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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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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 황인숙 저처럼 종종걸음으로 나도 누군가를 찾아나서고 싶다...... - 황인숙 시집, 문학과지성사 일요일에 성묘를 갔다왔다. 집에 두고 간 핸드폰에 문자와 부재중 전화가 쌓였다. 뭔가 봤더니 추장 부친상 소식이다. 가슴이 덜컹했다. 며칠 전까지 아버지를 곁에서 모시기위해 일산 근처로 이사해야할 것 같다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다고 뭐 그런 얘길했었다. 아버지가 오래 아프셨다. 27년 정도. 예전에 추장 인터뷰할 때, 아버지 얘길 꽤 길게 했었다. 아버지가 막내인 그를 유독 예뻐했고 아버지에게 업혔던 따뜻한 등을 기억하고, 중3때부터 아팠던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한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 화학과를 지원했고 등등. 그 나눠가진 기억 때문인지 마음이 아팠다. 여러가지 이유로 심란했다. 작년 언제인지는 모르겠..
허수경 '킥킥 당신 이쁜 당신...'이소선 <어머니> ‘소선小仙’ 작은 선녀라는 뜻이라고 한다. 지금도 이렇게 작은데 태어났을 때는 을매나 작았겠느냐며 옛날이야기 하듯 당신 생의 기원을 더듬는 할머니가 정겹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의 삶을 담은 영화 를 보았다. 곱고 예쁜 이름만큼이나 영화가 소소하고 재밌다. 노동자의 어머니로 평생 살아왔는데 그런 칭호가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물으니 “노동자의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뭐라고 부르겄냐”고 조단조단 말씀하시는데 웃음이 난다. 질그릇처럼 투박하게 때론 놋그릇처럼 쨍쨍하게 때론 유리그릇처럼 투명하게 울리는 어머니의 일상. 창신동 좁은 골목길 올라간 방에서 고스톱을 판이 벌어진다. 어머니는 은행에서 출고된 포장용 동전꾸러미를 종자돈으로 꺼내놓으며 어느 금융위원장이 고스톱 칠 때 쓰라고 준 것이라고 자랑한다. 왼손에..
신해욱,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일 년에 0.5kg씩 꾸준히 자연증가세를 보이는 몸무게에 비례해 못 입는 옷의 중량도 늘었다. 옷이냐 살이냐. 둘 중 하나는 버려야 한다. 옷은 쉽고 살은 어렵다. 결단에 순간에는 아무래도 만만한 쪽을 택하게 된다. 체형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한 의류정리를 단행했다. 수년간 서랍에서 잠자던 옷가지를 추렸다. 빛바랜 옷들이 무지개떡처럼 층층이 쌓였다. 그것들을 보노라니 잠시 추억이 회오리쳤다. 처음 사서 쇼핑백에 담아올 때는 금지옥엽, 입을 때는 김칫국물 묻을 까봐 조심조심, 보관할 때는 드라이클리닝 비닐에 고이간직. 그래봤자 버릴 때는 다 똑같다. 각각의 고유성과 개별성은 사라지고 일괄폐기 처분한다. 연심의 변심. 그 요란한 과정을 묵묵히 당해야 하는 옷의 입장에서는 황당할 지도 모르겠다. 멋쩍고 미안해도..
김혜순, 납작납작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도시에서는 길을 헤매도 그다지 큰일은 아니다. 하지만 숲속에서 길을 잃듯이 도시에서 길을 잃으려면 훈련을 필요로 한다. 이 경우 거리이름이 마른 나뭇가지가 똑 부러지는 소리처럼 도시를 헤매는 이에게 말을 걸어주어야 하며, 도심의 작은 거리들은 산골짜기의 계곡처럼 분명하게 하루의 시간을 비추어주어야 한다.’ 벤야민의 자전적 에세이 일부이다. 평소 싸돌아다니기를 즐겨하는 나로서는 이 암호 같은 문장에 일순 매혹되었다. 아는 길도 물어가는 게 아니고 길 잃는 훈련을 하라니…이 책에서 벤야민은 일상적인 장면을 은밀하고 정교하게 본다. 대도시의 부산함 속에서도 동상, 건물, 모퉁이, 골목 등에게 끊임없이 말하고 들으며 유년시절 이미지를 불러낸다. 집안의 가구 등 물건들과도 마찬가지. 그런데 단순히 사물과의 대화..
