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의 가을 / 최영미

[올드걸의시집]




나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슬프다고 다 우는 게 아니고 눈물이라고 다 순결한 게 아니다.  두 눈에 눈물이 삐져나올 때 '지금 나 슬픈가?' 생각해보면 정말로 가슴 미어질 때도 있고, '울기엔 좀 애매한' 상황인데 저절로 눈물이 흐르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내겐 눈물이 방귀처럼 몸에서 삐져나오는 액체 정도. 수정같은 눈물 아니고 습관성 방귀나 집중호우 같은 개념이다. 내가 잘 우는 이유는 지난 수년간 집중적인 훈련으로 뇌에서 눈까지 눈물이 다니는 길이 닦인 것 같다. 스스로도 기가 막힐 때가 많다. 특히 오후 8시무렵 주차장 씬. 시장보고 오는 길에 차 댈 때 멜로배우처럼 운전대 앞에서 멍하니 눈물 흘린다. 클래식, 가요, 락 등 장르불문. 어둑한 밤길에 흐르는 음악이 나를 가을날 창가로 데려간다. 얼마전 라디오에서 이동원의 이별노래가 나왔다. 직효다. 가슴에 바람 한줄기 휭하니 지나가더니 일초만에 낙엽지듯 눈물졌다. 시동 끄고 마저 울고 일어난다. 장바구니와 휴지보따리 양손에 들고 뒤뚱 거리며 집에 들어가서는 꽃수레 쌀강아지 불러가며 호들갑 부리고, 밥 하고 찌개 끓여서 아무렇지도 않게 밥 한그릇을 뚝딱 비운다. 연기력 쩐다.  

전태일 평전을 읽었다. 20년 전 맹렬히 학습할 때 '어느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책으로 봤었다. 돌베개에서 조영래 변호사님이 쓴 걸로 <전태일평전>이 나왔는데 사려다가 말았다. 안 봐도 '비디오'처럼 다 아는 이야기라고 여겼겠지. 헌데 책을 읽고서 그간 전태일이란 이름 석자만 알고있었다는 걸 알았다. 전태일은 생각보다 많이 가난했다. 생각보다 많이 고생했고 생각보다 훨씬 똑똑했다. 그의 존재가 헤아릴 수 없이 컸다. 맑스의 <자본론>의 초과노동 공부할 때는 전태일이 보이지 않았는데 전태일에서 <자본론>이 보였다. 자본의 포악함이 살갗을 할퀴었다. 그가 노동소외니 인간소외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노동자를 '밑지는 인생'이라고 표현할 때 죄스러움의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눈물은 쓸모있었다. 울어 마땅한 대오각성의 눈물. 이주노동자가 우린 기계가 아니다라고 말할 때 난 왜 전태일을 떠올리지 못햇을까. 난 자본이 왜 인간의 의지를 넘어서 존속하는가를 치밀하게 고려하지 못했을까. 아직 짙게 물들지 아니한 초록 잎들 사이로 수많은 전태일이 보였다. 기억의 초상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흩어졌다. 강수확률 높아지는 계절 가을. 눈물이 있으면 나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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