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벅차게도 좋던 어느 늦가을 오후 버스에 몸을 실었다. 기사님이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가 교통카드 체크음과 엇박으로 귀에 감겼다. 육자배기 같은 걸쭉한 웃음소리와 시시콜콜한 속사포 멘트가 주거니 받거니 중계되는 라디오 프로그램은, 때론 활명수처럼 나른함을 씻겨주기도 한다. 헌데 그 날은 찰떡궁합을 자랑하는 남녀진행자의 말투가 자못 비장했다.
"네…, <불안사전>이라는 다소 까칠한 사전이 나왔네요, '88만원'은 비정규직 한 달 월급이면서 휴대폰 1대 가격이고, '정규직'은 잠재적 비정규직이라고 정의했네요. 참 씁쓸하죠? 우리의 불안한 현실을 담아낸 것 같습니다."
장안의 화제가 된 <불안사전>의 발원지는 '시민지식 네트워크를 위한 독서프로젝트(이하 독서프로젝트)'다. 그 행사의 참가자와 네티즌이 만들어낸 가상의 사전으로 불안한 현실에 대한 비판과 냉소를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독서프로젝트는 <우리의 불안정한 삶, 비정규직을 읽는다>는 기치 아래 지난 10월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주축으로 출판사·연구모임·북클럽·도서관 등 40여개 단체가 함께 한 일종의 독서토론모임이다
"책으로 불안을 멈출 수 없을까? 한번 사건 만들어보자"
애 초의 독서프로젝트 제안서의 알맹이는 이렇다. "우리 삶이 불안정해지고, 세상이 더 큰 불행으로 나아갈 때, 그것을 멈출 힘이 독서에 있지 않을까"라고 묻고는 "공동체의 경험을 빌어볼 때, 함께 하면 무슨 일이든 사건이 된다"며 "책을 읽는 여러분, 책을 좋아하는 여러분과 함께 올 가을 '하나의 사건'을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고, 실제로 많은 단체들이 모인 것.
그 들이 주도한 '하나의 사건'에서 삐져나온 '유쾌한 비명'이 바로 <불안사전>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연구원 고병권, 일명 '고추장(대표)'이 있다. 지난달 26일 만난 그는 "이미 독서프로젝트도 끝난 마당에 <불안사전>이 뒤늦게 언론의 집중을 받는다"며 "지난주에 인터뷰 요청이 밀려왔다"고 말했다.
그러게 말이라고, "라디오에서도 나오더라"는 증언과 함께 아무래도 대다수가 불안을 느끼는 현실을 <불안사전>이 잘 짚어낸 것 같다고 말하자 예의 그 날카로운 지적이 돌아왔다. "불안은 우리가 느끼는 걸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이지, 사회문제를 시의적절하게 맞춘 건 아니다"라는.
이 말은 그의 세계관을 잘 함축한다. 그가 대표로 있는 연구공간 수유너머는 기업의 경제연구소처럼 사회를 진단하고 해법과 전망을 제시하는 연구단체가 아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같이 공부하고 토론하고 밥 지어먹는 생활공동체이고, 앎과 삶의 일치를 지향하는 학문공동체다. 각자 공부를 하고 살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즉, 목끝까지 차오를 때 발언하고 절박함을 느끼는 자가 행동한다고 그는 말했다.
"독서 프로젝트도 원래는 '불안'이 키워드가 아니었습니다. 농민·비정규직 등 우리사회의 불안문제를 얘기해보자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정규, 비정규직은 상징적인 표현이고 불안은 우리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공통의 느낌입니다. 비정규직의 해법을 찾아보자, 삶의 불안정서에 대한 모색을 해보자 했습니다. 최근 보험광고는 왜 그리 많아진 걸까. 여럿이서 대화하다가 '불안'이란 키워드가 찾아진 겁니다. 둘이 마주치면서 창출하는 것, 즉 공통의 키워드는 전제된 것이 아니라 발명하는 것입니다."
"불안을 참을 수 없는 당신, 말하라 행동하라"
ⓒ이강훈
'참을 수 없는 자의 발언', 즉 각자의 자리에서 느끼는 걸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는 그의 말이 다소 막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어떤 숭고한 도덕적 사명감이나 이념, 혹은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 아니다.