진은영,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 서른다섯. 일자리가 필요했다. 이력서를 썼다. 세 바닥을 채워도 시원찮을 판에 네댓 줄 쓰니 끝이다. 쉼표 없이 달려온 마라톤 인생인데 어쩜 이리도 이력서가 빈곤한가. 화폐화 되지 않는 노동-활동은 언어화도 불가능했다. 궁극적으로는 존재증명이 난감했다. 아무튼 자기소개서에 금칠과 덧칠을 해서는 두 군데 지원했다. 은행파트타이머랑 지역신문기자. 결과는 둘 다 낙방. 물 한 바가지씩 연거푸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민망하고 처량하여 고개돌렸다. 내 인생에서 슬그머니 찢어버리고픈 한 페이지. 곧이어 커피전문점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았는데 이번에는 나이제한에 걸렸다. 노년 재취업도 아니고 삼십대 중반에 이럴 수는 없었다. 그 때 확실히 알았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는 정말 늦은 거다! 젠장. 어차피 궁지였다. 인..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여의도에서 잠실로 가기 위해 좌석버스 30번을 탔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는 신문을 폈다. 오후 2시의 햇살이 고흐의 노란 빛깔로 가닥가닥 쏟아져 들어왔다. 강물이 반짝이고 활자가 흔들렸다. 몸이 노곤노곤 해진 나는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미세한 기척에 부스스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신문이 손에서 떨궈져 담요처럼 무릎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신문과 다리의 틈에서 무언가가 뱀처럼 스윽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신문을 들추자 옆 사람이 황급히 자리를 떴다. 각 잡힌 감색 양복의 뒤통수를 보고서야 옆자리에 남자가 앉아있었음을, 내 생살 위로 미끄러지던 뱀은 그자의 손이었음을 알아챘다. 순간, 목덜미를 잡아채고 손모가지를 비틀기는커녕 나는 뇌부터 발끝까지 굳어갔다. 혀도 뻣뻣하고 심장만 ..
최영미, 원한의 인간의 고백 글쓰기 수업 때 들은 얘기다. 그녀는 서른을 갓 넘긴 비혼여성이다. ‘달려라 하니’처럼 커트머리에 자전거여행으로 팔도를 누비는 씩씩한 캐릭터이다. 하루는 저녁 찬거리를 준비하러 마트에 갔단다. 시식코너에서 맛있게도 냠냠 먹고 있는데 직원이 그러더란다. “고객님~ 남편 안주용이나 아이들 간식용으로 좋아요~” 순간 당황하고 불쾌하여 “제가 먹을 건데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고. 이 에피소드를 듣고는 다 같이 박장대소했다. 사실 처연한 웃음이다. 얼굴에 앳된 기색 사라지고 나면 한 여자의 개체성은 상실되고 엄마나 어머니로 호명되는 경우가 많다. 욕망하는 주체가 아닌 돌봄노동의 대명사로 불린다. 현실은 훨씬 징하고 찡했다. 주부들과 글쓰기 수업에서 그녀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자주 가슴을 쓸어내렸다. ..
김선우,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이것이냐 저것이냐. 삶은 선택의 앙상블이다. 어떤 결정도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일은 없지만 그래도 매번 고심하게 된다. 선택이 어려운 까닭은 내 안에 머무는 것들, 내가 몸 비비고 사는 것들이 많아서일 게다. 존재가 곧 필연이고 나눔이거늘 무엇을 덜어낼까. 내게 가장 난처했던 선택은 6년 전 일이다. 집을 반으로 줄여 이사하느라 면적에 맞게 가구를 선별해야 했다. 안방에는 장롱을 놓을까 침대를 놓을까. 거실에는 소파가 낫나 식탁이 낫나. 책꽂이냐 피아노냐. 이 문제로 도면을 그려가며 수일을 고심했다. 결국 장롱, 식탁, 피아노를 싣고 왔다. 자기만의 방이 없는 내게 거실은 주무대였고 식탁은 작업대였다. 원형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거액을 주고 장만한 오래된 식탁. 거기서 아침 먹고 그릇 치우고 책 보고 점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