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를 오랜만에 읽었다. 첫 장을 읽자 다시금 당혹감이 덮쳤다. 어? 니체가 뭐래? 이야기의 초점이 맞춰질 때까지 두어 번을 읽어봐야 한다. 이 대목이 시방 비판인지 옹호인지 조차 분간이 쉽지 않다. 그것은 ‘습관화된 가치 감정’이 피부처럼 들러붙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니체는 ‘진리를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진리를 의심하라고 “삶의 조건으로 비진리를 용인하라”고 말한다. 또 고통을 피해야할 그 무엇으로 여기는 ‘평균인’의 태도를 비판하는데 니체가 볼 때 진리만큼이나 거짓, 행복이상으로 고통 등이 삶에서 가치와 쓰임을 갖기 때문이다. 니체는 진리처럼 주장되어 온 것들을 모두 파헤쳐 보면 단순한 맹목이나 독단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아주 근엄하고 단정적인 냄새를 풍긴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겉보기에만 그런 것이고, 사실은 온갖 미숙함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금까지 독단론자들이 구축해 놓은 철학적 건물들이 실제로는 정말로 빈약한 것들이라는 사실이 머지않아 밝혀질 것이다.’(서문)
<선악의 저편> 1장이 ‘철학자들의 편견에 대하여’다. 늘 진실/오류처럼 가치들의 대립에 의해서만 사고하는 자들, 물자체, 불변하는 것, 신, 모태, 근원을 찾아 헤매는 형이상학자들. 왜 문제인가. 그들은 영원한 보편적 진리를 들먹이며 이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변화들의 가치를 무시한다. 마찬가지로 삶에 대해 고민하기보다 죽음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기독교, 보편적인 선악의 잣대로 사람들의 삶을 끊임없이 움츠려 들게 하는 도덕주의자들을 니체는 몽땅 소환한다.
‘형이상학자의 공명심은 언제나 한 수레 가득한 아름다운 가능성보다 궁극적으로 한줌의 확실성을 선호한다. 심지어 불확실한 그 무엇을 위해서보다 오히려 확실한 허무를 위해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양심을 지닌 청교도적인 광신자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허무주의이며 절망하여 죽을 정도로 지쳐 있는 영혼의 징후이다.’(10)
진리에의 의지가 왜 나쁜가. 고병권의 해석에 따르면 삶이란 “하나의 진리, 하나의 신, 하나의 이상을 찾는 고단한 수행의 과정이 아니라 수백 개의 건강(진리)를 즐겁게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천국이란 사후의 어떤 세계도 아니고 믿음으로 도달할 수 있는 세계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바꾸는 실천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언가 확고한 도덕, 무언가 확실한 진리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잘 따져보지도 않고 쉽게 믿어버린다. 대개 제 스스로 서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의지할 것을 찾는 데 지나치게 서두르는 법이다.”
칸트비판. 관점주의자 니체는 칸트의 물자체에 반대한다. 그래서 "마침내 어떻게 선험적 종합판단이 가능한가? 라는 칸트의 물음을 왜 그러한 판단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가?라는 다른 물음으로 바꿔야만 할 시기가 왔다."고 일갈한다. 가치의 가치를 묻는 것, 이것이 니체의 계보학적 접근이다. 니체가 볼 때 선험적 종합판단은 전혀 가능한 것이 될 수 없다. 그렇지만 삶의 관점주의 시각에 속하는 하나의 표면적인 믿음이나 외관으로 단지 그 판단의 진리에 대한 믿음은 필요하다. (11)
‘원자론적 요구’ 비판. 원자론적 요구는 형이상학적 열정만큼 해롭다. “기독교 세계가 가장 잘 그리고 오랫동안 가르쳐왔던 저 또 다른 운명론적인 원자론, 즉 '영혼의 원자론'에게도 최후의 일격을 가해야 한다. 이러한 말로 영혼을 없애버릴 수 없는 그 무엇, 영원한 것, 불가분할자, 하나의 단자, 하나의 원자로 여기는 그러한 믿음을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고 니체가 ‘영혼’ 그 자체를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영혼의 가설을 새롭고 세련되게 ‘발명’하라는 것이다. 이를 테면 “사멸하는 영혼, 주체 복합체로서의 영혼, 충동과 정동의 사회구조로서의 영혼 같은.”(12)
니체가 물질을 옹호하고 정신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물질이든 정신이든 '원자론'처럼 고정불변의 어떤 최후의 것을 설정하는 세계관을 문제 삼는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적 비판의 포인트는 원자냐 이데아냐, 물질이냐 정신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정지의 철학이냐 운동의 철학이냐’이다. 사멸, 복합체, 충동의 사유감각은 스피노자의 것이면서 나중에 들뢰즈가 계승하는 개념이다. 단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자들은 정지의 철학을 추구하지만, 운동하는 철학은 충동과 정동의 복합체로서 다양한 힘의 배치가 가능한 천개의 진리, 천개의 길을 발명한다.
자유의지 비판. 니체는 사람들이 오랜 문법적 습관 때문에 ‘번개가 친다’처럼 주체와 행위를 분리시킨다고 말한다. 하지만 칠 수도 있고 안 칠 수도 있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생각한다’도 그렇다. “우리 몸은 많은 영혼의 집합체일 뿐이다.”(19) 그 하위에 있는 의지, 혹은 하위에 있는 충동들. 그것들이 명령하고 동시에 복종한다. ‘나’라는 주체가 선험적으로 설정돼 있어 자유롭게 판단하는 것이라 어떤 판단의 결과가 ‘나’를 사후적으로 구성한다는 얘기다.
니체의 계보학. "‘개개의 철학적인 개념은 자의적이지도 않고 스스로 성장하는 것도 아니며, 상호 간의 관계와 유사성 속에서 성장한다.. 인도, 그리스, 독일의 모든 철학적 사유가 ‘가족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특정한 문법적 기능과 궁극적으로는 몸에 배인 생리학적 판단, 종족적 조건에 속박된다." (20) 그래서 니체는 철학한다는 것을 '최고의 격세유전'으로 정의했다. 잠재된 것이 반복적으로 돌아온다는 얘기다.
니체의 책은 성서적이고 시적이면서 연극적이다. 워낙 다양한 학문과 개념이 얽혀 독해가 어렵긴 하지만 다양한 읽는 재미를 준다. 1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선악의 저편으로 넘어가자는 얘길 이렇게 한다. “그래! 좋다! 이제 이를 강하게 악물자! 눈을 크게 뜨자! 손으로 키를 단단히 부여잡자! - 우리는 바로 도덕을 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