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닝 바람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타난 윤성호 회원. 어기적어기적 계단을 오르는 뒷자태하며, 안경 너머로 나른하면서도 분주한 시선을 쉼 없이 발사하는 눈초리까지. 보무도 당당히 꿈에 취해 다니는 그는 영락없는 몽상가타입이다. 2001년, 제1회 시민영상제에서 <삼천포 가는 길>로 대상을 받으면서 민언련과 인연을 맺고, 이후 해마다 필모그래피를 늘려간 재기발랄 저항가, 윤성호 감독을 만났다.
영화감독 윤성호
재기발랄 저항가, 윤성호 감독
농구와 맥주 즐기던 우익청년 윤성호
“전공이 신문방송학과지만 사회에 별 관심 없었습니다. 학회 할동도 통일학회나 말지연구학회 같은 정치적인 것을 제외하고 부담 없이 가입할 만한 곳이 영화분석학회 뿐이었습니다. 영화랑 친해진 계기가 됐지요. 그 때가 막 디지털 캠코더가 보급되었고, 장난으로 친구들을 찍다가 졸업 전에 기념작품 남겨볼까 하는 단순한 마음에 영상물을 만들게 됐습니다.”
맥주와 농구를 즐기던 ‘학삐리’ 윤성호는 그 즈음에 원용진 교수님의 수업에서 신자유주의와 조중동의 문제점 등의 얘기를 들었고 민언련을 알게 됐다고 한다. 자연스레 시민영상제 소식을 접했고, 호기심 삼아 출품했는데 대상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늦바람’이 든 영화와 사회참여라는 두 물줄기가 자연스레 모여든 곳이 ‘민언련’이라고 강조했다. 처음 민언련 사무실 왔을 때는 대학 총학생회 말고 아직도 이런 단체가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지만 자신에게 상을 주며 북돋아주었고, 영화를 통한 사회참여의 기회를 열어준 고마운 곳이라는, 긴 끈 같은 자랑과 감사의 말을 늘어놓았다.
“영화를 만들고 사람들 앞에 공개했을 때의 반응과 격려가 저한테는 무척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리포트는 혼자 일주일을 낑낑대고 써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데, 영화는 내 생각에 공감해주는 실체가 있고 교감이 가능하다 것이 좋더라고요.”
‘20년 동안 한 번도 학교 울타리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그. 집과 학교의 동선을 벗어나 세상의 중심에 선 청년 윤성호는 ‘그렇다면 카메라를 어디로 휘두를 것인가’ 고민 끝에 독립영화를 선택하게 된다. 졸업 후 회사원이 되려던 애초의 계획을 대폭 수정해 영화로 방향을 급선회한 이유는, 인정받고 사랑 받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에게 영화를 만드는 것은 연애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엉뚱한 자막과 나레이션, 뜬금없는 이미지의 공명
“초기작품은 그냥 동영상이지 영화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농구가 아니라 공놀이나 달리기였던 거죠. 감독으로서 자의식도 없고 경험치도 미약하고 숙련되지도 못했고요. 그런데 점차 영화적인 문법에 눈 뜨면서 재미를 느꼈습니다. 컷과 컷이 만나고 사운드가 깔리고 은유적인 장치도 넣고요.”
그의 작품은 시종일관 엉뚱한 자막과 나레이션, 뜬금없는 이미지로 유명하다. 영어, 불어, 중국어 등 말도 안 되는 외국어를 사운드로 넣고 그 외국어와 전혀 상관없는 자막을 넣거나 아예 소리를 뒤집어 넣는 식이다. 그는 “처음부터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독립영화는 녹음이 후진 탓에 자막으로 대체한 것”이었는데 “그것들이 서로 뒤엉켜 묘한 공명을 일으키는 느낌 또한 나쁘지 않았기에 강행했다”며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적 기법의 태동 배경을 설명했다. 그의 이 같은 ‘거침없이 영화찍기’ 혹은 ‘종횡무진 사유하기’의 백미는 무심한 듯 시니컬한 뉘앙스를 풍기는 제목들에서도 드러난다.
