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추위가 물러가고 독재자 무바라크도 퇴진한다. 봄이 오는 걸까. 언론마다 이집트 민중들이 환호하는 사진을 내걸고 민주주의 승리라고 표현한다. 그것을 지켜보는 마음이 ‘거시기’ 하다. 민주주의. 그거, 내겐 꼭 단물 빠진 ‘사랑’처럼 사기 같아서다. 어설픈 민주화의 봄 겪고 나니 민주주의가 좋은 건지조차 헷갈린다. 그래도 하나는 확실히 안다. 양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 단지 오래된 감정이 참사랑은 아니듯이 다수결의 지배가 민주주의는 아닌 거다.
때마침 고병권이 민주주의를 주제로 강연을 했다. 2월 11일 장애인언론 <비마이너> 창간 1주년 기념 특강.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열렸다. 휠체어로 가득 메워진 강연장, 그 자체로 북적북적 열기가 후끈하다. 대개 공공장소에 사람이 몰리면 휠체어가 한두 대 정도인데, 여기서는 반대다. 서 있는 내 몸이 낯설었다. ‘노들’의 장소성이 무딘 신체를 일깨운다. 각성모드로 변환했다. 휠체어와 소수성과 민주주의. 셋의 상관관계를 뚫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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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 = 소수성
‘Let's Be Minor! 민주주의의 영원한 슬로건’ 강연제목이다. 민주주의가 소수성이라니. 반전이다. 고추장은 ‘민주주의는 다수성의 통치’라는 통념부터 깨고 들어갔다. “민주화 투쟁을 겪은 한국사회에서 ‘소수’라는 말은 권력자를 지칭하는데 주로 사용했고, 민중은 다수 민중, 다수 대중이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그런데 왜 다수가 아니라 소수라는 말을 쓸까요..소수성은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척도, 잣대의 문제입니다.”
위의 소수성의 정의는 들뢰즈, 가타리 개념이다. 가령 서구사회에서 백인, 남성, 기독교에 해당하는 이들은 그 숫자가 얼마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적 지위를 차지한다. 그들이 사회적 가치척도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그 척도를 벗어난 자들은 여성처럼 수가 셀 수 없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비주류, 즉 소수자의 자리를 차지한다. 소수자는 수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주류적 정체성을 갖지 않은 사람’을 뜻한다.
고병권은 소수성을 ‘공격성’으로 해석한다. 노들장애인야학 교장의 ‘나쁜 장애인론’이 좋은 예다. 장애인은 모두 착하다는 식의 소박한 이상주의부터 착하게 보여야 자원봉사자에게 서비스 하나라도 더 받는다는 현실론까지 우리 사회는 장애인에게 착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2000년부터 터진 장애인 투쟁은 장애인의 기질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줬다. ‘착한 장애인론’의 허구를 까보였다.
G20홍보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린 박정수의 나쁜 시민론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대다수 언론에서 박정수를 황당한 공안검사 만난 운 없는 사람으로 보았지만 그는 피해자가 아니라 자기행동이 옳다고 믿는 확신범이라고 주장했다는 것.
“이처럼 소수성이란 다수, 주류, 척도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공격이자 고발입니다...다시 말하면 소수성은 억압과 차별의 근거로부터 이탈이며, 무엇보다 그 이탈이 그런 억압과 차별의 근거 없음을 고발하고 공격하는 행위입니다.”
# 민주주의 = 근거없음
소수자가 자기 정체성을 드러낼 때 ‘커밍아웃’이라고 한다. 벽장에서 나오기. 하지만 커밍아웃 이전에 ‘벽장’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 벽장을 비우기 전에 전체를 의심하라.(한채윤) 애당초 벽장은 무엇인가, 내친김에 묻자. 도대체 정상인은 뭘까. 네이버 지식검색에 따르면 정상인은 ‘탈 없는 제대로인 사람’이다. 장애인의 개념 ‘신체의 장애나 정신적 결함이 있는 사람’이다. 서로 반대말로 지칭하고 있을 뿐, 정상인과 장애인을 실제로는 정의하지 못한다.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아르케(지배자, 근거) 없고 분별없는 제멋대로의 체제라고 조롱했다. 고추장은 이를 민주주의의 핵심개념으로 써먹는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플라톤은 동굴정치 바깥으로 나가는 것에서 철인정치의 이상을 찾았지만 동굴 속으로 더 들어가야 한다는 것. 니체의 말대로 사상가는 근거를 파괴하고 그 아래까지 가는 사람이다. 근거들의 ‘근거없음’을 폭로하는 사람이다. 민주화 투쟁이란 그런 근거들이 전혀 근거 없는 것임을 폭로하는 일이다.
