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명함. 하나는 낡았고 하나는 반질하다. 1974년 결성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과 지난 6월 발족한 ‘민주평화국민회의’ 대표에는 모두 정동익이란 이름이 적혀있다. 그는 늘 여러 개의 명함이 있었다. 지난 32년 동안 그가 지닌 명함은 우리나라 민주화 역사의 장대한 슬라이드 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언련의 전신 ‘민협’ 의장시절 언론학교를 만들어 언론운동의 새 지평을 연 그는, 한 평생 언론민주화의 아궁이를 지키며 시대정신의 불씨를 지펴왔다. 원로의 경륜과 현역의 열정을 갖춘 그가 묻고 그가 답했다. 언론운동은 왜 필요한가, 진정한 언론인의 자세는, 민언련이 태동한 정신은 또 무엇이더냐. 뭉근히 오래 끓어 깊은 맛을 내는 그의 이야기는 내도록 뜨겁게 귓전을 울렸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정동익 위원장
큰 언론인의 긴 싸움 “언론이 바로 서야 나라가 산다”
“민주평화국민회의는 농민들, 학교, 종교계 등 시민사회 재야원로들이 모여 만든 단체입니다. 대선정국을 앞두고 6월 항쟁 정신을 훼손하려는 냉전수구세력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아 단일대오를 형성한 것이지요. 국민의 힘으로 민주평화개혁 세력의 단일 후보를 내기 위해 국민경선추진협의회를 결성하는 등 민주주의의 희망과 대안을 만들어가는 국민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동아투위와 32년의 시차를 두고 태어난 민주평화국민회의를 그가 소개했다. 두 개의 조직이 이름과 결성 시기는 다르지만 설립 취지는 대동소이했다. 불의와 억압에 맞서 정의와 진실을 지키고자 함이다. 세월은 흘렀지만 세상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까.
언론과거사 규명 뒷전, 언론민주화 뒷걸음질
“언론은 오히려 군사독재 정권 시절보다 더 나빠졌습니다. 언론탄압의 주체가 국가권력에서 자본권력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예전에는 언론사에 경찰 보안사 정보부 사람들이 7-8명이 노상 드나들면서 감시하고 통제했기에 적이 분명했고 오히려 싸움이 쉬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주와 광고주 등 자본권력이 경영권과 인사권으로 통제합니다. 시사저널 사태가 이를 극명하게 말해줍니다. 교묘해지고 실체가 드러나지 않으니 잘 느끼지 못하는 겁니다.”
그는 참여정부가 과거사 정리를 위해 노력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언론의 과거사 규명을 간과했기에 모든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고 진단했다. 독재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저항한 130여명의 기자·피디·아나운서들을 거리로 내몰았던 동아투위 등 불행했던 언론의 과거사를 규명해 국가가 사과하고 피해자의 보상이 이뤄졌어야 하는데 그 반성의 과정이 없으니 언론이 바로 서지 못했다는 것. 또 조중동 같은 수구언론이 국민의 눈과 귀를 막고 있어 FTA나 비정규직 등 심각한 사안도 힘을 받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넘어갔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동아·조선투위, 해직언론협의회 등 피해자 단체와 민언련, 기자협회 언론 단체 등 15개 단체가 ‘언론탄압진상규명협의회’를 만들어서 법안을 제출 했는데 국회에서 심의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언론에서도 한 줄 보도조차 하지 않고 언론단체들조차도 무관심했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민언련의 모태는 해직언론인 모임 ‘민협’
“민언련은 85년도 12월 전두환 군사정권과 싸우기 위해 해직언론들이 만든 조직입니다. 민언련에 신입회원이 늘고 조직이 불어나는 건 좋지만 과거 정통성과 바탕이 무엇인지, 선배들이 지키고자 했던 정신이 무엇인지 그 뿌리에 대해서 알아야합니다. 단지 그런 일이 있었더라에 그치지 말고 참언론과 언론개혁을 향한 열망과 정신이 공유돼야 언론운동이 제대로 이뤄진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언론학교 출신들이 민언련 주축멤버로 활동하지만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민언련에는 일반회원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해직기자 조직인 민협이 일반시민 중심의 민언련으로 거듭나게 된 당시의 상황을 들려주었다.
