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 막내기자 차형석. 지난 7년 간 그의 자랑스러운 타이틀이었다. 시사저널은 팩트에 입각한 집요한 취재와 성역 없는 탐사보도로 참언론의 가치를 구현해왔다. 1년 전 사장의 일방적 기사삭제로 일명 '시사저널 사태'가 불거졌고, 그는 동료들과 ‘편집권독립투쟁’의 긴 터널을 통과했다. 현재 사표를 내고 새 매체 창간을 준비 중이다. 수척한 얼굴에 형형한 눈빛의 그는 ‘기자로 산다는 것’의 묵직한 소회를 밝혔다.
<시사인> 차형석 기자
“지금, 취재현장으로 돌아갑니다”
파업, 1인 시위, 집회, 단식농성… 그러나
서울 목동 방송회관 9층. ‘참언론실천시사기자단’이란 작은 명패가 눈에 띈다. 전 시사저널 기자들의 임시 거처다. 그는 컴퓨터 앞에서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노조 소식지에 나갈 ‘시사저널 사태 총정리’ 글을 쓰는 중이다. 파업기간 중 선전국을 맡았던 그는 각종 홍보문건 및 기사작성을 담당해왔던 터다.
“새 매체 창간 작업은 아직 시작도 못했습니다. 이상하게 바쁘고 여유가 없네요. 사실 워낙 오래 싸워서 다들 지치기도 했고요. 작년 6월부터 만 1년 간 파업, 직장폐쇄, 1인 시위, 집회, 기자회견, 단식농성까지 안 해본 게 없는데... 결국 사표 제출로 끝이 났으니 허탈하고 상실감이 큽니다. 그걸 막기 위해서 버틴 건데 싸움에서 지는 모양새가 됐으니까요.”
그의 연둣빛 셔츠 위로 뿌연 담배연기가 아릿하게 피어올랐다. 누굴 미워하고 비판하는 싸움을 오래해서 기력이 쇠잔해졌다는 그. 이번 싸움으로 배운 것도 느낀 것도 많지만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지는 3~4년 후에나 알게 될 것 같다고 했다. 이틀 전에 사무실에서 짐을 다 빼 왔는데 오히려 덤덤했다며,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사표제출 이후 ‘근황’을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는 마치 오랜 연인과의 가슴 아픈 이별을 회상하듯 더듬더듬 흐름이 끊기고 말끝이 흐릿했다. 그러나 시사저널 기자가 된 7년 전으로 화제가 돌아가자 서서히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문화담론 펴는 기자 꿈꾸며 시사저널 입사
“2001년 6월 공채로 들어갔습니다. 그 전에 대학 졸업 후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2년 6개월 동안 일했었지요. 출판사 일을 해보고 싶어서 간 건데 원래 문화와 문학에 관심이 많기도 했고 언제부턴가 문화부 기자가 되고 싶더라고요. 스트레이트 기사 말고 내 관심거리와 생각을 잘 취재해서 알리고 싶었어요. 언론사 시험을 치려니까 영어가 부족해서 황급히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났지요. 초단기로 5개월 반을 마치고 돌아와 처음으로 시험 친 곳이 시사저널이었습니다. 운이 좋았지요.”
어학연수를 다녀왔으나 정작 시사저널 입사시험에는 토잌성적표를 요구하지 않았다. 1차 서류전형과 2차 상식시험과 취재실기 시험을 보았고 그는 시사저널의 ‘바늘구멍’을 날렵하게 통과했다. 꿈은 이루었으나 현실은 달랐다. ‘나의 주장과 의견’은 언감생심이었다.
시사저널은 ‘사실과 진실의 등불을 밝히고’로 시작되는 사시에서 알 수 있듯이, 치우침 없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논조를 목숨처럼 여겼다. 지도사수에게 “듣는 기자가 되라, 취재원을 감동시키는 기자가 되라, 기자가 고생해야 독자가 행복하다”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고 말했다.
“의견과 사실을 혼동하면 안 되고, 취재원과 거리를 두어야하고 기계적 중립을 지켜야했지요. 기자의 가치판단이 들어가도 안 되고, 글도 주어 목적어 동사로 된 담백하게 써야하고 등등 객관적 태도를 엄격히 훈련받았습니다. 그런데 ‘사실’로만 글을 쓰려니 좀 답답했습니다.
