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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 이성복 1 내가 자연! 하고 처음 불렀을 때 먼 데서 무슨 둔한 소리가 들렸다 하늘 전체가 鍾이야 내가 자연! 하고 더 작게 불렀을 때 나무들이 팔을 벌리고 내려왔다 네가 山이야 내가 자연! 하고 마지막으로 불렀을 때 샘물이 흘러 발을 적셨다 나는 바싹 땅에 엎디어 남은 말들을, 조용히, 게워냈다 2 안개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그의 입모양도 지워지고 손짓만이...... 떨리는 손가락,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는 돌아서 무언가를 밀어젖혔고 그건 門이었고 아름드리 전나무가 천천히, 쓰러져 갔다 굴러 떨어지며 그가 일으키는, 나는, 물결이었다 - 이성복 시집 엄마 요즘 왜 시집 안 읽어? 딸이 묻는다. 내가 시를 안 읽는 줄도 몰랐는데 딸이 일깨워 준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니 책상 위에 시집이 없단다..
시 읽기 세미나 - 말들의 풍경 한 사람과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시가 쌓입니다. 이 삶을 다시 살고 싶다고 후회할 때 시가 다가옵니다. 시집에는 어김없이 얼굴이 누워있습니다. 인연이 매개한 ‘말들의 풍경’은 그대로 세상 읽기의 독본입니다. 반려생물처럼 시집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동안은 사는 일이 쓸쓸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뜨겁게 달궈진 불온한 언어는 정신의 성냥불을 확 긋기도 합니다. 그러니 시는 행복 없이 사는 훈련(황동규)이며, 추위를 이겨내는 입김(김현)이기도 한 것입니다. 시가 필요한 시절, 그리고 계절. 같이 둘러 앉아 시를 낭독하고 느낌을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 10월 15일 토요일 6시부터 - 반장: 은유 016-233-8781 - 회비: 월 15000원 (수유너머R의 모든 세미나 참가 가능) - 함께 하실 분..
김수영은 김수영을 반성하지 않는다 강가도 좋고 산속도 좋고. 자연의 품에서 벗들과 둘러 앉아 시를 낭송하는 풍경을 꿈꿔왔다. 지난 6월 한강둔치에서 ‘강가에서’를 낭독했다. 강에도 나에게도 할 도리를 다한 기분이었다. 봄이면 봄시. 산에 가면 산시. 사랑하면 사랑시. 슬프면 술시. 정직한 산출이 즐겁다. 7차시 수업에 남산에서 시수업을 계획했다. 이 수업을 끝으로 미국으로 돌아가는 냥냥님이 야외용 미니 도시락 17인분을 낑낑 들고 나타났다. 일동 감탄하고 환호했다. 방산시장에서 도시락 용기를 사다가 엄마랑 준비했다는데 월간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나 보던 도시락 비주얼을 자랑했다. 수업시간마다 간식이 하도 색다르고 풍부하여 ‘식도락 동호회’로도 손색없다했거늘, 냥냥표 도식락은 미식가의 자부심의 궁극을 선사했다. 1교시 ‘묘사하기’는 교실..
명절 다음 날 명절 전날, 그러니까 여친과 헤어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후배에게 말하고 또 말했다. “받아들여. 이유를 따지지 마. 이 세상에 논리적 인과성을 비켜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꼭 너처럼 헤어진 이유라도 알자며 매달렸던 인생선배들이 얼마나 처참히 버려졌는가를 예로 들며, 나는 연애사건을 포함한 '삶의 부조리'를 연신 설파했다. 내겐 그랬다. 인생에서 중요한 일은 대부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받아들여야하는 현실로 닥쳤다. 여자에겐 ‘결혼’이 삶의 불합리를 체험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제도장치다. 순종과는 거리가 먼 인간유형인 나조차도 ‘대 시댁’관련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생각하지 않고 그냥 행한다. 생존본능의 발동이다. 제사나 명절은 일박이일 극기훈련 가는 기분으로 임하며 실제로도 혹..