“1991년도에 강경대 열사 사건이 발생하고 독재정권 물러가라면서 매일 시위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차츰 시위인파가 줄면서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갔습니다. 이유가 뭐냐면 언론 때문입니다. 그 때 정원식 국무총리가 외대를 방문했다가 학생들에게 밀가루세례를 받았습니다.
정원식은 전교조 교사 2000명을 해직시킨 장본인이기에 학생들이 진입을 막은 겁니다. 그러데 각 신문방송에서는 계속 대문짝만하게 밀가루 뒤집어 쓴 정원식 총리의 사진을 내보내고 운동권 학생들을 ‘스승도 몰라보는 패륜아’로 몰았습니다. 운동권의 도덕성을 훼손시키는 보도가 이어졌고, 결국 언론의 몰매를 맞고 시위대가 무너진 것입니다.”
언론학교 초대 교장… 시민언론운동 시대 열어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겪으며 언론의 중요성을 다시금 절감한 그는 언론운동을 해직언론인만 해서는 안 된다, 온 국민이 언론의 행태와 중요성을 바로 알아야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92년도 언론학교를 만들고 동시에 민주언론‘시민연합’으로 단체의 이름을 바꾸었다. 언론학교 초대교장이기도 한 그는 “언론운동의 주체를 해직언론에서 일반시민으로 물꼬를 돌린 것은 획기적인 일”이라며 언론운동의 새 장을 열었다는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렇게 태어난 민언련이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다는 그의 증언이 이어졌다. 1992년에 각 단체가 참여해 선거보도감시연대회의를 처음 만들었고, 회원 60여 명이 3개월 간 매일 밤 12시까지 각 신문 모니터해서 분석하고 검토하고 토론했다고 한다. 그렇게 추려낸 선거보도의 왜곡, 축소의 사례를 다음날 신문으로 만들어 언론사에 보내고, 길거리에서 뿌리고 그러다가 경찰에 붙잡혀 가고, 조선일보로 항의방문을 가기도 했다.
아마 그런 정신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위장전입 수십 번 한 사람이 대선 후보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그는 후배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요즘은 언론사를 그저 보수가 좋고 안정된 직장으로 여기고 또 일부 언론인은 적당히 순치돼서 단순 전달자로 만족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언론인은 성직자 같은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빛과 소금 같은 존재가 돼야 합니다. 언론인 본연의 사명감을 갖고 출발해도 막상 사회에 나가면 유혹이 많은데 그런 의지조차 없으면 금방 현실에 젖어들어 안주하게 됩니다. 언론인을 꿈꾼다면 이 사회에 어떤 언론이 필요한가를 늘 고민해야 합니다.”
‘억강부약’… 구차하게 살지 말자는 오기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선 일상에 매몰되지 말고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모여서 반성하고 생각을 단련해야 한다는 정동익 대표. 강직한 어투와 형형한 눈매는 30년 세월이 지나도록 추호의 흔들림이 없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토록 오랜 세월 외롭고 서글프고 가난하고 긴 투쟁의 삶을 지탱하게 한 힘은 무엇일까.
“대학교 다닐 때부터 그리고 언론사 입사해서도 계속 민족과 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가 전북일보 편집장을 지내시다가 언론통폐합으로 해직되셨습니다. 제가 해직기자 2세대죠. 아버님께서 항상 ‘억강부약’ 정신을 강조하셨습니다. 기득권의 편에 서지 말고 약자 편이 되라, 다수 민중의 시각을 대변하는 기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 했던가. 꺾이지도 굽히지도 그렇다고 쉬이 부스러지지도 않는 단단한 유전자를 타고난 그는 공명정대한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사유의 중요한 바탕을 이루었다. 시대적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자는 결심과 “한번 왔다 가는 인생 구질구질 살기 싫다는 오기” 같은 것도 발동하여 그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털어놓는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묻자 ‘이한열 열사의 추모행렬’라고 답한다. 수십만 인파와 함께 연세대부터 시청 앞까지 걸어오면서 민중의 역동적인 힘을 몸으로 느꼈다며 감회에 젖어들었다. 민중의 힘. 억강부약, 참언론, 시대정신, 민주, 평화, 개혁... 기나긴 세월 갖은 눈비를 다 맞으면서도 꺼지지 않는 불씨. 참으로 오래 타는 땔감이 그의 가슴속엔 살아있었다. (2007년 9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