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블랑쇼가 누구냐. '쓴다는 것은 매혹이 위협하는 고독의 긍정으로 들어서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사람이다. 더없이 클래식한 표현. 왠지 프랑스에서 태어나 걸음마 떼면서부터 철학을 시작하여 문청을 거쳐 사상가로 깊은 주름을 만들어낸 프렌치코트 깃 세운 노신사가 떠오른다. 맞다. 1907년에 태어나서 2003년에 돌아가셨으니 참 오래 사셨다. 철학과 문학비평 등등 작품이 많다. <문학의 공간>이 주저서로 알려졌다. 그 책을 넘기면 '철학책'스러운 관념어들이 나열돼 있다. 본질적 고독, 문학의 공간, 작품과 떠도는 말, 릴케와 죽음의 요구, 영감, 문학과 근원적 경험 등등. 예상대로 읽기가 수월치 않다. 강밀도가 높다. 그러니 고급수제초콜릿처럼 한번에 읽어치우지 말고 혀에 품고 녹여야한다. 글을 눈에 바르고 있으면 풍미가 느껴진다. 시 같은 책이다. 단숨에 안 읽히는 도도함에 은근히 끌린다.
<카프카와 작품의 요구>는 카프카에 대한 블랑쇼의 고유한 해석이다. 블랑쇼와 카프카가 만났으니 의미는 금상첨화일 텐데 내용은 설상가상이다. ㅜㅜ 어흑. 블랑쇼는 카프카의 <일기>와 작품을 중심으로 글을 풀어간다. 대략 내 방식으로 정리해보면, 카프카의 <성>과 <소송>에는 공통적으로 늘 무언가를 찾아 헤매지만 중심에 가닿지 못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카프카의 존재조건과 관련이 있다. 카프카는 유대인인데 히브리어를 할 줄 몰랐다. 독일에서 살았고 독일어로 글을 썼다. 원초적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그는 추방된 자, 헤매는 자이다. 블랑쇼는 그에게 시오니즘이면서 반시오니즘이 공존한다고 말한다. 카프카의 당시 시오니즘은 현실에서 구현될 수 없는 이상향에 대한 희구를 의미하고, 시오니즘과 반시오니즘의 길항 속에서 카프카의 작품이 태어났고 구원받았다고 읽는다. 카프카는 엄격하고 냉정하고 치밀했다. 쓴다는 것을 구원이자 해방의 통로로 삼았다. 자기해방과 긴밀히 연결된 글쓰기를 실천했다. 죽음의 폐허 위에 피는 꽃만 문학인 거다. 카프카에겐.
* 젊은 카프카
카프카는 순수한 문학적 열정을 가졌고 구원에 대한 염려가 컸다. 글쓰기는 진정한 절망, 글 쓰는 이로부터 펜을 앗아 가는 절망 속에서만 그 근원을 갖는다고 했다. 1912년까지 글을 쓰려는 그의 욕망은 매우 컸으나 파괴력 넘치는 야성적 힘으로 그는 거의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다. “이 고양된 순간을 욕망하는 만큼이나 두려워했다.” 여러 면에서 카프카는 자신의 내면에서 글쓰기 취향이 싹트고, 글쓰기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또한 글쓰기의 어떤 요구들을 알아차리면서도 거기에 적절한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인가 증거는 갖추지 못한 젊은 청년이었다.
* 갈등
카프카에겐 직업이 있고, 가족이 있다. 그는 세계에 속해 있고, 또 그러해야만 한다. 세계는 그에게 시간을 허락하지만, 그 시간은 세계에 달려있다. 일기는 적어도 1915년까지 자살하려는 생각이 되풀이 된다. 자기시간, 즉 시간, 신체적 힘, 고독, 침묵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순조로운 여건이란 없다. 작품의 요구에 ‘그의 모든 시간’을 쏟는다 하더라도, 그 ‘모두’가 아직은 충분치 못하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작업에 시간을 바치고 글 쓰는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글 쓰는 시간이 더 이상 작업이 아닌 다른 시간으로 들어가, 시간이 상실되는 지점, 시간의 부재가 주는 매혹과 고독으로 들어서는 그 지점에 다가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이렇게 연속적으로 써 가고, 육체와 영혼이 또한 완전히 열린 상태일 때에만 가능하다.” 카프카에게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세계는 좀 더 적어야만 했다. 카프카는 작품의 요구와 자신의 구원이라 이름 할 수 있는 요구를 분리시키지 않으려 했다.
