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민언련대학교 방송분과 4학년입니다. 재작년부터 1년 반 동안 분과장을 지냈습니다. 방송매체분석은 물론 사회구조에 관심이 많고, 세상이 조금이라도 왼쪽으로 기울기를 바라는 자칭 ‘B급 좌파’입니다. 때문에 민언련이 “내 생각보다 늘 오른쪽에 있다.”고 말합니다. 신문이나 인터넷언론의 노동전문기자를 꿈꾸는 취업준비생. 장동건 외모에 전태일 감수성을 지닌 문제적 회원, 김동찬을 소개합니다.
노동전문기자 꿈꾸는 어느 좌파의 고백
친미와 오욕의 역사, 독학으로 깨우쳐
웬 민언련대학? 그는 2004년에 민언련 회원이 되었다. 올해로 4년차다. 실제 대학에서도 신문방송학과 4학년이니, 두 생활 장르의 주기가 오묘하게 일치한다. 그러나 그는 “내가 알아야할 모든 것은 민언련에서 배웠다.”고 말한다. 또한 ‘언론학교’ 다닐 즈음을 내 생애 가장 열심히 공부한 시기로 꼽는다. 그에게 민언련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선 늘 스물여덟 생애를 통틀어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좋아했어요. 축구담당기자가 꿈이었지요. 그래서 ‘신문방송학과’에 소신 지원한 겁니다. 그런데 공부가 생각보다 재미없더라고요. 방황하다가 군대를 갔습니다. 2002년도에 제대했는데 그 해에 효선이 미순이 사건도 터지고 대선도 있고 사회가 뒤숭숭했습니다. 희미한 문제의식만 품고 있었지요. 다음해에 복학해서 우연히 강정구 교수님 수업을 듣게 됐는데 효선이 미순이 사건 등을 거론하면서 미국을 신랄하게 비판하시더라고요. 반미‘감정’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몰랐던 역사적 사건과 진실에 눈 떠갔습니다.”
그는 ‘분노와 충격’이었다고 당시 심정을 고백했다. 뜨거운 젊은 피에 작은 불씨가 던져진 것이다. 학내 분위기도 냉랭했지만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기보다 안으로 갈무리하는 편인 그는 혼자만의 방식으로 뭉근히 불꽃을 키워갔다. 도서관에서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서성이며 강준만, 홍세화, 고종석 등 진보지식인들의 책을 택해 한 권씩 섭렵해갔다.
5.18 광주를 다시 찾아보고 87년 민주화 투쟁 등 역사의 중요시기를 짚어가며 교과서 밖 역사를 공부했다. 힘든 줄도 모르고 도서관 책상 위로 그림자의 위치가 변해가는 것을 보며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세계관이 발갛게 달구어질 즈음, 강 교수의 과제 중 민언련 토론회에 참여하는 게 있었다고 한다. 수업 준비를 위해 민언련 홈페이지에 접속했고 그 때 언론학교 모집공고를 본 것이다.
민언련 깃발 아래 매주 토요일 시위 참가
“민언련에 와서 외로움이 해결됐습니다. 이쪽을 공부 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위에도 참여하게 됐는데 소속된 조직이 없으니까 항상 대열의 맨 뒤에서 배회했었습니다. 크고 작은 깃발들을 보면서 ‘나도 동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민언련 회원이 되고나니까 저에게도 드디어 깃발이 생기더라고요.”
각종 집회 현장에서 민언련 깃발 아래 모인 것 외에도 그는 회원으로서 맹렬한 활동을 펼쳐갔다. 2004년부터 방송분과 활동을 시작했고 다음해에는 1년 반 동안 분과장을 맡았다. TV라는 거대한 괴물을 상대하고, 들고나는 많은 분과원들을 아울러야하는 고된 자리임에도 그는 멋지고 똑 부러지게 분과장의 역할을 해냈다. 이에 2005년도 민언련 최우수회원으로 뽑히기도 했다.
“방송분과를 하면서 참 많이 배웠습니다. 방송매체가 시사교양, 드라마, 음악 등등 사회문화 전반적인 부분을 다루니까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사회를 조망할 수 있었습니다. 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 외에도 언론고시를 위해 오는 보수적인 회원 등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특정 노선이나 주장에 갇히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예전에는 생각이 다르면 격하게 토론했는데 지금은 절대 옳은 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의견도 무시할 순 없다는 걸 알고 인정하게 됐습니다.”
방송분과 통해 폭넓은 시각 갖게 돼
‘당신의 생각이 당신의 감옥이 되지 않게 하라’는 말을 가슴에 새긴 이 지혜로운 좌파는 방송분과를 통해 사고의 유연성을 길렀을 뿐 아니라, 성격도 개조됐다고 털어놓았다. 주위에서 “말도 많아지고 얼굴이 밝아졌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그런데 그의 얼굴에 웃음이 많아진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방송분과에서 여자 친구를 만나서 지금껏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민언련이 시위현장에서의 외로움만 덜어준 게 아니라 일상의 외로움마저 해소해준 셈이다.
“민언련 활동을 하면서 많은 걸 얻었고 성장했습니다. 선배들을 통해 치열했던 역사의 생생한 경험담을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좋고요. 또 사회적으로 불합리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무기력했는데 발언의 통로가 생기고 행동할 수 있는 토대가 생긴 것도 좋고요. 꼭 거창한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여기 오면 맘이 편하고 내가 가지 생각을 나눌 수 있으니까요. 그런 거처가 있다는 게 위안이죠.”
그러나 그는 그토록 소중한 민언련이기에 쓴 소리도 잊지 않는다. “민언련은 늘 나의 생각보다는 오른쪽에 있다”고 평가한다. 조금만 더 분명하고 민첩하게 민주언론‘시민연합’의 막강 펀치를 날리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노동자의 편에서 세상을 바꾸고 싶다.”
그는 현재 대학교 4학년이다. 사회진출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에 봉착했다. 기자를 꿈꾸는 언론고시생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막막하다. 지금껏 그 흔한 토익시험 한 번 안 본 상태고 스터디 그룹이나 학원을 다니지도 않는다며 스스로를 “답답한 인간”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아직은 모든 걸 팽개치고 시험 준비에만 매달릴 생각은 없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하루를 차곡차곡 실하게 살아가는 방법으로 예비언론인의 자질을 갖추려 한다. 꾸준한 독서와 공부를 통한 일명 내공쌓기 전략이다.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노동으로 삶을 영위해나가죠. 노동과 노동자의 문제가 중요한 거 같습니다. 비정규직도 늘어나는 등 노동시장의 구조도 급변하고 있는 실정인 만큼 깊이 있고 전문화된 노동전문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는 난곡에서 살았다. 워낙 빈민가의 상징으로 꼽히는 동네인지라 세상살이의 녹록치 않음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러나 노동과 부의 함수관계는 언제나 풀기 어려운 숙제였다고 한다. “왜 열심히 일해도 누구는 평생 가난을 면치 못 하는가”하는 ‘낡은 질문’을 그는 여전히 부여안고 있었다. 미선이 효순이 때부터 반FTA까지 최근 4년 간 청춘의 달콤한 주말을 고스란히 광화문에 바친 시대착오적 젊은이. 보라색 셔츠를 그대로 흡수하는 서늘한 외모에 70년대의 뜨거운 시대정신을 지닌 김동찬 회원. 훗날 어디서 무엇을 하든, 그에게 세상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임은 너무도 자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