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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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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 / 문충성 '새해엔 빛나는 삶이게 하소서' 캄캄한 추위가 출렁이고 새하얗게 눈보라 아득한데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서 반짝 눈뜨는 그리움 하나 가엾고나 강물도 얼어붙어 흐르지 않건만 빈 가지엔 찬바람만 걸려 울건만 취한 듯 눈부시게 새해에는 밝아 깊숙이 나를 꿈꾸게 하는구나 새해엔 빈손 들고 어정어정 발걸음만 떠돌지 않게 하소서 발걸음이여 이 세상엔 웃음도 많지만 서러움도 많아라 서러움이여 아직 하늘빛은 어둡지만 가슴가슴 고통도 많지만 빈 가지에도 새 생명의 숨결 부풀어오름을 나는 보게 되리 파랗게 눈물 속을 날아오르는 새들을 그리움을 얼음 풀리는 강물 소리도 듣게 되리 새해엔 빈손 들고 어정어정어정 걷는 발걸음이 꿈꾸는 우리들 빛나는 삶이게 하소서 발걸음이여 - 문충성 시집 문학과지성사 오랜만에 영풍문고에 들렀다. 외국의 어느 서점에 간 기분이 ..
사랑의 감옥 / 오규원 '추운 세상 안으로 따뜻하게' 뱃속의 아이야 너를 뱃속에 넣고 난장의 리어카에 붙어서서 엄마는 털옷을 고르고 있단다 털옷도 사랑만큼 다르단다 바깥 세상은 곧 겨울이란다 엄마는 털옷을 하나씩 골라 손으로 뺨으로 문질러보면서 그것 하나로 추운 세상 안으로 따뜻하게 세상 하나 감추려 한단다 뱃속의 아이야 아직도 엄마는 옷을 골라잡지 못하고 얼굴에는 땀이 배어나오고 있단다 털옷으로 어찌 이 추운 세상을 다 막고 가릴 수 있겠느냐 있다고 엄마가 믿겠느냐 그러나 엄마는 털옷 안의 털옷 안의 집으로 오 그래 그 구멍 숭숭한 사랑의 감옥으로 너를 데리고 가려 한단다 그렇게 한동안 견뎌야 하는 곳에 엄마가 산단다 언젠가는 털옷조차 벗어야 한다는 사실을 뱃속의 아이야 너도 태어나서 알게 되고 이 세상의 부드러운 바람이나 햇볕 하나로 너도 울며 세상의 ..
길 / 황지우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보면 조선팔도, 모든 명당은 초소다 한려수도, 내항선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 황지우 시집 밤길은 두렵다. 겨울밤은 어둡다. 헤매기 십상이다. 역시나 그랬다. 제사가 끝나고 집에 오는 길. 남편은 늦게라도 송년회에 가야한다고 먼저 따로 나갔다. 혼자서 뒷자리엔 애들을, 트렁크엔 김치를 싣고 출발했다. 시댁에서 집으로 가는 길, 수지에서 목동까지 수년간 수십 번을 지나갔는데 헤맸다. 판교IC 타는 곳을 놓쳤더니 영판 낯설다. 왕복 8차선 도로에 지나가는 차가..
木 瓜 / 김중식 '우리의 사랑은 의지다' 사랑이 고통일지라도 우리가 고통을 사랑하는 까닭은 고통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감내하는 까닭은 몸이 말라 비틀어지고 영혼이 꺼멓게 탈진할수록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지속적인 냄새를 피우기 때문이다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집요한 냄새를 피우기까지 우리의 사랑은 의지이다 태풍이 불어와도 떨어지지 않는 모과 가느다란 가지 끝이라도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의지 는 사랑이다 오, 가난에 찌든 모과여 亡身의 사랑이여! - 김중식 시집 문학과지성사 나의 화장대 세간은 단출하다. 스킨과 로션, 영양크림, 비비크림 정도. 가끔 아이크림이나 향수도 끼어있다. 입국자들에게 선물 받은 건데, 끝까지 써본 적이 없다. 성의가 고마워 간직하다가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고서야, 그것들은 쓰레기통에서 서글픈 최후를 맞이했다. 그..
국화꽃 그늘을 빌려 / 장석남 '마음 그늘 빌려서 잠시 살다가는' 국화꽃 가을을 빌려 살다 갔구나 가을은 젖은 눈으로 며칠을 살다가 갔구나 국화꽃 무늬로 언 첫 살얼음 또한 그러한 삶들 있거늘 눈썹달이거나 혹은 그 뒤에 숨긴 내 어여쁜 애인들이거나 모든 너나 나나의 마음 그늘을 빌려서 잠시 살다가 가는 것들 있거늘 - 장석남 시집 문학동네 겨울하고도 흐린 날. 온종일 비가 내렸다. 살얼음 낀 바람이 불지 않았고 쌀쌀하지도 않았으나 이제 가을비라고 말하지 않는다. 포털화면에 뜬 ‘겨울비’ 뉴스 자막을 보고 가을이 홀연 떠났음을 알아차렸다. 11월 가기 전에 가을 먼저 갔다. 그래서 그랬나. 거리에 낙엽이 소용돌이처럼 휘감길 때는 봄처녀 가슴 부풀어 오르듯 안절부절 못하겠더니 요 며칠은 마음 없이 산 거 같다. 세상과 연결된 코드를 빼버린 것처럼 적막했다. 몸에서 가을이 ..
기러기/ 메리올리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 백 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 절망을 말해보렴, 너의.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 테니.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 그러면 태양과 비의 맑은 자갈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거야. 대초원들과 깊은 숲들, 산들과 강들 너머까지. 그러면 기러기들, 맑고 푸른 공기 드높이,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거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며 달뜬 목소리로- 네가 있어야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 메리 올리버 '기러기' 김연수장편소설 표제시 직감이라는 것. 선천적인 부분도 있지만..
의자 / 이정록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 이정록시집 , 문학과지성사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길가에 금은보화처럼 수북이 쌓여있는 낙엽을 가르며 달리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놀이기구를 탄 것 같아서 마냥 가고 싶었지만 늦으면 안 되니까 자중했다. 지하철을 갈아탔다. 늦가을 풍경에 취해 멍하니 앉아 ..
11월의 나무 / 황지우 -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 황지우시집 문학과지성사 인생 폼 나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11월을 좋아했다. 외로운 나그네 둘이서 언덕을 넘어가는 쓸쓸한 형상이 떠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