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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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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생각/ 기형도 '내 유년의 윗목'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 시집 문학과지성사 학교가 파하는 12시 40분이면 어김없이 핸드폰이 울린다. 액정에 새겨진 이름 꽃수레. 집 전화다. 며칠 전엔 현관문을 열었을 때 책상에 엄마가 없으면 너무 허전하다며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는 제목으로 일기를 써서 나를 놀래킨 딸내미. 이번엔 또 어떻게 마음을 달래주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받는다. 짐짓 밝은 척 오버한다. “어, 우리 딸, 집에 왔구..
조금새끼 / 김선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 가난한 선원들이 모여사는 목포 온금동에는 조금새끼라는 말 이 있지요. 조금 물때에 밴 새끼라는 뜻이지요. 조금은 바닷물 이 조금밖에 나지 않아 선원들이 출어를 포기하는 때이지요. 모 처럼 집에 돌아와 쉬면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지요? 그래서 조금 은 집집마다 애를 갖는 물때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해서 뱃속에 들어선 녀석들이 열 달 후 밖으로 나오니 다들 조금새끼가 아니 고 무엇입니까? 이 한꺼번에 태어난 녀석들을 훗날 아비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우다 다시 한꺼번에 바다에 묻힙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인 셈이지요. 하여, 자금도 이 언덕빼기 달동네 에는 생일도 함께 쇠고 제사도 함께 지내는 집이 많습니다. 그런 데 조금새끼 조금새끼 하고 발음하면 웃음이 나오다가도 금세 눈물이 나는 건 왜일까요? 도대..
나뭇잎을 닦다 / 정호승 '나뭇잎에 앉은 먼지를 닦는 일' 저 소나기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가랑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봄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기뻐하는 것을 보라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 고이고이 잠드는 것을 보라 우리가 나뭇잎에 앉은 먼지를 닦는 일은 우리 스스로 나뭇잎이 되는 일이다 우리 스스로 푸른 하늘이 되는 일이다 나뭇잎에 앉은 먼지 한번 닦아주지 못하고 사람이 죽는다면 사람은 그 얼마나 쓸쓸한 것이냐 - 정호승시집 , 열림원 사람 만날 때 녹음기를 쓰지 않는다. 기계사용이 서툴다. 노트북 펴놓는 적도 드물다. 사람 사이에 기계를 두면 장벽같다. 핵심과 흐름을 추려 수첩이나 노트에 적는다. 속기사이자 통역관이 되어 그의 말을 나의 언어로 기록한다. 이야기에 자연스레 집중된다. 내 몸이 거대한 귀로 작동하는 그 순간이 ..
목돈 / 장석남 '날마다 땀에 절어간다' 책을 내기로 하고 300만 원을 받았다 마누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어머니의 임대 아파트 보증금으로 넣어 월세를 줄여드릴 것인가, 말하자면 어머니 밤 기도의 목록 하나를 덜어드릴 것인가, 그렇게 할 것인가 이 목돈을, 깨서 애인과 거나히 술을 우선 먹을 것인가 잠자리를 가질 것인가 돈은 주머니 속에서 바싹바싹 말라간다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돈봉투 끝이 나달거리고 호기롭게 취한 날도 집으로 돌아오며 뒷주머니의 단추를 확인하고 다음 날 아침에도 잘 있나, 그럴 성싶지 않은 성기처럼 더듬어 만져보고 잊어버릴까 어디 책갈피 같은 데에 넣어두지도 않고, 대통령 경선이며 씨가 말라가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쥐고 있는 내 정신의 어여쁜 빤스 같은 이 300..
옛 노트에서 / 장석남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 내 품에서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 장석남 시집 , 문학과지성사 삼사십대 남녀 다섯이 인사동에서 모였다. 전시를 끝낸 지인의 뒤풀이 자리다. 조곤조곤 수다 떨며 와인 한잔 마시는데 마흔 지난 남자가 물었다. “내 나이에 사랑을 하는 게 좋은 거야 안 하는 게 좋은 거야.” 여자들이 개구리합창처럼 답했다. “당근 하는 게 좋지..
행복론 / 최영미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사랑이 올 때는 두 팔 벌려 안고 갈 때는 노래 하나 가슴속에 묻어놓을 것 추우면 몸을 최대한 웅크릴 것 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되 수상한 곳엔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말며 확실한 쓸모가 없는 건 배우지 말고 특히 시는 절대로 읽지도 쓰지도 말 것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리되 엎질러진 물도 잘 추슬러 훔치고 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년 세월을 보상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것 그러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 최영미 시집 , 창작과비평사 창밖은 오월인데 너는 미적분을 풀고 있다는 시구처럼..
엄마와 딸 / 이해인 '아프지만 아름다운 세상' 이렇게 나이를 먹어서도 엄마와 헤어질 땐 눈물이 난다 낙엽 타는 노모의 적막한 얼굴과 젖은 목소리를 뒤로 하고 기차를 타면 추수 끝낸 가을 들판처럼 비어가는 내 마음 순례자인 어머니가 순례자인 딸을 낳은 아프지만 아름다운 세상 늘 함께 살고 싶어도 함께 살 수는 없는 엄마와 딸이 서로를 감싸주며 꿈에서도 하나 되는 미역빛 그리움이여 - 이해인 시집 , 샘터사 여성암 무료검진을 받으라는 통지서가 서울시에서 왔다. 작년 가을 즈음에. 기한이 12월 31일까지였다. 병원 가는 일이 좋을 리 없다. 특히 산부인과. 애 낳고 병원을 한 번도 안 가봤다가 암에 걸려 돌아가신 김점선 화가를 생각했다. 또 무료 건강검진을 받지 않다가 암에 걸리면 보험 혜택이 없다는 얘기도 들린다. 8년 전 애 낳고 진료실 출입이 1회..
하얀 눈 덮어쓰고 / 이오덕 자다가 깨어나 생각하니 내가 하얀 눈을 덮어쓴 지붕 밑에서 자고 있었구나. 아침마다 창문을 열면 하얀 세상 건너편 산도 마을의 집들도 길고 하얀 눈으로 덮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정작 내가 그 눈 밑에서 자고 있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으니! 지붕뿐 아니지, 내가 덮고 있는 이불도 하얀 양털에 하얀 목화로 짠 베다. 이불뿐 아니구나 내가 입은 잠옷도 하얗고 내복도 하얗고 낮이면 추워서 방 안에서도 입고 있는 오리털 겉옷도 새하얀 빛 하얀 것만 입고 덮고 하얀 쌀밥까지 먹고 의사가 권해서 포도당 하얀 가루까지 날마다 먹고 하얀 종이에 글을 쓰고 그러고 보니 이거야말로 전신만신 하얀 것뿐 하얀 것뿐일세. 그렇다면 내 마음은 어떤가? 마땅히 하얗게 눈같이 깨끗하게 되어 있어야 할 내 마음은? 자다가 깨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