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왜 우리가 인문학을 배워야 합니까?"
첫 강의시간. 한 재소자가 질문했다. 인권실천시민연대 오창익 국장이 강좌의 취지를 설명했지만 와닿지 않는 눈치다. 연구공간 '수유+너머' 고병권 대표가 부연했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삶의 기술'을 배워야 함을. 하지만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다. 오 국장은 제안했다. 그렇다면 2주간 수업을 다 듣고 강좌가 끝날 때 그 질문을 다시 한 번 해달라고.
3월 21일, 약속한 날이 밝았다. 20여명이 졸업식에 참석했다. 오 국장은 1기 과정을 무사히 마친 걸 자축하자며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참, 어느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나중에 나가서도 이 책을 봐야 하는데 자료집에 '안양교도소'라고 쓰여 있으면 어떡하느냐고요. 제 실수입니다. 다음에 책 만들 땐 꼭 뺄게요. 우선, 수정액으로 살살 지우세요."
한 차례 웃음이 번졌다. 수강생들 표정이 성큼 찾아든 봄볕만큼이나 밝다. 심드렁한 질문은 적극적인 의견 개진으로, 예민하던 눈빛은 여유로운 웃음 세례로 활짝 옷을 갈아입었다. 평화인문학 강의가 진행된 2주 사이의 변화다.
두고두고 보고파... 교재에 '안양교도소' 지워주세요
'2008년 안양교도소 평화인문학'은 성공회대학교 평생학습사회연구소, 연구공간 수유+너머, 인권실천시민연대, 지행네트워크, 철학아카데미 등 5개 단체의 공동주최와 다음세대재단의 후원으로 마련됐다.
'철학하며 살아간다는 것' '예술로 철학하기' '동양고전으로 세상읽기' '닫힌 공간에서 꿈꾸기' 등 고전, 철학, 문학, 예술을 아우르는 내용으로 강의가 구성됐다. 자발적 신청자 25명을 대상으로 2주간 10회에 걸쳐 진행되며 이미 5기까지 일정이 잡혀 있다.
이날 1기 졸업식에는 성공회대 김성수 총장이 직접 참석, 축사를 남기고 졸업생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수료증을 증정했다. 출판사 측의 지원으로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세기의 기도(삼인)> 등 두 권의 책도 선물로 주어졌다.
"처음에 인문학 강의 소식을 듣고는 이젠 교도소에서 별 걸 다 시킨다고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닫힌 공간에 살더라도 마음을 열고 생각하면서 살아야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배운 사람들에게야 철학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저는 초등학교만 졸업했습니다. 4년 동안 이 안에서 컴퓨터 등 여러 가지를 배웠는데 이번 강좌가 가장 특별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고추장(고병권) 선생님 수업이 가장 좋았습니다."
'바울'은 가장 먼저 손을 들고 앞으로 나가 소감을 밝혔다. 강좌 기간 동안 수강생들은 자신만의 이름을 정해 이름표를 달고 수업을 했다. 다음 발표자는 '복덩이'. 남에게 기쁨을 주면 기분이 좋아져 복을 주는 사람이 되고자 '복덩이'라고 정했다고 한다.
"그동안 레크리에이션 강사도 해보고 조리사 자격증도 따고 봉사의 삶을 살기 위해 안 해본 게 없습니다. 열정을 쏟았지만 마음에 큰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문학 강의를 듣고 다시 한 번 '복덩이'의 삶에 도전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같은 그림 수백 장 그린 고흐처럼, 예술가-되기
이번 평화인문학 강좌에서는 윤세진(수유+너머 연구원)씨의 '예술로 철학하기'가 가장 인기를 끌었다. 이 수업을 참관한 고병권씨는 수강생들이 그림을 한 장 한 장 따라가며 완전히 빨려들었다고 그 열기를 전했다.
