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그가 누웠던 자리

[올드걸의시집]

421. 시세미나 시즌2 마지막 시간. 봄비 가열차게 내리던 밤.

우리는 아름다운 몰락을 위해 <몰락의 에티카>를 읽었습니다.

 

감기와 시험 등으로 개별적인 몰락을 통보한 바람도리(은미), 단단, 한준이 빠진 빈자리. 오랜만에 형호씨가 등장했습니다. 혜진, , 소영이 가로등처럼 환하게 여전히 그 자리를 지켜주었고요. 소설과 시 두 마리 토끼를 모는 문학의 여신 은재와 정란공교육의 현장 감각으로 시수업의 핵심을 짚어주시는 로코코 고은, 그리고 웃음과 활력에너지 원천 공대생 예술인 두부가 함께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날도 어김없이 홍차 캔음료 데자와를 든 어린왕자 규빈이 간신히 착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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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하노라.

몰락이 아니면 달리 살줄 모르는 자를.

 

신형철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 애피그램으로 쓰인 구절이고 출처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입니다. 아마도 니체의 요청에 가장 부합하는 삶을 산 사람이 아닐까 싶은 시인 이상의 평론글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이상은 건축가 출신 시인입니다. 영화 <은교>에서 엄청 디스 당하는 공대생이 (문학에 대해) 뭘 알아?” 할 때 그 공대생 시인입니다.ㅋㅋ 수학과 작도를 배운 건축가의 시선. 설계도와 조감도 그리는 법을 배운 그는 도시 산책자이기 전에 이미 도시 설계자이죠. 백화점과 미로 등 근대 공간을 해체하는 작업은 당대의 일상적인 통념을 해체하는 작업과 나란하다는 것을 확인해나갔습니다. 오감도 제11의 아해가 무섭다 그러오...이 반복적 구절에 대한 반복강박에 대한 혜진샘의 문제제기로 잠시 설왕설래. 막다른 골목을 향한 편집증적인 질주(강박)가 반복된다는 점에서 반복강박의 표현같다로 논의가 모아졌고요. 왜 똑같은 문장을 계속 쓰느냐고 말하던 두부는 낭독하더니 시 너무 좋다고 정서감염 증세를 나타냈습니다. 이상의 시는 낭독을 해야 제맛이 우러납니다.

 

미로는 뚫린 골목이지만 막힌 골목이라는 역설의 확인. ‘출구 없는 식민지시대 폐병 3기 지식인에게 모든 길은 뚫린 골목이자 곧 막힌 골목인 미로였을 것이다에 밑줄 긋고. 마가쟁 드 누보테에서 백화점의 화려환 외관을 괄호치고 그것을 설계도로 해체시켜 부조리한 공간으로 만들어버린 놀라운 시를 낭독하고 이상의 천재성에 또 감탄하고 그것을 읽어낸 신형철의 천재성과 성실성에 또 박수치고 그랬습니다.

 

슬퍼? - 슬플밖에 - 20세기를 생활하는데 19세기의 도덕성밖에는 없으니 나는 영원한 절름발이로다

 

이 구절은 왜 이렇게 가슴 먹먹하게 좋은가요. 생활인 김해경과 시인 이상의 분열.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 미끄러지다가 아름답게 몰락한 사람. 혜진샘은 이상에 대해 자의식 과잉의 지식인 아닌가 못마땅한 심기를 살짝 표현하였고 정란샘은 문학하는 사람으로서 인간적인 고투로 보인다며 옹호했습니다. 은재샘은 조감도가 원래 오만하고 폭력적인 시선인데 이상에게서는 그런 점이 안 보인다고 했고, 소영샘이 이상의 시는 전위지만 불편하지 않다, 어떤 나이 어린(!) 등단 시인의 시를 읽을 때의 그저 감각적인 시와는 확실히 다르다고 얘기했고 이를 계기로 감각, 감성, 감정. 정서, 정동 등에 대한 민이의 날카로운 해석을 주축으로 논의가 오갔습니다. 자의식이 나쁜 건 아니다. 과잉이 문제다. 그런 얘기도 함께. 