오죽하면 친구들이 제가 쓴 기사를 보고는 ‘너 억누르고 있구나’라고 말하더라고요. 학교 다닐 때 신방과 수업은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기자에 무관심했는데 현장에 와서 뒤늦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좋은 언론, 좋은 기자, 좋은 기사란 무엇일까...”
“팩트 중심의 객관적 논조가 진실에 가깝다”
그의 치열한 고민과 시사저널의 전통은 그를 ‘기본을 지키는 언론인’으로 성장케 했다. 그는 “사실 양쪽의 주장이 다 들어 있으면 하나만 주장하는 것보다 기사의 힘은 좀 빠진다.”며 “그래도 다 듣고 끝까지 사실을 확인하고 세상에 그대로 알리는 게 진실에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7년 차 기자의 입에서 ‘사실’, ‘진실’, ‘가치’와 같은 순정한 단어들이 수시로 흘러나왔다. 바로 이것이다. 시사저널이 거대언론이 외면한 사회의 부조리를 꾸준히 탐사보도하며 ‘한국의 타임’으로 우뚝 솟을 수 있었던 이 힘이, 아니러니 하게도 시사저널 사태를 불러왔다.
“무슨 X-파일도 아니고, 고작 삼성 임원의 기사를 사장이 논의도 없이 인쇄소에서 직접 드러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는 그의 말대로, 시사저널 기자들은 천부당만부당한 사태에 분노하며 들불처럼 일어났다. 노조를 만들고 밥그릇을 내팽개치며 편집권 독립의 가없는 투쟁을 시작했던 것이다.
“시사저널 독자의 힘이 컸습니다. 지난주에도 시사모(시사저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오프 모임이 있었습니다. 서른 명 남짓 모였지요.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막막하고 어지럽던 생각이 정리되고 방향도 잡히고 무엇보다 힘이 납니다. 아마 시사모가 아니었으면 1년 동안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또 한편으로는 언론의 무관심한 태도를 겪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다른 사업장 파업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나 반성도 했고요.”
시사저널 사태에 대한 언론의 침묵의 카르텔은 공고했다. 지난 2월 한 여론조사에서 기자 10명 중 8명 이상은 삼성 관련 기사 삭제 사건을 “자본의 논리에 휘둘려 경영진이 편집권을 침해한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런데 얼마 전 CBS가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 10명 중 6명 이상이 시사저널 사태를 모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기자들 자신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만, 이를 제대로 국민들에게 알리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시사저널 사태 ‘언론의 침묵’에 스스로 돌아봐
“이것이 우리나라 언론의 적나라한 현실”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는 그와 동료들이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려는 절대적 이유이기도 하다. ‘펜을 꺾을지언정 굽히지 않겠다’는 금석맹약을 남긴 시사저널 기자들이 ‘참언논실천시사기자단’을 꾸렸다.
그가 막내니까 짧게는 7년, 길게는 25년 경력의 전문저널리스트들이 새 매체 창간을 준비 중이다. 시사저널의 맥을 이어 전문보도와 탐사보도의 새로운 전형을 선보이겠다는 포부다. 솔직히 두려움과 설렘이 반반이지만, 그는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면 정신 바짝 차리고 잘 해보고 싶다고 다짐했다.
기자의 태도부터 생활인의 자세까지, 길고 험난한 싸움은 그에게 훌륭한 배움터였다. 역지사지로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거리에서 유인물을 나눠줄 때 거절당하는 아픔을 맛본 후로는 길가다가 누가 유인물을, 심지어 그것이 광고지라도 반드시 받는다며 웃었다. 시사저널 막내기자 차형석은 이제 없다. 세상을 더 깊고 따뜻하게 바라보는 한 사람, 제대로 된 독립 언론사 한번 만들어보자는 기백 넘치는 ‘정론직필 기자 차형석’만 있을 뿐.
(2007년 7월 10일)
** 그는 몇 년 전에 우연히 민언련 사무실에 들렀다가 회원이 되었다. 자신은 “파업 중에도 마이너스 통장에서 꼬박꼬박 회비를 낸 진성회원”이라고 운을 뗀 뒤 “민언련 회원 여러분도 오는 9월 창간될 새로운 매체의 열혈독자가 되어 달라”고 당부했다. 구독신청 및 후원 http://www.sisaj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