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봄눈이 내렸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자리한 충무로 한 건물 앞에서 만난 그는, 마치 한 그루 나무처럼 서서 흩날리는 눈발을 맞고 있었다. 아, 어쩌면 그의 삶이 바로 이 장면과 같지 않았을까. 과거사 청산이 한낱 힘없는 구호에서 법으로 제정되기까지, 길고 긴 세월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김학철 선생. 그의 머리 위에는 어느새 백발성성 눈꽃이 쌓여 있었다.
역사의 밭 일구는 농부, 김학철
“과거사 청산, 뿌린 대로 거둡디다”
어렵던 시절, 서로 돕던 따뜻하고 오랜 인연
“창 문 좀 열어보세요. 비올 때 여기서 비 내리는 거 쳐다보고 있으면 참 좋지요.” 그를 따라 들어선 곳은 충무로 한옥마을 내 음식점. 그는 창호지가 발라진 창문 쪽을 가리키며 시를 읊듯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얼핏 외유내강한 선비로서의 풍모가 느껴지는 그이지만, 명함 속 글자들은 더없이 완강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인권침해조사국 11팀장 김학철’
그는 민언련이 막 생겨나던 무렵에 회원이 되었다. 당시 의문사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최민희 전 총장과 인연이 닿았고, 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김유진 사무처장이 일을 돕는 등 민언련 사람들과 각별하고 돈독한 관계를 이뤘다고 한다. 그래서 “최민희 전 총장이나 김유진 사무처장이 하자고 하면 무조건 다 돕는다.”는 그는 “오늘 여기에 나오게 된 것도 그 분들의 청”때문이라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의문사 규명’ 노력만큼 성과 거두는 정직한 일
그는 1980년대로 시간을 거슬러갔다. 인천의 경동산업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중 87년에 해고를 당했고, 10년 간 여기저기 떠돌며 복직투쟁을 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 여러 동지들의 분신을 목도했고, 죽음에 대해, 나아가 죽음이 또다시 죽임을 당하는 의문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 후 전태일, 강경대, 이한열 등 각 민주열사의 추모 사업회가 모인 ‘추모연대’와 ‘의문사 유가족 대책위’,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등에서 대표와 간사로 일 해왔다.
“의문사는 어떻게 왜 죽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동안 죽음과 희생에 대해 알아내고 밝히는 일을 해왔지요. 이 일은 일 자체가 매우 정직합니다. 하면 하는 만큼 결과가 나오거든요. 또 그 전까지 과거 속에 묻혀 있던 일이 드러나면서, 야사가 정사가 되기도 하고, 국가가 반성할 일도 생기고요. 그런 게 보람이죠.”
그는 굴곡진 지난 세월을 담담하게 회상했다. 원래부터 쉽지 않으리라 예상했던 일이고, 어렵사리 한 걸음 한 걸음 여기까지 온 만큼 탄탄하게 다져졌다고 평가했다. 또한 한낱 구호에 불과하던 의문사 규명이 법 제정까지 된 것은 ‘놀라운 성과’라며 “어쩌면 너무 빨리 쉽게 온 것이다”라는 참으로 겸허한 결론을 짓기도 했다.
군 의문사, 장기수 전향 공작 등 인권침해 조사
“불과 이삼십 여 년 전만 해도 인권이란 개념도 없던 시대입니다. 인권침해가 당연시 됐고 귀한 목숨이 아무렇지도 않게 죽어갔습니다. 하지만 그 원통하고 숭고한 죽음은 반드시 밝혀내야지요. 과거를 반드시 밝히고 청산해야 하는 까닭은 잘못된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역사의 교훈 때문입니다. 지난세기 우리가 청산하지 못한 과거는 무수히 많습니다. 의문사 사건들, 광주학살, 삼청교육대, 각종 조작사건, 군 의문사, 한국전쟁 때의 민간인 학살사건 등등...이런 일들을 위해 지난 2005년 12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생겨났고 저는 작년 3월부터 인권침해조사국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그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인권침해조사국에서 일한다. 한국 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 장기수 전향공작 사건 등 그 중에 인권침해를 규명하는 일을 맡고 있다.
“과거사 대상 사건은 대개가 오래된 사건이라 현장과 증언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관계자가 사망하거나, 또 생존해 있다 해도 기억이 희미해졌거나, 자료는 유실된 사례가 허다해 진실을 100% 밝히기가 어렵지요. 특히나 한국전쟁 시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의 피해는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어 유가족은 50년간 가슴앓이만 하고 있는 상황이니 더욱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렇게 모든 과거사는 늦으면 늦을수록 밝힐 수 있는 폭은 약해집니다. 하루라도 빨리 한 가지라도 더 밝혀내는 게 상책이죠.”
유가족들 통해 용서와 사랑의 숭고함 배워
그가 주로 만나는 대상은 유가족과 고문관이다. 겉보기에는 정반대의 처지의 사람들이지만, 그는 당시 고문경찰관들도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다보면 사람 자체가 나쁘거나 악한 경우는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들은 말합니다. 자기는 정말로 빨갱이를 잡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는 줄 알았다고요. 자기 딴에는 애국이라고 생각하고 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게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된 거죠.”
그는 또한 유가족들, 즉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이들에게서 참 많은 것을 배운다”며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분노를 갖다가 점차 그 분노가 사랑으로 승화되곤 합니다. 자신과 같은 불행한 어버이들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또 고문 경찰관이나 관계자들을 용서하기도 하고요. 그런 걸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저도 함께 아파하고 배우고 느끼게 됩니다.”
유가족과 살붙이처럼 동고동락하다보니 더욱 삶을 공경하고 사람에 헌신하게 됐다는 고백이다. 아마도 이 힘 덕분인 듯싶다. 농성과 시위일정으로 채워진 투쟁의 나날을 버틸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국가라는 거대한 벽을 문으로 알고 몸을 부딪치길 수십 년 세월, 마침내 벽에 작은 문을 내고서 그 사이를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오가며 여전히 많은 일들을 해내는 지금의 모습까지 말이다.
다시는 원통한 죽음이 없도록 후대 보호하는 일
“우리 역사에는 고통당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억울하고 숭고한 희생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무수한 과거사에 대한 의혹과 왜곡, 은폐와 침묵을 바로 잡는 것, 의혹을 규명하고 감춰진 진실을 밝히는 것, 피해자에게는 명예회복을, 가해자에게는 반성의 기회를 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또 전란 가운데 억울하게 희생당한 숱한 사람들의 넋을 달래는 것이 이후 반인권적인 전쟁범죄로부터 우리 후대를 영원히 보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2011년을 시한으로 운영된다. 그는 그 때가 지나고 나면 대장정의 인생 1막을 내리고, 제2의 인생을 열어갈 계획이다. 원래는 경치 좋은 제주도에 가서 택시운전사를 하고 싶었지만, 요즘 신혼부부들이 전부 렌터카를 이용한다기에 잠시 ‘나는 제주도의 택시운전사’의 꿈은 접어둔 상태라고 한다. 결혼 후 첫 아이를 낳고는 먹고 살 일이 막막해 인력시장을 전전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의문사 일하면서 돈도 받고 많이 좋아진 거 아니냐”며 그는 허허 웃었다. 진한 대추차 향기를 타고 전해오는 그의 웃음에서 뭉클함이 번진다. 하루하루는 힘겨웠지만 돌아보면 그래도 삶은 내게 친절했다는, 가슴 따뜻한 생의 진실을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