 

2부의 주인공은 윤동주. 휴머니즘 철철 넘치는 그의 시를 읽고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가. 그런 어렵고 진지한 주제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괴로울 때 누구한테든 고민을 말할 수밖에 없어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들을 수밖에 없어서 듣는 것인데. 고민을 들은 자가 앞에서는 공감포즈를 취하고 뒤에 가서는 딴 소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하고 또 들어야한다. 이 귀한 결론을 막내지만 언니 같은 소영이가 내려주었고 다들 크게 공감했습니다. 윤동주의 그가 누웠던 자리에 가서 눕는 미묘한 머뭇거림이 참으로 겸손한 윤리적인 포즈가 아니겠느냐. 경선은 그 대목에 필이 꽂혀서 미묘한 머뭇거림 느껴보고 싶다고 얘기했습니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

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

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자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

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

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 <병원>

 

 

윤동주의 시 두편. 팔복병원에 나오는 핵심어. 슬픔과 아픔의 차이가 뭘까. 신형철이 슬픔이 구조적 통찰 이전의 즉각적 반응이라면 아픔은 어떤 구조적 통찰 이후의 반성적 반응이다.’고 했는데 저는 아픔이 먼저고 슬픔이 나중이더라고 말했습니다. 은재가 인간극장 같은 프로그램 보면 처음에는 슬프고 그들의 구조적인 삶을 인식하면 아픈 거 아닌가 예시를 들어서 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로코코의 경험담이 봄비로 촉촉해진 우리의 심금을 울렸지요. 연애하기 전에도 무시로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쓰긴 썼지만 진짜 느껴본 적이 없는데 연애할 때는 슬프면 정말 (앙가슴을 만지며) 여기가 아프더라며 아픔을 느껴보았다고 했지요. 정란의 부럽부럽 모드. 그 얘길 듣고 보니 자신은 연애하면서도 아픔을 느껴본 적이 없는 거 같다고 시무룩하게 말했습니다. 슬픔-아픔 이야기에 물이 올라 저는 문득 <슬픈 아픔>이란 노래를 떠올렸고 스마트폰으로 즉흥 감상했습니다. 풍부한 기타사운드에 감성은 더 몰락의 길을 가고.

 

슬픔 층위까지는 자주 이르지만 아픔까지는 가는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느니. 상처받지 않으려고 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거 같다, 아픔의 정서를 촉발하는 사람이 고귀한 인연이다. 뭐 이런 생각을 하는데 로코코님이 어느 평론가 교수님 얘기 들려주셨어요. "좋은 비평은 기분 나쁘게 하는 게 아니라 아프게 하는 비평이다."고 하셨답니다. 살짝 비틀어봐도 좋은 말이 되네요. 좋은 인연은 화나게 하는 게 아니라 아프게 한다. 그러니 정서적 층위에서 육체적 층위까지 육박해오는 파동으로서 아픔을 느낄 기회를 마다하지 말아야합니다. 아플 수 있을 때 아프자.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 

 

윤동주 시를 사랑하도록 인도하고 아픔의 가치를 재발견하도록 물꼬를 터준 신형철-책에 감사했고요. 요즘 복고취향으로 선회중인 제가 서정주를 친일파라고 미워했는데 모국어를 너무 절도 있고 아름답게 쓰더라고 감탄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런 저의 요청에 따라 문학소녀 소영의 <귀촉도> 암송으로 장장 4시간 시담의 막을 내렸고 시즌2도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신형철이 말하는 몰락의 윤리는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눕는 일이 아닐까, 시를 읽는 일도 누군가 누웠던 자리에 가서 슬며시 누워보는 미묘한 머뭇거림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지난 가을부터 모두 26권의 시집을 읽었습니다. 그동안 나란히 누워주고 머뭇머뭇 느낌을 나눠준 친구들, 많이 고맙고 많이 사랑합니다. 스치듯 만난 인연들도 어쩌자고 그립습니다.

 

 

 

** 수유너머R 시세미나 2주간 방학합니다. (4월 28일, 5월 5일 세미나 쉽니다)

** 시즌3 미래파 시인 편 아무도 가본 적 없는 도시에 서다는 조만간 일정표 올리겠습니다.

** 512일 토요일 6. 첫 시간에 이장욱의 <정오의 희망곡>으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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