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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와 서술어는 연인이다 一文一思 (one sentense one idea) 글쓰기 말고 글 고치는 일을 했었다. 원고 리라이팅. 교정과는 조금 다르다. 읽히지 않는 글을 읽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오탈자 수정은 물론 단어 교체, 문장 삽입, 문단 위치 변경 등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가 이뤄진다. 사보 기획자의 부탁으로 시작했다. 사보에 넣을 임직원 원고를 고치는 일이었다. 대부분 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쓴 글인데 상태가 심각했다. 딱딱한 전문용어가 난무하고 문장이 엉켜서 주어가 실종되기 일쑤였다. 앞에 한 말 뒤에 또 하고 중구난방에다가 결론도 모호했다. 견적이 안 나와서 울고 싶은 적도 많았다. 차라리 내가 새로 쓰고 말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야할지 막막했다. 계속 하다 보니 나중에는 요령이 생겼다. 이때 가장 먼저 한 일이 문..
인터뷰 현장스케치 # 술 나는 인터뷰를 사랑한다. 사람 만나서 얘기 듣는 게 좋다. 나는 술을 사랑한다. 사람 만나서 술을 마시는 게 좋다. 그래서 두개의 카드를 한꺼번에 써버리지 않는다. 아깝다. 인터뷰 마치고 가끔 밥 먹자고 해도 대체로 거절한다. 술 따로 밥 따로 인터뷰 따로의 원칙을 고수했다. 이상엽작가 취재 때 5년만에 금기를 깼다. 처음으로 처음처럼 마시며 인터뷰 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연구실 후배까지 셋이 소주 3병. 내가 일점오병쯤 마셨다. 술한모금 메모한줄. 취할만 하면 깼다. 어찌나 아깝던지. 이래서 음주인터뷰가 나쁘다. 취하려고 마시는 술. 취하지 못하니까. 그날 인터뷰 분위기는 좋았다. 화기애애했다. 술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원래 자기정리가 된 사람은, 자기가 삶에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
같은 표현을 두 번 쓰지 마라 접속어 12매 분량을 써야하는 원고가 13매 써졌다. 원고 1매를 줄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두 세 문장을 덜어내는 것도 있지만 글의 구조를 무너뜨리지 않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접속사’와 ‘반복어휘’ 걷어내기다. 그냥 보면 안 보이는데 고르자고 작정하면 여기저기 박혀있는 접속어가 눈에 띈다 . 접속어가 많으면 글이 딱딱해지고 논리적, 설명적이 된다. 철학책을 생각해보라. 접속어에 자꾸 걸려서 글이 매끄럽지가 않다. 논조를 따라가기 어렵다. 나는 철학책에 한 줄 걸러 등장하는 접속어가 거슬려서 - 안 그래도 내용도 어려운데- 몰입에 곤란을 겪곤 했다. - 이상은 현실을 견디는 진통제다. (그러므로) 이상이 크고 높을수록 어지간한 통증은 다 녹아들어 간다. -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 내..
익숙해진다는 것 / 고운기 오래된 내 바지는 내 엉덩이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칫솔은 내 입안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구두는 내 발가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빗은 내 머리카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귀갓길은 내 발자국 소리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아내는 내 숨소리를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오래된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바지도 칫솔도 구두도 빗도 익숙해지다 바꾼다 발자국 소리도 숨소리도 익숙해지다 멈춘다 그렇게 바꾸고 멈추는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 고운기 시집 창비 오래될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 응당 그래야한다 여겼다. 골동품 같은 우정, 오래 가는 사랑. 한결 같은 마음. 세월은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고귀한 선물이다. 맞다. 그런데 한번 마음의 물길 트면 저절로 감..