2004년 인디포럼 개막작이자, 전주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도쿄 이미지포럼 등에 출품한 영화 <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은 ‘하루 10분씩 그냥 들여다보기만 해도 코펜하겐식 이별실력이 부쩍 느는 비디오’라는 숨찬 부제를 달고 있다. 그는 이에 대해 “아무 뜻 없는 삐끼질”이었다고 고백했다. 마침 인터넷에서 선전하는 ‘하루 10분씩 그냥 들여다보기만 해도 영어 실력이 부쩍 느는 비디오’에서 즉흥적으로 제목을 빌려온 것이다.
더군다나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 안 돼 “황망하고 분개한” 그로서는 이별 실력이 부쩍 늘어 빨리 정신을 차리는 것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미역 같은 거 에요. 매일 당근이 있던 자리에 갑자기 미역을 넣으면 관객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 뻔하면 재미없잖아요. 또 소풍 산책 이런 제목을 달면 사람들이 상상하면서 영화를 더 아름답게 생각하는 게 싫으니까요.”
독립영화 6년, “편하게 살진 않았지만 즐겁게 살았다.”
그는 독립영화를 시작하고 처음 1,2년은 무척 즐겁게 일했다고 한다. “이쪽 사람들이 순수하고 좋았다”며 “편하게 살진 않았는데 즐겁게 살았다”고 말하는 윤성호 감독. 하지만 3년차가 지나고나니 조금씩 관성에 젖게 됐다며 아무래도 청중이 적고, 리뷰가 한정되어 있고, 운신의 폭도 좁아 정체되는 느낌이 들어 변화를 시도 중이라고 말했다.
“작년부터 상업영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상업영화가 더 우월하다는 게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 영화적인 얘기를 해보고려는 거죠. 100개의 문장을 열 명에게 말하는 게 독립영화라면 10개의 문장을 만 명에게 전달하는 게 상업영화입니다. 또 한 가지 변화는 그 전에 플롯을 부정해왔습니다. 파편적 에피소드 모아서 얼기설기 배치하면서 불친절한 영화를 만들었지요. 그런데 나이가 조금씩 들면서 이별도 경험하고 탄생과 죽음 등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아, 인생이 플롯이 있구나!’하는 걸 알게 됐습니다. 작위적이고 관습적인 나쁜 플롯이여서 그렇지 있는 거구나. 이번에는 한번 친절한 플롯으로 가보려고요.”
'인생의 플롯'을 알게 된 친절한 성호씨
그가 준비 중인 영화는 ‘그녀들의 남자친구’다. ‘달콤 살벌한 연인’ 정도의 저예산 영화가 될 것이고, 역시나 사적인 경험을 소재로 했다고 한다. 이처럼 그에게는 큰 사건부터 자질구레한 일상사가 전부 영화의 소재다. 이미 눈이 렌즈고 대뇌가 편집기라고 하니, 시나리오를 작성과 영상편집 작업은 기실 24시간 이뤄지는 셈이다.
“영화가 제게 준 게 많지요. 일단 영화하면서 여자 친구를 사귈 수 있었고요, 익명의 관객들도 소중하고, 제가 관객으로 만나던 독립영화 감독들을 동료로서 대할 수 있게 된 것도 좋고요. 영화쪽 동료, 선후배 등등… 앞으로 인생을 함께 할 수 있는 ‘말이 통하는’ 사람들을 만난 게 가장 큽니다. 아마 그게 없었으면 못했을 것 같아요.”
그는 머리위로 늘 말풍선을 이고 다닌다. 끊임없이 응시하는 자, 상상하는 자, 그리고 기록하는 자다. 그것들을 그러모아 대사, 은유, 기법, 이미지가 와글와글 떠들어대는 수다스런 [애니홀]같은 영화 한 편, 멋지게 만들고 싶다고 고백한다. 민언련이 배출한 걸출한 영화감독, 언젠가 크게 사고 칠 인물로 윤성호 이름 석 자 기록해두어도 좋을 듯하다. (2007년 2월)
필로그래피 2001 삼천포 가는 길 2003 산만한 제국 2004 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 2004 독립영화인 국가보안법 철폐 프로젝트 -우익청년 윤성호 2005 이렇게는 계속할 수 업서요 2006 졸업영화 2007 은하해방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