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 진은영 ‘긴 손가락의 詩’ 중에서
# 레닌, 기억
레닌이라니. 전생에 잠깐 스친 첫사랑처럼 흠칫 발걸음을 불러 세우는 이름이다. 우연찮게 일 년 터울로 세 권의 책이 나왔다. <레닌의 노래>(2006) <레닌이 있는 풍경>(2007) <지젝이 만난 레닌>(2008) 각각 시집, 사진책, 철학서인데 표지나 표제가 빨갛다. 마치 3부작 같다. 아직도 참숯처럼 뜨거운 가슴으로 레닌을 호명하는 이들은 뉘신가. 시인 김정환은 레닌을 노래했다. 기억의 시간의식이 ‘지워지는 것’은 지나간 삶의 의미와 가치가 ‘짓밟히는’ 것이라며 “인간의 조직이 아름다웠던 시간”을 환기했다. 철학자 지젝은 레닌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레닌이 반복되어야 한다며 “아연할 정도로 실패한 이름 레닌” 안에는 구현해낼 가치로 충만한 유토피아적 불꽃이 있음을 주장한다.
사진가 이상엽은 몰락의 땅, 레닌의 나라로 떠났다. 시베리아횡단열차 타고 9,938km를 달렸다. 도시 곳곳마다 거리의 풍경과 살을 섞으며 다리 아프게 서 있는 ‘지독히 쓸쓸한’ 레닌을 목도했다. 세상은 레닌에 대해 말하지 않음으로써 레닌을 보이지 않게 했지만 그는 “한 시대 종말의 지표이자 미래사회에 대한 묵시론적 풍경” 레닌을 되살렸다. 기록함으로써 기억했다.
레닌이 있는 풍경
늦여름 충무로. 오후6시 잔광이 흩날리는 길모퉁이에 시베리아횡단열차가 멈춘다. 좁은 계단을 내려오는 그의 어깨에 레닌의 쓸쓸함이 내려앉은 듯하다. 참 오래도, 그리고 멀리도 돌아왔다. 최루탄 매캐한 아스팔트로 출근하던 새내기 사진기자가 중년의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 사이 그는 20개국이 넘는 아시아 땅을 밟았으며 중국 10년, 러시아 3년, 긴 호흡으로 작업했다. 우리 땅에서는 이상한 숲 DMZ, 용산 철거민, 4대강 등을 기록했다. 미순이·효순이 사건 때 사진가 100인 시국선언을 주도했고, 얼마 전 4대강 살리기 사진가 80명의 서명도 이끌어냈다.
이밖에도 글과 사진에 두루 능한 이상엽은 칼럼니스트, 파워블로거, 기획자, 프레시안기획위원, 진보신당정책위원 등으로 활약하며 다큐사진가로서 외연을 넓혔다. 처녀작 <이상엽의 실크로드 탐사>부터 최근작 <사진가로 사는 법>까지 공저 포함 18권의 책을 썼다. 그는 넘치는 자, 행하는 자이다. 삶의 상상력이 남다르다. 준비해간 질문지가 빼곡했다. 그런데 그가 ‘삼겹살과 소주’를 시키는 바람에 얘기가 좀 더 길어졌다.
# 거리, 신념
“며칠 전 <한겨레>에 칼럼을 썼거든요. 사진하나 없이 8.5매 분량을 언어로만 얘기하려니 영 힘들더라고요. 사진가 강운구 선배 같은 경우는 영문학도 출신인데 그는 사진가이면서도 문자의 힘을 더 신뢰해요. 세상은 문자가 지배하고 사진은 보조라고 말하죠. 근데 난 아니에요. 나의 정체성은 사진이에요. 세상을 오직 사진-언어로 이야기하죠. 곧 이미지가 증언할 때가 온다고 봐요. 물론 다큐멘터리 사진에 캡션은 필수이고 문자의 도움을 받지만요.”
문자이냐 사진이냐. 낡은 담론을 펴려는 게 아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사진-언어’의 가능성에 그는 주목한다. 사진과의 인연이 각별하다. 이상엽은 진보월간지 ‘길을 찾는 사람들’에서 글밥 먹는 기자였다. 사진기자가 임금체불 때문에 카메라를 책상 위에 두고 나가버렸다. 주인을 잃은 카메라가 그를 애처롭게 쳐다보았다. 외면하지 못했다. 그는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사진과를 다닌 것도 아니고 아마추어로도 사진을 찍어본 경험이 없지만 사진부 발령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오랫동안 그림을 그렸다는 우쭐함 때문인지 모른다.”
