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 취임 100일, 시청 앞 광장으로 향했다. 날이 날이니만큼 얼마나 맛깔스런 ‘촛불밥상’이 차려질라나 싶어 설레는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 굵은 빗발이 쏟아졌다. 천둥 번개가 쳤다. 이명박 대통령의 100일 간 행태에 하늘도 진노하신 게다. 그래. 비야 내려라, 물대포 같은 장대비도 촛불은 꺼뜨리지 못할지니. 역시나 광장에 도착했을 때 많은 시민들이 비옷을 입고, 우산을 쓴 채 촛불을 밝혔다.
촛불문화제의 열기가 달아오르던 즈음 다행히 비도 그쳤다. 그런데 우산을 접자 난데없는 깃발들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며칠 전부터 하나둘 깃발이 보이더니 이날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있었다. 사회자는 동맹휴업을 결의한 대학생들이 참가했다고 소개했다. 찬찬히 둘러보니 ‘의혈**’ ‘민족**’ ‘구국**’ 등 20년의 세월을 느낄 수 없는 ‘그 시절 그 깃발’들이었다. 다만 ‘구국의 애국대오 ***’은 영락한 조직의 실상을 반증하듯 깃발이 초라했다. 일부 운동단체와 정당의 깃발도 눈에 띄었다.
잠시 후 사회자는 청계광장에서 결의대회를 마친 민주노총 조합원 5천여 명이 입장한다고 말했다. 저 멀리 깃발의 위용을 앞세운 채 노동자의 대열이 밀려왔다. ‘금속노조’ ‘서비스 공공노조’ ‘사무금융’ 등 민주노총 산하 조합원들이었다. 시민들은 박수로 열렬히 환영했다. 나도 갑자기 불어난 촛불인구에 벅차 박수를 쳤다. 그런데 천군만마라도 얻은 듯한 기쁨은 잠시. 시간이 갈수록 떼로 나부끼는 ‘깃발’이 거슬렸다.
깃발은 '열린 축제'를 '닫힌 집회'로 만든다
깃발의 폐단을 꼽아보자. 첫째, 깃발은 작고 소박한 촛불바다의 아름다움을 가린다. 마치 논두렁 밭두렁 초가집 어우러진 마을에 높은 빌딩이 삐죽 솟은 듯 위압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촛불을 왜소하게 만들어버렸다. 분명 촛불은 유모차를 탄 아기를 밝혀주는 숭고한 빛이 되었다. 그런데 어제 무대 오른편 뒤쪽에 휠체어를 타고 온 세 명의 장애인은 깃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둘째, 깃발은 시민을 가르고 소외를 낳는다. 갑남을녀, 장삼이사가 이어온 촛불이다. 그간 제각각 나이도 성별도 고향도 다른 이들이 모여서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했고 동감했으며 잘도 놀았다. 유난히도 학연, 지연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계급장 떼고 ‘시민’의 이름으로 모여 든 촛불은 분명 그 어떤 ‘구국의 횃불’보다 힘이 셌다. 훨씬 오래 탔다. 그런데 깃발은 촛불을 가르고 시민을 나누었다.
셋째, 깃발은 열린 축제를 닫힌 집회로 만든다. 촛불문화제는 각본도 주인공도 없는 드라마였다. 재밌었다. 그래서 퇴근 길 지나가던 시민이 합류해도, 집에서 동영상 보다가 튀어나가 누구라도 섞일 수 있는 ‘열린 공간’의 시민축제였다. 그런데 깃발이 나부끼기 시작하면 무슨 대학이 아니고, 단체도 아니고, 노조의 소속이 아닌 사람들을 설 곳을 잃게 된다. 당장 교복 입은 촛불소녀들, 정장차림의 직장인이 깃발을 비집고 들어가기 멋쩍어지지 않겠나.
생생한 삶의 이야기가 오가는 ‘국민 반상회’ 깃발은 불청객
자칫 물대포도 끄지 못한 촛불을 깃발이 끌 수도 있다. 그러니 깃발은 두고 모이자. 노동자들, 학생들, 시민단체 회원들이 모두 시민이다. 그간 시민들을 모아온 것은 대단한 이념이나 조직의 논리가 아니다.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당하고 삶의 기반을 위협한다는 ‘열 받음’. 그 살아 펄펄 뛰는 느낌들. 시민들이 삶의 현장에서 경험한 일들을 인식의 수단으로 삼아 이명박 정부를 심판했다.
시민발언도 보라. 무슨 조직의 간부가 발언자로 나오면 ‘풋풋함’이 없고 진부하다. 사고의 지평을 뒤흔드는 ‘유쾌한 웃음’과 ‘감동의 눈물’이 없다. 틀에 박힌 논리들이다. 구호가 거창할수록 현실에선 멀어지는 법이다. 열악한 현실을 외면하자는 것도, 소속을 감추자는 것도 아니다. 시민이 되어 일상의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직의 틀에서 사유하고, 깃발 아래서 행동한다면 나올 얘기가 너무 뻔하다. 집단은 사고하지 못한다. 위대한 개인의 예를 들어보자.
“여러분, 제가 출판사에 다녀서 매일 신문을 스크랩하는데, 제가 하필 동아일보 담당입니다. 그래서 괴롭습니다.(좌중 웃음) 미친소를 안전하다고 하고 촛불집회를 매도하는데 볼 때마다 열받습니다. 그래서 제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촛불집회에 나와야 합니다. 저 여기 안 나오면 미쳐버릴 것입니다.(우렁찬 박수)”
5월 29일 오후 10시경. 동화면세점 앞 어느 여성의 발언이다. 이런 이야기가 마음을 움직인다.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가장 사소하고 가장 일상적인 것에서 시작하는 ‘삶의 시인’들이 말하게 해야 한다. 일상을 짓누르는 더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촛불문화제는 삶에 밀착한 이야기들이 오가는 질펀한 국민 엠티이자, 반상회가 돼야 한다. 그런 자리에 깃발은 불필요하다. 불청객이다.
다른 존재와 어우러지는 착한 깃발로 변신하라
또 한 가지. 6월 10일 촛불문화제가 ‘백만 명’ 결집을 목표로 하지 말았으면 한다. 공공연히 이런 얘기가 나돌고 있다. 백만 명이면 어떻고 백 명이면 어떤가. 숫자를 목표로 내세우는 것은 삶의 질을 양으로 환산하는 천박한 수량적 사고다. 의도와 목적에 갇혀서는 우연을 즐길 수 없다. 자생적 흐름이 낳는 접속과 배치를 즐기던 ‘촛불시민’ 아닌가. 앞날에 대한 무계획성, 무지가 우리 시민의 힘이었음을 기억하자.
노동자단체, 시민단체, 학생단체는 깃발을 내려주길 바란다. 정히 들고자 한다면 좀 더 고민해 달라. 다른 존재들과 어우러지는 ‘착한 깃발’, 눈길을 끄는 ‘매력적인 깃발’로 변신해 달라. 어느 단체 조합원들은 ‘돈보다 생명을’이란 글귀가 새겨진 연두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이 같은 통찰과 희망을 주는 대안은 얼마든지 있다. 부디 숭고함과 깊고 따뜻한 빛으로 충만한 촛불의 민심, 그 초심을 지켜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