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공부하면 행복해져요? 누가 물었다. 순간, 당황했다. 흑마늘의 효능을 묻는 것이나, 요가하면 살 빠지느냐는 질문처럼 들렸다. 단답형의 명쾌한 답변을 해줘야할 것 같은데 확신이 없었다. 니체가 행복의 특효약이라면 이론상으로는 우리나라에 내로라하는 니체전문가들. 번역자들이 가장 행복해야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머뭇거렸다.
난 니체를 읽으면서 행복과 고통을 동시에 느꼈다. 책장을 넘기는 동안은 엄청 괴롭고 자학했다. 문장이 난해하고 맥락이 안 잡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가 좋으니까 봤겠지. 어려워서 낑낑대고 열 불나는 ‘스팀현상’이 은근히 중독성 있다. 끝 맛이 달달하다. 어떤 사람이 자기 시대와 전면적으로 대결하면서 세계와 인간을 치열하게 분석하고 자신만의 사상적 결과물을 정리했다는 게 보통 생의 의지는 아니지 않나. 그 에너지가 주는 힘이 큰 거 같다. 고생 끝에 산에 올라 대자연의 품에 안기면 기운이 나는 것처럼. 다른 산에서 보는 풍광은 어떨지 궁금해서 도전해보고 싶고, 힘든 길 같이 올라간 친구들과도 정이 흠뻑 들고. 그 과정이 고통이면서 행복이다.
사실 공부를 그리 열심히 한 것도 아니니 말하기도 부끄럽다. 니체의 주요저서를 골라서 읽었고 전집 한번 제대로 훑지 못했다. 내 생각에는 긴 호흡으로 삶의 다양한 접촉면에 부딪히고 삶 속에 소화시키며 읽으면 좋은 것 같다. “행동하는 자만이 배운다”고 강조하는 니체도 자신의 공부가 부디 ‘속물교양’이 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니체는 책상에 앉아서 ‘노동하듯이’ 지식을 모으는 ‘학문적 인간’을 노예신분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어떤 앎이 속물교양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구분할까. 니체에 따르면 일종의 속물교양은 “교양-사상으로 교양-감정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거기서 교양-결단이 나오지 않는 것”을 일컫는다. 삶을 바꾸지 못하는 앎이 될 것이다.
“학문적 인간은 요즘 독일에서 마치 학문이 하나의공장이며 단 일분의 태만이라도 벌을 초래하리라는 초조에 빠졌다. 이제 그는 제4신분, 즉 노예 신분이 일하듯 가혹하게 일한다. 그의 연구는 이미 더 이상 일이 아니라 ‘고난’이다. 그는 오른쪽도 왼쪽도 보지 않으며 모든 업무를 처리하고 지칠 대로 지인 노동자 특유의 저 어설픈 주의력이나 불쾌한 휴식의 욕구를 가진 채 삶이 잉태하고 있는 모든 의심들을 통과한다.” (반시대적고찰 236)
니체에게 이런 학자들은 농부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이들은 ‘고독이 끈질기게 요구하는 물음’- 무엇 때문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하는 물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하여 그토록 열심히 업무와 학문에 종사한다고 생각한다. 책장을 덮고 이해한 것을 삶으로 소화해내는 시간도 없이 마구잡이 폭식하는 이유는 고독이 요구하는 물음을 회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뿐 아니라 학자들에게는 가장 쉬운 물음, 즉 그들의 노동, 그들의 초조, 그들의 고통스러운 흥분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물음조차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굶주린 자가 빵을 구하는 식으로 고행하면서 학문의 탁자로붜 아무런 선택도 없이 탐욕스럽게 책을 잡아채는 자들. 이후에 남는 것은 충혈된 눈과 둔감해진 사고기관 뿐이다.
“현대인은 결국 엄청난 양의 지식 돌멩이를 몸에 달고 다니는데, 이 돌멩이는, 동화에서 말하듯이, 때가 되면 몸 안에서 덜커덩거린다. 이 덜커덩 소리를 통해 현대인의 고유한 특성이 밝혀진다. 외면과 일치하지 않는 내면 그리고 내면과 일치하지 않은 외면이라는 기묘한 대립인데 고대의 민족들은 이를 알지 못했다. 배고프지도 않은데, 욕망을 거슬러 과도하게 포식한 지식은 이제 더 이상 변혁적인, 바깥으로 몰고 가는 동기로 작용하지 못하며, 일종의 혼동의 내면세계 속에 감추어져 있다. 현대인은 이것을 이상한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의 고유한 ‘내면성’이라고 부른다.”(318)
내면과 외면의 분리가 발생한다. 현대교양전체는 근본적으로 내면적이다. 현대인은 이동하는 백과사전이 될 뿐이다. 엄청나게 밀려오는 지식과 정보를 감당하는 방법은 가능한 가볍게 받아들여 재빨리 제거하고 내던져버리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마치 요즘 제도교육에서 스펙을 쌓기 위해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해대듯이 말이다.
문제는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먹어치우고 쫓기듯 공부를 하는 가운데 실제 사물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습관이 생기고, “약한 인격”이 생겨나는 것이다. “단지 기억이 항상 새롭게 자극받으면 되는 것이고, 알아야할 만한 새로운 것이 밀려와 기억의 상자 속에 진열되면 된다.”고 생각하는 성과주의가 우리주변에도 만연하지 않은가. 이런 공부에서 지식은 쌓여도 지혜는 생길 틈이 없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인격이 나약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니체는 위대한 문화의 산출을 위해 학문이 문화에 종사해야한다고 말한다. “어느 시대나 천재와 학자는 서로 싸움을 벌였다. 학자는 자연을 중기고 분해하고 이해하려 하지만, 천재는 활기찬 새 자연을 통해 자연을 증대하려 한다. 그래서 신념과 활동의 충돌이 발생한다. 태평성대는 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고 그를 알지 못하지만, 병들고 불만이 팽배한 시대는 학자를 가장 고귀하고 가장 존엄한 인간으로 평가하고 그에게 첫째 서열을 부여한다.” (반시대적고찰 4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