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이자 게임개발자 이명진 씨는 동안의 앳된 외모다. 꿈꾸는 듯한 눈빛의 그는 어디론가 금세 날아가 버릴 듯한 피터팬의 태를 지녔다. 그에게 삼십대라는 옷은 아직 헐렁해 보인다. “성장기에 잠을 제대로 잤으면 지금보다 조금 더 키가 컸을 것”이라는 말로 그는 몸에 얽힌 사연, 아니 만화가로서 고단했던 성장기를 술회했다. 어릴 때 형이 빌려온 만화책을 보고 달력뒷면에 베껴 그리기 시작했다. 학교 들어가서는 연습장에 만화를 지어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또 책받침도 만들어주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화로 쓱쓱 지어내 전달할 수 있는 게 너무 재밌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갈수록 만화에 빠져든 그는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궁여지책으로 새벽 3시에 일어나 어머니의 기상시간 전까지 3시간 동안 숨죽여 만화를 그렸다. 그것도 부족해 부모님에게 등교시간을 한 시간 앞당겨 말하고 일찍 집을 나섰다. 부랴부랴 걸음을 옮겨 학교에 도착했고 텅 빈 교실에서 수업시작 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 만화를 그렸다.
주체 못할 끓어오르는 창작열정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대외적 결실을 거두었다. ‘제1회 챔프수퍼만화대상’ 우수작으로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이 선정되어 소년챔프에 연재하게 된 것. 이 작품은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했음에도 100만부가 넘는 부수가 팔렸다. 뿐 아니라 그 작품은 당시의 만화잡지 내용이 중견 작가들 작품에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신인 작가들의 작품으로 메워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만화가가 되려면 오랜 세월 문하생으로 지내야했던 관행의 물꼬를 돌려놓은 것.
고2때 응모작 백만부 판매 돌풍
[어쩐지..]라는 긴 타이틀의 처녀작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동시대의 감수성’이 녹아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 생각을 잘 표현해줬다’며 독자들이 공감을 표했다고 전한다.
“그 작품이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표현했고 재미도 있었지만 감동은 부족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신화의 세계를 그려보자 결심했고 ‘라그나로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만화는 제작규모가 큰 영화나 애니메이션과 다르게 혼자서 다양한 창작이 가능하니까 생각에 막힘이 없이 마음껏 뻗어나갈 수 있거든요. 그게 만화의 매력입니다. 또 독자에게는 읽는 재미와 보는 재미를 동시에 줄 수 있고요.”
라그나로크는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가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어드벤처 판타지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특히 영적세계까지 넘나드는 큰 스케일을 선보인다. 웬만한 작가의 역량으로 소하해내기 힘든 방대하고 치밀한 복선구조를 깔끔하게 풀어나가며 효과적인 배경그림으로 실감나는 상황을 묘사해 큰 인기를 끌었다. 본디 만화란 종이와 펜으로 시공간을 넘나들고 호박을 마차로 변화시킬 수도 있으되,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게임’으로의 진화를 고려해 작품에 임했다. [라그나로크]는 마침내 2001년 ‘그라비타’에 의해 온라인게임으로 재탄생 했다.
“원래 게임을 좋아했습니다. 평소에 게임을 즐기면서 스토리 연출에 감동을 많이 받았었거든요. 게임에서라면 더 실감나는 재미를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라그나로크는 애초 캐릭터나 스토리 라인 등 게임적 요소를 고려해서 그렸습니다. 온라인 게임이 개발되는 동안에도 만화 연재를 계속했는데 두 작업을 병행하면서 무척 재밌었습니다. 온라인 게임 이용자들의 요구사항을 반영해서 배경 도시를 만화 속에 넣기도 하고, 또 만화독자들의 요구를 게임 패치 때 수용하는 등 작품 간 쌍방향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졌습니다.”
게임과 만화의 접점에서 일어나는 스팩터클한 전율과 시너지효과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하는 그. 영감의 세계 안에 세워진 거대도시의 불빛이 몸 밖으로 삐져나온 듯 상기된 표정이다.
라그나로크, 게임의 능동적 재미로 극대화
“만화는 작가와 독자 간의 일대일 만남이고 온라인 게임은 플레이그라운드가 마련이 되니까 집단적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또 만화는 여행가이드처럼 책이 보여주는 대로 혼자 따라가며 이야기를 즐기지만, 게임은 여럿이 어울려 능동적으로 즐거움을 개척할 수 있거든요. 만화와 게임은 연극을 보는 것과 하는 것의 차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온라인 게임 라그나로크는 2001년 대한민국 게임대상 2개 부분을 수상했다. 또한 2002년 대만과 일본진출을 계기로 총 63개국에 진출해 현재 48개국에서 상용화 서비스를 하고 있다. 라그나로크 진출 국가에서는 매년 게이머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라그나로크 페스티벌’이 활발하게 개최된다고 한다. 온라인게임 라그나로크의 이 같은 ‘폭발적’ 인기비결은 타게임에 비해 비전투적인 설정, 아기자기한 캐릭터, 커뮤니티성을 최대한 배려한 편리한 시스템 등을 꼽는다.
“게임 개발하는 일이 재밌어요. 도시, 나라, 캐릭터, 에피소드, 게임방법, 커뮤니티 등이 조금씩 달라지거든요. 만화도 좋지만 그 때가 아니면 못 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게임이 그런 것 같습니다.”
현재 ‘그라비티’ 소속의 게임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그는 게임세계의 진화를 위하여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애초부터 만화가로서 창작소재 역시 상상과 공상의 즐거운 넘나들기에서 얻는 그이기에 생각하기는 곧 숨쉬기와 마찬가지로 일상적이다.
“요즘같이 계절이 바뀔 때는 새록새록 생각이 많아지고 감성을 자극받습니다. 주로 길가다가 사물을 보면서 그 모양을 다른 물체에 대입시켜 보는 식으로 생각을 이어가죠. 물론 소설책, 영화, 음악 등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다 그만 생각에 몰두한 나머지 만화공모전에 응모할 원고를 두고 내린 적도 여러 번이라며 멋쩍게 웃는다. 두고 내린 덕에 다시 새로운 것을 그렸으니 그도 꼭 나빴다고만 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이 거침없는 열정과 지혜로운 상상파워가 결국 그에게 새로운 세상으로 통하는 길을 열어주었고 세계적 만화가이자 게임개발자로 만들어준 듯하다. “그 게임에서 이길 수 없으면 자기가 게임의 룰을 만들면 된다.”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씨의 말은 그에게서 생생한 가상-현실이 되고 있다.