이상엽 사진가 - 레닌에서 만화까지, 사진 그 가능성의 중심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 진은영 ‘긴 손가락의 詩’ 중에서 # 레닌, 기억 레닌이라니. 전생에 잠깐 스친 첫사랑처럼 흠칫 발걸음을 불러 세우는 이름이다. 우연찮게 일 년 터울로 세 권의 책이 나왔다. (2006) (2007) (2008) 각각 시집, 사진책, 철학서인데 표지나 표제가 빨갛다. 마치 3부작 같다. 아직도 참숯처럼 뜨거운 가슴으로 레닌을 호명하는 이들은 뉘신가. 시인 김정환은 레닌을 노래했다. 기억의 시간의식이 ‘지워지는 것’은 지나간 삶의 의미와 가치가 ‘짓밟히는’ 것이라며 “인간의 조직이 아름다웠던 시간”을 환기했다. 철학자 지젝은 레닌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레닌이 반복되어야 한다며 “아연할 정도로 실패한 이름 레닌” 안에는 구현해낼 가치로 충만한 유토피아적 불꽃이 있음을 ..
거리의 고통을 사랑하라 월악산 자락으로 짧은 여름휴가를 갔다. 남편 친구가 빌려준 펜션을 거점삼아 강으로 산으로 하루씩 다녀왔다. 낙동강 지류 어디쯤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아이들은 커다란 나룻배 모양 튜브를 빌려서 타고 놀았다. 나는 물이 무릎까지 닿는 바위에 걸터앉아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며, 깎아지른 절벽과 그것을 와락 껴안은 듯한 초록빛 강물의 절경에 심취해있었다. 덕윤이가 노를 저었다. 겁이 많은 꽃수레는 반은 웃고 반은 굳은 채 앉아있었다. 오빠에게 천천히 하라는 둥 뭐라고 쫑알쫑알 말소리가 들리더니 한참 후 보니까 배가 저만치 흘러가 있었다. 물이 ‘결코’ 깊지 않았다. 안전선 부근에서 노는 성인남자들 얼굴이 강물 위로 쏘옥 나와 있었다. 그런데 배가 자꾸 멀어져갔다. 아들 녀석이 방향을 틀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노..
설명하지 말고 보여줘라 군살을 제거하라 글의 목적이 과시가 아니라 소통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간소한 글이 좋은 글이란 얘길 했다. 글쓰기 실력은 필요 없는 것을 얼마나 걷어낼 수 있느냐에 비례한다. 이것을 안(못)하는 이유는 처음에는 뭐가 불필요한 요소인지 ‘무지해서’이고 나중에는 ‘귀찮아서’이다. 아. 찔려 -.-; 일단 습관을 들여놓아야 한다. 나도 한 1년 동안은 글을 쓰고 인쇄해서 모나미 적색볼펜으로 고쳐 버릇했다. 다 걷어냈다고 생각했는데도 나중에 인쇄물을 보면 또 거슬리는 단어들이 있었다. 아무쪼록 꾸준히 하면 문장 보는 눈을 기를 수 있다. 첨삭지도 할 때 사용하는 방법으로 괄호 치기를 권한다. 글에서 유용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모든 요소에 괄호를 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따로) 틈을 내서 -> 틈을 내서 ..
소통인가 과시인가 “나 글쓰기 좀 가르쳐 주라.” “그러고 싶은데.......어느 시인이 그랬거든. 효모에게 술이 되는 법을 가르칠 수 없듯이 시 쓰기를 가르칠 수 없다고. 난 그 말이 맞는 거 같아. 더군다나 내가 야매로 글쓰기를 배웠으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뭘 가르쳐줘야할지 모르겠어.” “그런 거 말고!” “그래. 뭐 기본적인 기사작성법 같은 건 알려줄 수 있지. 가르쳐줘? -.-;;” 얼마 전 친구와 나눈 대화내용이다. 요즘 들어 글 쓰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이 잦다. 그럴 때면 두 마음이 다툰다. 하나는 “진정 온갖 정성을 다해 가르쳐주고 싶다”이고, 다른 하나는 “내 앞가림도 못하면서 남 가르쳐줄 처지인가” 이다. 그러던 중 이 딜레마의 해결방법을 찾았다. ‘가르친다’ 대신 ‘나눈다’로 의미를 재규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