“법 앞에서의 평등이 아니라 법 이전의 평등입니다. 민주주의가 정의되는 영역이 법보다 존재론적으로 더 이전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정치체제가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것, 민주주의를 결심한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확고부동한 근거를 구축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확고부동한 근거라고 믿었던 것을 비판대상으로 삼겠다는 표시입니다.”
# 민주주의 = 데모스의 힘
민주화는 잣대가 바뀌는 것이다. 즉 ‘교정’이 아니라 ‘이행’이다. 그래서 고추장은 역설한다. 민주주의를 좌우엘리트들이 벌이는 대중 획득 게임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엘리트의 힘’이지 결코 ‘데모스의 힘’이 아니라고.
“데모스의 힘은 형상들을 구별하고 자격을 나누는 기준을 위배하면서 나타납니다. 시민이 불법체류자와 연대하고,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하며, 젊은이와 노인과 연대하고, 백인만 허용된 버스에 흑인이 올라타고, 정규직 지정좌석에 비정규직이 앉습니다...민주화란 이런 기준들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정당한 근거를 가질 수 없음을 나타내면서 그 형상들의 구별을 적극적으로 위반합니다. 자격이나 조건을 넘어 공동의 삶, 연대의 삶을 구축하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이 시대 상식과 통념은 지배자를 지배자로 만들어준 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통념과 상식은 소수자의 삶을 폭력적으로 배제한다. 민주화란 투표장에서 행사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상식과 통념에 난입해서 그것을 깨뜨리는 것이다. ‘장애인이동권투쟁’ ‘장애인탈시설투쟁’이 그런 점에서 정말 대단한 민주화투쟁이다. 모든 분리와 고립의 선을 가로질러 이동하고 ‘함께-존재’하는 방식으로 자립하는 것. 이만한 민주화투쟁이 어디 있을까요.
지지와 공감의 박수가 쏟아졌다. 두 시간 넘는 강의가 끝났다. 강연장이 비좁아 건넌방에 스크린을 설치했는데 그곳에서 마이크가 잠시 꺼졌었다. 음성이 나오지 않자 그들은 잠시 웅성거렸다. 그 순간만큼은 강연을 듣는 우리 모두에게 ‘민주주의’가 절실했다. 살을 에는 바람처럼 삶에 파고들었다. 이후 질의응답시간에 어느 분이 물었다. 그러면 장애인은 소수자로서 이 사회의 마이너리티로 영원히 살란 말이냐.
“마이너가 힘든 생활을 해야 한다면 당연히 NO다. 하지만 마이너는 주변인, 피해자가 아니다. 빛과 어둠의 이 구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노동자가 자본가가 되기 위해 투쟁해야 하고 강사가 교수가 되면 행복할까. 빛은 언제가 도달해야할 천국이미지일 뿐이다. 팍팍하지만 참고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우리는 이건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복을 누려야 한다. 다르게 사는 것이다. 밝은 곳을 나아가려 하지 말고 어둠 속에서 불 줄 아는 능력, 자유로움을 잃지 말자는 거다.”
또 다른 질문이 나왔다. 이 사회 메이저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고추장이 답했다. “구원받으세요.” 한바탕 웃음으로 자리를 파했다. 문득 고추장에게 순복음교회를 한 번 빌려주고 싶었다. 여러 가지 즐거운 상상이 뒤섞인다.
노들장애인야학을 나왔다. 차창 밖 가로수가 검다. 잔설이 녹은 앙상한 나뭇가지, 스산한 바람이 휘감긴다. 문득 지금이 겨울이 되려는 11월인지 겨울이 끝나는 2월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이 시대의 풍경 같다. 춥고 어둡다. 민주주의 달력이 11월이면 더 혹독한 겨울을 겪어야할 것이고, 2월이면 머지않아 따스한 봄날을 맞는다. 어쨌든 지금, 서로의 체온이 필요하다. 김종삼의 시구처럼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 얹혀 놓고 발잔등 부은 하루를 찬미해야 한다. 어둠 속에서 몸을 뒤섞어 그림자놀이를 벌여야할 시간이다. 춥지 않도록, 죽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