우선 강사는 고흐의 엇비슷한 그림 수백 장을 준비했다고 한다. 무언가를 온전하게 찾아낼 때까지 고흐가 늘 노력하는 존재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점묘화로 유명한 '쇠라'도 마찬가지다. 쇠라는 자기가 원하는 색채와 표현을 얻기 위해 별로 달라지지도 않은 듯싶은데도 그 부분의 미묘한 차이를 내며 수백 장씩 그리는 고된 과정을 반복했다.
"중요한 건 걸작이 아니라 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이며, 천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천재라고 불리는 누군가가 삶에 임하는 노력과 배움의 자세, 그리고 궁리와 모색이란 것을 그림을 통해 이야기했습니다. 고흐와 쇠라의 작품은 예술의 위대함을 넘어 삶의 기술과 자세, 행복에 대해 많은 울림을 전해주었습니다."
고병권씨는 자신도 감동을 받았다며 "수강생 몇 명은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치더라"고 전했다. 일상과 동떨어져 철저히 '타자화'되었던 천재와 예술의 개념이 '나와 다르지 않은 이들이 만들어가는 특이한 이야기'로 다가온 것이다. 한 수강생도 위의 강의를 거론하며 "생각의 전환점이 됐다"고 털어놓았다.
"5년간 있으면서 시간도 안 가고 지루하던 차에 강의를 들었습니다. 내 인생이 변화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또 같이 수업을 받은 분들과 동료애가 생긴 점도 좋습니다."
대학교에서 철학과 과대표를 하다가 왔다는 '아나키스트'는 비록 나이가 어리고 인생 경험이 짧지만 영국 처칠 수상이 강연에 했던 한 마디를 나누고 싶다며 "포기하지 마라.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힘냅시다"라고 말해 우렁찬 박수를 받았다. 이 밖에도 "강좌가 너무 짧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가 돌아갔으면 좋겠다" "점심 시간 이후에 하니 졸립다, 아침 시간에 해달라"는 등의 제안도 나왔다.
"재소자도 주부들도, 생각이 깨질 때 눈빛은 똑같다"
1부가 끝나고 쉬는 시간. 한 수강생이 다가와 농담을 건넨다.
"고추장 선생님, 추장이 아니라 족장이 낫지 않나요?"
"고족장이라고 하면 이상하잖아요. 성이 고씨니까 추장이 더 어울리잖아요. 고추장 부르기도 편하고."
이날 졸업식까지, 고병권씨는 안양교도소에 일곱 번이나 들렀다. 평화인문학 강좌가 결정되고 나서 "공간에 제압당하지 않기 위해" 사전답사 차원에서 두 번, 강의하러 세 번 다녀갔다. 또 같은 연구실 윤세진씨의 강의에 동행했고 이날 졸업식에도 참석했다. 그의 열의와 정성을 아는지 수강생들도 그를 '고추장'이라고 부르며 유독 허물없이 대했다.
"사실 처음엔 긴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이 분들이 재소자라는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생각하기, 공부하기, 자유롭게 살기, 더불어 살기 등 제 삶을 중심으로 솔직하게 이야기를 풀어갔지요. 거리감이 전혀 없었어요. 저만의 느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센터에 온 주부들과 그들은 결코 다르지 않았습니다. 자기 생각이 깨질 때, 그 반짝이는 순간의 눈빛은 다 똑같습니다."
자기를 긍정하고 작더라도 자기 능력에서 출발하는 자만이 능력의 확장을 이룰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얘기 등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혹시나 좀 더 세련된 '목사'가 되어 재소자들 앞에 서는 건 아닐까 고민했다는 고병권씨. 하지만 그들 역시 '동료시민'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강좌에 임했고 그런 마음이 통한 것 같다고 말했다.
피자와 담소... 교도소 강좌 중 단연 최고였다
2부에는 피자와 음료수를 놓고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둥그런 원탁에 예닐곱 명씩 모여 앉아 편안하게 담소를 나누었다.
