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올드걸의시집

(167)
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친구랑 점심을 먹었다. 친구가 후배직원과 같이 나왔다. 뿔테 안경에 더벅머리를 인 선머슴 비주얼에다가 어딘가 겅중거리는 뒤태가 단독의 망상체계를 구축한 소년 캐릭터를 연상시켰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월의 다정한 햇살로 데워진 합정동 주택가 골목길을 터벅터벅 내려가는데 그 소년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말을 건다. “저, 등단 하셨다고요?” 첨엔 놀랐고 바로 웃겼다. 너무 뜬금없는 대사가 무슨 접선하는 거 같았다. 시 읽는 여자로 나를 치장한 적은 있을지언정, 시 쓰는 인격으로 행세한 적은 없다. 그 푸른색 거짓말을 나는 모른다. 알고 보니 친구가 나에 대해 시를 좋아한다며 시집 운운한 모양이다. 그 소년이 ‘시집’이라는 말에 혹해서 ‘등단’까지 진도를 빼서 정보를 왜곡 수용한 거다. ..
시세미나_말들의 풍경_시즌3_ 미래의 시집 "시 세미나 쉬니까 좋아? (싫어?)" 세미나 하던 친구들과 통화할 일 생기면 다짜고짜 물어보게 됩니다. 이 무슨 투정인지 앙탈인지 모르겠습니다. 저것은 특정 반응을 유독하는 전형적인 닫힌 질문아니겠습니까.ㅋ 다행스럽게 "시 세미나 없으니까 일주일이 힘들어요. 위로받을 데가 없어서요." 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바람도리님도 댓글로 말씀하셨네요. 시 세미나 없는 토요일이 허전하다고요.^^ 우리는 그저 아름다운 시어들과 소소하고 자질구레한 느낌들을 나누었을 뿐인데 그 말들의 풍경이 영적구원과 은총의 시간이 되었다니 신기한 일입니다. 시즌1 올드걸의 시집, 시즌2 여자의 시집에서 총 26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시즌3은 미래의 시집 '아무도 가본적 없는 도시에 서다' 시집 10권과 편집시집, 평론집 각1권씩 1..
문태준 - 내가 돌아설 때 지난 주 글쓰기 수업을 마치고 여의도에 갔다. 약속한 사람이 MBC 조합원이다. 엠비시 노조는 지금 사방이 화택이다. 파업 80일을 넘기면서 본사 마당에 텐트 치고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동참하는 그와 잠시 나와서 저녁을 들었다. 파업이 너무 길어지고 회사는 요지부동이고 시민은 무관심하고. 내부에서도 업무에 복귀하는 조합원이 생기고 (파업에 합류하는 조합원도 있지만) 회사는 경력직을 채용하여 대체인력을 확보하니까 분위기가 무겁다고 했다. 그 역시 파업이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 모르고 약속해 놓은 작품이 있었는데 고심 끝에 파업에 계속 동참하기로 결정했단다. 윗사람과의 갈등이 컸던 모양이다. 불판에 삼겹살처럼 수시로 뒤집히는 마음. 남을까 떠날까를 고민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그동안 같..
윤동주 / 병원 - 외로움 독거친구들이 불 꺼진 집에 혼자 들어가기 싫고 집에 들어가도 외로움을 달래려 TV부터 켠다고 했을 때 “나는 불 꺼진 집에 들어가는 게 제발 소원”이라고 했다. 진짜다. 동굴처럼 컴컴한 어둠이 기다리는 곳, 체온으로 덥혀지지 않아 풀 먹인 이불호청처럼 약간 서늘한 공기로 세팅된 공간에 들어가서는 오디오랑 스탠드 켜고 한 시간 정도 넋 놓고 앉아있어도 아무도 말 시키는 사람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런 고즈넉한 일상을 살아보고 싶었다. 자취, 유학, 긴 여행 등 단독거주 기회가 전무 했다. 서울내기에다가 결혼 전에는 엄마아빠오빠가 결혼 후에는 남편아들딸이 집에서 24시간 365일 번갈아 대기상태였다. 군집 동물인 인간이 혼자 고립되는 것도 위험하겠지만 늘 누군가와 동거해야하는 것도, 길어지면 미칠 ..
몰락의 에티카, 그가 누웠던 자리 4월 21일. 시세미나 시즌2 마지막 시간. 봄비 가열차게 내리던 밤. 우리는 아름다운 몰락을 위해 를 읽었습니다. 감기와 시험 등으로 개별적인 몰락을 통보한 바람도리(은미), 단단, 한준이 빠진 빈자리. 오랜만에 형호씨가 등장했습니다. 혜진, 민, 소영이 가로등처럼 환하게 여전히 그 자리를 지켜주었고요. 소설과 시 두 마리 토끼를 모는 문학의 여신 은재와 정란, 공교육의 현장 감각으로 시수업의 핵심을 짚어주시는 로코코 고은, 그리고 웃음과 활력에너지 원천 공대생 예술인 두부가 함께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날도 어김없이 홍차 캔음료 데자와를 든 어린왕자 규빈이 간신히 착지하였습니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이 아니면 달리 살줄 모르는 자를. 신형철 평론집 애피그램으로 쓰인 구절이고 출처는 니체의 서문입니다..
김중식 - 이탈한 자가 문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 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 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 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 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 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 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 롭다는 것을 – 김중식 시집 『황금빛 모서리』 중에서 프리랜서로 글 쓰는 일을 완전히 그만둔 지 일 년이 지났다. 일명 문필하청업. 각종 사보와 공공간행물을 기반으로 주로는 인터뷰, 신입사원연수 동행기, 부서소개, 맛집 탐방, 새로 ..
김경미, 고통을 달래는 순서 같이 산 것도 아닌데 정이 드는 남자가 있다. 친구의 남편이나 남자친구다. 그들과 나는 참으로 비대칭적인 관계이다. 친구를 만날 때 같이 얼굴을 보기도 하지만 주로는 친구가 공개하는 간접 정보를 통해 그 사람의 전모를, 수다체로는 이꼴저꼴을 알게 된다. 둘이서 깨소금 쏟아지는 만남초기에는 남자들은 거의 정상성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친구는 연애 하느라 바빠서 연락조차 뜸하다. 무소식이 희소식 시즌이 끝나면 어김없이 다가오는 하소연. (그 놈의) 그것을 알려주마 국면에 접어든다. 안건은 대동소이하다. 이기적인 행태, 제멋대로 결정, 가사와 육아의 외면, 경제적 무능, 애매한 불륜 등. 싸웠다 화해하고 다시 헤어졌다 만나고 때로 영영 갈라서기도 하고. 친구커플이 지지고 볶는 일..
불취불귀不醉不歸 / 허수경, MOT-wing 어느 해 봄 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 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 허수경 시집 , 문학과지성사 그녀의 시가 물미역처럼 몸에 치덕치덕 감겨서 빠져나오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