* 문학을 통한 구원
카프카는 남들에게도 자신에게도 자신이 사라지는 소름끼치는 자기붕괴상태에서 글쓰기 요구의 무게 중심을 확인했다. 그의 젊은 시기의 작업은 심리적 구원의 수단으로서 “단어 하나하나 그의 삶에 이어질 수 있는” 창작, “그를 자신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자기에게로 이끌어 오는” 창작, 그러한 창작의 노력이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은총의 기다림 혹은 막연한 예언적 단언이 아닌, 보다 단순하고 절박한 그 무엇이다. 이를 테면 침몰하지 않으리라는 희망.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글을 쓸 것이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나의 투쟁이다.”
* 긍정적 경험
이 시기에 세계의 상실이 어떻게 긍정의 경험으로, 또 다른 세계에 대한 경험으로 전환하는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카프카에게서 세계로부터 쫓겨난다는 것은 가나안으로부터 쫓겨나 사막을 방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세계 바깥으로 한없이 떠도는 이주의 길로 내쫓긴 그가 이 바깥을 또 다른 세계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이 떠돎을 새로운 자유의 원리이자 근원으로 만들기 위해 끝없이 투쟁해야하는 것처럼.. 출구도 확신도 없는 싸움, 여기서 그가 이루어야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상실, 유배의 진실, 흩어짐 그 한가운데로의 회귀이다.
카프카는 분명 자신의 “이 모든 문학”을 마치 “새로운 카발라”, “그 사이 시오니즘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발전할 수도 있었을 새로운 비밀 교리”처럼 암시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가 왜 시오니스트이면서 동시에 반시오니스트인가를 보다 잘 이해하게 된다. 시오니즘은 유배의 치유이고, 지상의 체류 가능성에 대한 긍정이며 유태민족의 거처는 한권의 책, 곧 <성경>일 뿐만 아니라 땅이기도 하며, 시간의 흐름 속의 흩어짐은 더 이상 아니다. 이러한 화해를 카프카는 진정으로 바라고, 비록 그가 제외되더라도 그는 화해를 바라고 있다.
“글을 쓴다. 그렇다. 계속해서 글을 쓴다. 하지만 사라져 없어질 것을, 고립된 것을 무한의 삶으로, 우연에 속하는 것을 법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만 글을 쓴다.”
문학은 예속을 벗어나는 역량, “모든 것이 목에 걸린 듯 느껴지는” 세계의 억압을 물리치는 힘으로 예고되고 있다. 문학은 나에게서 그로 가는, 카프카의 고뇌였던 자신에 대한 관찰에서 견딜 수 없는 현실을 넘어 또 다른 세계, 자유의 세계로 이르는 드높은 관찰로 가는 해방의 통로이다.
* 진리 바깥의 발걸음: 측량사
측량사(<성>의 주인공)는 처음부터 자신의 세계를, 자신의 고향을, 여인과 아이들이 있는 삶을 영원히 거절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처음부터 그는 구원 바깥에 존재한다. 그는 유배에, 자신의 거처가 아닐 뿐더러 자기 자신을 벗어나 바깥 그곳에 존재하게 되는 장소에, 모든 것들이 부재하는 것만 같고 우리가 붙들고 있다고 믿고 있는 모든 것이 빠져나가는 절대적으로 내밀성을 박탈당한 영역에 속해 있다.
<소송>의 요제프K는 첫 문장부터 세계로부터 배척당하였음에도, 상황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며, 자신은 여전히 세계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제프K의 잘못은 자신이 변함없이 속해 있다고 믿고 있는 그 세계 속에서 소송에 이기기를 바란다는 데 있다. 피고들을 빛나게 하고 그들을 여인들에게 호감이 가도록 하는 아름다움은 그들 자신의 분열의 그림자, 보다 진정한 빛처럼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이다.
<소송>은 적어도 K에게 자신이 실제로 어떠한가를 알게 하고, 그가 좋은 일자리와 몇몇 대수롭지 않은 즐거움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실존을, 세계를 살아가는 자로서의 실존을 믿도록 허락하는 환상과 헛된 위안을 저버리게 한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소송이 진리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바깥에 관련된 모든 것, 추방의 힘에 의해 우리가 내던져져 있는 그 외부의 어두움과 같은, 실수의 과정이다.
