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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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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역, 삶이 흘러가는 길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여러분들은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 주셔야겠지만, 그게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승객들은 모두 전철을 타야하고, 전철엔 이미 탈 자리가 없다. 타지 않으면, 늦는다. 신체의 안전선은 이곳이지만, 삶의 안전선은 전철 속이다. 당신이라면, 어떤 곳을 택하겠는가.’ 박민규의 단편소설 (카스테라, 문학동네)의 일부이다. 이 소설은 지하철에서 푸시맨 아르바이트를 하는 고등학생의 눈으로 IMF무렵 고단한 한국 사회를 그렸다. 요즘은 사라진 풍경이지만, 푸시맨은 출퇴근 시간마다 ‘지옥철’로 비유되는 열차에 승객을 태우는 일을 맡았다. 제한된 자리에 필사적으로 끼어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목적지를 향해 쉼 없이 달리는 삶. 떠밀리고 부대끼며 흘러가는 사람들. 작가는 세상을 하나의 열차..
김포, 문수산 성곽길 김포는 조용한 도시다. 한강을 끼고 펼쳐진 너른 평야에는 곡식이 알알이 익어가고 철조망 쳐진 땅위로는 무심히 비행기만 뜨고 진다. 삼팔선이 마음에도 그어진 때문일까. 오랜 세월 북녘을 등지고 살다보니 김포에는 어쩐지 소원했다. 풍광이 좋으나 여행자가 드물고 개발도 더디었다. 무명시절이 길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평화롭고 그래서 아름답다. 전국 도시가 개발열풍에 고만고만하게 닮아가고 관광지로 닳아 가는데 비해 김포는 무공해 천연미인의 자태 그대로이다. 밖으로 품 넓고 안으로 옹골차다. 가만가만 걷기 좋은 김포. 한반도에 다시 냉전기류가 감도는 서늘한 여름날, 문수산 성곽길 따라 북녘 땅 바라보며 통일을 기원하는 나들이를 떠났다. 출발지는 문수산. 강화대교 입구 성동검문소 부근이다. 큰 냉면집 뒤로 문수..
연천 시골집 위클리수유너머에서 '여강만필' 쓰시는 김융희선생님 댁을 소개합니다. 지난번 인터뷰 기사가 나가고 자세히 보고 싶다는 분이 계셨어요. "시골에다 집 짓고 텃밭 가꾸며 살고 싶다" 살면서 한번쯤은 꿈꿔보지만 말뿐인 경우가 많죠. 가슴에서 발까지의 거리는 멀기만 합니다. 길들여진 것을 내려놓기 쉽지 않거니와 낯선세계의 두려움이 발목 잡습니다. 원래 저지르기 전이 공포가 가장 극대화되는 법이죠. 한 걸음 벗어나는 순간 깨닫습니다. '별 거 아니네!' 김융희선생님은 인생 9회말에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연천으로 가셨습니다. 세발바기 아이가 그린 것처럼 네모난 집 짓고 자연친화적인 삶을 사시죠. 현관문 열자마자 펼쳐지는 책들의 향연. 여기는 거실이고 방마다 책꽂이가 있습니다. 김융희선생님은 이청준선생님, 한승원선생..
심상정의 사퇴를 보며 심후보가 사퇴할 것 같다고 했을 때는 '어차피.. 그래..잘됐다.. 대인배시다..' 단순히 생각했는데 기자회견문을 보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당원이라는 사실도 잊고 살았는데 당원으로서 조금 화가 났다. '유시민을 지지하겠다'는 글귀를 보는데 맥이 탁 풀렸다. (난 유시민도 좋아하고 그의 당선을 빌지만 두 사람은 서로 다른 특이성을 가진 각개약진해야 하는 정치인이다.) 약자들의 거처인 진보신당의 존재의미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당비만 자동이체 시키던 내가 이런 마음일 때 열성당원들은 어떤 심정일까. 당게시판에 갔더니 거친 글들이 넘치고 있었다. 분노의 역류였다. '경기도당'에서는 심후보의 사퇴가 도당의 입장과 무관한 결정이라고 '성명서'가 올라있다. 당원들은 심후보가 자신들과 ..
