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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민우회생협 글쓰기반을 마치고 ‘내 삶은 안톤체홉의 '귀여운 여인'속 올렌까였다. 나의 의견을 생각을, 내 언어를 갖지 못함으로써 나의 시간은 큰 무더기로 자각될 뿐이었다. 살아냈으나 기억할 수 없는 시간들. 첫 시간에 '나의 생각을 나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이 필요함을 배웠다. 벅벅거리는 머릿속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 어느 것도 말하지 못 하고 전혀 다른 말을 뱉어내곤 했던 지난 시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존재하고자 한다. 내 언어를 찾고자 한다. 떨리는 심정으로 생애 처음 인터넷이란 공간에 빠끔히 문을 열고 들어선다.’(wonstep) 낯선 눈빛으로 들어선 그녀들과 8주를 보냈다. 여성민우회생협 고양지부 글쓰기강좌 종료 후 보름이 넘게 지났다. 나란 인간, 원래는 하나의 사건을 겪으면 받아쓰기 하듯 뭔가를 써야했다. 이번엔 그게..
역전易傳 1 / 이성복 며칠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눈물 흘리는 짐승들이 슬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기를 먹었습니다 넓적넓적 썰은 것을 구워먹으니 맛이 좋습니다 그날 아 침 처형당한 간첩의 시체라고 했어요 한참을 토하다 고개 들어보니 입가에 피범벅을 한 세상이 어그적어그적 고기 를 씹고 있었습니다 - 이성복 시집 문학과지성사 시장을 봤다. 월요일 화요일 이틀동안 김치찌개와 계란후라이에 밥 먹는 아이들이 불쌍해서 장바구니를 챙겼다. 사실 좀 덜먹을 참이었다. 부산을 댕겨오고 나니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강건너 불구경을 한 것 같았다. 그동안 돼지처럼 꼬박꼬박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기름진 육체에서 나태한 사고가 나온다. 비대해진 몸으로는 세상의 외침이 살갗을 뚫고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나름의 위..
희망버스와 소금꽃나무 # 갈까 말까 한진중공업 최초의 여성 용접공 출신, 김진숙 부산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고공농성 185일차. 이를 두고 ‘여자의 몸’으로 극한의 외로운 투쟁을 전개한다고들 얘기한다. 모두가 한 여성 노동운동가의 입신에 주목하고 칭송할 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잠시 딴 생각을 했다. ‘그렇게나 오래 집을 비워도 괜찮은 거면 결혼을 안 했거나 했어도 아이가 없거나 아니면 친정엄마가 옆에 있나보다.’ 얼추 적중. 52세 김진숙은 비혼이다. 그 사실을 알려준 친구가 덧붙인다. 아마 김진숙 정도의 인물이 남자였으면 그의 옆에는 헌신하는 여성이 필시 있지 않았겠느냐고. 지난주, 김대리의 대출광고 스팸 문자를 압도한 문자메시지가 있으니 ‘희망버스 타자’는 불온한 속삭임이다. 또 다른 ‘여자의 몸’은 고민했다.남편 ..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 나희덕 우리 집에 놀러 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 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 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 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 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 나희덕 시집 , 창비 6월에서 7월로 건너온 일이 꿈만 같다. 글쓰기강좌 끝나고 보자며 미뤄놓았던 약속의 순례의 나날들. 남편이 월수금, 내가 화목토 주 3..
분노하라 - 등록금 알바생의 죽음 군대 제대하면 적어도 일주일, 아니 한 달은 마음껏 놀고 싶을 것 같다. 가난한 청춘에게는 그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제대 다음날부터 등록금을 벌려고 아르바이트 자리로 직행, 이마트 냉동기 점검 작업하던 황승원 씨가 참변을 당했다. 사인은 가스중독이다. 일이 힘들면 그만두라는 엄마의 말에 ‘다른 업체에선 월급 150만원 받기 쉽지 않다’고 했단다. 아버지 사업실패로 고교진학을 못했고 검정고시 치르고 서울시립대에 들어갔다니 공부를 잘하고 착실했던 모양이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아들. 그런 자식을 바라봐야 하는 엄마는 얼마나 안쓰러웠을까. “늘 아들에게 미안했다”는 엄마의 통곡이 나의 가슴을 친다. 오늘(7월4일) 1면 기사다. 요 며칠 시험기간이라 대낮부터 얼굴 맞대고 있는 아들에게 ‘너가 너무 고생을..
보편적인 노래 보편적인 하루 # 오전 10시. 2011년 6월 30일 목요일. 이날은 병역거부자 현민의 가석방데이. 우산 받쳐들고 영등포교도소로 향했다. 오전 10시에 맞춰 겨우겨우 도착. 굳게 닫힌 철문이 열리고 어색한 표정의 출소자들이 경계를 넘는 극적인 상봉을 기대했으나 불발이다. 예정보다 일찍 나온 민이는 벌써 비를 피해 건물로 들어가 엄마와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눈부실만큼 하얀 셔츠에 쥐색 바지, 짧게 깎은 머리가 어쩐지 수도승 같기도 했다. 그동안 위클리수유너머 '영장찢고 하이킥'에 보내온 글에서는 이미 깨달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령 '유치함에서 두어 계단 오르면 잔인함에 도달한다' 같은 구절. 바늘귀같은 마음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피폐함을 토로하는 대목이었을 거다. 폭발할 듯한 침묵의 요동. 몸으..
마지막 수업 마지막 수업은 엠티를 갔다. 연천 김융희선생님 댁으로. 서울역에서 전철타고 동두천에서 내려서 기차나 버스로 갈아타는 ‘난’코스. 대략 2시간 넘게 걸린다. 황금 같은 봄철 주말. 요즘은 회사에서도 회식이나 야유회를 가지 않는 추세라고 들었다. 젊은 직원들은 예사롭게 빠지고 대놓고 싫어한다니, 글쓰기반 엠티를 계획하면서도 내심 걱정했다. 안 가는 사람이 절반을 넘으면 어떡하나, 갈수도 아니 갈수도 없고. 왜 나는 아직도 ‘엠티 상상력’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잠시 자책했다. 그냥 근처 밥집에서 거나하게 뒷풀이를 할까 망설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므로 엠티를 강행하기로 했다. 왜?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가장 슬픈 가난은 추억이 없는 것이다. 글 쓰는 사람은 기억을 파먹고 산다. 또한 ‘질투..
화분 / 이병률 - 빨간 자전거 타는 우체부 그러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약속한 그대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날을 잊었거나 심한 눈비로 길이 막히어 영 어긋났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봄날이 이렇습니다, 어지럽습니다 천지사방 마음 날리느라 봄날이 나비처럼 가볍습니다 그래도 먼저 손 내민 약속인지라 문단속에 잘 씻고 나가보지만 한 한시간 돌처럼 앉아 있다 돌아온다면 여한이 없겠다 싶은 날, 그런 날 제물처럼 놓였다가 재처럼 내려앉으리라 햇살에 목숨을 내놓습니다 부디 만나지 않고도 살 수 있게 오지 말고 거기 계십시오 - 이병률 시집 문학동네 비가 하도 예쁘게 내려서, 어울리는 시와 음악을 찾아본다. 막대사탕 빨아먹듯이 당도 높은 시가 가끔씩 끌린다. 이를 테면 이런 날. 한 한시간 돌처럼 앉아있다 오고 싶은 날. 내용과 상관없이 내 마음을 끄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