일단 카메라를 들고 나갔다. 거리에서 사진 찍는 법을 깨우쳤다. 전선에는 헬멧과 방독면으로 중무장한 일간지, 주·월간지 기자들이 서 있었다. “어린 눈에 그들은 충분히 멋있었고 그들처럼 행동했으며 알량한 진보적 지식과 민중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을 갖고 카메라를 휘두르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그가 사진에 매료된 또 다른 이유는 현장성이다. 글을 쓸 때는 직접 나가지 않아도 자료를 참조하거나 전화 취재가 가능했다. 하지만 사진은 그게 불가능했다. 발로 뛰어야 성과가 나오는 사진의 정직함이 좋았다. 옴짝 달싹 할 수 없게 만드는 사진 한 장의 위력에 매혹됐다. 한눈팔지 않고 초지일관 사진과 열애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진을 날마다 낳았다.
# 진보, 물음
그는 요즘 진보신당 프로젝트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4대강을 기록한다. 그가 맡은 분야는 ‘하중도’이다. 하중도는 하천의 흐름에 따라 생겨난 섬으로 강의 유속을 느리게 한다. 배가 못 지나간다. 그래서 “하중도가 밀어버릴 대상 1순위”이다. 하지만 학자나 환경단체의 연구가 없다. 4대강사업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하중도와 둔치를 그가 ‘이미지’로 증언하는 것이다.
디아스포라연작금강
“강과 자연. 나는 그동안 자연을 어떻게 보았는가. 근본적인 고민을 하고 있어요. 자연에 대해 진보주의자는 딜레마를 갖고 있거든요. 자연을 그대로 두는 게 진보인가? 19세기에는 도시를 피해서 자연으로 가는 자가 보수주의였죠. 진보는 철도를 내고 자연의 변화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있었고요. 한 세기 만에 도치됐어요. 딜레마죠. 맑시즘은 인간의 진보, 변화 발전에 대한 낙관이죠. 지율은 있는 그대로 두라고 말해요. 천성산 때부터 그랬어요. 보수적 입장이죠.
물론 이명박이 약속 안 지킨다, 자연 하천을 복원시키기로 하고 운하 파더라. 비판해야죠. 하지만 진보주의자에게 있어서 미래에 강은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 생각이 많아요. 미국은 자연하천에 인간이 접근하지 않아요. 땅이 워낙 넓으니까. 우리는 강과 조화로운 삶을 정책적으로 가야 해요. 두물머리가 유기농단지가 된 것처럼 특화해서 생산물을 비싸게 팔아야죠. 우리는 땅이 좁은 나라니까 강가에서 옹기종기 합목적적인 삶을 살아야한다고 생각해요.”
촛불집회, 용산참사, 4대강 살리기 등 우리사회의 핵심적 현안에는 늘 수많은 카메라가 따라다닌다. 일반 시민, 사진 동호회, 기자, 다큐사진가 등이 셔터를 누른다. 하지만 같음에서 다름을 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어떻게 볼 것인가’ 질문하는 능력과 사진하는 역량은 같이 간다. 사진은 사유다. 4대강과 진보에 대한 물음을 농익혀 그가 자신만의 시각을 찾으려 애쓰는 까닭이다.
촛불여성연작
“사진가라면 자기중심을 잡아내야죠. ‘용산’이라는 현상을 반복하지 않도록 설득하는 힘이 있어야 해요. 사진은 감성이에요. 그게 빠지면 사진이 건조해져요. 그게 과해서 어떤 사진가는 용산의 슬픔, 잔혹한 개발사를 증발시켜버리기도 하죠. 좋은 다큐사진은 ‘보는 힘’에서 나와요. 심미적인 것은 부차적이죠.”
