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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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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그날의 현장 검증 / 황지우 어제 나는 내 귀에 말뚝을 박고 돌아왔다 오늘 나는 내 눈에 철조망을 치고 붕대로 감아 버렸다 내일 나는 내 입에 흙을 한 삽 쳐넣고 솜으로 막는다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나는 나의 일부를 파묻는다 나의 증거 인멸을 위해 나의 살아 남음을 위해 - 황지우 시집 , 문학과지성사 눈에 밟힌다. 그 아이. 내가 살면서 본 뉴스 중에 가장 끔찍하고 가장 가슴 아픈 일이 되었다. 우연히도 요 며칠 나의 화두는 ‘엄마’였다. 아는 선배가 엄마를 주제로 전시를 하고 싶다고 해서, 화가 났던 참이다. 사진을 보고 말했다. “저 중에는 비혼이거나 자식 없는 중년 여성도 있을 거 같은데...” 사람들은 나이든 여자를 다 엄마로 보고 싶어 한다. 나는 어른 남자들이 그저 떠올리기만 해도 애잔하고 죄송스러운 엄마를 호명..
생활 / 김수영 시장거리의 먼지 나는 길옆의 좌판 위에 쌓인 호콩 마마콩 멍석의 호콩 마마콩이 어쩌면 저렇게 많은지 나는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모든 것을 제압하는 생활 속의 애정처럼 솟아오른 놈 (유년의 기적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갔나) 여편네와 아들놈을 데리고 낙오자처럼 걸어가면서 나는 자꾸 허허...... 웃는다 무위와 생활의 극점을 돌아서 나는 또 하나의 생활의 좁은 골목 속으로 들어서면서 이 골목이라고 생각하고 무릎을 친다 생활은 고절(孤絶)이며 비애이었다 그처럼 나는 조용히 미쳐간다 조용히 조용히...... - 김수영 전집, 민음사 보살님 같았다. 온화한 표정. 잡티 하나 없는 무욕의 피부. 넉넉한 말투. 세미나 첫날부터 앉아계시는 그곳에 편안한 파장이 흘렀다. 수선문. 화두를 아이디 삼으셨다..
시세미나 4-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오후 6시. 세미나실에 사람들 들고 나는 시간. 문학세미나가 끝나고 시세미나가 열린다. 방에서 나오던 가연이 카페 테이블 위 시집을 쥐어든다. “와, 이거 멋지다.” 제목을 적겠다고 볼펜을 꺼내려다가 스마트폰으로 찍기로 했다. 옆에 있던 유정과 나는 얼결에 모델대오로 포즈를 취했다. 시집팔이소녀. 매혹적인 언어의 조합을 팝니다. 장석남의 것. 시세미나 시즌1 ‘올드걸의 시집’ 열권을 선별하면서 끝까지 망설인 시집이다. 넣다가 뺐다가를 반복했다. 단 한 편의 시가 너무 아름다운데, 나머지는 미궁이다. 사실 그가 언어를 부리는 솜씨가 아주 빼어나거나 통찰이 남다르지는 않다. 근데 시집 전체에 긴장이 흐른다. 낡은 풍경을 심상하게 그리는데 이론상 쉬워야하는데, 의미가 모아지지 않고 미끄러진다. 바늘귀에 들어가..
시체 / 보들레르 기억해보아라, 님이여, 우리가 보았던 것을, 그토록 화창하고 아름답던 여름 아침: 오솔길 모퉁이 조약돌 깔린 자리 위에 드러누워 있던 끔찍한 시체, 음탕한 계집처럼 두 다리를 쳐들고, 독기를 뿜어내며 불타오르고, 태평하고 파렴치하게, 썩은 냄새 가득 풍기는 배때기를 벌리고 있었다. 태양은 이 썩은시체 위로 내리쬐고 있었다, 알맞게 굽기라도 하려는 듯, 위대한 ‘자연’이 한데 합쳐놓은 것을 백 갑절로 모두 되돌려주려는 듯; 하늘은 이 눈부신 해골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어나는 꽃이라도 바라보듯. 고약한 냄새 어찌나 지독하던지 당신은 풀 위에서 기절할 뻔했었지. 그 썩은 배때기 위로 파리떼는 윙윙거리고, 거기서 검은 구더기떼 기어나와, 걸쭉한 액체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살아있는 누더기를 타고, 그 모든 ..