사진위주 류가헌 - 4대강 사진전 보러 가자 # 낭만위주 류가헌은 자연이 아름답다지만 지천에 흐드러졌다. 대놓고 아름다운 거 매력없었다.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게 끌리지. 그래서 뭉게구름 떠가는 마당, 맨질맨질한 낡은 툇마루, 너울너울 춤추는 처마선, 바람에 부딪치는 대숲소리, 이나무에서 저나무로 옮겨다니는 새의 몸짓을 담은 한옥에 별반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흘긋 눈길이 갔다. 처마끝에 빗물 떨어지는 소리에 가슴 설렜다. 한옥에 혹하는 나를 보면서 '노화'의 징후를 자각했다. 나도 세월 앞에 어쩔 수 없구나. 이러다가 십년후에는 산간지방에 귀촌해서 농사짓겠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맘 같아선 마을회관 아니고 구립도서관이나 조조영화 보러 다니는 도회적인 할머니 되고싶은데. 두 가지 욕망. 자연의 위로. 도시의 편리. 다 채워주는 곳이 있더..
루체른, 알프스에 나를 비추다 혼자 배낭 메고 훌쩍 떠나본 적이 없다. 두고두고 아쉽다. 딱히 사랑에 일찍 눈 뜬 것도 아닌데 어쩌자고 결혼은 그렇게 빨리 했는지. 꽃다운 청춘이 조모씨와 함께 한반도에서 시들었다. 그러니 태어나서 지금껏 어디서 무얼 하든 부모, 남편, 아이들, 아니면 친구와의 동행이었다. 조기품절녀의 운명이다. 아니 비극이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을수록 온전한 인간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위스여행. 원래는 남편도 같이 가기로 했다가 막판에 못 가게 됐다. 막막했다. 공항의 복잡한 관문을 통과하는 것부터 언어소통의 장애까지 온통 겁났다. 출국 전날, 항공사에 다니는 남편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공항에 도착하면 자기한테 전화하란다. 직장인이지만 소설가 지망생이라 나랑 정서적 유대감이 높은 그다. 남편이 그에..
몽트뢰, 베른 - 미리 가 본 천국 2월에 스위스를 간다니까 주변에서 하나같이 안타까워했다. “2월이 제일 볼 게 없다!” 유럽의 겨울은 춥고 해가 일찍 떨어져서 많이 돌아다니지 못한다, 경치도 봄여름가을보다는 덜 예쁘다 등등. 즉 본전을 뽑지 못해 손해라는 것이다. 마음이 흔들리면서도 씁쓸했다. 투입대비 산출효과의 극대화를 따지는 것은 신자유주의 논리다. 여행을 가면서도 계산기를 두드려야 하나 싶어서다. 자연은 좋은 날씨, 나쁜 날씨가 없다. 그러한 구분은 자연을 대상화한 인간중심적인 사고다. 비가 오면 우산도 챙겨야 하고 바지도 젖지만, 불편한 게 꼭 나쁜 건 아니다.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란 말도 어불성설이다. 4월과 2월의 아름다움은 각기 다르다. 20대와 40대가 그렇듯이 스산함은 화창함에게 없는 나름의 운치가 있지 않던가. 여..
동피랑 예고편 - 비오는 날의 수채화 * 통영 동피랑 취재다녀왔어요. 원고 쓰기 전에 '예고편'으로 사진 몇장 올립니다. 통영의 달동네 동피랑. 동쪽의 벼랑이란 뜻. 엿장수, 날품팔이들이 몰려살던 초초초 가난한 동네. 통영사람들도 동피랑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존재감 없는 빈민촌이었다. 철거위기에 놓인 마을을 구하기 위해 푸른통영21에서 발벗고 나섰다. 서민의 애환이 담긴 동네를 가꾸고 보존하자! 공모전을 통해 벽화그리기 대회를 실시. 환경운동가 출신 윤미숙 사무국장(모자)은 그곳 할메들을 '어메'라 부르며 그분들 삶을 지켰다. 지금은 주말에 200-300명이 다녀가는 통영의 명소로 탈바꿈. 푸세식 화장실에 벽화를 그려서 환골탈태. 아름답게 꾸며 놓으니까 사람들이 몰리고 시에서도 마을을 없애지 못했다. 삭발하고 투쟁하는 '철거반대'가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