그는 아마추어의 사진은 산만하다며 ‘나도 저 상태가 뭔지 모르는데 나 저기 갔어, 찍었어.’ 라고 말하는 사진들, 현상만 봤지 감응도 못한 상태에서 마치 전리품처럼 사진을 내놓는 경우가 많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 DSLR, 페르소나
아마추어 얘기가 나온 김에 ‘DSLR열풍’을 짚어보자. 디지털카메라 인구 천만시대를 진즉에 넘어섰다. 한중일 극동아시아 삼국, 그 중에서도 한국인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비싼 DSLR을 들고 다닌다. 왜 일까?
“모든 예술 장르 중 나이 삼사십 넘어서 시작할 수 있는 장르가 사진이에요. 예술의 재주 없음을 한탄할 수 없는 장르라고 할까?(웃음) 나이 들어서 음악 미술은 도저히 못해요. 사진은 좋은 장비만 있으면 웬만큼은 나오니까 착각을 줘요. 아마추어들의 장비가 더 좋은 경우도 많잖아요. 이는 우리나라에 집중된 현상이죠. 유럽은 어릴 때부터 예술에 대한 풍부한 소양을 쌓으니까 문화적 갈증이 없어요. 사진은 선택 가능한 하나의 장르일 뿐이죠. 우리나라는 초중고 때 예술적 소양교육이 부족하잖아요. 성인이 돼서 손쉽게 즐길만한 놀이가 사진 밖에 없는 거죠. 우리나라 부르주아들은 클래식이나 뮤지컬을 즐기지 사진은 안 해요. 사진은 하층민의 예술이에요.”
세기포토스쿨강좌 /사진가 김윤섭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사진에 관하여> 저자 수잔 손탁Susan Sontag은 이렇게 말했다. ‘숙련된 기술이나 전문적인 지식 없이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 기계가 다 알아서 해주기 때문에 셔터를 살짝 누르는 것처럼 자신의 생각을 조금만 흘려줘도 알아서 작동하는 카메라. 엔진을 시동하거나 방아쇠를 당기는 것처럼 간단히 조작할 수 있는 카메라’(33)를 들고서 ‘멈춘다,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간다. 무조건 일만 해대는 무지비한 노동 윤리 탓에 심신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 예컨대 독일인, 일본인, 미국인들이 이런 방식을 매우 좋아한다’(27)고.
이상엽은 수잔 손탁의 통찰을 빌어 “망원렌즈는 남근의 상징”이라며 “근사한 카메라 하나가 경제적, 성적, 예술적 매력을 다 보여준다”고 말했다. 또 남성들은 고급 장비에 전력투구 하면서도 사진을 컴퓨터에만 저장할 뿐 직접 현상 한번 해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마치 우리가 유기농 먹을거리를 살 때 진짜로 구매하는 것이 생태학적 생활방식의 경험(지젝)인 것처럼 근사한 DSLR을 소유하는 것은 공적 페르소나를 구입하는 것인지 모른다.
어쨌거나 인간의 신체가 세상을 감각하는 방식은 변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에서 그는 사진이라는 영상언어의 가능성을 읽어낸다. 문자의 시대에 유시민이 발명가였다면 앞으로는 이미지-언어를 잘 다루고 그것을 독해할 줄 아는 사람이 발명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마 지금 젊은 친구들이 40대가 되는 순간 문화지형이 크게 바뀔 겁니다.”
# 반복, 미학
예술은 지겨운 반복에서 폭발한다. 모네는 정원 연못에서 영감을 얻고 30년을 수련연작을 그리는 데 바쳤다. 점묘화로 유명한 쇠라는 자기가 원하는 색채와 표현을 얻기 위해 별로 달라지지도 않은 듯싶은데도 그 부분의 미묘한 차이를 내며 수백 장씩 그리는 고된 과정을 반복했다. 중요한 것은 걸작이 아니라 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이며 예술가의 자세이다.
사진도 다르지 않다. 반복의 차이화 과정이다. 장애인, 기형아, 성전환자 등 소수자 사진으로 유명한 다이앤 아버스는 ‘500번은 찍어야 가면이 없는 타자의 모습을 찍을 수 있다’고 했다. 사진계의 전설 앙리카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인 순간’도 기다림의 결과다. 피사체의 감정, 빛의 의미,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합이 맞아 탄생했다. 들뢰즈의 언명대로 ‘필연은 우연에 의해 긍정된다.’