* 본질적 과오
측량사는 요제프K의 잘못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 그는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가나안에서의 삶을 잃어버렸고, 그 세계의 진리는 지워졌다. 그러나 측량사는 카프카가 가장 심각한 과오라 일컫는 초조함의 과오에 끊임없이 빠져들기 때문이다. 실수 가운데의 초조함은 본질적 과오이다. “다른 모든 원죄를 낳는 인간의 두 개의 중대한 원죄는 초조함과 무관심이다."
클람(측량사가 성에서 만나려는 자)은 결코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다. 측량사는 그를 보고 싶어 하고, 그를 보고 있다. 지고의 목표인 성도 결코 시선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로서의 성은 언제나 그에게 열려 있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형상들은 실망스러운데, 성은 초로한 시골 사람들의 무리지은 모습에 불과하고, 클람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뚱뚱하고 몸이 무거운 한 남자일 뿐이다. 평범하고 누추한 것이 전부이다. 이것이 또한 측량사이 행운이고, 이것이 진실, 즉 이미지들이 갖는 기만의 정직이다.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지 않다. 이미지들은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 갖는 매혹의 관심을 보증해줄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이렇게 하여 이미지는 이미지가 진정한 목표가 아님을 상기시켜 준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의 무의미함 가운데 또 다른 진실이 잊혀지고 있다. 이미지는 그럼에도 이 목표의 이미지이고, 이미지는 목표의 빛남과 그 표현할 길 없는 가치에 기여하며, 이미지에 애정을 갖지 못하면 이미 본질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이 잊혀지고 있다.
초조함은 매개 속에서 즉각적 형상을 알아보지 못하게 방해함으로써 종결의 다가옴을 무산시킨다. 목표가 장애로 변하고 또한 장애가 목표에 이르는 매개로 변함으로써 불가피하게 무한정 깊어만 가는 거리의 체계적 증식, 이 모든 강력한 비유는 더 높은 세계의 진리를 형상화하거나 그 초월성을 형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형상화의 행복과 불행을 형상화한다.
* 작품의 공간
카프카는 아마도 자신도 모르게 글을 쓴다는 것이 끝없는 과정 속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으며 고뇌, 초조함의 고뇌, 글쓰기의 요구에 대한 세심한 염려로 인해 그는 유일하게 완성을 허락하는 도약, 기약 없는 것에 (일시적인) 종결을 가져다주는 근심 없는 낙천적 믿음에 대해 결코 자신을 용납하지 않았다.
카프카는 종종 몇 줄의 표현으로 핵심에 도달할 수 있는 명민한 재능의 소유자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점차 세심함, 차분한 접근, 치밀한 정확성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현실로부터 추방된 자는 혼돈의 미망, 이미지라는 어중간한 것에 순식간에 빠져들게 되어 있다. 바깥에서 낯섦과 상실의 불안정 속에서 헤매면 헤맬수록, 엄격하고 신중하고 빈틈없는 정신에 도움을 청해야 하고, 이미지의 다양성을 통하여 절제되고 한정된 외현의 이미지를 통하여 단호하게 유지된 일관성을 통하여 부재에 마주해야 한다... 무제한의 아득한 깊이에, 엄청난 불행에 연루된 자는, 그렇다. 과도할 정도의 결함 없고 빈틈없고 불화 없는 지속성의 추구를 선고받았다.
참을성과 면밀함과 냉정한 다스림은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불가피한 자질들이라면, 그러한 자질은 끊임없이 무한을 미결의 것으로 변모시키면서 해방을 늦어지게 하는 결함이기도 하다.
* 예술과 우상숭배
원래 카프카에게는 종교적 요구를 문학적 요구로 이어가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특히 만년에는 문학적 경험을 종교적 경험으로 이어가고, 믿음의 사막에서 더 이상 사막이 아니라 그가 자유를 돌려받은 또 다른 세계로서의 세계에 대한 믿음으로 옮겨가면서 문학적 경험과 종교적 경험이 구분되지 않고 혼동되어 가는 성향을 보인다. “나는 지금 또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카프카는 자신이 볼 때 인간은 가나안 쪽에서 약속의 땅을 찾든가 사막이라는 또 다른 세계 쪽에서 그것을 찾든가 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인간에게 제3의 세계란 없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덧붙여 말한다... 예술가, 즉 카프카 또한 자신의 예술에 대한 염려에서 그 근원에 대한 추구에 있어서 스스로에게 갈구했던 그 인간, 곧 ‘시인’은 그를 위해 단 하나의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자라고. 시인에겐 바깥만, 영원한 바깥의 반짝임만 존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