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22일 토요일 오후 2시. 수유너머R에서 마련한 이상엽 사진강좌 출사수업이 명동에서 진행됐다. 이상엽 선생님 꼬드겨서 강좌를 기획한 사람으로서 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그날이 나의 생일이라도. 처음엔 생일이라서 빠지려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생일이니까 가보고 싶었다. 서울을 사랑한 여인, 마흔 살 생일에 국내 최대 번화가 명동을 걷는다. 카메라를 들고서.
사진강좌 제목이 ‘마틴파처럼 찍기’이다. 난 마틴파를 모른다. 앞의 이론수업도 안 들었다. 게시판에 올라온 사진 석 장 훑은 게 전부였다. 처음엔 그저 선생님과 수강생에게 인사만 하고 따라다니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엽 선생님이 내 디카를 플래쉬 강제발광으로 설정하고는 테이블에 놓인 케첩 한 장 찍어주고 ‘이렇게 찍으면 마틴파 사진’이라고 했다. “그냥 찍어도 멋있네요? 모에요~” 진정 부러웠다. 셔터본능이 발동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마틴파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가서 찍어라. 훌륭한 것은 전부 눈에 띈다.”
길을 나섰다. 인산인해의 인파에 금세 휩쓸렸다. 나의 동행은 눈이 큰 그녀와 연구실 멤버인 단단이다. 셋 다 카메라가 달랐다. 나는 구닥다리 기본형 디지털카메라. 단단은 아이폰. 그녀는 DSLR. 나는 당최 뭘 찍어야할지 막막했다. 졸졸 따라다니면서 물었다. “마틴파의 특징은 뭐야?” “일상적인 풍경 속에 숨어있는 현대인의 욕망을 강렬한 컬러로 담아낸 사진가래요.” 도시와 욕망. 두 가지 단어를 떠올리면서 셔터를 눌렀다. 찍어놓고 보면 창피했다. 마틴파의 사진은 키치적인 예술품인데, 내가 카메라에 담은 것은 유치원생이 색종이 오려 붙인 것처럼 조잡하기 짝이 없다. 누가 볼세라 얼른 삭제했다. 화려함이 욕망하는 것들. 꽃. 비즈. 퍼.
카페에서 몸을 녹이며 우리는 사진가의 위대함을 이야기했다. 사진은 아무나 찍을 수 있지만 예술품은 누구나 남기는 게 아니라는 처절한 깨달음. 마틴파가 그 작품을 얻어내기 위해 얼마나 다리품을 팔았을지, 추운 겨울에 손가락이 떨어져나가는 칼바람을 헤집고 다니며 얼마나 셔터를 눌러댔을지. 단단이 그런다. “원래 칼라사진이 더 찍기 어렵대요. 흑백은 구도만 잘 잡으면 분위기 있어 보여서 쉬운 측면이 있고요.” 그럴 것 같았다. 흑백사진이 밤이라면 칼라사진은 낮이다. 존재를 선명하게 드러내 밝혀주니까 어디 숨을 구석이 없었다.
사진은 관찰력을 길러준다. 같은 장소도 누구와 가느냐, 언제 가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카메라를 들고, 욕망이라는 키워드로 명동을 훑고 다닐 때 새로운 것이 보였다. 민소매 입고 아이스커피 들고 친구랑 수다 떨면서 설렁설렁 아이쇼핑 즐기던 도심의 산책로도, 최루탄 가스 피해 눈물 흘리며 골목으로 숨어들던 투쟁의 거리도 아니었다. 매장 입구에서 요란한 차림으로 일본어와 중국어를 구사하며 행인의 소매를 잡아끄는 언니들, 패스트 패션과 저가 화장품이 뒤범벅된 한류의 거리 명동은 낯설다. 하지만 어디로 갈지 고민하고 판단하지 않아도 된다. 곳곳에 조명과 화살표가 많다. 이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 간판이 네비게이션이다.
두 시간을 흘러 다녔다. 사람 표정도 가게 인테리어도 리어카 상품도 복제한 듯 똑같아서 슬슬 지겨워졌다. 흔히 소비와 쾌락을 등치시키는데 소비가 과연 쾌락일까. 똑같은 모양의 어그부츠와 똑같은 무늬의 기모타이즈를 입는 것이 어떤 즐거움을 주는 걸까. 현란한 시야노동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사는 일의 피곤함을 잠시 잊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고통을 고통으로 처방하기. 모두 같아짐으로써 각자 살아있음을 느끼는 기괴한 공간. ‘전체주의와 스펙터클의 중첩’으로 현대사회를 읽어낸 아감벤의 진단이 사무친다. 명동은 정체된 고속도로다. 빠져나갈 수도 속도를 낼 수도 없다. 다른듯 보이지만 비슷한 상품들. 그 차이를 헤아리는 소비-노동의 컨베이어벨트는 멈추지 않는다.
오후 5시. 조용히 집으로 가는 길. 지하철 타려는데 벨이 울린다. 이상엽 선생님이 케이크를 사놓았다고 하여 충무로로 발길을 돌렸다. 뒷풀이 자리. 무안함을 견디느니 뻔뻔함을 택하겠다는 듯, 나는 말했다. “제가 태어나길 잘 한 것 같아요. 안 태어났으면 오늘 사진 강좌도 없었을 테니까요.” -.- 케이크를 감사히 받아들고 자리를 떴다. 가족들과 기름진 저녁을 먹고 집에 와보니 박완서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소탈한 멋. 살뜰한 글. 충만한 삶. 죽음이 사라짐이 아니라 남겨짐인 사람도 있다. 많이 슬프지 않았다. 기사를 보니까 내가 태어난 71년에 첫 단편집을 내셨다. 잘살아보세의 요란한 풍악이 울려퍼지던 한국사회를 뭉근한 열정과 예리한 필체로 그려내시고는 작가로서 40년 생을 마감하셨다. 40년 전 태어난 한 여자가 명동을 해방군처럼 쏘다닌 2011년 1월 22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