실크로드연작 스리랑카
“사진은 노동이에요. 사진 잘 찍는 법이요? 확률을 믿어야죠. 찍고 또 찍으면 천장 중에 열장은 건질 수 있어요. 근데 잘 찍은 사진이 곧 좋은 사진은 아니에요. 형식적인 완성도가 중요해요. 아름다운 사진이 아닌데도 형식적으로 정교한 게 있어요. 예를 들어 유진 리차드처럼 균형미마저 파괴할 수 있는 미학적인 관점을 획득해야죠. 저는 언어만큼이나 이미지를 독해하는 능력이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고 봐요. 선천적으로 아름다움을 보는 능력이 있는 거죠.
고야의 후기 스케치를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보지 못해요. 그가 스페인 궁정화가에서 리얼리즘에 눈을 뜨고 민초들의 고통 받는 현실을 표현한 것은 괴물과 광기, 참혹과 전율로 가득 차 있어요. 근데 잡아끄는 힘이 있다니까요. 팔다리 잘려나가도 더 보게 되는 거. 작가는 일반인과 같은 형식을 추구하면 안 돼요. 사진은 내 이야기 읽어달라고 보여주는 거니까.”
# 인문책, 밑그림
충무로의 밤은 어항처럼 고요하다. 경기가 좋았던 시절엔 밤새 기계가 돌며 각종 인쇄물과 유인물을 뽑아내던 동네였다. 지금은 과거의 영화를 찾아볼 수 없다. 지방 소도시처럼 어둑하고 스산하다. 헌데 극동빌딩 뒤편 낮은 건물에서 밤새 노란 불빛이 새어나올 때가 많다는 후문이다. 그의 작업실이다. 두 개 층을 쓴다. 조금 넓은 아래층은 글과 사진 작업이 이뤄지는 사무실이고 천정이 낮은 위층은 책을 모아둔 서재이다.
다락방 서재가 탐난다. 정원은 4명. 나뭇결이 벗겨진 창틀에 달이 꽉 차는 안온한 공간이다. 인문학 천국이다. 묵직한 책들이 벽면에 빼곡하고 창틀아래 수북하다. 한 귀퉁이에 고풍스러운 기타가 기대고 서 있어 운치를 더한다. 여기가 사유의 촉발이 일어나는 곳, 인식의 동굴이다. 그는 하나의 주제를 잡고 사진 작업에 임하기 전에만 대략 100권의 책을 읽는다.
“사진 프로젝트가 1년 이상이 되고 취재 경비가 만만치 않아요. 책이란 결과물로 내려면 당연히 주제를 잡고 공부를 해야죠. 무작정 가면 실패확률이 너무 커져요. 일관된 포토스토리가 있어야 해요. 대략의 밑그림을 그려가도 모든 현장이 50%이상은 틀어져요. 상황은 늘 변하니까요. 그걸 받아들이는 게 중요해요. 애초에 내가 생각했던 대로 꿰맞추기 시작하면 진실 되지 않아요. 최종 결과물로 모든 것들이 정리가 돼야죠.”
그의 저서 <레닌이 있는 풍경> 마지막 부분 ‘읽고 참고한 책들의 목록’에는 <노마디즘> <러시아문화사> <레닌평전><유라시아기행>등 수십 권의 책이 올라있다. 그의 독서비법은 좋아하는 책을 여러 번 읽기다. 아무려나, 독서뿐이겠는가. 다음 작품에 대한 끈질긴 명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에게는 매일매일 하는 일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기여한다. 읽고 보고 만지고 느끼고 믿고 의심하고 묻고 답하고의 상호작용이 ‘찍다’로 승화되는 것.
# 삶, 결
다큐멘터리사진가에게는 순간을 다투는 어떤 윤리가 요구된다. 운명이다. 타인의 가난과 아픔을 자신의 작업에 이용한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매순간 좋음과 나쁨을 물어야 한다. 셔터를 눌러도 될까 살피고 배려하는 마음. 문태준의 시어를 빌자면 ‘결을 맞추는 시간’과 ‘가서 얻어오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것이 사진가의 윤리다.
