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올드걸의시집

(167)
버리고 돌아오다 / 김소연 지루한 글이었다 진전 없는 반복, 한 사람의 생 읽 어내느라 소모된 시간들, 나는 비로소 문장 속으로 스 며서, 이 골목 저 골목을 흡흡, 냄새 맡고 때론 휘젓 고 다니며, 만져보고 안아보았다. 지루했지만 살을 핥 는 문장들, 군데군데 마지막이라 믿었던 시작들, 전부 가 중간 없는 시작과 마지막의 고리 같았다. 길을 잃 을 때까지 돌아다니도록 배려된 시간이, 너무 많았다, 자라나는 욕망을 죄는 압박붕대가 너무, 헐거웠다, 그 러나 이상하다, 너를 버리고 돌아와 나는 쓰고 있다, 손이 쉽고 머리가 맑다, 첫 페이지를 열 때 예감했던 두꺼운 책에 대한 무거움들, 딱딱한 뒷표지를 덮고 나 니 증발되고 있다, 숙면에서 깬 듯 육체가 개운하다, 이상하다, 내가 가벼울 수 있을까, 무겁고 질긴 문장 들은 다, 어디..
내 속의 가을 / 최영미 나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슬프다고 다 우는 게 아니고 눈물이라고 다 순결한 게 아니다. 두 눈에 눈물이 삐져나올 때 '지금 나 슬픈가?' 생각해보면 정말로 가슴 미어질 때도 있고, '울기엔 좀 애매한' 상황인데 저절로 눈물이 흐르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내겐 눈물이 방귀처럼 몸에서 삐져나오는 액체 정도. 수정같은 눈물 아니고 습관성 방귀나 집중호우 같은 개념이다. 내가 잘 우는 이유는 지난 수년간 집중적인 훈련으로 뇌에서 눈까지 눈물이 다니는 길이 닦인 것 같다. 스스로도 기가 막힐 때가 많다. 특히 오후 8시무렵 주차장 씬. 시장보고 오는 길에 차 댈 때 멜로배우처럼 운전대 앞에서 멍하니 눈물 흘린다. 클래식, 가요, 락 등 장르불문. 어둑한 밤길에 흐르는 음악이 나를 가을날 창가로 데려간다. 얼마전..
심보선 / 슬픔이 없는 십오초 사는 일에 미련이 없다. 없었다. 그말을 예사롭게 해댔다. 진심이었다. 자식 두고 죽는 여자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쯤이면 나한테는 생의 마지노선까지 다녀온 거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죽음이 목전에 닿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팔자 좋은 말잔치같아 부끄러웠다. 지금도 크게 바뀐 건 아니다. 삶의 밀도가 중요하지 길이가 중요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명은 재천이니까 안달해도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나를 확장하려는 노력은 멈출 수 없겠지만 순한 양처럼 주어진 시간에 복종하고 싶다. 어디로든 끝 간에는 사라질 길. 그저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전화할 때마다 ‘빨리 가고 싶다’는 시어머니의 말은 진심일까. 살고 싶다는 표현에 비가 새는 것이라 여겼다. 나는 죽어도 여한이 ..
익숙해진다는 것 / 고운기 오래된 내 바지는 내 엉덩이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칫솔은 내 입안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구두는 내 발가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빗은 내 머리카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귀갓길은 내 발자국 소리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아내는 내 숨소리를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오래된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바지도 칫솔도 구두도 빗도 익숙해지다 바꾼다 발자국 소리도 숨소리도 익숙해지다 멈춘다 그렇게 바꾸고 멈추는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 고운기 시집 창비 오래될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 응당 그래야한다 여겼다. 골동품 같은 우정, 오래 가는 사랑. 한결 같은 마음. 세월은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고귀한 선물이다. 맞다. 그런데 한번 마음의 물길 트면 저절로 감..
낙화유수 / 함성호 네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으리라 우리의 옛 맹세를 저버리지만 그때는 진실했으니, 쓰면 뱉고 달면 삼키 는 거지 꽃이 피는 날엔 목련꽃 담 밑에서 서성이고, 꽃이 질 땐 붉은 꽃나무 우거진 그늘로 옮겨가지 거기 에서 나는 너의 애절을 통한할 뿐 나는 새로운 사랑의 가지에서 잠시 머물 뿐이니 이 잔인에 대해서 나는 아 무 죄 없으니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배고파서 먹었으니 어쩔 수 없었으니, 남아일언이라도 나는 말 과 행동이 다르니 단지, 변치 말자던 약속에는 절절했 으니 나는 새로운 욕망에 사로잡힌 거지 운명이라고 해도 잡놈이라고 해도 나는, 지금, 순간 속에 있네 그 대의 장구한 약속도 벌써 나는 잊었다네 그러나 모든 꽃들이 시든다고 해도 모든 진리가 인생의 덧없음을 속삭인다 해도 나는 말하고 싶..
문태준 - <가재미> 뒷표지글 비오니까 여러모로 살겠다. 덥지 않아 살겠고, 책 읽기 좋아 살겠다. 철지난 유행가 싱크로율도 100%다. 올만에 이오공감의 김수철 전인권의 를 들었다. 김수철은 훌륭한 가수다. 가사랑 음악과 목소리가 조화롭다. 밤 깊자 빗소리 커튼 삼아 골방모드 됐다. 비교적 행복하다. 긴 원고 한 편 쓰고나니 육신이 고되다. 쓸고 닦고 청소하고 몸도 씼고. 시집이 꽂힌 책꽂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거기가 내 우물가다. 한 권 뽑아서 아무데나 펴서 읽어본다. 이 어둠, 이 기온, 이 바람, 이 허함에 응하는 시를 제발 제발 만나길 염원했다. 문태준의 가 눈에 들었다. 이리저리 매만지다가 뒷표지글을 봤다. 아, 그랬었다. 그 때 서점에서 이걸 읽고 놀래서 가슴에 포갰었다. 난 아름다운 책을 보면 일단 안아본다. 갖고 ..
기억할 만한 지나침 / 기형도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기형도 시집 문학과지성사 지하철에서 소요했다. 이리저리 헤매면서 두어 시간을 보냈다. 취재였다. 고등학교 들어가..
그 자리, 그 삶 / 채호기 '격렬하고 불투명한 삶' 어느 날 내 몸은 잘게 부서져 눈이 되어 흩날리니 이리저리 몰리며 몸부림치는 나의 영혼 눈보라로 흩어지네. 살점 몇 개는 사람들 신발 밑에 깔려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딴 세상으로 가버렸으니 내 삶의 어떤 부분이 질펀히 녹아 하수구로 흘러 버려지는가. 살점 몇 개는 벌거벗은 너의 눈 속으로 흘러들어 두근거리는 피가 되어 너의 몸속을 떠돌며 네 예민한 감각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니 너의 삶도 상심의 회오리에 실려 찬 계곡을 눈보라처럼 부유하네. 그토록 단정하던 너의 몸, 뚜렷한 색깔과 형태의 너의 몸이 흐트러지며 단단히 잡고 있던 마지막 흰 숨결까지 게워내며 눈보라 속에 천천히 지워져가고 너의 몸과 너의 삶이 선명한 푸른색으로 남아 있던 그 자리 내 몸과 네 삶이 뿌옇게 섞이고 있는 거기 그 자리 서리 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