에 와 있습니다. 사측관리자들 말고는 너무도 적막하네요. 조문, 내일 11시 기자회견, 반올림카페에 격려글 올리기 등 마음과 힘을 모아주세요.' 어제 오후에 공유정옥 활동가에게 문자가 왔다. 삼성전자 직원이 또 죽었다니 무슨 일인가 기사를 찾아봤다. 하루 12시간-15시간 노동강도를 견디지 못한 26세 남성의 자살이다. 전혀 몰랐다. 포털화면에는 삼성가재벌녀 이부진 이서진의 패션감각 분석 기사가 떠있었다. 그동안 삼성에서만 100여 명의 노동자가 죽었고 죽어 가고 있으며 죽을 것이다. 전에 삼성일반노조 위원장님이 삼성전자에서 직원 뽑는 방법을 들려주셨다. 실업계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 관광버스에 태우고 가서 강도 높은 체력테스트를 거친 이들만 합격시킨다..
꽃수레의 사랑으로 그저께 남편이랑 싸웠다. 오랜만의 심각한 다툼이다. 무릇 부부싸움이 그렇듯이 사소한 안건이 싸우는 동안 인격 자체를 문제 삼는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남편의 감정 그래프는 원래가 잔잔한 해수면이고 나는 파도치는 유형이다. 그래서 싸움의 러닝타임은 길게 가지 않는다. 내가 폭풍 분노를 퍼부으며 눈물을 찍어내다 보면 남편은 쿨쿨 자고 있다. 허탈하다. 나 홀로 분노의 뒤안길 어슬렁거린다. 하나둘 케케묵은 원한감정이 안개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마치 버스가 흙탕물 튀기고 지나간 것처럼, 순식간에 기억의 오물을 뒤집어쓰고서 나는 맹렬히 후회한다. ‘그 때 결판을 내렸어야 하는데......’ 남편이 ‘꼴도 보기 싫어서’ 마루에다 이불을 폈다. 평소에 아빠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야 잠이 잘 온다며 아빠 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