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 병원 - 외로움

[올드걸의시집]

 

독거친구들이 불 꺼진 집에 혼자 들어가기 싫고 집에 들어가도 외로움을 달래려 TV부터 켠다고 했을 때 “나는 불 꺼진 집에 들어가는 게 제발 소원”이라고 했다. 진짜다. 동굴처럼 컴컴한 어둠이 기다리는 곳, 체온으로 덥혀지지 않아 풀 먹인 이불호청처럼 약간 서늘한 공기로 세팅된 공간에 들어가서는 오디오랑 스탠드 켜고 한 시간 정도 넋 놓고 앉아있어도 아무도 말 시키는 사람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런 고즈넉한 일상을 살아보고 싶었다. 자취, 유학, 긴 여행 등 단독거주 기회가 전무 했다. 서울내기에다가 결혼 전에는 엄마아빠오빠가 결혼 후에는 남편아들딸이 집에서 24시간 365일 번갈아 대기상태였다. 군집 동물인 인간이 혼자 고립되는 것도 위험하겠지만 늘 누군가와 동거해야하는 것도, 길어지면 미칠 노릇이다. 그렇게 40년 외길인생. 그러나 미치지 않고 ‘얼굴에 그늘이 없다’는 말을 듣고 살긴 살았는데 그런 나의 인성에 하자가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다. 바로 외로움에 무지하다는 것.

일찍이 나는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는 시구로 유명한 「수선화에게」를 줄줄 외우며 외로움을 학습했다. ‘난 니가 바라듯 완전하지 못해. 한낱 외로운 사람일 뿐야’ 들국화의「제발」을 따라부르며 가슴 깊이 외로움을 새겼다. ‘여자에게 독신은 홀로 광야에서 우는 일이고 결혼은 홀로 한 평짜리 감옥에서 우는 일’이라는 신현림의 시구에 크게 공감하며 외로움을 인식했다. 외로움 그거 삶의 조건이니까 발버둥치지 말고 안고 가라고 지인들에게 무시로 충고하며 외로움을 일반화했다. 무림고수처럼 굴면서 외로움을 꽤나 여유롭게 다뤘다. 그런데 요즘 ‘외롭다’는 대사가 별스럽게 들린다. 가령 후배랑 대화하다가. 니 남자친구한테 문자 보냈는데 답이 없다고 했더니 자기도 그 애한테 다정한 문자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단다. 근데 왜 만나느냐고 하니까 “그냥 외로우니까 만나죠” 한다. 또 헤어진 남친과 다시 만나는 친구에게 왜냐고 물으니 “아침마다 출근 시켜주고 주말에 특별히 할 일도 없고 그냥 외로워서 만나” 그런다. 동거남이랑 헤어진 후배는 평소 그 강인함은 어디가고 “외로워 죽겠다”며 울먹울먹 안절부절이다. 영화 <은교>에서 은교는 말한다. “여고생이 왜 남자랑 자는 줄 아세요? 외로워서요.”

자몽처럼 쓰고 시큼한 분홍 즙이 나올 것 같은 말. 저 외로움의 실체가 뭘까. 내가 그동안 알았던 외로움은 외로움이 아니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성탄절 이브의 사건이 떠오른다. 식구들 다 잠들고 나만 홀로 덩그마니 남았는데 마음이 울렁거리고 답답했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집 앞 포장마차에서 순대볶음 6천원어치랑 소주를 사다가 마시는 초유의 궁상사태를 연출했다. 그냥 뭔지 모르게 사무쳤다. 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에 나는 왜 혼자인가. 아니, 나는 왜 혼자 일 수 없는가. 한 평짜리 감옥을 한숨으로 채웠다. 그게 외로움이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외로울 때조차 감정에 몰입하기보다 소낙비 피하듯 도망쳤고 분석했다. 한국사회에서는 결혼제도가 친밀성의 장을 독점하기 때문에 외로운 거다, 이게 다 결혼 때문이라는 구조적인 비판으로 정리했다. 당하면 외로움이고 선택하면 고독이라고. 외로움 따위의 수동적인 정념에 휘말리지 않음을 뿌듯해했고 자주적인 여성으로서 우아한 고독자 되기를 동경했다.

사랑과 외로움을 가르마처럼 분리해서 사고했다. 외로워서 남자를 만나느니 그건 사랑에 대한 모독이며 홀로 선 둘이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게 참다운 사랑이고 외로운 사람끼리 질척거리는 정서예속 상태는 비루한 사랑인 거다. 연애근본주의자인 나에게 사랑은 인간 외적 영역에서 구현되는 이념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헌데 저 날것 그대로의 외로움 발언대를 생중계로 듣고 나니 꽉 짜였던 사고의 틀이 흔들린다. 다른 이유 아무 것도 아니고 외로워서 한 사람을 만나고 외로워서 둘이 살아가는 인생이 무에 그리 문제일까 싶고 그게 아니라면 또 무에 그리 대단한 이유가 있을까 싶다. 그러니까 비듬같이 정결치 못한 감정쯤으로 여기고 행여나 달라붙을 세라 몸에서 털어내기 바빴던 외로움을 응시하는 단계를 지나면서, 고독의 향유자는커녕 외로운 단독자조차 제대로 되어보지 못한 나의 누추함을 본다. 가부장제 질서에서 고독을 확보할 용기도 능력도 부족한 나로서는 심보선 시구대로 ‘나는 가만히 있고 집이 멀어져서’라도 외로움을 당해보고 싶기도 하다.

‘늙은 의사가 젊은이의 병을 모르’듯이 외로움을 몰랐던 시절을 반성하는 요즘. 호기심이 넘쳐 사람들한테 실없게 물어보고 다닌다. 어떤 가요. 그대 외로운가요? 비혼 선배한테 물어봤더니 흐리게 웃는다. “그런 거 몰랐는데 작년부터 몸이 여기저기 안 좋아지니까 외롭더라. 간사하게” 예전 같으면 배우자가 간병인이냐며 실용주의를 비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는 가만히 고개 끄덕인다. 외로움이 자기보존에 기여하는 중차대한 감정이구나 생각한다. 인간을 사색하게 한다는 점에서 야만에서 구제하는 요소이고 관심을 타자에게로 향하게 한다는 점에서 겸손하게 만드는 동력으로서의 외로움. 물론 그 외로움이 지나치고 사무치면 자기파괴에 이르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찾아오는 나비 한 마리, 바람 한 점 없어서 외롭게 죽어간 이들을 슬퍼하면서, 변변히 외롭지 못했음을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이었다고 믿었던 날들을 부끄러워하면서, 돌아누운 이적요의 비린 눈물을 떠올리면서, 나는 그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가만히 누워본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
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
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
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
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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