시세미나1 : 가재미 - 물렁물렁한 바퀴 되기 토요일 오후 6시. 황금시간. 조직의 강제에서 놓여나는 자유시간. 가족에게 봉사하는 시간. 광고시장의 프라임 타임. 리모콘 운전하면서 시청자와 소비자 주체로 살아가는 시간. 존재증명을 위한 스펙을 쌓는 시간. 방황하는 시간. 나의 욕망과 본능대로 살고 싶지만 달리 방법을 몰라 어정쩡하게 흘려보내는 시간. 집회시간.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드는 시간. 어쨌거나 현대인의 ‘자아’의 활동력이 가장 왕성한 시간. 그 삶의 노른자위에서 시집을 편다는 것은, 느긋한 저항이다. 가시적인 성과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일. 쓸 데 없는 짓을 행함으로써 ‘쓸모 있음’의 세상에 등지겠다는 것. 잠시나마 다른 삶의 시공간을 열어 밝히고 싶은 욕망. 내 삶의 촛불시위. 같이 모여서 둘러앉아 시집의 모서리를 부딪..
해방촌, 나의 언덕길 / 황인숙 이 길에선 모든 게 기울어져 있다 정일학원의 긴 담벼락도 그 옆에 세워진 차들도 전신주도 오토바이도 마을버스도 길가에 나앉은 됫돌들도 그 위의 신발짝들도 기울어져 있다 수거되기를 기다리는 쓰레기 봉투들도 그 위에 떨어지는 빗줄기도 가내 공장도 거기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도 무엇보다도 길 자신이 가장 기울어져 있다. 이 길을 걸어 올라갈 때면 몸이 앞으로 기울고 내려올 때면 뒤로 기운다. 이름도 없고 번호도 없는 애칭도 별명도 없는 서울역으로 가는 남영동으로 가는 이태원으로 가는 남산 순환도로로 가는 그외 어디로도 가고 어디에서든 오는 급. 경사길. - 황인숙 시집 , 문학과지성사 해방촌과 이별했다. 짐차를 보내고 정수샘 차로 비탈길을 털털털 오르면서 친히 호명했다. (구)정일학원 안녕. 용왕정김치찌개집..
자연 / 이성복 1 내가 자연! 하고 처음 불렀을 때 먼 데서 무슨 둔한 소리가 들렸다 하늘 전체가 鍾이야 내가 자연! 하고 더 작게 불렀을 때 나무들이 팔을 벌리고 내려왔다 네가 山이야 내가 자연! 하고 마지막으로 불렀을 때 샘물이 흘러 발을 적셨다 나는 바싹 땅에 엎디어 남은 말들을, 조용히, 게워냈다 2 안개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그의 입모양도 지워지고 손짓만이...... 떨리는 손가락,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는 돌아서 무언가를 밀어젖혔고 그건 門이었고 아름드리 전나무가 천천히, 쓰러져 갔다 굴러 떨어지며 그가 일으키는, 나는, 물결이었다 - 이성복 시집 엄마 요즘 왜 시집 안 읽어? 딸이 묻는다. 내가 시를 안 읽는 줄도 몰랐는데 딸이 일깨워 준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니 책상 위에 시집이 없단다..
시 읽기 세미나 - 말들의 풍경 한 사람과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시가 쌓입니다. 이 삶을 다시 살고 싶다고 후회할 때 시가 다가옵니다. 시집에는 어김없이 얼굴이 누워있습니다. 인연이 매개한 ‘말들의 풍경’은 그대로 세상 읽기의 독본입니다. 반려생물처럼 시집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동안은 사는 일이 쓸쓸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뜨겁게 달궈진 불온한 언어는 정신의 성냥불을 확 긋기도 합니다. 그러니 시는 행복 없이 사는 훈련(황동규)이며, 추위를 이겨내는 입김(김현)이기도 한 것입니다. 시가 필요한 시절, 그리고 계절. 같이 둘러 앉아 시를 낭독하고 느낌을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 10월 15일 토요일 6시부터 - 반장: 은유 016-233-8781 - 회비: 월 15000원 (수유너머R의 모든 세미나 참가 가능) - 함께 하실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