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4일 오마이뉴스에 ‘깃발들, 촛불 앞에서 착해지세요.’라는 글을 올렸다. 전날 촛불집회 현장에 급작스레 불어난 노동자, 학생, 시민단체 깃발에 대한 우려를 나타낸 내용이었다. 당시는 촛불소녀들에 의해 점화된 촛불이 퇴근길 시민들의 참여로 힘을 받아 뭉근히 타오르던 즈음이다.
자발적으로 모인 발랄한 시민축제의 장에 80년대 깃발의 집단등장은 개인적인 판단으로 불편하고 겉돌았다. 촛불문화제의 동력인 무소속 ‘무명’씨들에게 ‘유명’한 단체의 깃발이 행여나 ‘담장’이 되어 자발적인 발걸음을 막을까, 촛불의 외침을 가릴까 싶어 염려스러웠다.
‘낡은 깃발’로 표상되는 실체 속에서 내가 본 것은 진화할 줄 모르는 ‘진보’세력의 운동방식이다. 조직화된 깃발의 세몰이로 승리를 쟁취했던 과거와는 다른 투쟁 양상이므로 깃발도 좀 가볍고 화사한 차림으로 시민축제에 어우러지길 바랐다. 그 글에 대한 반응은 극단으로 갈렸다. 찬반 의견으로 드러난 ‘깃발’에 대한 오해를 넘어 ‘촛불’의 이해로 가보고자 한다.
국민요구·사회모순 생생히 드러낸 ‘촛불’
이번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투쟁의 핵심은 촛불이다. 즉 ‘드러내 훤히 밝힘’이다. 세 가지 측면이다. 첫째, 광우병을 계기로 이명박 정부가 교묘히 국민을 속이려 했던 음모와 작태가 일차적으로 드러났다. 둘째, 그것에 분노하는 시민의 움직임이 실시간으로 드러났다. 셋째, 광고주 압박, 관보게재 연기 등 자발적 시민행동, 시민불복종의 변화가 드러났다.
‘시위’는 말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온오프를 넘나드는 ‘열린 광장’에서 진행된 촛불집회는 우리 국민들의 의견과 요구를 생생히 전달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시위로 평가된다.
이전에는 어떠했나. 이랜드 코스콤 기륭전자 등 비정규직 투쟁, 이주노동자 문제, 평택 대추리와 새만금 사건 등 우리 사회 곳곳에서 삶의 위기에 직면한 이들의 크고 작은 싸움은 계속 일어나고 있다. 폭력진압은 늘 있어왔다. 하지만 국가권력은 이를 철저히 비가시화 했다. 도심에서 시위가 일어나도 전경차에 의해 겹겹이 둘러싸여 가려졌고, 언론도 외면해 국민들 대다수가 알지 못했다.
노동자 단체도 붉은 머리띠와 투쟁조끼, 검은 깃발의 구태의연한 시위용 드레스코드를 탈피하지 못했다. 고공투쟁, 삭발, 단식 농성 등 투쟁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안타깝게도 대중과는 멀어졌다.
진보세력, 보다 정치적이기 위해 가면놀이 즐겨야
이번 촛불집회는 상호 간에 막혔던 언로를 뚫어주었고 가려졌던 존재를 훤히 밝혀주었다. 저마다 촛불을 두 손에 쥔 시민은 가장 먼저 자신의 삶을 성찰했다. 옆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생명보다 돈의 논리가 우세한 세상살이의 피폐함을 인식했다. 촛불은 한 개인의 삶을 외부를 향해 열어 밝혀주었다. 생각하는 법, 말하는 법, 행동하는 법을 깨우친 시민들이 늘어갔다.
촛불은 이러한 ‘자각’의 물꼬를 터주었다는 점에서 가장 정치적이고 숭고하다. 이 도도한 촛불의 흐름을 저해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깃발이라도 내려져야한다고 판단했다. 깃발이 정치적이기 때문에 내리라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정치적이기 위해서 ‘가치와 지향’을 담은 매력적인 깃발을 상상하자고 얘기했다. 깃발이 불편한 게 아니라, 존재를 가리고 스스로 은폐하는 게 못마땅한 거다.
깃발로 표방되는 진보세력이 유연한 신체로 거듭나기를, 시대에 뒤쳐진 말들과 의복을 벗고 가면놀이를 즐기길 바랐다. 힘이 양적으로 거대할지라도 변형될 수 없는 힘은 고갈된 힘과 마찬가지다. 변치 않는 가치와 변화의 역동성의 공존은 고도의 지혜와 섬세함을 요한다. 쉽게 갈 수 없지만 포기할 수도 없는 길이다. 더군다나 앞서가는 걸음, ‘진보’라면 말이다.
존재를 가리는 모든 것에 반대한다.
정리하자면, 대립구도는 ‘깃발 대 촛불’이 아니라 ‘가려짐 대 드러남’이다. 구석구석 변방의 삶까지 더 환히 밝혀져야 한다. 삶보다 우월한 가치를 만들어내는 자를 감시해야 한다. ‘인간에 관한 어떤 문제도 남의 일이 아니다’라는 걸 보고 알아야 한다. 주부, 학생, 노동자, 활동가, 노숙인등 시청자이고 시민인 우리가 밝히는 촛불이 숭고한 이유다.
협상시한 20일을 지나 이번 주말이 분기점이 될 것이다. 이제 조중동 사옥에 스티커 붙이기와 누가 더 이명박 대통령을 조롱하는가의 놀이에서 나아가야 할 것 같다. 폭력과 비폭력으로만 투쟁공간을 가르는 것을 넘어 또 다른 투쟁방법들을 발명해야 할 때다.
지리멸렬 타오를지언정, 이내 분열과 배반에 자리를 내줄지언정 촛불에게 감사하다. 6 10 백만촛불대행진을 통해 모든 스펙터클 중에서 가장 장엄한 것은 거대한 군중의 모임임을 두 눈으로 보았다. 이 같은 국민적인 ‘성공체험’은 다른 이슈들로 점화되고 있다. 제2의 이명박, 제2의 조중동, 제2의 최시중을 가늠하는 안목을 키웠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됐다. 존재의 밝힘, 그것이 촛불의 참 '가치'이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
‘혁명의 성공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해 혁명이 이루어졌던 바로 그 순간에 혁명이 인간들에게 부여했던 울림들, 어우러짐, 열림들에 있다.’ - 질 들뢰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