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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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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쓰는 편지3 / 김사인 한강아 강가에 나아가 가만히 불러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작은 목소리에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나 값싼 눈물 몇 낱으로 저 큰 슬픔을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큰 분노와 슬픔으로 흐르는 것인 줄을 진즉 알고는 있었습니다 한강아 부르면서 나는 저 소리없는 흐름에게 무엇을 또 기대했던 것인지요 큰 손바닥과 다정한 목소리를 기다렸던 것인지요 나도 한줄기 강이어야 합니다 나도 큰 슬픔으로 그 곁에 서서 머리 풀고 나란히 흘러야 합니다 - 김사인 시집 청사 비가 왔다. 좋았다. 나뿐이겠는가. 비오는 날이면 라디오 사연도 급증한다. 알록달록 우산처럼 여기저기서 감수성이 꽃핀다. 난 이번 비에는, 왠지 게으르고 싶어졌다. 한글파일을 끄고 찢어진 우산을 폈다. 뒷목으로 흘러드는 빗물..
김수영 / 비 '움직이는 비애'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를 알고 있느냐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 그 누구의 시처럼 그러나 여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여 결의하는 비애 변혁하는 비애...... 현대의 자살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 계사 위에 울리는 곡괭이소리 동물의 교향곡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 ---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
사십대 / 고정희 - 제 몸에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어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 고정희 유고시집 창작과비평사 꽃단장 컨셉에 맞추느라 신발장을 지키던 7센티 정통 하이힐 신고 외출했다가 아주..
보리/ 이재무 '세상 옳게 이기는 길' 보리밭 속에 들어가 보리와 함께 서본 사람은 알리라 바람의 속도와 비의 깊이를. 보리밭 속에 들어가 보리와 함께 흔들리며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정확히 알리라 세상 옳게 이기는 길 그것은 바로 바르게 서서 푸르게 생을 사는 자세에 있다는 것을 - 이재무 시집 문학과지성사 선거 전후로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냈다. 그냥 다 속상하고 다 안타깝고 다 갑갑했다. 화병이 났는지 선거 날은 아침부터 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침대에 자석처럼 붙어 있다가 오후 2시에 가까스로 투표장에 갔다. 줄이 길었다. 안에서 먼저 투표를 하고 나오던 40대 남자가 내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는 반갑게 아는 척을 한다. 친구인지 이웃인지 간단히 몇 마디 나누더니 가면서 하는 말. “우리 동문 나온 거 알지?” “응. 알아” '참내 무..
김종삼 / 묵화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김종삼시집 민음사 긴 하루가 지났다. 단거리 마라톤을 끝낸 것 같다. 다리가 팅팅 부었다. 다시 한 호흡 가다듬는다. 늘 삶이 단조롭기를 소원하나 그러질 못해 말썽이다. 친구가, 나이 사십에 접어들면서 하기 싫은 일은 안 하기로 결심했는데도 왜 똑같이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고 하더니만 내가 그 짝이다. 분명 결심했다. '잘할 수 있는 일만 하자. 한 가지라도 공들여 일하자.' 그리고 종종거리지도 징징거리지도 말고 묵묵히 거뜬히 해내자. 그런데 여전히 부릉부릉 시동소리 요란하다. 이런 삶은 주위에도 민폐다. 나와 접속하는 사람들의 인사말이 늘 이렇다. “요새 바쁘지?” 완전 민망하다. 조용히 ..
논 / 황지우 '살고싶다 별안간' 큰비 물러간 다음, 논으로 나가 본다 창평 담양 일대의 범람이여 논은 목숨이다 농부님은 이 숨 넘친 水平에서 자신의 노동을 뺀 생산비 이하의 풀포기들을 일으켜, 그래도 어쩌야 쓰것냐 살어라 살어라 하신다 멀리 제비들이 그에게 경례 한다 아픈 내 몸이 안 아프다 왜 그러지 물 위로 간신히 밀고 나온 연둣빛을 보니 살고 싶다 별안간 - 황지우 시선, 민음사 고속버스 타고 가는 길.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유리창에 빗방울들이 사선으로 아슬아슬 달라붙어 있다가 점점 미끄러지더니 가차 없이 몰락한다. 고 여리고 투명한 것들의 맹렬한 몸부림의 경연장에 내 얼굴은 희미한 배경으로 설정돼 있었다. 머리를 자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난줄 몰라봤다. 유리창 안쪽에 간당간당 매달린 나. 빗방울처럼 혼자인 나 또한 언젠가 형체..
내 워크맨 속 갠지즈 / 김경주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표정' 외로운 날엔 살을 만진다 내 몸의 내륙을 다 돌아다녀본 음악이 피부 속에 아직 살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열두살이 되는 밤부터 라디오 속에 푸른 모닥불을 피 운다 아주 사소한 바람에도 음악들은 꺼질 듯 꺼질 듯 흔 들리지만 눅눅한 불빛을 흘리고 있는 낮은 스탠드 아래서 나는 지금 지구의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있는 메아리 하나 를 생각한다 나의 가장 반대편에서 날아오고 있는 영혼이라는 엽서 한 장을 기다린다 오늘 밤 불가능한 감수성에 대해서 말한 어느 예술가의 말을 떠올리며 스무 마리의 담배를 사오는 골목에서 나는 이 골목을 서성거리곤 했을 붓다의 찬 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고향을 기억해낼 수 없어 벽에 기대 떨곤 했을, 붓 다의 속눈썹 하나가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것 같다는 생 각만으로 나는 겨우 음악이 ..
봄이 와도 봄은 오지 않고 / 이태수 '바람이 분다' 봄이 와도 봄은 오지 않고 내 마음의 깊은 골짜기, 바람이 분다. 지난해 사시사철 잉잉대던 그 찬바람이 분다. 그는 돌아오지 않고, 그를 기다리는 마음은 이토록 붉은데, 세상은 여전히 뒤죽박죽 돌아간다. 사람은 벌써 그를 까마득히 잊어버렸는지, 그도 이젠 어디로 영영 가버렸는지, 꿈속에서조차 보이지 않는다. 기다리던 봄이 다시 오고 산과 들판, 뜨락에 갖가지 꽃이 피었는데도 내 마음에는 봄이 돌아오지 않는다. 풀잎도 꽃들도 안 보이고, 냇가의 얼음도 처마 밑의 고드름도 녹지 않는다. 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처진 어깨, 초점 잃은 눈동자, 그래도 아랑곳없는 사람들. 공장의 기계들은 잠을 자고, 집들이 흔들린다. 거리에서 새우잠을 자는 사람들은 가슴에 별빛을 끌어들이지만, 따스한 밥을 꿈꾸지만, 밥그릇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