“하수들은 남의 고통만 찍어 와요. 그게 초상권 문제로 나타나기도 하고요. 요즘은 여행도 자유롭고 웹이란 공간도 무한정 제공되니까 그 폐해가 더 커요. 피사체는 자기 모습을 보일 수 있고 안 보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자신의 목적 하에 남을 이용해서 고통마저도 섹시함으로 포장하죠. 만약 프로 사진가라면 선정적인 사진으로 판매가 되는 거고 아마추어라면 대단한 사진인양 남들에게 내보이면서 쾌감을 갖겠죠. 중국서부연작루얼까이
그러지 않기 위해선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있어야죠. 저 사람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저 모습을 왜 어떻게 내보일 것인가에 대해 사진가 스스로 충분히 고민해야죠. 그들도 ‘저 사람이 내 얼굴을 훔치려한다’는 느낌을 금방 받아요. 눈만 마주치면 알 수 있죠. 나중에 사진에도 나옵니다. 피사체와 깊은 교감을 했구나, 더 좋은 세상에 대한 의지가 있다는 게 읽히죠."
이럴 때 그는 셔터를 누른다. “당당하고 존엄해 보였을 때”
“이를 테면, 티베트의 정말 하찮고 추레하고 가난해 보이는 아이들이 당당하고 존엄해 보이는 순간이 있어요. 그 삶이 얼마나 행복할까 싶은 느낌. 티베트 지역 유목민의 활동구역이 5만평이에요. 나는 20평이나 될까한 공간에서 다글다글 살잖아요. 자기 삶과 비교해보죠. 분명히 내가 해줄 수 있는 그들에 대한 옹호가 있어요.”
# 아이패드, 공명
올해 나이 44세. 똑 떨어지는 중년이다.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는 김훈의 유명한 수필구절도 있다만, 그는 중년의 가을을 환대한다. 새로운 도전에 설렘 가득하다. 일단 내년부터 지난 20년간 몰입해온 찍는 행위를 멈추고 그간의 작업을 정리할 예정이다. 관행적 출판을 바꿔보고 싶던 참에 때마침 찾아온 출판환경의 변화가 반갑단다. “승부해볼 만한 시기”라고 운을 뗀다.
“내년까지 아이패드 백만 대가 보급됩니다. 아이패드는 백만 원 이하의 꿈의 기계에요. 소프트웨어가 필요할 거고 책이 되겠죠. 경쟁상대는 영화밖에 없어요. 그런데 아이패드는 이미지 최적화 환경이에요. 뭐 스타누드가 팔리겠지만, 다행히 인간이 똑같진 않거든요. 사람이 10% 이상은 다른 사진을 요구한다는 거죠.”
디아스포라연작 용산미사
다큐멘터리 사진은 대중교화용이다. 베트남전 당시 반전여론을 끓게 만들었던 것도 1972년 세계 모든 신문의 1면을 장식한 고통으로 울부짖는 베트남 어린이 사진이었다. 어떤 한 순간을 깔끔하게 포착해 놓은 이미지, 지속적으로 공명이 가능한 사진에게 그는 기대가 크다. 단, ‘어떻게’의 문제가 남는다.
“요즘 젊은 층은 ‘꼰대가 교육시키는 것’을 가장 싫어해요. 30-40대의 교화 끝났다고 봐요. 그들은 참조만할 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너희는 뭐하냐는 식의 교육은 힘들어요. 공감하느냐, 교육하느냐는 에디팅 능력이죠. 지금은 정보와 이미지가 넘쳐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취할 수 있죠. 그들이 공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젠 사진이 가진 매체의 한계를 사진가 스스로 인정하고, 어떻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도록 설득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죠. 그건 사진가의 몫이에요.”
# 디아스포라, 형식
사진책 <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에서는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아이디어 화수분, 이상엽’ 말 그대로다. 그는 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 같은 사람이다. 과거를 복원하고 현재를 기록하며 미래를 당겨온다. 세상의 변화에 현기증을 느끼며 뒤로 물러나는 진보주의자들 사이에서 눈에 띈다. 헌데 그는 이 '탁월한 기획자'라는 꼬리표를 떼고자 한다. “사진가로서 자존심이 상한다.”