'The Piano' ost by Michael Nyman '오블로모프에게는 그가 숨쉬는 공기중에 언제나 존재가 넘친다. 그의 무위 속에는 소동과 야단법석이 넘치고 있다.아무리 그가 방문의 빗장을 열지 않더라도, 최후의 성가심까지 몰아내고 그의 인생을 누워서 보낸다고 하더라도, 한마디로 완전한 게으름, 아무런 족쇄도 채워지지 않는 혼수상태에 이르기 위해 외부 세계와의 모든 연결을 단번에 영원히 끊어버리기로 결심핟라도, 오블로모프에게는 바로 존재라고 하는 이 작품, 무게, 무담, 버릴 수 없는 사업이 남는다.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해서 파업을 할 수 있다. 단 존재에 대해서만은 예외다.' 아침의 독서. (동문선) 제목이 교회주보 칼럼코너 같다만, 레비나스의 존재 철학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 물론 내용은 은혜롭다. 레비나스가 철학학교 강..
좌담회: 상상해봐, 희망버스 어디로 갈지 희망이란 말은 빛나지 않는다. 차라리 남루하다. 1차 희망버스는 빛나지 않았다. 탑승객 700명. 세상은 무심했다. 2차 희망버스는 1만 명이 몰려갔으나 차벽을 넘지 못했다. 3차 대회를 지나 4차 서울대회가 치러지는 동안 참가인원이 반으로 줄었고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는 슬로건은 희마하게 번졌다. 허나 희망버스 그 후, 사람이 사람을 찾아가고 유머가 아픔을 퍼뜨리고 집회가 축제로 벌어지는 풍경은 익숙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1차, 2차, 3차, 4차 희망버스는 빛나지 않는다. ‘그 연관만이 빛난다’(김수영)고. 부산 앞바다 고공크레인에 매달린 김진숙이라는 절망의 극점에서 전국으로 펼쳐진 희망의 이행, 그 연관은 빛나고 또 질기다. 여름 내내 반도의 땅을 달궜던 희망버스는 하늘 높은 가을날 강정..
자기를 배반하지 않고 살기 위해 는 무늬만 책이지 완성본이 아니다. 참고 자료와 초고를 모은 것으로 그의 생전에는 출판되지 못하다가 1932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의 맑스-레닌주의 연구소가 출판했다. 이 청년 맑스 풋풋하고도 심오한 저작을 읽고 노동/화폐에 관한 글을 써오라 했더니 민원이 빗발쳤다. ‘너무 어렵다’ ‘괜히 샀다’며 한숨짓는가 하면 ‘앞으로도 읽을 일은 없을 것 같다'고 자괴감을 호소하기도 했다. 가장 대박은 대성씨 글. ‘국가정보원은 20일, 칼 마르크스란 아이디로 공산주의 서적을 출판하는 등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혐의로 김모 씨(25세, 무직)를 검거했다고 밝혔다. 김 씨는 자신을 유럽에 사는 경제학자로 속여 자본론, 경제학-철학 수고, 공산당 선언 등의 책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은 경찰 등과 합동조사단을..
파랑도 / 이희중 파전을 익히며 술을 마시는 동안 더워서 벗어 둔 쇠걸상에 걸쳐 둔 저고리, 내 남루한 서른 살 황태처럼 담배잎처럼 주춤 매달려 섭씨 36.5도의 체온을 설은살 설운살 서른살을 말리고 있다 소란한 일 없는 산 속의 청주(淸州) 한가운데 섬이 있다 소주집 파랑도(波浪島) 바람 불어 물결 치고 비 오는 날은 사람마다 섬이며, 술잔마다 밀물인데 유배지 파랑도에서 저고리는 매달린 채 마르기를 기다린다 술병이 마르기를 풍랑이 멎기를 - 이희중 시집 , 민음사 사진을 시작할 때부터 알던 후배가 있는데 어제 첫 전시를 했다. 사진위주 갤러리 류가헌. 친한 선배부부가 하는 곳이다. 보도자료 써 달라, 일손 부족하다며 몇 번을 도와달라던 언니의 청을 들어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서 축하와 자봉을 동시에 해결하러 겸사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