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에 쇠붙이와 인연을 맺었으니 40년이 넘었다. 고되고 고독하고 혹독한 시간이었다. 허나 어떤 미혹됨도 없이 ‘두드리고 새기고 파냈다.’ 그렇게 불혹의 세월을 묵묵히 밀고 나갔다. 목가구에 붙이는 각종 금속제 장석(裝錫)을 만드는 두석장 박문열 씨. 그는 전통 장석물의 기기묘묘한 아름다움에 매료돼 ‘먹고 자고 일만했다’는 담박한 삶의 원리를 터놓는다.
중요무형문화재 64호 두석장 박문열 씨
기기묘묘한 자물쇠의 비밀 풀다
벽제 부근, 너른 들판을 끼고 야트막한 슬레이트 지붕 건물 세 채가 서있다. 좀 허름한가 싶었으나 ‘중요무형문화재 64호 두석장 기능전승자의 집’이란 문패를 보니 여기가 맞다. 박문열 선생의 작업장이다. 안쪽은 나름 운치가 있다. 상추며 감자가 심어진 텃밭이 그대로 마당이다. 저 멀리 앞산이 넉넉히 들어차는 품 넓은 집이다. 빨랫줄에 널린 옷가지가 봄바람 따라 그네를 타고, 그 아래에서 까만 강아지가 물끄러미 쳐다본다.
나른한 아침햇발을 뚫고 박문열 선생이 들어선다. 차돌처럼 단단한 모습이다. 질박한 웃음에서도 언뜻 내공과 결기가 비친다. 천생 ‘쟁이’다운 그의 신체에 무수한 이야기가 담겨있으리라 쉬이 짐작 가능했다. 우연일까, “요즘 기록영화를 준비 중”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영화 만드는 사람이 내가 일 하는 거 그대로 찍는다고 하더라고요. 쇳물 녹여서 거푸집에 부어서 장석 재료 만들고 완성품 만드는 것까지 카메라로 기록한대서 이것저것 정리하는 중이에요.”
목가구의 금속장식 제작, 고건축의 장석물 복구
두석장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놋쇠로 장석을 만드는 장인을 일컫는다. 장석은 목가구나 나전가구의 몸체에 부착하는 금속장식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다. 옛날에는 동과 주석의 합금재를 사용하여 장식물을 만들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지만 조선시대에 이미 황동 백동 동은 물론 시우쇠(철)까지도 다 장석재로 쓰였다.
두석장의 작업은 두 가지로 나눠진다. 목가구의 장석물과 자물쇠를 만드는 것, 그리고 고건축물에 쓰이는 장석물 제작 및 보수보전 처리다. 부여 정림사지의 황동철물장석, 양산 통도사 대웅전 금강계단의 비녀쇠 돌쩌귀, 안동 봉정사 대웅전의 등자쇠, 영광 불갑사 대웅전의 철물을 모두 그가 복원했다.
대개의 장인들이 그렇듯이, 그는 소싯적부터 재능이 남달랐다. 친구들이 쓰다버린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으로 상을 받았고 돌멩이로 부처상을 만들며 놀았다. 공부에는 취미가 없고 집안 형편은 어려웠던 지라 초등학교 졸업 후 용산의 큰 주물공장에서 쇳물 녹이는 일을 시작했다. 미성년자 노동 단속반이 뜨면 창고에 갇히고 뜨거운 물에 손발을 데이는 등 갖은 고생을 다했다. 그러다가 1968년 본격적으로 장석의 길로 들어섰다. 넷째 누이의 소개로 인사동에 공방을 두고 고가구의 장석을 만들던 윤복희 씨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전통 자물쇠 17종 재현...겉만 봐도 구조 훤하다
“그 때는 인사동에 좋은 물건이 많았어요. 시간이 나면 인사동을 돌면서 전통적인 금속기명을 찾아다니며 구경했죠. 선비들이 외출할 때 붓과 먹을 넣어다니 게 만든 묵호, 철연적 등 금속제품의 세계도 무궁무진했습니다. 또 사람들이 주로 자물쇠가 없어져서 물건을 가져왔는데 그 때부터 자물쇠를 들여다보고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그게 다 내 노하우가 된 거죠.”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도제식 교육을 받지 않았다. 평범한 장인에게 기술을 배웠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단다. 여건이 불리한 만큼 ‘투지와 인내’로 승부를 걸었다. “남들이 다 하는 거, 평범한 건 싫었다.”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억척스럽게도 매달렸다. 더 특이하고 더 어렵고 더 희귀한 작품을 찾아 전국 골골샅샅을 누볐다.
한번은 소문을 듣고 진주의 장석수집가를 찾아갔다. 담배와 음료수를 들고 수차례 시도한 끝에 겨우 진귀한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헌데 그가 사진촬영과 스케치를 허락해주지 않아서 눈으로 훑어보며 머리에 입력했다.
“그 집을 나오자마자 터미널로 달려가서는 종이랑 연필로 중요부분만 대강 그리고 서울로 직행했죠. 겨울이었는데 홍은동 무허가 건물 옥탑방이 작업실이었어요. 거기에 도착해서는 작업이 완성될 때까지 여기서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지요. 가장 난이도 있는 자물쇠는 열쇠구멍이 없는 거거든. 안 되면 버리고 안 되면 또 버리고 하다가 한 3-4일 지나니까 어느 정도 답이 나오더라고요. 결국 7단 짜리 자물쇠 만들기에 성공했지요.”
“삶은 고통스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해서 완성한 7단짜리 자물쇠를 비롯한 전통 자물쇠 17가지의 재현으로 그는 1993년 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체육부 장관상을 받았다. 1979년부터 매년 장석 관련 유물을 한 종류씩 재현해서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한 끝에 거둔 ‘인간승리’다. 그는 “우리 전통 자물쇠는 모양도 예쁘고 잠그는 방법이 기미묘묘한 것이 많다”고 자랑한다.
또 하나. 자물쇠와 더불어 그의 주특기는 숭숭이 반닫이다. 그는 숭숭이 반닫이 장석으로 98년 전승공예대전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문갑, 탁자, 반닫이 등 수백종류의 목가구에 붙는 장석물이 모양 형태 생김새가 다 틀려요. 투박하면서도 손맛이 나죠. 똑같이 본떠서 만들어도 다 틀리거든. 서랍 손잡이 고리 같은 것도 배흘림으로 두께를 다르게 해서 만드니까 뭉근한 멋이 살고.”
그는 2000년 7월 21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작업장이 불이 타서 옷 한 벌 없이 길바닥에 내몰리는 등 질곡의 세월이었으되 그저 매일 “먹고 일하고, 자고 일했다” 정을 쥐고 해를 보고 또 장석을 만지며 해를 지웠다.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힘과 배고픔의 고통을 두 축으로 예까지 왔다” 구멍 없는 자물쇠가 수차례의 ‘반전’을 거듭해서 철커덕 열리듯, 막막하던 그의 인생도 스르르 열렸다. 그가 삶 속에서 꺼낸 한 줌 보물은 이렇다. “삶은 고통스러워할 필요가 없어. 그냥 살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