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에게는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두 명의 스승이 있었다. 쇼펜하우어와 바그너. 니체는 초기저서 <반시대적고찰> 세 번째 논문 ‘교육자로서 쇼펜하우어’에서 쇼펜하우어에 대한 애정을 스스럼없이 고백한다. 이는 곧 니체의 스승관이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니체는 말한다. 좋은 스승이란 ‘해방자’이어야 한다고. 무엇을 해방시키나? 바로 한 사람을 관념의 감옥에서 풀어주는 것으로, 자신을 직시하도록 돕고 그릇을 키워주는 역할을 해야 참스승이라는 뜻이다.
니체가 여러 대륙을 여행한 사람에게 인간의 공통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게으름과 겁이 많다는 점'이라고 했단다. 이 게으름과 소심함이 문제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자신이 단 한번, 유일무이한 존재로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만 나쁜 마음인 것처럼 그것을 숨긴다. 무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한다. 니체가 볼 때 그것은 편안함이요, 타성이요, 게으른 습성이고 겁 많음이다. 무리에서 이탈해 솔직히 자신만의 의견을 낼 때 개인이 감내해야할 부담을 생각해보라. 그러니 대세대로 어영부영 묻어가는 길을 택한다. 귀찮고 두려우니까.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무조건적인 정직성과 솔직함을 강요할지 모를 부담을 가장 무서워한다.”
그렇게 자기시대의 인습과 도덕의 틀에 묶여서 ‘남들 사는 대로’ 평균치의 삶을 살아가거나 살아가려고 애쓴다. 그래서 스승이 필요하다. 본래의 자기를 잊고 사는 이들에게 자신을 보게 하는 사람, 즉 “너 스스로가 되어라! 네가 지금 행하고 생각하고 원하는 것은 모두 네가 아니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스승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스승 니체는 이런 멋진 말로 '너의 길을 가라'고 독려한다.
“세상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너 만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이 하나 있다. 그 길은 어디로 이어지는가? 묻지 말고 그저 걸어가라. 사람은 그의 길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를 때 가장 높이 분기한다.”
(반시대적고찰 394쪽)
교육자가 해방시키는 교육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니체는 아무쪼록 '인조사지와 밀랍 코, 안경 쓴 눈'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고 못 박는다. 교육자가 해방자라면 “교양은 해방이다.” 여기서 교양이란 속물적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통념을 깨뜨리고 사고의 지평을 산산히 부수어주는 앎이다.
# 니체의 스승, 쇼펜하우어
니체에게 쇼펜하우어가 그런 스승이었다. 우연히 고서점에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발견하고는 밤잠 설쳐가며 책을 읽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 철학자로, 헤겔의 관념론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의지의 형이상학을 주창한 인물이다. 니체가 칸트를 알게 된 것도 쇼펜하우어를 통해서라고 한다. 세계를 물자체와 현상으로 나누고 물 자체를 인식불가능하다고 주장한 칸트와는 달리,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 세계를 나누고 표상으로서의 현상세계 배후에서 그것을 낳게 하는 원인이 되는 물자체를 ‘의지’로 보고 단적으로 인식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 세계의 원인인 이 의지는 맹목적인 ‘생에 대한 의지’ 바로 그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형이상학이 니체의 ‘권력의지’개념으로 발전되는 것 같다.
아무튼 니체는 이후 계속적으로 칸트와 대결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는데, 본격적으로 자기 철학 체계를 구축하는데 쇼펜하우어가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니체에게는 쇼펜하우어가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하고 철학의 세계로 안내한 진정한 해방자였던 것이다.
“내가 교육자로서의 진정한 철학자, 즉 시대에 내재한 불만을 넘어설 수 있고 생각과 삶 속에서 단순하고 정직하라고, 반시대적이 되라고 가르칠 수 있는 교육자로서의 철학자를 그렸고... 나는 쇼펜하우어를 알게 되었다.”
# 타인에게는 명랑함을 자신에게는 지혜를
니체는 사상가의 태도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사상가는 정직하고 단순한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존재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니체는 쇼펜하우어와 함께 몽테뉴도 훌륭한 사상가로 꼽는다. 특히 진정한 사상가는 항상 흥겹게 하고 생기를 북돋아주어야 한다. 즉 ‘타인에게는 명랑함을 자신에게는 지혜를’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가 철학자에게 있어 ‘명랑함의 미덕’을 강조한 최초의 인물이 아닐까. 사상가, 철학자 하면 진지한 표정과 무거운 콧수염이 연상되는데, 니체에게 그런 고뇌에 찬 심각한 얼굴로 부정의 에너지와 탁한기운을 발생시키는 이들은 반쪽 사상가와 반쪽 예술가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신의 불만의 증기를 퍼뜨려 우울하고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승리자들은 가장 깊은 것을 생각했기 때문에 가장 생동적인 것을 사랑할 것이고 현자로서 결국 아름다운 것으로 기울어질 것이다.”
# 니체, 스승의 머리를 뛰어넘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단순함, 정직함, 한결같음 등 인간적 면모를 높이 샀다. “그는 자신에게 자신을 위해 말하고 쓰기 때문에 정직하며, 가장 힘든 일을 사유를 통해 이겨내기 때문에 명랑하며,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변함이 없다.” 고 칭송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길을 발견한다” 고 했다. 우리 주변에도 살펴보라. 이것저것 따지지않고 단순하게 정직하게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람은 자신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발견하고는 마치 자신을 위해 책을 쓴 것 같다며 열렬히 빠져들었다. 그랬던 그가 후기에 가서는 쇼펜하우어를 버린다. 어차피 니체는 같은 책에서 “나는 어떤 철학자가 모범을 보이는 정도만큼만 그를 인정한다.”고 했다. 쇼펜하우어에 대한 열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때 그의 염세주의에 경도되었지만, 시간이 흘러 생을 긍정하고 그 의미를 고양하는 생의 철학자의 길을 가면서 니체는 염세주의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쇼펜하우어로부터 멀어졌다.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이별했다. 니체답다. 본디 스승과 제자의 자리는 인생의 어느 국면에서는 바뀔 수도 있고, 니체는 스승의 머리를 뛰어넘을 수 없다면 진정한 제자가 아니라고까지 말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