절박함이 말하게 하고 그 말이 전염되면서 퍼져나가고 여러 사람의 열정과 지혜가 모아지는 과정에서 "그 판이 커질 수도 있고 반대로 사그라질 수도 있다"고 했다. 독서프로젝트가 좋은 사례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안풍토에 갑갑함을 느낀 누군가의 제안이 씨앗이 됐고, 사람사이에 뿌려지자 생각과 행동이 거름이 되어 스스로 커나갔다.
처음에는 십여 개 단체가 단출하게 시작했지만 마지막에는 예상치도 못한 단체까지 참여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고 그는 말한다.
독서프로젝트의 삼분의 이가 책과는 별로 상관없는 단체였다고 한다.
"'이웃을 사랑하지 말라. 먼 이웃을 사랑하라'고 니체가 말했죠. 가깝고 친숙한 것을 사랑하기는 쉽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질적이고 낯선 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차이가 있고 다른 사람끼리 접속하고 어떤 공통을 만드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참을 수 없는 사람이 말을 해야 하고 촉발해내야 합니다. 하나의 가치를 상정해놓고 단결하자는 외침은 힘을 갖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이주노동자 문제를 접근할 때도 '노동자는 하나'라는 구호는 공허하다. 이주노동자가 일자리 뺏는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들도 분명 있다. 또 실제로 어떤 사업장은 이주노동자를 고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이주노동자와 노동자의 밥그릇 싸움 구도로 몰아갈 게 아니라 노동자와 이주노동자의 공통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를 고민해야 하며 그에 따라 해법은 천차만별 달라진다고 그는 말했다.
마찬가지로 교수노조와 강사노조도 따로 만들어서 연대하는 게 아니라 둘만의 공통을 만들어내야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노조도 방법은 있지 않을까 그는 묻는다.
"끊임없는 시도와 물음이 필요합니다. 누군가 구호를 내뱉고 강변할 때 그 주장이 백번 옳은데 감흥이 없고 기쁨을 안 주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이명박 지지자들을 무조건 비난하기보다 그들 가슴 밑바닥의 불안 정서와 거기서 비롯되는 안정에 대한 절대적 바람을 읽어야 합니다. 정서를 파악해서 접근하는 세심한 기술과, 다른 상상을 할 수 있는 실험이 필요한 거죠."
보험 광고는 왜 그리 많을까, 이명박 후보는 왜 지지율이 높을까
지 난 2006년 5월, 그는 연구공간 수유+너머 동료들과 함께 신자유주의 재편에 반대하는 행진을 벌였다. 세 개의 큰 사건이 계기가 됐다. 새만금 간척사업,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선언이다. 전라도에서 서울까지 2주간 매일 10시간을 걸으면서 많은 슬픈 장면들을 보았다고 말했다.
"삶의 한계지대에 내 몰린 사람들입니다. 불안정과 위기는 삶의 기본조건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매번 죽음을 체험했습니다. 원한과 공포·슬픔 속에서 그들은 개발의 유혹과 같은 더 강한 환상과 허구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권력과 자본이 자행하는 대중들의 폭력적 추방을 보면서, 또 그에 대응하는 대중들의 악착같은 투쟁을 보면서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고 말했다. 절망만큼이나 큰 희망을 보았다고 했다. 그 때의 귀한 경험과 사유의 결과물들을 부지런히 글로, 책으로 엮어내고 있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대해 투쟁하는 방법이다. 새만금 사람들이 조개와 싸우듯이, 장애인이 거리를 온 몸으로 기어가듯, 그는 펜으로 외치며 싸우는 것이다.
"슬픔의 표상을 하나로 묶고 단체로 대변하던 시대는 갔습니다. 전대협·전노협이 학생을, 노동자를 대변하지 못합니다. 대의의 불가능성, 대의 시스템에 질문을 던질 때가 온 것이지요. 매 시대마다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보편적 진리일수록 위험합니다. 싸움의 양상은 계속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런 거다. 예전의 싸움은 중단이었다. 비상 사태였다. 삶의 터전을 텅 비워두고 광장에 모였다.
그러나 지금의 싸움은 그렇지 않다. 화염병 쇠파이프 등 일회성 즉자적 상황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기 터전에서 살아가는 것이 존재론적으로 최고의 투쟁이다."