"교도소에서 여러 가지 교육이 있거든요. 그렇고 그런 거려니 했는데 이번엔 정말 특별했습니다. 무엇보다 여기 강의오신 선생님들이 우리를 색안경 끼지 않고 봐주니 고맙더라고요." - (king)
"훈장 선생님(이천 도립서당 한재훈 훈장)의 동양고전으로 세상읽기도 좋았어요. 영화로 보는 세상(성공회대 김찬호 교수)도 좋았고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모든 강의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바로 '생각을 해라'는 얘길 하더군요." - (조**)
"윤세진 선생님이 두 번째 강의에서 새만금 조개의 고통을 얘기한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나중에 공부를 더 많이 해서 교도소에 이런 강의를 하러 다니고 싶습니다." - (1*6*)
"네, 좋은 생각이세요. 경험을 토대로 얘기한다면 일방적인 강의가 될 위험도 줄이고 더 좋을 것입니다. 어떤 무형의 능력에 자격증을 주고 국가가 고용해서 계속 일할 수 있다면 직업으로도 좋을 텐데요." - (고추장)
한 명 두 명 진심어린 고백은 진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고병권씨는 "여러분 덕분에 많이 배웠다"며 화답했다.
"여기 말고도 파업 현장, 철거 현장 등에서 그 분들과 함께 삶을 이야기 합니다. 그 과정에서 저도 성장했고 많이 배웠습니다. 저 같은 인간 하는 일이 그런 삶의 한계지대에 내몰린 분들의 끈을 이어주는 것이고요. 실은 제가 교도소에서 강의한다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어떠냐고 물어봅니다. 그 이상한 데 가서 강의하니 좀 다르지 않느냐는 질문인데(웃음) 해줄 말이 없습니다. 왜? 이상한 게 없으니까요."
이어 그는 강좌가 짧아서 아쉬움이 남지만 의미 있는 출발이었다며 "최선을 다해 협조해준 법무부와 안양교도소, 작년부터 발로 뛰며 강좌를 기획한 인권실천시민연대 등 여러 단체와 열심히 들어준 여러분들 등 모두의 노력이 만든 소중한 결과"라고 자리를 마무리했다.
수강생들은 "인문학을 더 공부하고 싶은데 좋은 책을 권해달라" "편지를 보내겠다" "나중에 나가면 수유+너머에 꼭 가보고 싶다"는 등 귀한 배움과 인연의 끈을 잇고자 갈망했다. 고병권 씨는 곧 책을 몇 권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어디서라도 나중에 또 만나겠지요."
스태프와 수강생들은 따뜻한 악수를 나누며 다음을 기약했다.
안양교도소는 누범자들이 모인 곳이다. 평균 누범률 3.7범이다. 하지만 졸업식에서 '삶과 꿈'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표정은 '생의 의지'로 반짝였다. 주어진 삶을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사유하는 모습은 이 봄날 싹 틔우려는 새싹의 안간힘처럼 애틋했다. 3.7범이란 통계치의 무거운 그림자는 잠시나마 사라진 듯 싶었다.
희망의 인문학... 교화 아닌 대화, 설교자 아닌 친구
우리나라의 재범률은 60%다. 범죄자 10명 중 6명이 다시 교도소에 온다는 얘기다. 그간 재소자 교육은 어떤 질서와 통념을 주입하는 수준이었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길들이고 순치시키며 재소자들을 교화했다. 하지만 이는 자유와 능력의 고양을 낳지 못하는 '불모의 도덕'일 뿐이다.
매번 살아보려고 발악하지만 번번이 사는 법에 실패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배치와 다른 접속이다. 일방적인 훈화식 '교화'가 아닌, 생각하며 사는 법을 이야기하는 '대화', 그리고 근엄한 '설교자'가 아닌 건강한 '친구'가 필요하다.
자유인의 지혜는 '삶의 숙고'라고 말한 스피노자, 자신 안에 더 나은 미래를 잉태하라고 고귀한 산모의 이기심으로 생을 살라고 조언한 니체, 화구를 지게처럼 지고는 원하는 빛을 찾아 하염없이 떠돈 고흐, 이웃집 가듯 안양교도소를 들락거린 고병권, 평화인문학의 성사를 위해 건배조차 '인문학!'으로 했다는 오창익 등과 같은 미더운 삶의 동반자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