“저한테 사진 전공자가 아니라는 콤플렉스가 있어요. 더 잘 찍어야 한다는 조바심 같은 거. 자기과시 욕망이랄지 열망이겠죠. 사진판에서는 비전공자치고 미려하게 사진을 찍는다는 얘기를 듣긴 해요. 20년을 했으니 기계적으로 잘 찍은 사진을 얼마든지 찍죠. 이제 잘 찍는 게 아니라 자기 언어를 조율하고 싶어요. 우리나라 최고의 사진가 강운구나 이갑철처럼 내용과 형식 조율된 사진. 형식의 진실함이 중요해요. 나는 아직 이상엽 만의 형식을 못 찾았어요.” 디아스포라연작 금호동
방법은 있다. 안다. “오직 걔만 사랑하면 된다” 사진에 집중하기. 잔가지 잘라내기. 내 인생에는 자를 게 너무 많다며 “집중하면 보인다”고 자신했다. 일단 쉰 살까지로 잡았다. 사진을 늦게 시작했으므로 그 즈음이면 나만의 사진-언어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 시작이 내년이다. 주제는 디아스포라. 사진가 강운구가 전쟁과 분단으로 폐허가 된 우리 땅을 기록했다면 그는 2000년대의 국토, 즉 재개발로 파괴된 땅과 추방된 사람을 담을 것이다.
여기에 근원적인 꿈을 덧입힌다면 금상첨화일 터. 그것은 모든 사진가의 로망인 “간지 나는 책 한권”을 갖는 것이다. 책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그의 표정이 피어난다. 총기 넘치는 노련한 사진가는 간데없고 엄마 졸라서 기타 살 꿈에 부푼 열다섯 소년이 장황하게 떠들고 있다.
“가장 비싼 수입지에다가, 최고의 인쇄소에서, 기막힌 오리지널 프린트 질감에 준하는 인쇄물로 만드는 거죠. 1천권 정도 제작하려면 3천만 원이 들어요. 출판사가 떠안기 어려운 비용이죠. 그래도 간지 나는 책 한권의 유혹이 커요. 여러 가지 감정이죠. 공명심, 물질성, 오리지널리티, 볼륨감, 그러니까 무게 1Kg에 육박하는 책! 과거의 그 모-오-든 고생을 보상하는!”
# 유목, 만화
그는 한 때 일 년이면 150일을 아시아대륙을 떠돌았다. “아시아가 싸구려 패키지여행이나 하는 하찮은 곳”으로 여겨지는 데 대한 반발심 컸다. 중국에서 시작해서 동남아시아의 유구한 역사에 천착했다. 관심은 시베리아까지 확장됐고 발길은 유럽 언저리까지 다다랐다. 육체의 학대가 만만치 않았지만 “영토의 확장이 곧 인식의 확장이었다.” 한반도 안에서 살던 사내가 20년 만에 이 정도면 멀리 갔지 싶다. 욕망하는 삶, 유목하는 그. 앞으로 인생에서 20년 더 주어지면 어디까지 확장될까? “아시아가 깊어질지 서유럽까지 넓어질지는 모르겠다.”
중국서부연작 멍하이제비
예고편이 남았다. 꿈 너머 꿈. 일단 이상엽 사진 형식의 진실함을 찾고, 그 다음 폼 나는 사진집 한권 만들고, 그리고 다리에 힘 빠지는 50대가 지나면 새로운 꿈이 열린다. 사진의 상상력에 대한 무한도전! 그는 만화광이다. 소싯적부터 그림과 이야기를 동경했다. 미대에 가지 못한 것은 조부때부터 공무원을 지낸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 탓이다. 오랜 기다림이었다. 다행히 만화에 대한 욕망은 시들지 않았다. 사진에 미쳐 살았던 날들의 기록물이 쌓였다. 이를 밑바탕으로 구성한 논픽션 만화, 그러니까 "사진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르포르타쥬 만화를 만들 예정이다. "아마 그것은 ‘사진 그 가능성의 중심’에서 살아온 이상엽의 삶을 집대성한 것으로 “사진, 그림, 문자를 다 섞어서 가장 타인을 잘 꼬드길 수 있는 창작물이 될 것이다.”
* 위클리수유너머 32호 전선인터뷰
* 이상엽의 이미지프레스 http://blog.naver.com/inp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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