평택 대추리 문제만 해도 그곳 주민들의 싸움방식은 "올해도 농사짓자"였다. 2~3개월 간 땅 파서 물길 내고 또 한쪽에선 콘크리트 붓고 하는 식으로 싸웠다. 핸드폰과 디카로 실시간 현장 상황이 올라온 것도 놀랍다. 사실 폭력시위를 기다리는 건 폭력경찰이다. 대추리 싸움은 국책사업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었고 인식 전환을 가져왔다.
새만금 간척사업의 경우도 계화도에서 어민들이 밭을 경작했다고 한다. 그들은 "농민이 돼서라도 어민이 되겠다"고 했다. 또 추방명령을 받은 계화도의 한 어민은 이렇게 말했다. "조개와 게들과 함께 싸우며 계속 살아가겠다"고.
"삶의 다짐이 곧 투쟁의 다짐이 된 것입니다. 투쟁은 삶의 중단이 아니라 삶의 지속입니다. '이렇게 살아보자. 혹은 어떻게 해보자'는 시도는 누구나 자기 자리에서 실험이 가능합니다. 교사 노동자 등 권력과 부딪치는 어떤 곳에서 일어나는 실험이 바로 정치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멋진 실험을 하고 메시지가 있으면 단결하지 말라고 해도 모여듭니다."
▲지난 여름 상암동 홈에버 매장에서 '이랜드 투쟁'이 한창일 때 '힘내세요'라는 소박한 피켓을 만들어 지지방문을 나선 고병권씨. ⓒ김지영
"개발의 환상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는 사람들"
그는 인문학 전파에 힘쓰고 있다. "세상을 바꿀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 인문학은 무기가 된다"는 소신에서다.
지난 여름 해인사에서 스님들에게 인문학 강의를 나가기도 했고, 이랜드 파업장에 강연을 나가기도 했다. 교도소·공부방 등등 어디든지 간다. 내년에는 청소년들과 공부를 해보고 싶다고 한다. 지난 여름 상암동에서 이랜드 농성이 한창일 때 '힘내세요'라는 소박한 피켓을 만들어 지지방문을 나선 그와 마주치기도 했다.
"우리는 답을 찾는 노예가 아닙니다. 문제를 우리가 던지고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잘 사는 게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누구도 좋은 삶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누군가 행복하게 해줄 사람에 대한 이미지만 있습니다. 이명박이 해주길 바라는 겁니다. 시민 상호간의 의무가 점차 작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질문하고 시도하면서 키워야 합니다."
고병권은 줄기차게 말한다. 뭘 해도 세상이 안 바뀐다는 이유로 내 삶을 안 바꾸는 게 가장 문제라고. 사회악의 재생산에 일조하는 거라고.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면 사소하게 홈페이지에 글 쓰는 거부터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겠나. 각자가 자기 선 자리에서 '15도 틀기'가 이뤄질 때 세상은 바뀔 수 있다고. "누구나 아는 만큼 살고, 사는 만큼 알게 된다"고.
<불안사전>을 들춰보니... '88만원' ①비정규직 한달 월급 ②프라다폰 1대 가격 '정규직' 잠재적 비정규직 '스펙' 자신을 조직의 부품으로 낮추어 생각하고 상품화해 소개하는 특장점. 스스로를 불안사회의 저가품으로 인식하여 나타나는 현상 '투잡' 일을 하면 할수록 가난해지는 사회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징후 '잡일' 잡을 잃은 사람들이 하는 일 '결혼' 억대 빚잔치의 시작 '동료애' 지금 약에 쓸래도 도무지 찾을 수 없는 것 '다이어트' 필요 이상의 것을 덜어내고 영혼을 축내는 행동 '성형'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에 가장 충실한 마약
덧붙이는 글 | 대선, 삼성문제, 비정규직 등의 문제로 세상이 어수선한만큼 마음이 무거웠다. 고병권을 찾아갔다. 그는 책으로 강연으로 나의 생각과 삶에 많은 영향을 준 동료이다. 치열하게 공부하는 인문학자 고병권에게 물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위의 글은 총체적 답안지이자 새로운 질문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