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의 계보>는 그의 사상이 집약된 매우 중요한 저작이다. 그중에서도 제2논문, 기억과 망각에 관한 해석은 내게도 무척 감동적이고 유용했다. 그전만 해도 기억은 우월한 능력(기억력), 망각은 골치 아픈 병(건망증)이었다. 공부할 때나 일할 때나 일상에서 망각신이 강림해서 일을 그르친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 또 정작 악몽 같은 일은 생생히 떠올라 괴로웠다.
그런데 니체는 망각이 단순한 타성력이 아닌 “적극적인 저지 능력”(망각력)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적, 자신의 고난, 자신의 비행을 오랫동안 생각하는 것, 즉 약자의 원한을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강자는 그런 기억에 대단한 망각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좋은 예가 미라보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한 모욕과 비열한 행위를 기억하지 못했고, 이미 잊어버렸기 때문에 용서할 수도 없었다"
니체는 기억을 힘으로 망각을 병으로 생각하는 통념을 달리 해석했다. 망각이 능력이라는 것에서 나아가 건강한 삶에 필수적 요소로 보았다. 망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먹은 음식을 배설하지 못해 아무 것도 먹지 못하는 소화불량 환자나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인간관계의 갈등에서 보면 과거의 기억이 원한감정으로 변질되어 파괴적으로 쓰인다. 기억이 과거의 사건에 고착돼 있을 경우 새로운 건강한 관계를 낳지 못한다. 그러니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또 사안에 따라 쉽게 화해하거나 덮어두지 않고 삶의 문제로 안고 가는 것이 중요한 경우도 있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역사를 ‘삶의 다른 가능성을 여는 물음’으로 안고 간다. 이것은 중요하다. ‘식민주의’는 우리에게 뭘 의미했나를 묻는 속에서 ‘이주노동자’ 문제의 답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제3세계 이주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착취는 식민주의의 착취-피착취 지배구조와 유사하다.
이처럼 어떤 것은 잊고 어떤 것은 안고 가야 할까. 맥락과 쓰임에 따라 다르다. 망각이 무조건 좋고 기억이 무조건 나쁜 게 아니다. 돈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돈을 많이 가질수록 돈에 소유당하는 노예적 쓰임이 문제이듯 망각과 기억도 그렇다. 건강한 사람에게 망각과 기억은 미래를 낳는 고귀한 힘이다. 망각은 정신적 질서와 안정을 위해 의식의 문과 창들을 일시적으로 닫는 “의식의 백지상태”로 작동하며, 기억은 스스로의 미래를 보증할 수 있기 위한 “약속할 수 있는 능력” 즉 “본래적인 의지의 기억”으로 작동한다.
문화, 피의 기억술
인간은 스스로의 미래를 보증할 수 있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관념에 대해서조차도 예측할 수 있고 규칙적이며 필연적인 존재가 되었어야했다.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을 기르는 것. 인간은 풍습의 도덕과 사회적 강제라는 의복에 힘입어 실제로 예측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이것이 문화다. 자유롭고 강력한 인간을 낳기 위한 훈련과 선택, 문화는 기억이라는 새로운 능력을 부여한다.
여기에 ‘고통’은 가장 강력한 보조수단이었다. 첫 아이를 바치는 희생, 거세, 모든 잔인한 종교의식 등, 인간이 기억을 만들어야할 때 피나 고문, 희생 없이 끝난 적은 없었다. 형법의 냉혹함은 인류가 망각을 극복하고 사회적 공동생활의 몇몇 원시적 요건들을 순간적으로 감정과 욕망의 노예가 된 이러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척도를 제공해준다. 이성, 진지함, 감정의 통제, 숙고라 불리는 이러한 음울한 일 전체, 인간의 모든 특권과 사치. 모든 좋은 것의 근저에는 피와 전율이 있었다!
인간 그 자체를 향상시키는 종적활동으로서의 문화. 이를 수단으로 ‘주권적 개인’이 태어난다. 이는 오직 자기 자신과 동일한 개체이며, 풍습의 윤리에서 다시 벗어난 개체이고 자율적이고 초윤리적인 개체, 즉 간단히 말해 약속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독립적인 오래된 의지를 지닌 인간이다.
죄의 기원은 채무법
문화는 고통을 화폐와 같은 등가물로 간주했다. 니체는 ‘죄’라는 도덕의 주요개념이 실은 부채라는 극히 물질적인 개념에서 유래되었음을 밝혀낸다. “죄, 양심, 의무, 의무의 신성함 등과 같은 도덕적 개념 세계의 발생지는 채무법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오직 죄를 지은 자만이 벌을 받아야 한다는 전제 아래 형벌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형벌은 오늘날 보모가 아이들에게 벌을 주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피해에 대해 가해자에게 표출하는 분노로 가해졌다. 이 분노는 손해에는 등가물이 있으며 가해자를 고통스럽게 해서 배상받을 수 있다는 관념에 의해 억제되었다. “손해와 고통은 등가라는 관념” 이것은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계약관계다.
채무자는 자신의 육체나 아내 혹은 자신의 자유 또는 자신의 생명 역시 저당 잡혔다. 채권자는 채무자의 육체에 온갖 종류의 능욕과 고문을 가할 수 있었다. 부채 액수에 적합해 보이는 크기만큼 그의 육체에서 살로 도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손해에 대해 직접적인 이익을 받는 대신 채권자에게는 배상이나 보상으로 일종의 쾌감을 누릴 권한이 주어졌다. 채무자에게 형벌을 가함으로써 채권자는 일종의 지배권에 참여한다. 그 사람이 경멸당하고 학대받는 것을 보는 우월감을 한번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이때 고통은 부채를 보상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채무자는 여럿이 보는 데서 손이 잘려나갔지만, 그것으로 빚을 갚고 공동체에서 다시 사람들과 어우러질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 이것은 진정한 축제였다.” 이 때 쾌감은 저열한 복수반응과 다르다. 원한과 가책, 사회적 낙인이 없었다. 근대의 형벌은 육체를 살로 도려내지 않아 육체적 불구신세는 면하지만 사회에 복귀할 수 없는 사회적 불구자가 되어버린다. 후자가 훨씬 잔인하고 끔찍하다.
또 고통은 오늘날처럼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았다. 니체는 이렇게 비유한다. “지금까지 과학적 연구의 목적으로 해부용 칼로 연구된 모든 동물의 고통을 전부 합쳐도, 한 명의 신경질적인 교양 있는 여성의 하룻밤 고통에 비하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통의 '외면화'. 고통을 정신화하고 내면화한 근대인들과 달리 고대인들은 고통을 보고 즐기는 눈을 상상했다. 그것은 채권자의 눈이며 신의 눈이다. 그런데 니체는 고급문화의 역사 전체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잔인함이 점점 더 정신화 되고 신성화되는 것을 지적하며 일갈한다. “인류가 자신의 잔인함을 아직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그 때가 염세주의자들이 존재하는 현재보다 지상에서의 삶이 더 명랑했다.”고. 잔인한 쾌감이 사라지면서 인간이라는 동물이 자신의 모든 본능을 부끄럽게 여기게 된 병적인 유약화와 도덕화를 낳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